COVER STORY
세계 무대 속 한국의 클래식 기타리스트
박규희·변보경·조대연·박지형
친숙한 악기에 담긴, 낯선 이야기
이들로 인해 오늘날의 클래식 기타와 음악은 한층 진화 중이다. 스페인과 남미의 분위기를 자유롭게 뿜어내는 자유주의자이면서도, 유럽의 음악사를 더듬어 기타의 뿌리를 찾는 원리주의자들인 네 명의 기타리스트. 친숙하지만, 깊게는 몰랐던 기타 이야기를 그들의 대화로 풀어본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박진호
‘토요 명화’의 시그널 음악으로 널리 알려진 호아킨 로드리고(1901~ 1999)의 아랑후에즈 기타 협주곡 2악장은 잉글리시 호른과 기타의 애수 어린 대화로 시작해 기타 솔로의 장대한 카덴차, 그리고 오케스트라와의 압도적인 선율로 마무리된다. 이 곡에는 작고 섬세한 소리부터 화려하고 웅장한 울림까지, 클래식 기타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여섯 현으로 빚어내는 풍부한 표현력 덕분에 클래식 기타는 ‘작은 오케스트라’라고도 불린다.
여기, 각각의 ‘작은 오케스트라’를 품은 네 명의 기타리스트가 모였다. 데뷔 14년 만에 첫 바흐 음반을 들고 돌아온 박규희, 2023년 프란시스코 타레가 기타콩쿠르의 위너 조대연, 이제 막 해외 공연을 마무리하고 한국에 돌아온 박지형, 그리고 미국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변보경까지. 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이 젊은 클래식 기타리스트들은 국내외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각자의 기타 줄을 조율해 나가는 중이다.
♪ 기타의 첫 음을 튕기며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인 것을 보니, 이 질문이 곧바로 떠오릅니다. 평소에도 기타리스트 선·후배로 자주 만나는 편인가요?
박규희_ 클래식 기타계가 워낙 좁다 보니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죠. 제가 먼저 후배들에게 조언을 구할 때도 있고요. 특히 코로나 시기에는 (박)지형이랑 같이 팟캐스트도 하고, 클래식 기타를 알리는 작업물을 만들기도 했어요. 다른 악기에 비해 연주자들끼리 더욱 의지하며 지내는 것 같아요.
변보경_ 저는 일찍 유학을 떠나서 한국의 연주자들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는데, 이번 기회를 통해 평소에 뵙고 싶었던 분들을 드디어 만나게 되었네요.(웃음)
조대연_ 국내 클래식 음악 시장은 너무 작고, 악기 간 격차가 심한 편이에요. 그중에서도 기타의 수요는 특히 더 적다 보니 기타리스트끼리 만나면 서로 연주 기획에 대한 이야기와 고민을 털어 놓곤 합니다. 저 또한 앞으로 자라날 후배들을 위해 환경적인 기반을 닦아놔야 하는 상황이라 어깨가 무겁습니다.(웃음)
처음 기타를 접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박규희_ 제가 어릴 때, 비틀스를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취미로 통기타 학원에 등록하셨어요. 그런데 그 학원이 클래식 기타 학원이었던 거예요. 당시 학원 선생님이 제게 조그마한 기타를 쥐여주셨는데, 결과적으로 그 작은 악기가 저를 클래식 기타의 세계로 이끈 셈이죠.
조대연_ 중학생 때 음반 가게에서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음반을 구입하면서 클래식 기타를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날 무언가에 홀린 듯 그 음반을 듣고, 다음날 안방 장롱 속에 잠들어 있던 기타를 제 손으로 꺼내며 본격적으로 기타를 시작하게 됐어요.
박지형_ 아버지가 클래식 기타를 좋아하셨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기타를 같이 배워보자는 아버지의 제안에 기타를 잡게 됐습니다.
변보경_ 6살 때 TV에서 우연히 기타리스트의 연주를 들었는데, 그때 처음 들은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줄을 튕기는 연주법도 재미있어 보였고요. 그날 바로 어머니께 저 악기를 배우고 싶다고 말씀드렸던 기억이 납니다.
기타리스트로서 도약할 수 있었던, 성장의 발판이 된 무대가 있었나요?
박규희_ 스무 살 무렵부터 나갔던 해외 콩쿠르들이 제게 큰 자극이 되었어요. 콩쿠르에서 정상의 위치에 있는 기타리스트들을 만나면서 제 실력에 대해서도 깨달았고요. 콩쿠르는 제 장점보다는 다른 연주자들의 장점이 돋보이는 무대거든요. 이런 경험을 반복하면서 마음이 많이 단단해졌고, 더 독하게 노력하게 되었죠.
조대연_ 지난해 우승한 프란시스코 타레가 콩쿠르가 가장 큰 성장의 발판이 되어줬어요. 1968년 창설된 타레가 콩쿠르는 스페인 카스테욘주 베니카심에서 매년 개최됩니다. 지중해 해변에서 밤 늦은 시간에 경연이 진행되기에 낮에는 다른 연주자들과 축구와 수영을 즐기는 긴장 속의 여유도 만끽했어요. 10번의 도전 끝에 우승하게 되어 더욱 뜻깊게 느껴지는 대회입니다.
박지형_ 모든 순간이 성장의 동력이 됐던 것 같은데 그중 고르자면, 아무래도 미켈레 피탈루가 콩쿠르 무대가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때부터 목표로 삼고 준비해 온 콩쿠르인 만큼, 준우승과 특별상이라는 좋은 성과를 거두게 되어 준비 과정부터 수상자 발표의 순간까지 모두 잊지 못할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변보경_ 제게 가장 큰 기회는 지난해 수상한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랜트와 함께 찾아왔습니다. 링컨센터에서 신인 연주자에게 수여하는 상으로, 역대 수상자로는 조슈아 벨·길 샤함·사라 장(바이올린), 리처드 용재 오닐(비올라), 유자 왕(피아노) 등이 있어요. 클래식 기타리스트로서는 1988년 이후 첫 수상이었기에 더욱 뜻깊었죠. 수상 이후, 이전보다 더 많은 오케스트라와의 협연 기회가 생기기도 했고요.
♪ 기타의 본질을 찾아서
네 사람 모두 각기 다른 국가에서 유학을 마쳤습니다. 유학을 결심한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변보경_ 검정고시를 마치고, 미국 유학을 고려하던 중 윌리엄 카넨가이저(1959~) 교수님과의 만남으로 미국행을 결정하게 되었어요.
박지형_ 저는 알베르토 퐁세(1935~2019) 선생님께 기타를 배우고 싶어서 그분이 계신 프랑스로 유학을 갔어요. 제가 좋아하는 주디카엘 페루아(1973~) 선생님도 프랑스인이었고요. 자연스럽게 좋아하는 연주자들이 있는 파리 국립고등음악원으로 유학을 가게 됐어요.
박규희_ 저도 알바로 피에리(1953~) 선생님에게 배우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갔어요. 선생님의 음반이 한국에 들어오기 전, 일본에서 먼저 듣고 신세계를 경험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해요. 도쿄음대 진학 후, 여름방학 때 유럽에서 피에리 선생님의 마스터클래스를 듣고, 학교를 자퇴하고 다음 해에 바로 빈 국립음대에서 선생님께 배우기 시작했어요.
조대연_ 저는 기타가 유래한 스페인의 문화를 배우러 유학을 갔어요. 당시 스페인의 작은 시골 마을까지 여행을 자주 다녔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던 시간이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에서의 배움만큼이나 값진 인생 공부가 되기도 했죠. 그들의 문화와 생활 방식을 배울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습니다.
변보경_ 유학을 결심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자신의 음악적 방향성을 명확히 하고, 방향을 잘 이끌어 줄 수 있는 교수를 찾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교수의 연주 성향과 여러 음반을 찾아보고, 그를 사사한 연주자들이 어떤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는지도 잘 살펴봐야 하죠.
해외에서는 보편화되어 있지만,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클래식 기타 교육과정이나 훈련법이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변보경_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느낀 특별한 점은 음악 교육의 많은 부분이 부상을 예방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단순히 테크닉 연습뿐 아니라, 바디맵핑이나 알렉산더 테크닉(좋은 움직임을 스스로 찾고, 습관화하는 것) 같은 이론을 접목해 최소한의 근육 긴장으로 최대의 효과를 내는 방법을 배우는 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습니다.
조대연_ 레오 브로워(1939~)의 연습곡 시리즈는 현재 국내를 제외하고 모든 나라에서 기타를 시작할 때 피아노의 체르니 연습곡처럼 쓰이는 교본이에요. 아무래도 쿠바 출신 작곡가이다 보니 그의 작품이 한국 교육 현장에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편이라 아쉬움이 커요.
♪ ‘작은 오케스트라’의 소리에 귀 기울이다
기타 음악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독주곡 외에도 여러 작곡가들에 의해 쓰인 실내악과 협주곡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이 많습니다. 악기의 특성에 따른 독주와 실내악, 협연의 차이점과 함께, 기타만의 특징을 말한다면 무엇이 있을까요?
변보경_ 기타의 장점은 섬세함이라고 생각해요. 로마의 조각상이나 경주의 석굴암 같은 거대한 작품이 주는 웅장함이 있는 반면, 반가사유상처럼 아주 작고 섬세한 작품에서 오는 감동이 있죠. 포근하게 청중을 감싸고 여운을 남기는 기타의 매력은 독주에서 두드러집니다.
박규희_ 기타는 독주 악기로도 완결성이 높고, 작품도 많아 대부분의 기타리스트들은 고독하게 홀로 연습하는 것에 익숙한 편이에요. 요즘은 다양한 연주자들과 실내악을 연주할 기회가 점차 늘어나고 있는데, 함께 소리를 만들어 가며 배우는 점이 참 많아요.
변보경_ 더불어 화성 악기라는 장점이 있어 대중에게 익숙한 타레가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부터 대위법이 만연한 바흐의 ‘푸가’, 현대기법을 포함한 현대음악까지 다양한 작품을 솔로로 연주할 수 있습니다. 실내악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소화할 수 있는 악기의 장점이 두드러지고, 협연에서는 오케스트라의 웅장함이 더해져 기타의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어요.
기타를 위한 명곡들을 남긴 작곡가들은 스페인, 이탈리아, 남미 출신이 많은데요. 연주 및 작품 해석의 측면에서 각 나라의 분위기 또는 특정 문화에서 받은 영향도 있나요?
박규희_ 기타 음악은 집시 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귀족들을 위한 궁중 음악이 아닌, 일반 서민들의 사소한 일상을 담은 음악이 많거든요. 특히 남미풍의 리듬을 좋아하는데, 남미에 가본 적은 없지만 그곳의 생활 풍경을 상상하면서 연주하기도 하고, 그들이 느꼈던 소박한 감정을 연주에 표현하고자 하는 편이에요.
조대연_ 대부분의 기타 작품들은 지중해 선상 및 남미 국가들의 배경을 품은 곡들이 많아요. 그곳의 기후, 지형, 역사, 삶의 방식, 특히 언어(스페인어)가 음악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죠. 마치 바흐의 코랄에서 독일어 단어가 가진 정서와 화성이 일치하는 것과 비슷한 맥락입니다.
박지형_ 저는 그들의 문화나 사회적인 관습보다는, 지역적 특성이 담긴 음악을 많이 들어보면서 작품을 이해하려고 해요. 스페인적이거나 남미적인 요소를 특별히 구분 지어 표현하기보다 제가 작품을 듣고 느낀 바를 연주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려고 합니다.
오늘날 연주되는 기타의 원형은 19세기 중반 안토니오 데 토레스 후라도(1817~1892)가 만든 기타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악기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박규희_ 제 기타는 프랑스의 악기 제작자 다니엘 프리드리히(1932~ 2020)가 제작한 악기예요. 프리드리히는 젊은 시절에는 악기를 많이 제작했지만, 나이가 들면서는 거의 만들지 않았어요. 그런 분이 알바로 피에리 선생님의 부탁으로 저를 위해 6개월 만에 악기를 뚝딱 만들어 주신 거예요! 제가 프리드리히의 악기를 가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유럽의 페스티벌이나 콩쿠르에 나가면 다른 연주자들이 대기실로 찾아와 제 기타를 쳐봐도 되는지 물어보기도 했어요.(웃음)
조대연_ 오스트레일리아의 악기 제작자 짐 레드게이트가 제작한 악기를 사용하고 있어요. 지난해 애들레이드 기타콩쿠르에서 우승하며 부상으로 받은 악기죠. 최신 방식으로 만들어진 현대 악기이기에 기타로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음량과 고른 음색을 갖고 있어요.
박지형_ 제 악기는 게르노트 바그너가 얇은 목재판 두 겹을 겹쳐 만든 더블탑 방식의 악기로, 울림이 풍부하고, 원하는 음색을 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변보경_ 저도 더블탑 악기를 사용하고 있어요. 독일의 악기 제작자 디터 뮐러가 2019년에 제작한 악기죠.
클래식 기타와 통기타는 외관상 비슷하지만, 통기타는 스틸현을 사용하고 클래식 기타는 나일론현을 사용한다는 차이점이 있죠. 또한, 피크를 쓰는 통기타와 달리 클래식 기타는 오로지 손톱과 살로 연주해야 하는데요. 평소 손톱 관리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합니다.
조대연_ 투수들이 어깨를 보호하기 위해 특정 방향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지 않듯, 기타리스트들도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울 때 손톱이 짧은 왼손으로 줍는 경우가 많아요. 저는 태생적으로 손톱이 약한 편이라 늘 부러지지 않게 조심하고, 물에 오래 닿지 않도록 노력하는 편입니다.
박규희_ 저는 반대로 손톱이 굉장히 단단한 편이에요. 기타리스트를 위한 손톱으로 태어났다고 할까요?(웃음) 그래서 손톱에 네일팁을 붙이는 등 특별한 관리를 하지는 않아요. 대신 무대에 오르기 바로 직전까지 손톱을 부드럽게 갈아주는데, 그렇게 끝까지 손톱에 윤을 내고 연주하면 정말 맑고 깨끗한 소리가 나요.
♪ 기타의 미래를 짊어질 4명이 입을 모은 한마디
여기 모인 다양한 기타리스트들의 스타일과 개성처럼, 기타로 연주하는 음악의 폭과 종류도 점점 다양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지형_ 기타는 현존하는 악기 중 가장 다양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는 악기라고 자부하고 싶어요. 줄을 걸어서 손으로 튕기는 원시적인 악기의 형태를 갖고 있기에 르네상스 음악부터 현대음악까지 모든 곡을 소화할 수 있어요. 특정 레퍼토리를 두고 연주하기보다는 제가 하고 싶은 곡, 지금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곡을 연습해서 선보이는 편이에요.
변보경_ 클래식 기타의 장점은 클래식 음악뿐 아니라 영화음악, 뉴에이지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포괄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예전에는 클래식 음악에 집중했다면, 요즘은 다양한 장르의 연주를 시도하고 있어요. 오는 10월, 미국에서 ‘집, 가족’을 주제로 공연을 준비 중인데 재즈 기타리스트 팻 메스니의 ‘집에서 온 편지(Letter from Home)’, 신승훈의 ‘I Believe’ 등을 연주할 예정이에요.
조대연_ 여러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있지만 제가 클래식 음악으로 지칭되는 작품들의 연주를 선호하는 이유는 관객에게 전달되는 음악의 방식과 구성이 다른 장르의 음악과 다르기 때문입니다. 쉽게 읽히는 책이나 만화책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고, 여백의 미가 느껴지는 시집이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을 선호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말이죠.
국내 음악계에서는 클래식 기타가 갖고 있는 대중성에 비해 청중의 관심이 관현악이나 특정 악기에 집중된 편인데요. 후배 연주자들이 양성되기 위해 보완되어야 할 점 혹은 국내에서 클래식 기타의 저변 확대를 위해 개선되어야 할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박규희_ 기타는 바이올린이나 피아노 등 다른 악기에 비해 기초 교육의 틀이 정립되지 않은 편이에요. 가르치는 선생님에 따라 기본자세와 연주법이 달라져 연주 습관이 잘못된 학생들을 많이 봤어요.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든 올바르게 배울 수 있도록 기타 교육의 기본 틀이 갖춰지는 게 가장 우선시되어야 할 것 같아요.
조대연_ 다른 악기에 비해 희소적 가치가 높은 악기인데, 국내에서는 아직 기타의 역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희망적이라고 봅니다. 사실 전 세계 음악원에 기타 전공이 생긴 지는 50년도 채 되지 않았어요. 한국에 클래식 기타를 알리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연주자가 짊어져야 할 과제가 아닐까요?
박지형_ 황석영의 장편소설 ‘개밥바라기별’에는 이런 문장이 나와요. “너희는 언제나 시에 코를 박고 있었다구. 별은 보지 않구 별이라구 글씨만 쓰구.” 연주하는 동안 종종 이 문장을 되새기곤 했어요. ‘음악을 듣지 않으면서 어떻게 음악을 할 수 있을까?’ 하고요. 저도 그렇고, 후배들도 그렇고, 좋은 음악을 위해 다양한 음악을 많이 들었으면 좋겠어요.
좋아하는 작곡가부터 성장 과정, 유학 생활, 음악적 지향점까지 각기 다른 네 명의 클래식 기타리스트들이 유일하게 입을 모은 한마디는 바로 “클래식 기타를 널리 알리고 싶어요”였다. 각자의 자리에서 꾸준히 갈고 닦은 이들의 노력이 국내 클래식 기타계의 새로운 이정표가 되길 바라며. 뜨거운 여름 햇살 아래, 이들의 손끝은 지금도 여섯 현 사이로 바삐 움직이고 있다.
글 홍예원 기자
조대연
조대연(1992~) 스페인 마드리드 왕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했다. 애들레이드 기타콩쿠르 및 스페인 그라나다 엘리엇 피스크 기타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2023년 프란시스코 타레가 기타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기타리스트의 길을 걸어간 선배들의 조언 중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작년에 존경하는 엘리엇 피스크(1954~)를 만나러 이탈리아 키지아나 음악원의 여름 아카데미에 참여했어요. 그때 마스터클래스에서 그가 남긴 조언입니다. “대연, 이제부터 네가 연주하는 방식이 곧 법이고, 트렌드이고, 역사야. 그러니 네가 마음 가는 대로 연주하면 사람들이 네 연주를 사랑해 줄 거야. 선배인 우리들은 너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을 믿고 지지해 줄 거고. 다만 조건이 있어. 너도 나이가 들면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비켜주고 그들을 지지해 줘야만 해.”
다가올 8월, 음반 발매를 앞두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타레가 콩쿠르 우승 기념 음반에 왜 타레가의 작품이 없냐고 물어보시는데요. 학생 때 첫 음반을 내고, 30대가 된 지금의 첫 음반을 준비하는 시점인 만큼, 독주 악기로서 기타의 의미와 구성력 있는 음악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그래서 이번 음반에는 브라질 작곡가인 빌라로부스의 명작으로 남은 전주곡과 연습곡 전곡을 담았습니다.
변보경
변보경(1994~) 6세에 기타를 시작해 한국기타협회, 한국음악협회, 미국기타재단(GFA) 국제 청소년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하며 주목받았다. 줄리아드 음대에서 학사 및 석사를, 서던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콧 테넌트, 윌리엄 카넨가이저, 천위펑, 김태수, 샤론 이스빈을 사사했으며, 현재 노스 텍사스 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현재 노스 텍사스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2022년에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풀러턴)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해 지난해 노스 텍사스 대학교로 옮겨 왔어요. 지금은 기타과에서 실기 레슨과 기타 문헌, 기타 앙상블, 기타 페다고지(Pedagogy) 등의 수업을 맡고 있죠. 음악의 추상적인 면을 학생들에게 말로 설명하면서 저 역시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
오는 12월, 미국의 알바니 심포니와 니키 손의 기타 협주곡을 세계 초연할 예정입니다. 작품에 대해 소개해 주세요.
작곡가 니키 손과 저는 2019년부터 기타를 위한 새로운 음악을 장려하는 ‘사운딩 보드’라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생기 넘치고 리듬감 있는 니키 손의 음악은 빌 에반스, 쳇 베이커, 마일스 데이비스 등 재즈 음악가들의 영향을 받았어요. 현재 곡 작업이 진행 중이며, 저 역시 어떤 곡이 탄생할지 무척 기대됩니다.
박규희
박규희(1985~) 3세에 기타를 시작하여 리여석(1940~)을 사사했다. 예원학교 졸업 후, 도쿄음대를 거쳐 빈 국립음대에서 알바로 피에리를 사사했다. 벨기에 프렝탕 기타콩쿠르에 최초의 여성 우승자이자 아시아인 우승자로서 이름을 올렸으며, 2012년 스페인 알함브라 기타콩쿠르에서 1위와 청중상을 받았다. 지난 5월, 신보 ‘바흐’(2024)를 발매했다.
지난 5월,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바흐의 작품을 담은 음반을 발매했습니다. 바흐에게 애정을 보인 이유는 무엇인가요?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면 졸업 시험부터 콩쿠르 레퍼토리까지, 바흐 작품을 빼놓고는 무대에 오를 수 없어요. 마치 숙명처럼 언제나 바흐의 작품을 연주해야 하는 셈이죠.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바흐의 작품들을 담았으며, 지금 이 시기의 제 연주, 그리고 앞으로의 음악 여정에서 하나의 발자취를 남긴다는 생각으로 이번 음반을 녹음했어요.
박지형
박지형(1993~) 9세에 기타를 시작해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 금호영재콘서트에 데뷔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예술사 과정 수석 졸업 후, 파리 국립고등음악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2017년 이탈리아 미켈레 피탈루가 콩쿠르에서 준우승하며 한국인 기타리스트 최초로 병역특례를 받았으며, 2019년에는 도쿄 기타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했다.
2022년 두 번째 음반 ‘오마주 투 슈베르트’를 발매했습니다. 기존의 선율을 기타곡으로 작·편곡한 작품들을 수록했는데요. 이러한 연주를 할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소가 있나요?
기타는 다른 악기에 비할 때, 기타만을 위한 작품이 적지만, 상대적으로 편곡 작품이 많은 악기이기도 해요. 기타의 특성이나 음색과 잘 어울리는 곡들이 많거든요. ‘오마주 투 슈베르트’ 음반에도 제가 조금씩 편곡한 곡들이 담겨 있어요.(웃음) 제가 편곡할 때는 우선 기타의 음색과 잘 어울리는 곡을 선정하고, 원곡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되, 연주자가 연주하기 편하게 악보를 수정하는 편입니다.
RECORD
클래식 기타리스트 4인이 추천하는 다채로운 클래식 기타 레퍼토리
박규희
기타의 아름다움과 기교를 느끼게 하는 명연주
알바로 피에리 선생님의 기타 협주곡 모음집인 ‘로드리고, 줄리아니, 브로워’(1997) 중 줄리아니 기타 협주곡 1번 Op.30을 권하고 싶어요. 정말 아름다운 곡이에요. 마우로 줄리아니(1781~1829)는 고전 시대 작곡가이자 클래식 기타리스트로, 클래식 기타계의 베토벤, 모차르트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죠. 두 번째로는 ‘세르지오 & 오다이르 아사드의 피아졸라 연주’(2005) 음반을 추천합니다. 두 사람은 형제 관계인데요. 그들이 연주하는 ‘탱고 모음곡(Tango Suite)’ 만큼 완벽한 기타 듀오 연주를 들어본 적이 없을 정도로, 피아졸라의 고난도 기교를 완벽하게 재현한 명연주입니다.
조대연
세고비아와 빌라로부스의 영감이 주는 감동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골든 주빌리(Golden Jubilee)’(1958)는 세고비아 데뷔 50주년 기념 음반으로, 업적의 총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기타 듀오인 이다 프레스티와 알렉산드르 라고야의 ‘리사이틀(Récital)’(1962) 음반에 수록된 풀랑크의 즉흥곡 12번 편곡 버전도 무척 아름다운 작품이니 들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또 하나, ‘줄리언 브림의 빌라로부스’(1971) 음반에 실린 앙드레 프레빈/런던 심포니(협연 줄리언 브림)의 빌라로부스 기타 협주곡을 처음 들었던 순간이 아직도 잊히지 않네요. 이어 나오는 전주곡과 몇 곡의 연습곡, 그리고 브라질 전통 음악인 쇼로(Choro)까지, 꼭 들어보세요!
박지형
정교한 사색, 섬세함과 재치가 돋보이는 음악
솔로듀오(Soloduo, 마테오 멜라 & 로렌초 미켈리)의 ‘마리오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 기타 평균율’(2012)은 카스텔누오보-테데스코의 24개의 전주곡과 푸가가 담긴 작품집으로, 특유의 낙천적이고 아름다운 선율의 장조 작품과 사색적이고 정교한 단조 작품들이 다채롭게 어우러진 음반입니다. 특히, 전주곡과 푸가 G장조를 추천합니다. 플로리안 라루스는 ‘바흐’(2020)에서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류트 모음곡 2번 BWV997과 샤콘느 BWV1004(excerpt)를 연주합니다. 한 편의 이야기 같은 전주곡과 푸가, 진한 애수의 사라반드, 그리고 결연한 지그까지! 라루스는 그 특유의 섬세함과 재치로 발군의 연주를 들려줍니다. 외란 쇨셔와 길 샤함의 ‘둘을 위한 슈베르트’(2003)는 기타와 다른 악기의 앙상블 중 단연 최고의 음반으로, 둘의 내밀하고 진실된 연주는 슈베르트의 작품과 뛰어난 궁합을 보여주죠.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D821을 추천드려요.
변보경
스페인의 낭만과 감성을 느끼고 싶을 때
줄리언 브림의 ‘스페인 기타를 위한 대중적인 클래식 음악(Popular Classics for Spanish Guitar)’(1964)을 추천합니다. 기타를 생각하면 스페인 음악이 자연스레 떠오르듯, 이 악기의 진정한 감성은 스페인 음악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고 생각해요. 엄청난 감성과 몰아치는 연주로 감동을 주는 줄리언 브림의 연주로 스페인 기타 음악을 느껴보세요! 작품으로는 마누엘 데 파야의 ‘Homenaje’를 꼽고 싶어요. 이 곡은 드뷔시를 기리는 톰보(Tombeau, 개인의 죽음을 기념하는 음악 장르의 한 형식)로 작곡되었는데, 곳곳에 인상주의적인 요소가 묻어나며, 곡 안에 많은 감정과 화음이 축약되어 있습니다. 마치 타케미츠 토오루(1930~1996)의 곡처럼 아름다운 작품이에요.
PLUS INTERVIEW
한국기타협회 회장 윤원준
기반이 부족해도, 한 걸음씩 천천히
한국기타협회는 기타의 매력을 대중에게 더 친절히 알리고, 미래를 이끌 전공자를 부지런히 키우는 등 기타를 둘러싼 생태계를 가꾸고 돌보는 중심지다. 1959년에 설립된 이후 현재 제29대 한국기타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윤원준을 만났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한국기타협회
한국기타협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1959년 설립된 한국기타협회는 지난 64년간 기타 연주·교육·봉사 등을 이어오고 있으며, 전국 기타콩쿠르 및 대한민국 기타 페스티벌 개최, 포럼, 기타지도자 자격 인증 교육 등을 통해 악기의 대중화와 지역 사회의 문화 향유에 기여하고 있습니다.
한국 음악계에서 클래식 기타가 널리 알려지게 된 시점은 언제라고 생각하나요?
협회의 역사가 50년이 넘은 만큼, 한국 클래식 기타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 동안 이어져 왔어요. 저도 어릴 때 학원에서 기타를 배웠고, 지금 국내외에서 활약하는 젊은 연주자들도 어린 시절 학원에서 처음 기타를 잡기 시작했을 거예요. 1970~80년대 클래식 기타를 전공하셨던 분들이 지금도 기타협회 지부에 소속돼 전국에서 기타 학원을 운영하고 계시거든요.
기타의 음악적 매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클래식 기타는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악기에요. 목소리가 작은 사람을 보면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처럼, 기타 연주는 악기의 소리를 차분히 숨죽이고 듣게 된다는 특징이 있어요. 특히, 기타는 양손으로 멜로디와 반주가 가능한 완전한 솔로 악기이기에 바로크 시대부터, 고전 시대,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를 연주할 수 있죠.
기타는 다른 악기에 비해 전공으로 삼고 교육받을 수 있는 기반이 부족한 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현재 국내 클래식 기타 연주자 교육 과정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과거와 비교해 달라진 점이 있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서울대학교에 처음 기타 전공이 생겼을 때 국내의 다른 음대에도 점차 기타 전공이 생길 거라는 기대가 있었어요. 그런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요. 다른 악기의 경우에는 대학에 대한 선택지가 많은데, 기타를 전공한 학생들은 입시에서 실패하면 유학을 가거나 현실적으로 악기를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생기니 안타깝고 아쉽죠. 그래도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해 여러 해외 콩쿠르도 나가고, 해외의 클래식 기타 관련 정보를 얻는 학생들이 많아졌어요. 과거에는 정보력이 너무 약했죠.
끝으로, 클래식 기타의 저변 확대를 위해 바라는 점이 있나요?
국내에 교육기관이 부족하고, 대학에 기타 전공이 없다고 해서 기타가 소외되고 있는 건 아니에요. 취미로 삼든, 전공으로 삼든 기타는 늘 우리 삶 속에 스며들어 있는 악기니까요. 많은 이들이 기타를 배워 훌륭한 음악가로 성장하는 것도 좋지만, 최종적으로는 우리 사회가 기타처럼 작은 악기 하나쯤은 다룰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갖게 되는 날이 오길 바라봅니다.
윤원준 한국예술종합학교 기악과를 졸업했다. 그라토 듀오 리더 및 그라토 앙상블 단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기타협회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윤원준기타교실 step1,2,3’(세광출판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