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한 리사이틀/율리우스 아잘 독주회/제주국제관악제/인형극 ‘산초와 돈키호테’/뮤지컬 ‘하데스타운’&’홍련’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9월 1일 9:00 오전

REVIEW

 

CLASSICAL MUSIC

 

바리톤 김태한 리사이틀

스타 성악가의 깊고 절제된 무대

7월 25일 금호아트홀 연세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2023년 벨기에 브뤼셀 팔레 데 보자르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소프라노 조수미가 전한 말이다. 바리톤 김태한(2000~)의 노래를 들은 어느 심사위원의 감상이라 했다. 콩쿠르 결선에서 김태한은 모범적이고 과부족 없이 딱 들어맞는 목소리와 연기를 들려주었다. 심사위원들도 그를 알아봤다. 다른 대회와는 달리 1등부터 발표하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의 호명은 “태한 김!”이었다.

그동안 베를린에서 한스 아이슬러 국립음대에 다니고 베를린 슈타츠오퍼 오페라 스튜디오에서 활동하며 노래의 깊이를 더해가던 그가 수상 1년 만에 금호아트홀에서 리사이틀을 열었다. 세계적인 콩쿠르 위너에게 ‘금호라이징스타’라는 타이틀은 왠지 겸손해 보였다.

무대로 걸어 나오는 그를 보며 작년의 놀라웠던 일련의 시간을 떠올렸다. 자정이 넘어서야 우승이 결정되고, 짧은 인터뷰와 함께 기사를 송고했을 때 호텔 창에는 아침햇살이 드리우고 있었다. 눈도 못 붙이고 공항으로 향하는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마음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1년 만에 다시 듣는 김태한의 목소리에는 기품이 가득했다. 베토벤 ‘멀리 있는 연인에게’, 클라라 슈만 ‘6개의 가곡’ Op.13, 슈만 ‘시인의 사랑’ 등 독일 연가곡의 걸작을 중심으로, 김태한은 더 웅숭깊은 소리를 들려주었다.

익숙한 곡이었지만 새로웠다. 김태한의 깨끗하고 깔끔한 미성은 청량한 뒷맛을 남겼다. 내용은 복잡한 구석이 하나도 없이 모범적이면서도 직선적으로 다가왔다. 간절하면서도 예의를 갖춘 품격이 있었다. 그의 음성이 그리는 세계와 이야기는 정중하게 청각을 거쳐 가슴 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듯했다. ‘성악의 친절한 안내자’가 이날 그의 이미지였다. 낯선 가사와 서사를 친숙하고도 극적으로 또박또박 전달할 수 있는, 귀중한 안내자가 될 수 있는 목소리였다. 이는 격정의 절제와 부지런한 가지런함으로 가능했다고 본다. 이날 함께 연주한 피아니스트 한하윤의 연주는 처음 접했는데, 김태한의 노래와 사뭇 대조적이었다. 피상적인 반주를 넘어 곡의 심오하고 미묘한 정서적 변화를 포착할 수 있도록 농담과 밀도, 거기에 점도까지 조절하는 인상 깊은 연주를 선보였다. 곡의 성격에 따른 미묘한 뉘앙스나 작품을 열고 닫을 때의 시적이고 제의적인 형상화가 보통이 아니었다. 한하윤의 피아노는 이날 김태한의 예술적 스펙트럼을 훨씬 더 높이고 넓히는 데 일조했다.

앙코르는 피아노 독주로 시작됐다. 한하윤이 슈만 ‘헌정’의 리스트 편곡 독주 버전으로 연주했다. 반주와 마찬가지로 빼어난 연주였다. 이어서 김태한이 등장해 슈만 ‘헌정’을 노래했다. 한 곡의 여러 측면을 보여주면서 비움을 채우고 완성하는 충만함을 들려줬다. 피아니스트에 대한 김태한의 믿음이 훈훈하게 스며 나온 앙코르였다. 그동안 K-클래식 스타들은 주로 피아노를 비롯한 기악 쪽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심사위원이자 K-클래식 스타인 조수미로부터 바통을 물려받은 김태한이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길 바란다. 우선 가곡 리사이틀 외에 정통 오페라 무대에서도 그의 목소리와 연기를 자주 들을 수 있다면 좋겠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금호문화재단

 

율리우스 아잘 피아노 독주회

기획과 연출의 귀재

8월 1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제4회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8.6~11)의 일환인 이번 공연은 연주자의 최근 데뷔 음반(DG) 프로그램을 따랐다. 스크랴빈(1872~1915)과 스카를라티(1685~1757)의 작품을 교차편성한 것. 그는 공통점을 알기 어려운 두 작곡가의 연결을 설명하려 여러 노력을 기울였다. 인터뷰, 음반 책자, 그리고 그의 연주 자체가 본인의 시각과 해석을 밝히는 자리였다.

아잘(1997~)의 독주회는 기존의 리뷰 방식으로 평하기 어렵다. 각 작품을 어떻게 연주했다는 조각낸 연주 분석을 근원부터 거절하는 듯하다. 각 작품에 관한 그의 해석은 독립되지 않는, 분류해 낼 수 없는 고무찰흙 같았다. 이미 꽁꽁 뭉쳐진 스크랴빈과 스카를라티를 귀로 나누는 것은 소용이 없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공연의 첫 프롤로그부터 마지막 에필로그까지, 한 번에 쭉 연결된 1부의 프로그램을 12곡의 작품으로 나누어 감상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그렇게 듣는다면 공연이 평면이 되어버린다. 조성은 곡 몇 개가 지나는 동안 변하지 않고, 그의 음색은 각 세기의 특징과 관습을 반영하지 않는데, 음악사(史)를 기반으로 하는 연주를 기대하면 어쩌겠는가. 그의 연주는 바로크 시대 명화를 붉은 조명 아래에서 감상하는 원리와 같다. 무색 조명 아래 명화에서 보이던 다채로운 색은 사라지지만, 평소에 감상하던 명화와는 다른 새로운 인상을 얻게 된다. 아잘은 두 작곡가 안에서 공통으로 발견되는 동일한 색을 꺼내 이어 붙였다.

이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1부 전체의 음색을 동일하게 맞췄다. 스카를라티의 작품에 필연적으로 페달이 늘었고, 딱딱한 옛 건반악기의 특색 대신 21세기 악기가 내는 낭만적인 선율로 빚었다. 모든 작품 사이를 쉼 없이 연결했는데, 단순히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도 정해진 박자가 있듯이, 악보의 쉼표처럼 연결했다. 페달도 의도적으로 다음 곡이 시작될 때까지 끊지 않았다. 그렇게 작품들 사이는 끝세로줄 없이, 겹세로줄로 이어졌다.

연결이 어색한 부분은 그가 직접 작곡한 ‘전환Ⅰ·Ⅱ’로 두 작곡가 사이를 이었다. ‘전환Ⅰ’은 f단조 묶음을 B♭(b♭)조성으로 옮기는 데에, ‘전환Ⅱ’는 서정적인 선율을 폭발하는 피날레로 바꾸는 데에 사용됐다. 두 중간 다리는 모두 설득력이 있었다. 총 3번 연주된 스크랴빈 소나타의 ‘거의 아무것도 없이(Quasi Niente)’는 데자뷔처럼 다가왔는데, 클래식 음악 공연에서 이러한 경험은 특별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작품을 앙코르가 아닌 프로그램에서 여러 번 듣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음색은 전체적으로 울림이 많고, 부드럽다. 계산적이고 딱딱한 소리는 거의 없고, 건반을 거의 어르듯 눌렀다. 특히 그는 여린 셈여림을 조정하는 것에 특화되어 있었는데, 메조피아노부터 가장 여린 셈여림까지 20단계는 나눌 수 있을 것이다.

2부의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은 비교적 무난했다. 아쉬움이 있다면 연주자의 긴장감이 객석 아래까지 느껴졌다는 것이다. 1부의 시작에도 그 모습이 보였는데, 2부도 마찬가지여서 1악장의 소리와 페달링은 다소 불안정했다. 2악장에 들어서자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앞선 불안감은 들리지 않았다. 특유의 여린 셈여림은 이 악장에서 다시 크게 빛났다. 3악장과 5악장은 힘이 있고, 대조가 살아나 가장 좋았고, 4악장은 그 위치의 악장으로 적합하게 해석됐다. 공연은 2부까지였지만, 끝날 듯이 끝나지 않는 3부 같은 앙코르로 6곡을 연주하고 공연이 마무리됐다.

이의정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FESTIVAL

 

제주국제관악제 개막공연

스물아홉, 그리고 내년의 서른을 바라보며

8월 8일 제주아트센터

 

1995년에 시작된 제주국제관악제(이하 관악제/ 8.7~16)는 여름 음악제인데, 올해 처음 봄 시즌(3.16~19)도 선보였다. 그간 여름 축제로 몰렸던 에너지가 봄으로 양분된 탓인지, 예년에는 빽빽하게 보였던 일정이 올해는 조금 헐겁게 다가왔다. 덕분에 여러 음악 현장을 볼 수 있겠다 싶었다.

제주에는 슬픔과 즐거움이 공존한다. 봄날의 4·3사건(1948~49)이 역사와 눈물의 변증이라면, 여름날의 관악제는 즐거움과 기대의 시간이다. 그중 개막공연은 관악제의 꽃이다. 올해도 많은 이들이 개막공연을 찾았다. 무대 테두리를 장식한 화단이 제일 먼저 관객을 반겼다.

관악제 개막공연의 형식은 해마다 비슷하다. 제주의 관악인들이 모인 윈드 오케스트라가 팡파르를 맡고, 해외 단체의 공연이 이어진다. 초청 음악가에 대한 기대도 높다. 여러 해 동안 성악가들이 함께 하고 있는데, 작년 라비던스에 이어 올해는 바리톤 김태한이 함께 했다. 2023년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우승자이다.

공연의 첫 곡은 ‘탐라 환상곡’이었다. 관악제는 우수한 목·금관과 타악기 연주자를 선발하는 콩쿠르(병역 혜택 제공)를 2000년부터 운영 중이며, 2021년부터 제주국제관악작곡콩쿠르를 시작했다. ‘탐라 환상곡’은 올해 3월 작곡콩쿠르 (1위 없는) 2위에 입상한 박다은의 곡이다. 제주에 전승되는 여러 민요를 모티프로 윈드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도록 작곡했다. 제주에 흐르는 예술·문화적 자원을 챙겨가며, 새로운 작곡가 발굴에 힘쓰고 있는 관악제의 노고가 느껴졌다. 무엇보다 개막 공연의 ‘팡파르’ 격인 첫 곡을 수상작으로 꾸린 것은 작곡가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었다.

김태한은 가곡 ‘산하’와 ‘오, 나의 성스러운 저녁 별이여’(바그너)를 불렀다. ‘산하’에서는 김태한의 목소리가, ‘저녁 별이여’에서는 목소리와 어우러지는 베이스 클라리넷, 튜바의 든든한 울림이 돋보였다. 익히 알려진 가곡과 아리아를 ‘다시’ 만나는 데에는 관악 앙상블 형식으로 재구성된 편곡의 힘이 컸다.

4인의 클라리네티스트로 구성된 바르셀로나 클라리넷 플레이어즈의 무대는 한편의 ‘관악극(劇)’ 같았다. 중세 기사들의 모험담을 그린 곡으로 줄거리를 전하는 가사나 대사는 없다. 하지만 진격과 출정의 순간, 승리와 개선의 순간이 ‘가사 없는 음악’을 통해서도 충분히 느껴지도록 작곡·구성되었다. 클라리네티스트들이 보여준 연주력은 물론 연기력도 뛰어나 관객들은 중세의 시간으로 금세 빠져들 수 있었다. 이러한 풍경을 볼 때마다 제주관악제는 ‘회집(會集)의 기능’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 ‘협업의 기능’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현재 제주관악제는 어린이 앙상블, 아마추어 단체, 프로 단체 등을 제주로 모으는 데 열과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관객의 취향과 성향은 변하고 있다. 따라서 관악 문화에 더할 ‘그 무엇’이나 ‘플러스’의 기능을 강화하는 것이 내년에 30주년을 맞이하는 관악제의 변화가 될 것이다. 관악극 형태의 프로덕션은 물론 관악음악극이나 관악오페라, 제주의 조각가와 관악기가 만나는 이색전시, 문학가들의 문장과 관악의 숨소리가 만나는 관악 낭독극 등.

물론 제주관악제도 이러한 다양성을 위해 노력 중이긴 하다. 개막공연만 보더라도 해마다 1·2부를 크게 나눠, 2부를 아예 해외 단체에게 맡겨 관악기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올해는 영국의 포든스 밴드(마이클 포울스 지휘)가 올랐다. 1부에 오른 제주 윈드오케스트라(지휘 임대흥)가 목관 중심의 선율선을 선사했다면, 2부의 포든스 밴드는 화려하고 강렬한 금관의 사륜구동을 보여주었다. 제주도립합창단, 서귀포남성합창단과 함께 ‘뱃노래’ ‘여자의 마음’ ‘푸니클리 푸니클라’를 함께 하며 국경을 넘은 음악적 협업을 보여주었다.

이번 관악제는 제주아트센터를 비롯해 제주 전역에서 16일까지 진행되었다. 폭염과 바가지요금으로 떠들썩한 관광지가 된 제주의 밤거리는 예년에 비할 때 한산했다. 이러한 ‘누명’이 관악제가 일군 역사의 ‘광명’에 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내년에 30주년을 맞는 관악제가 3월의 봄시즌부터 변화의 기폭도 넓혔으면 한다.

송현민(편집장) 사진 제주국제관악제

 


CHILDREN

 

인형극 ‘산초와 돈키호테’

어린이의 상상은 막연하지 않다

8.9~18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매년 여름 방학 시즌을 맞아 예술의전당은 어린이 공연 세 작품을 선정해 한 달여 동안 ‘예술의전당 어린이 가족 페스티벌’을 개최한다. 제8회를 맞이한 올해는 영국 대릴 앤 코의 오브제극 ‘네모의 세상’, 국내작으로는 스튜디오 나나다시의 연극 ‘우산도둑’, 예술무대산의 인형극 ‘산초와 돈키호테’를 초청했다.

가족극은 어린이와 어른이 함께 즐길 만하여 가족 단위로 관람하기 좋은 극을 의미한다. 그래서 관극 기준은 전적으로 주수용자인 어린이에게 맞춰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인형극 ‘산초와 돈키호테’(36개월 이상 관람가, 관람 추천 만 5세 이상)는 원작이 가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페스티벌 선정 공연의 응축도와 관객 집중도가 떨어지는 인상을 받는 것은 왜일까.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1547~1616)는 절대적 종교 권력으로 마녀재판까지 횡횡할 정도였던 1605년에 소설 ‘돈키호테’ 1편을 세상에 내놓았다. 자유로운 집필이 불가능한 사회에서 세르반테스는 ‘돈키호테’라는 주인공의 입을 빌려 사회를 날카롭게 풍자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새로운 유토피아인 이상사회를 제시했다. 원작은 정신착란을 일으켜 자신을 기사 ‘돈키호테’로 믿는 스페인의 귀족이 시종 산초와 함께 겪게 되는 여러 에피소드로 주를 이룬다. 작가는 여러 모험을 맞닥뜨리는 두 인물(이상적인 돈키호테와 이성적인 산초)이 표출하는 인간 내면을 냉철하고 심도 있게 묘사하며 새로운 문학의 효시를 열었다.

성인들을 위한 소설이었던 ‘돈키호테’는 독일의 작가 에리히 캐스트너(1899~1974)를 비롯한 전 세계 작가들에 의해 아동문학으로 재창작·번역되었다. 이 과정에서 여러 다시 쓰기의 과정이 있었다. 소설의 분량 축소나 순서 변화, 삽화가 추가됐다. 어린이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문장 부호, 의성어, 의태어, 속담을 사용하거나 두운(頭韻)과 라임을 통한 리듬 형성 등이 있었지만 어떠한 어린이 문학 ‘돈키호테’도 주제가 희석되거나 변질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이라는 두 인물의 동등한 충돌이 없으면, 모험의 종착역이자 궁극적인 주제인 휴머니티와 유토피아에 도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면, 인형극 ‘산초와 돈키호테’는 주인공인 아홉 살 산초가 오래된 서점에서 소설 ‘돈키호테’ 속 판타지에 빠져들어 돈키호테의 모험에 동참하는 줄거리다. 인형극은 산초와 함께 무대에 펼쳐지는 중세풍의 음악, 인형과 팝업북, 그림자극을 통해 관객을 ‘돈키호테’의 메시지에 도달시키려 한다.

돈키호테의 모험은 ‘톰 소여의 모험’과는 다르게 철저하게 계산되고 목적에 의해 설정된 성인을 위한 모험이다. 이번 공연을 선보인 ‘예술무대산’의 수려하고 유려한 인형들과 앙상블은 어린이의 호흡을 쫓으며 완벽했지만, 어린이를 위한 가족극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어린이 관객에게 눈높이가 맞춰진 무대에서 구현되는 상상은 막연한 상상이 아니다. 어린이 관객은 마음의 눈으로 무대 속 상황을 관찰하면서 상상력으로 형상을 유추해야 창조적 통찰에 도달할 수 있다. 어린이 관객에게 무대는 관념에서 현실로 성찰해, 새로운 이치를 재생산하는 과정을 선사하는 장소다. 이는 어른들의 탄성과 호응은 이어졌지만, 상대적으로 어린이 관객의 반향은 크게 감지되지 않았던 이유가 아닐까.

황승경(연극 평론가) 사진 예술의전당

 


테마 리뷰

MUSICAL

 

뮤지컬 ‘하데스타운’ & 뮤지컬 ‘홍련’

죽음의 설화에서 길어 올린 사랑 노래

7월 12일~10월 6일 샤롯데씨어터 / 7월 30일~10월 20일 대학로 자유극장

 

죽음 이후,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후 세계에 대한 인간의 궁금증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남아 있는 사후 세계에 대한 신화·설화들이 증명한다. 오늘날 이 오래된 신화들은 동시대 예술의 변주를 통해 다양한 주제를 우리에게 건낸다. 서로 다른 신화 속 등장인물이 만나며 새로운 교훈을 찾기도 한다. 익숙한 이야기의 시대와 배경을 바꾸어가며, 죽음 앞에서 삶의 교훈을 얻고자 하는 예술의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지난여름, 극장을 달구기 시작한 뮤지컬 ‘하데스타운’(샤롯데씨어터)과 ‘홍련’(대학로 자유극장)은 각각 그리스 신화와 한국의 설화를 소재로 했다. 공연의 규모나 제작의 과정 등이 전혀 다른 두 뮤지컬이지만, 서로 다른 문화적 맥락에서 사후 세계를 소재로 이들이 펼쳐낸 이야기를 모두 살펴보았다(‘하데스타운’ 8월 2일, ‘홍련’ 8월 7일 관람).

미국과 한국의 정서를 반영하다

‘하데스타운’은 브로드웨이에서 탄생한 화제작이다. 2019년 초연 후 토니 어워즈에서 8개 부문을 수상했다. 가장 주목할 점은, 뮤지컬의 탄생 과정이다. 원래의 ‘하데스타운’은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아나이스 미첼이 만든 음반명이다. 이후 연출가 레이첼 챠브킨을 만나 뮤지컬로 재탄생된 만큼 기존의 작법과는 다른 신선함을 가졌다. 포크송과 재즈 음악을 중심으로, 일반 대극장 뮤지컬과 달리 음악과 연출의 세밀한 요소들이 이 작품의 진정한 매력이다.

반면 ‘홍련’은 2022년 CJ문화재단 뮤지컬 창작자 지원사업 ‘스테이지업’을 통해 발굴됐다. 올해 7월, 정식 초연된 ‘홍련’은 신예 창작진이 촘촘하게 엮어낸 서사가 돋보인다. 한을 담아내는 음악으로는 강렬한 락 사운드를 택했다. 씻김굿 장면을 제외하면 한국적 색채는 음악보다 서사의 정서에 더 짙게 배어있다.

이렇듯 전혀 다른 국가와 시스템 속에서 탄생했음에도, 두 뮤지컬은 눈에 띄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서로 다른 두 개의 서사를 엮은 것. 이는 옛이야기에서 동시대성에 걸맞은 새로운 주제를 끌어내기 위함인 듯하다.

오랜 이야기를 어떻게 엮었나?

‘하데스타운’은 하데스-페르세포네의 서사와 오르페우스-에우리디케의 이야기가 동시에 진행된다. 지옥의 신 하데스(양준모 분)에게 납치된 봄의 신 페르세포네(리아 분)는 1년 중 6개월만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다. 이로 인해 지독한 추위를 겪고 있는 지상에는 식당의 종업원이자 천부적 목소리를 가진 시인 오르페우스(조형균 분)와 가난에 시달리는 에우리디케(김환희 분)가 살고 있다. 에우리디케는 배고픔을 참지 못하고 하데스의 ‘타운’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 오르페우스는 하데스타운을 찾아와 노래한다.

그런데 그가 완성한 ‘천상의 노래’가, 하데스와 페르세포네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시절 그들이 불렀던 노래로 설정돼 있다. 오르페우스의 노래를 듣고, 폭군처럼 보였던 하데스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페르세포네를 바라볼 때 뮤지컬에 대한 감정적 몰입도는 높아진다.

‘하데스타운’의 기존 이야기의 타임라인을 영리하게 활용했다면, ‘홍련’의 스토리텔링은 조금 더 창의적이다. 전혀 다른 두 얘기의 주인공을 만나게 한 것. 고전소설 ‘장화홍련’ 속 ‘홍련’은 아버지와 계모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언니 ‘장화’가 죽은 후 제 목숨을 끊었다. 그런데 뮤지컬 속 홍련(홍나현 분)은 자신을 괴롭히던 아버지도 직접 죽였다며 당당하게 등장한다. 죽은 영혼이 심판을 받는 ‘천도정’에 끌려온 그녀를 심판하는 이는 ‘바리공주’(이지연 분)다. 버려진 아이라는 뜻의 ‘바리데기’로도 불리는 그녀는, 딸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생명수를 찾아 저승을 다녀왔다. 홍련은 미련하게 효심을 지킨 바리공주를 비난하고, 바리공주는 그런 홍련이 자신의 이야기를 똑바로 마주하도록 돕는다. 상처받아본 바리공주는 상처받은 홍련의 마음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사실은 뮤지컬 속 홍련도 제 아버지를 죽이지 못했다. 언니 ‘장화’가 죽어가는 동안, 침묵하기만 했던 죄책감에 ‘아버지라도 죽인 못된 년’이 되고 싶었던 것. 울부짖는 홍련을, 바리공주가 “아가”하고 부르며 보듬을 때 객석 곳곳에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가엾은 영혼을 살피는 시선

죽음 앞 헤매는 홍련의 영혼을 바리공주가 돌보았다면, 하데스타운으로 향하는 용감한 오르페우스의 곁에는 ‘헤르메스’가 등장한다. 헤르메스는 무대와 객석 사이의 제4의 벽을 깨고 등장하는 존재다. 그의 다정함은 미묘하다. 하데스타운에 가고 싶은 오르페우스에게 길을 알려주긴 하지만, 위기에 빠진 그를 구해주지는 않는다. 캐스팅에 따라 ‘헤르메스’ 시선의 온도가 다르게 느껴진다는 관객의 평도 흥미롭다. 기자가 관람한 공연(8.2)의 헤르메스는 강홍석으로, 뮤지컬 전체를 이끄는 그의 힘이 느껴졌다. 동시에 젠더 프리 캐스팅으로 화제를 모은 최정원 표 헤르메스에 대한 궁금증도 일었다.

마이크의 존재가 두 뮤지컬 모두에 있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무대에는 긴 스탠딩 마이크가 놓여있고, 극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길고 복잡한 서사를 압축하기 위한 장치다. 등장인물들이 번갈아가며 마이크 앞의 화자가 되기도 한다. 모든 장면을 재연할 수 없기에, 마이크 앞의 화자는 ‘옛날 옛적에, 이렇게 죽은 한 아이가 있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죽음’이라는 결말을 바꾸지 못한다면…

두 이야기 모두 죽음의 결말을 면하진 못한다. ‘하데스타운’의 오르페우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승의 문 앞에서 에우리디케를 돌아보고 만다. 어리석은 인간의 연약함이여! 장장 2시간여를 달려온 결말 치곤 허무하다. 그러나 마지막에서 헤르메스는 다시 웃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번에는 이야기의 결말이 달라지길 바라며.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지옥 같은 죽음으로부터 에우리디케를 구할 것이라고 믿으며.

‘홍련’의 죽음은 조금 더 평안하다. 바리공주의 씻김굿으로 손에 묶인 붉은 밧줄을 드디어 끊어낸 홍련은 모든 한을 풀어내고 저승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따뜻한 눈길로 홍련을 보내주는 바리공주의 마음속 상처도 함께 씻긴다. 죽음의 문 앞에선 가녀린 영혼에 대한 두 작품은 아름다운 사랑의 노래로 극장 문을 나서는 관객을 배웅한다.

허서현 기자 사진 에스앤코·마틴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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