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실라’, 눈을 뜬 인형, 세상으로 나서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8월 19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감독 소피아 코폴라 음악 토마스 마스

출연 케일리 스패니, 제이콥 엘로디

 

‘프리실라’

눈을 뜬 인형, 세상으로 나서다

 

아주 어린 시절엔 내 눈으로는 무언가를 맑고 온전하게 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멀리 있는 것을 망원경으로 보거나,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을 돋보기로 들여다보듯 누군가의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편이 쉬웠다. 그렇게 타인의 관점으로 바라본 세상 속에서, 나는 훨씬 앞서 있고 훨씬 빨리 성장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온전히 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된 순간, 내가 알던 세상은 이전과 너무 달라진다. 나의 눈으로 나의 세상을 봐야, 비로소 내가 디뎌야 할 땅도, 길도 보인다.

인형과 인형의 집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이사 온 소녀 프리실라 볼리외(1945~)는 미군 기지의 파티에서 당대 최고의 슈퍼스타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를 만난다. 엘비스와 프리실라는 10살이라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첫눈에 반해 서로에게 빠져든다. 평범한 소녀였던 프리실라는 엘비스의 저택으로 들어가 함께 살고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세계적인 슈퍼스타와의 삶은 생각만큼 빛나지 않는다.

소피아 코폴라(1971~) 감독의 영화 ‘프리실라’는 1959년 엘비스와의 첫 만남부터, 1967년 이후의 결혼생활, 1973년 이혼까지 프리실라의 시각으로 따라간다. 프리실라라는 자기 이름 대신 엘비스의 연인으로 살아온 그녀가 결국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집을 떠나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준다. 인형처럼 살아온 여인의 자각이라는 점에서 헨리크 입센의 희곡 ‘인형의 집’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소피아 코폴라 감독은 전작 ‘마리 앙투아네트’(2006)를 통해 모두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 속에서 여성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프리실라’에서는 엘비스라는 빛의 뒤, 길게 드리운 그림자 속에 살았던 프리실라의 시점에서 엘비스와의 관계를 바라본다. 14살부터 20대 후반까지 수줍던 소녀에서 세상을 깨치는 여성으로 거듭난 프리실라는 케일리 스패니(1998~)가 연기했다. 케일리 스패니는 이해되지 않는 두 사람 간 묘한 관계의 빈틈을 눈빛과 표정으로 채우며, 이 영화로 2023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프리실라의 부모는 그녀를 보호하지 않는다. 프리실라는 엘비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할 수밖에 없는 아주 어린 소녀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엘비스의 통제 아래 있는데, 그런 수동적인 삶이 문제라고 생각해 볼 여유조차 없다. 엘비스의 사랑을 갈구하고, 낮에는 고등학교에 다닌다. 프리실라는 엘비스가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엘비스가 골라주는 옷을 입고 그가 원하는 색으로 염색하는 엘비스의 인형처럼 살아간다.

프리실라의 시선으로 본 엘비스

영화는 프리실라가 1985년에 쓴 회고록 ‘엘비스와 나’를 원작으로 한다. 회고록의 제목은 여전히 엘비스를 앞에 두지만, 소피아 코폴라의 영화는 프리실라를 이야기의 맨 앞에 둔다. 그래서 엘비스와 프리실라의 이야기보다 엘비스 프레슬리라는 세기의 스타와 결혼한 프리실라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엘비스라는 별에 눈이 멀어 자신을 놓쳤던 한 여인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보겠다고 눈을 뜨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적이다.

1959년, 엘비스와 프리실라가 독일에서 처음 만났을 당시 그녀는 14살이었다. 엘비스의 초대로 프리실라가 엘비스의 집에서 살게 된 건 그녀가 고등학생일 때였다. 미성년자인 프리실라를 엘비스에게 보낸 그녀의 부모도, 그 오랜 시간 동거하면서 결혼이 늦어졌던 이유도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코폴라 감독은 실제로 프리실라를 만나서 궁금한 이야기를 물었다고 한다. 영화 속에 뚜렷한 설명은 없지만, 누군가의 삶은 그렇게 우연히 결정되어 운명처럼 방점을 찍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설득한다.

실제로 엘비스를 만난 이후, 프리실라의 삶은 완전히 사라진다. 평범한 시골 마을의 소녀였던 그녀는 전 세계 여성들이 선망하는 엘비스의 여자가 된다. 하지만 온전하지 않다. 프리실라의 모든 삶은 엘비스의 일정을 따랐다. 엘비스를 기다리는 것이 그녀의 일상이다. 그리고 그 혼자만의 삶에 다른 여성들과 엘비스의 스캔들 기사가 불쑥 끼어든다.

물론 프리실라 역시 시대의 아이콘이었다. 많은 여성이 그녀의 캣 아이 메이크업과 한껏 부풀린 부팡 헤어스타일을 따라 했다. 가장 화려한 곳에서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을 사는 듯하지만, 영화 속 프리실라는 아름다운 성에 갇힌 인형처럼 보인다. 바비의 집처럼 화려한 색감의 집은 시간이 지날수록 박물관처럼 편안하지 않은 색감으로 변하며 프리실라의 마음을 대변한다.

자기만의 관점에 눈뜬 여자

관점에 따라 엘비스 프레슬리는 몹시 나쁜 남자처럼 보이지만, 프리실라에게 그는 여전히 사랑하는 남자다. 미워해서 헤어진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애틋한 마음이 남아 있다. 코폴라 감독은 그 어떤 상황도 이야기의 흥미로운 전개를 위해 과장하지 않는다. 그저 프리실라와 엘비스라는 사람과 그 관계를 요동치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대부분 한 사람의 자각이 가장 추락한 순간에 시작되는 것과 달리 프리실라는 가장 화려한 순간에 자신을 찾는다. 프리실라가 엘비스를 떠난 시절에 그와 그녀의 삶은 여전히 정상에 있었다. 엘비스가 원하는 ‘인형’이었던 그녀는 다시 본래의 머리색을 찾고, 차분한 헤어스타일과 옷차림으로 돌아간다. 엘비스를 기다리는 일 외에 자신을 위한 일을 찾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운다.

흔히들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몰랐던 여자의 얼굴이 영화 속에 있다. ‘프리실라’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살아왔던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야기 속에서 늘 부록처럼 그려지던 프리실라를 한 명의 사람으로 불러내, 소중하게 바라본다.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한 여인의 다음 이야기를 응원하는 이 영화에는 여전히 한 사람으로 우뚝 서서 자신의 길을 찾아 발을 디뎌야 하는 우리를 위한 응원도 담겨 있는 것 같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OST] 토마스 마스 | ABKCO

소피아 코폴라 감독의 남편이자 그룹 피닉스의 보컬인 토마스 마스(1976~)는 감독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영화와 가장 어울리는 음악을 담기 위해 노력했다. 아쉽게도 엘비스의 공연 장면은 뒷모습으로 담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신 19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팝 음악을 가득 넣어 복고적 정서를 담아냈다. 엘비스를 떠나는 프리실라의 마음이 담긴 엔딩 곡은 아이러니하게도 돌리 파튼(1946~)이 부른 ‘나는 항상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I will always love you)’인데, 정식 OST에는 담기지 않았다.

 

| | | set-list

01 Going Home 02 Baby, I Love You 03 Venus 04 Sweet Nothin’s (Single Version) 05 Crimson & Clover 06 (I Love You) For Sentimental Reasons (Single Version) 07 How You Satisfy Me 08 Country 09 The Crystal Cat 10 Forever 11 Wade In The Water 12 Goin’ Places 13 Stratus 14 Nobody Knows 15 Gassenhauer 16 Rippling Waters 17 My Elix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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