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레브레히트, 사이먼 래틀을 만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9월 2일 9:00 오전

노먼 레브레히트 칼럼 | SINCE 2012

영국의 평론가가 보내온 세계 음악계 동향

 

사이먼 래틀을 만나다

지난 8월, 그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들은 이야기

 

사이먼 래틀과 런던 심포니 ©Mark Allan

“이제는 행복한가요?” 내가 말을 꺼내자 사이먼 래틀 경은 다소 무거운 표정을 보였다. 경과 나는 독일 뮌헨의 한 카페 소파에서 두 시간 동안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들과의 고군분투에 대해 흉금을 털어놓고 이야기를 나눈 참이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자그마한 만족감이 나타났다.

이는 4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갖는 미디어 세션이었는데, BBC 라디오 3의 레브레히트 인터뷰를 처음 제안했을 때 그는 흔쾌히 즐거운 자리가 되겠다며 승낙했다. 마침 노동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시기도 적절했다. 래틀 경은 한때 음악계의 젊은 토니 블레어 총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나는 새 정부와 연락을 할 셈이냐고 물었다.

“키어 스타머 총리에게 편지 한 통, 리사 낸디 문화부 장관에게 한 통 쓰려고요.”

경의 답은 간단했다.

“뭐라고 적을 건가요?”

“축하한다고, 또 잘 해달라고요.”

래틀 경은 영국 음악계의 사정에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마이클 티펫의 ‘토머스 탤리스 주제에 의한 환상곡’ 연주에서 프리랜서 현악기 연주자를 어렵게 구한 것에 대해 언급했다. “사람들은 지휘자라는 업이 좋을 거라고 하지만 저는 직업을 바꿨어요. 지금은 가르치는 사람으로 다시 훈련 중이죠. 또 NHS(영국 국민 의료 보험)를 위해 세금을 내며 일하고 있고요. 우리는 모두 가족을 부양해야 하고, 음악가들이 헤쳐 나가야 하는 길을 생각하면 제 심장에서는 피가 철철 나요.”

운 좋았던 젊은 시절의 경험

그의 대답은 영국 음악계 거장의 현실을 보여준다. 경은 이제 막 음악계에 입문하는 이들이 거의 자취를 감췄다고 생각한다. “첫 무대에 오르기까지 이들이 해야만 하는 일들을 생각해 보세요. 제가 어렸을 때는 그냥 누리던 것들을 위해서 말이에요.” 한숨과 함께 터져 나온 말이다.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난 그는 누나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악보를 읽으며 자랐다. “수잔 누나에게는 자폐증이 있었어요. 누나는 제가 좋아할 줄 알고 아홉 살 꼬마였던 제게 쇤베르크의 ‘관현악을 위한 다섯 개의 작품’을 알려 주었죠. 좋을 수밖에요. 그런 역할을 하는 공공 도서관이 요즘도 있는지 모르겠네요.”

또 부모님은 그 꼬마에게 매일 저녁 7시 30분에 방송되는 라디오 3 나이트 콘서트를 들려주었다. “어머니는 켄트 출신 노동자셨는데 당신만의 상류층 악센트를 개발하시기도 했죠. 아버지는 재즈의 세계를 알려주셨어요. 듀크 엘링턴의 음악을 여섯 살 무렵 처음 들었죠. 피아노 아래에 풀썩 앉아 있는데 버디 리치, 메이너드 퍼거슨의 곡이 들렸어요. 그 뒤로는 펍에서 ‘리버풀 시인들’의 낭송을 들었고요.” 비틀스 곡을 듣기에는 그에게 들려오는 음악이 이미 넘쳐흘렀다.

“리버풀에는 특별한 사람이 많았어요. 일례로 관현악단에서 플루트를 연주하는 오스트리아인 프리츠 슈피겔은 순찰차를 위한 음악을 작곡하는가 하면 독창적인 저서 ‘리버풀 방언 말하기(Learn Yourself Scouse)’를 펴냈어요. 또 TV 뮤지컬 진행자이자 플루티스트인 아타라 벤 토빔도 꼽을 수 있겠네요.” 당시 BBC 심포니 지휘자였던 찰스 그로브스는 슈피겔을 리허설에 데려갔다. “그분은 젊은 음악가를 육성하는 게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래틀 경은 A 레벨(영국 입시 시험)을 벼락치기로 통과하고 16세의 나이로 영국 왕립음악원에 입학해 곧바로 말러 교향곡 2번 공연에 합류한다. “윗선에서는 우리가 말러를 연주할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연주자를 찾는 것도 굉장히 어려웠고…. 리허설에는 비올리스트가 한 명뿐이었죠. 그래도 저는 가수는 다 모았고, 그들이 올바른 음을 낸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쁨에 겨웠어요. 영적인 말을 늘어놓자는 건 아니지만, 이 음악을 발견한다는 건 정말 특별한 경험이에요. 당시에는 하늘을 날 듯 기뻤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간신히 해낸 셈이죠.”

에이전트의 눈에 띈 경은 BBC 스코틀랜드 심포니, 본머스 심포니 부지휘자를 거쳐 25세의 나이에 버밍엄 심포니 수석지휘자 자리를 제안받았다. 누구든 양손 벌려 환영했을 기회였지만, 경은 한 해를 쉬며 옥스퍼드에서 영문학을 공부했다.

“음악 없이 살 수 있을지 한번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의 회상은 이렇다. “영국을 떠나서 객원 지휘자로 살면서 때로는 정말 좋기도, 때로는 상상도 못 할 만큼 사무치게 외롭기도 했는데. 음악가 딱지를 뗀 저 자신에 대해 알아보고 싶었달까요.”

경은 공연장에 발길을 끊은 채 옥스퍼드에서 세 학기를 보냈다. “다시 음악의 세계로 돌아왔을 때 처음 들은 곡은 존 카레웨와 브라이튼 필하모닉의 베토벤 ‘영웅’이었어요. 존은 임시로 결성된 오케스트라라며 실력이 별로라고 했지만 그다지 상관없었죠. 곧바로 눈물이 쏟아졌는데, 울음이 꽤 격렬했던지라 주변 관객 몇은 절 피해 좌석을 옮길 정도였어요.”

버밍엄에서의 시간은 래틀 경에게 황금기였다. “유명 인사들이 총집합한 순간이랄까요.” 리버풀 시절 동료 에드 스미스가 매니저로 합류해 마치 듀오 작가 ‘길버트와 조지’처럼 함께했다. 이때 예술위원회로부터 백만 파운드의 보조금을 획득하고 새 공연장 허가를 받았는데, 이는 추후 영국에서 제일가는 공연 홀로 완공된다. “그땐 저희가 얼마나 운이 좋았는지 알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반면에 연주자들은 힘든 시간을 보냈어요. 몇 년째 치과 치료를 받지 못했다고 하길래 같이 치과에 다녀왔죠. 당시에 버밍엄은 새로운 활기가 필요했고, 유럽 대륙이 손을 보탰어요. 지금까지도 버밍엄 심포니홀 건설 비용이 정확히 얼마인지 아는 이가 없어요. 자크 들로르 전 EU 집행위원장과 키스 조지프 전 영국 교육부 장관이 첫 삽을 팠었고요.”

한 여름날 글라인드본에서 경은 흑인 빈민가 사람들의 삶을 다룬 거슈윈의 오페라 ‘포기와 베스’로 샴페인을 들이켜던 이들에게 놀라움을 선사한다. 오디션은 미국에서 진행되었다. “몇몇은 그다지 신뢰를 보이지 않았어요. 새파랗게 젊은 백인 지휘자라뇨. 영가(靈歌)의 빠르기를 놓고 일종의 교착 상태도 있었고요. 언젠가 원로 단원 한 명이 ‘사이먼, 당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어 정말 즐겁긴 한데, 사실 우리끼리는 가끔 당신 가족 중에 목화밭에서 노예로 일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얘기도 한다’라고 말해 주기도 했죠.” 경은 지금도 종종 초연 단원들과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베를린필, 살얼음판 위의 나날들

내가 래틀 경과 조우한 것도 이즈음이었다. 우린 모두 하교하는 아이들을 데리러 뛰쳐나가곤 했다. 다른 마에스트로라면 유모를 보냈을 테지만, 그는 규칙을 뒤흔드는 걸 즐기는 새로운 유형의 지휘자였다. 이후 18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 경은 다음 행보가 정해지지 않은 채 버밍엄을 떠난다. 1999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에서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암 투병으로 자리를 비우자 다니엘 바렌보임이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무기명 투표에서 단원들의 표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래틀 경이었다. 두 사람은 이후로도 지휘봉을 함께 들게 된다. 경은 속마음을 털어놓았다. “바렌보임은 여전히 제게 ‘사이먼, 그 자리는 내가 가는 게 나았다고 생각한다’며 말하곤 해요.”

“뭐라고 답했나요?”

“‘그때도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죠.”

베를린필은 인정사정없는 자각을 일깨워 주었다. “클라우디오의 마지막 공연에서 카라얀의 아내 엘리에트가 다가와서는 진지하기보다는 열성적으로 말해 주더군요. ‘사이먼, 행운을 빌어요. 다만 주의하도록 해요. 이 오케스트라는 훌륭하죠. 그런데 내 남편을 죽이고 클라우디오마저 죽음으로 몰고 간 이들이에요. 몸도, 마음도 조심하세요.”

오케스트라 내에서 극렬한 저항이 있었는데 일부는 보수주의자, 일부는 고집불통인 이들이었다. “월요일 아침마다 그 얼굴들을 어떻게 마주했나요?” 내 질문에 경은 으쓱하고 말았다. “여러 가지를 시도해 보는 거죠. 눈을 마주하는 건 항상 먹히는 방법은 아니고 도리어 자신감을 잃을 수도 있어요. 분명 어떤 때에는 굉장히 힘든 싸움이었죠. 고령의 단원 한 명이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지난주엔 제임스 러바인이 와서는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더군요. 내가 어떻게 ‘굿모닝’이라고 인사하는 지휘자를 위해 연주를 하겠나요?’ 또 어떤 단원은 코웃음을 치며 엘가를 연주할 바엔 말러를 연주하겠다고도 했죠.” 버밍엄 식의 방법으로는 먹힐 곳이 아니었다.

최고의 순간은 음악의 세대교체가 일어나던 저녁나절들이었다. 경은 베를린으로 현존하는 작곡가들을 불러왔다. 리게티, 구바이둘리나, 비드만, 아데스, 터니지…. 종종 경은 무대 위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좌석에 있는지를 확인하려 우측을 훑어보기도 했다. “총리가 그러더군요, 난민 위기 때였는데 자신이 세 시간 동안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고요.”

영국 총리를 만난 적도 있었을까? 기억을 더듬은 그가 답했다.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포기와 베스’ 공연에 왔었죠.”

16년 뒤 베를린을 떠날 때까지, 래틀 경은 세계 최정상 오케스트라의 심장에서 버텼다. “베를린필의 지휘자가 된다는 건 다정하고 정중한 대접은 받되 결코 그곳에 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의미해요. 단원들은 이른바 ‘마이스터징거’이고, 남아 있는 자들이죠. 왔다가 떠나는 건 지휘자의 몫이에요.”

경의 후임인 키릴 페트렌코는 인터뷰나 영상 녹화를 절대 하지 않는 내향인인데 경은 이를 반겼다. “제가 타협했던 부분에 있어 전혀 타협하지 않을, 훌륭한 지휘자가 온 거예요. 키릴은 포기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 단원들의 원망을 꽤나 사겠지만, 다른 지휘자가 협업하기에 훨씬… 수월한 오케스트라로 베를린필을 변화시키겠죠.”

안도의 한숨, ‘이제는 편안하다’

사이먼 래틀과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Symphonieorchester des Bayerischen Rundfunks

베를린에서의 지난한 시간이 지나고 래틀 경은 런던 심포니와 만났다. “대다수는 왕립음악원 시절이나 그전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들이어서 거기서는 그저 음악을 연주하고, 그 음악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런던 심포니는 경에게 전용 홀 신축을 지원해달라 요청했다. “앞으로 수년간 공연장 건축만이 주요한 문제가 되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죠.” 하지만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고, 브렉시트와 코로나19로 인해 신축 계획은 물론 투어를 향한 경의 인내도 함께 사라졌다. 연주자들은 경의 지원 그 이상을 필요로 했다. 그는 음악감독직은 이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때마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에 있던 한 친구가 공연 몇 개를 맡아달라며 달콤한 말로 경을 고속 열차에 태웠다. 그는 리버풀에서 보낸 유년 시절에 들었던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음색을 기억하고 있었다. 뮌헨의 연주자들은 리버풀 구단의 응원 문구이기도 한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야”가 바이에른 방언으로 적힌 티셔츠를 경에게 선물했다. 그는 조금은 리버풀 방언 같기도 했다며 웃음을 보였다.

그러나 또다시 공연장이 도마 위에 올랐다.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은 뮌헨필과 홀을 같이 쓰고 있었다. 신축 홀을 약속했건만 이는 2036년으로 연기되고 만다. “그때면 당신은 81세가 되네요.” 내 말에 경은 세련되게 답했다. “악단 측에 더 빠르게 처리해달라고 설득하는 게 제 일이죠. 물론 후임자가 누구든 그를 위해 이 과정을 계속하는 것도 문제 될 게 없고요.”

이렇게 편안해 보이는 경의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는 코로나가 한창이던 때에 백내장 수술을 받았고, 내 질문 중 하나는 정신과 의사에게로 넘기겠다고 말했다. 행복해 보인다는 나의 말에 경은 한참을 고심하다 이렇게 답했다. “고마운 말이네요. 이곳에서 일하는 건 퍽 마음에 들어요. 오케스트라는 가족 같고, 편안한 분위기지만 다들 또 연주는 맹렬하게 하거든요. 여기 있을 수 있어 참 운이 좋았다고 느껴요.”

테이블 위의 카푸치노 두 잔은 모두 차게 식었고, 마지막으로 시간을 내주어 고맙다고 인사하자 상냥한 답이 돌아왔다.

“노먼, 40년이 지나고 나서야 우리가 서로에게 졌던 신세를 갚네요.”

 

8월 24일에 진행된 레브레히트의 사이먼 래틀 인터뷰는 BBC 라디오 3에서 9월 6일(현지 시각 19시 15분)에 재방송될 예정입니다.

번역 evener

 


 

노먼 레브레히트 칼럼의 영어 원문을 함께 제공합니다. 본 원고는 본지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Happy at last?’ I suggest. Sir Simon Rattle shoots me a guilty look. For two hours on a Munich sofa he has talked, no holds barred, about his struggles with the world’s best orchestras. Now, he’s looking a bit contented.

We are having our first media session in forty years. ‘I would surely enjoy it,’ said Simon, when I offered him a BBC Radio 3 Lebrecht Interview. The timing was apt. Labour had just won the election. Rattle was once seen as the musical counterpart of the young Tony Blair. I ask if he will be getting in touch with the new government.

‘I will write a letter to Keir Starmer, I will write a letter to Lisa Nandy,’ says Rattle, frugally.

‘What will you tell them?’

‘Congratulations. Please look after it.’

He is heartbroken by the state of Britain’s music. He tells me about trying to find freelance string players for Michael Tippett’s Tallis Fantasia. ‘Many said, this would have been wonderful, but I’ve changed profession’ he reports. ‘I’m retraining as a teacher. I’m working for the NHS. We need to feed our families. My heart bleeds to think what people are having to get through.’

And that’s the top end of music in Britain. The entry-level, he thinks, has all but vanished. ‘Think what people have to do just to get to stage one,’ he sighs. ‘I had it all when I was a kid.’

Growing up in Liverpool, he read scores his sister brought home from the library. ‘My sister was autistic. The reason I knew the Schoenberg Five Orchestral Pieces when I was eight or nine is because Susan thought I would like it. And I did. Is there still a public library which does that?’

His parents let him listen to the Radio 3 nightly concert at 7.30. ‘My mother was a working-class girl from Kent who reinvented herself in a posh accent. My dad took me to jazz. I heard Ellington play when I was six. I sat literally under the piano. I heard Buddy Rich, Maynard Ferguson. A bit later I heard the Liverpool poets in pubs.’ So much was going on he never heard of the Beatles.

‘Liverpool had these huge personalities. Fritz Spiegel, an Austrian who played flute in the Phil, composed music for Z-Cars and wrote a seminal work ‘Learn Yourself Scouse’. Next to him was (the TV musical motivator) Atarah Ben-Tovim.’ The conductor, Charles Groves, let him attend rehearsals. ‘He felt it was part of his work to look after the young musicians.’

Crammed through A-levels he went to the Royal Academy of Music at 16 and promptly pulled together a performance of Mahler’s second symphony. ‘The powers that be felt we were not mature enough to be playing Mahler,’ he recalls. ‘It was very hard to find players … we did rehearsals with one viola. I was just happy that I’d got enough singers and they were hitting the right notes. Let’s not be mystical but there’s something extraordinary about discovering this music. We felt we could fly, but I’m sure we only just made it.’

Spotted by an agent, he went to the BBC Scottish Symphony and the Bournemouth Symphony as assistant conductor. At 25, he was offered the principal baton at Birmingham’s CBSO. Others might have grabbed it with both hands. Rattle took a year out and read literature at Oxford. ‘I wanted to see, could I live without music?’ he reflects. ‘I’d been guest conducting abroad, sometimes loving it, sometimes feeling more lonely than I could ever imagine. I wanted to know what am I, if I am not a musician.’

He did three terms at Oxford without hearing a concert. ‘And when I came back to music, the first music was John Carewe with the Brighton Philharmonic doing (Beethoven’s) Eroica. John said, it’s a pick-up orchestra, it’s not going to be any good. I didn’t care. I sobbed right through it. I sobbed so hard that couple of audience members moved a few seats away.’

Birmingham was an apotheosis, ‘one of those moment when all the stars align.’ His Liverpool mate, Ed Smith, had come in as manager. Together – ‘we were Gilbert and George’ – he won a million-pound Arts Council grant and a green light for a new concert hall, which turned out to be the best in Britain. ‘I don’t think we knew how lucky we were,’ he says. ‘The players had been through a terrible time. They said: we haven’t been to the dentist for years. We did dental hygiene together. The city wanted a rebirth. Europe got involved. To this day, nobody knows what Symphony Hall cost. Jacques Delors and Keith Joseph dug the first hole.’

One summer he electrified champagne quaffers at Glyndebourne with Gershwin’s Porgy and Bess, an opera about lifer in a black ghetto. Auditions were held in America. ‘Some were a bit suspicious of this very young white guy. We had a bit of a standoff over the speed of one of the spirituals. One of the older members said to me, “Simon, we’re really enjoying working with you. But every now and then we can tell that none of your relatives worked in cotton.”’ He still holds regular reunions with the original cast.

I met him around this time. We both ran off to collect kids from school. Any other maestro, I thought, would have sent the nanny. But Rattle was a new kind of conductor, never happier than when bucking the rules. After 18 years, he walked away from Birmingham with no job in sight. In 1999, the Berlin Philharmonic fell vacant as Claudio Abbado battled cancer. Daniel Barenboim was the clear favourite. In a secret ballot, Rattle won the players’ vote. The pair continue to share their baton wounds. ‘Barenboim still says to me, look Simon, I think I would have been a better person for them,’ Rattle confides.

‘And what do you reply?’

‘I say, Daniel, I thought that then… I think it now.’

Berlin proved a brutal awakening. ‘At Claudio’s last concert, Karajan’s widow Eliette came over to speak to me, not entirely sober but very intense. She said: “Simon, good luck with this. Just be aware. The orchestra is great, but they killed my husband and they nearly killed Claudio. Be careful. Of your health, of your sanity”.’

There was a hard core of resistants in the orchestra, some reactionaries, others just bloody-minded. ‘How did you face them on a Monday morning?’ I wondered.

‘You try lots of things,’ he shrugs. ‘Eye contact doesn’t always work. And it’s difficult to keep your confidence. I certainly struggled at some times. One of the older players said to me: we had James Levine last week. He said good morning to me. How am I expected to play for a conductor who says good morning to me?’ Another old-timer said: ‘If we are to play Elgar, we might as well play – sniff – Mahler.’ The Birmingham can-do was a thing of the past.

The best parts were those nights when music took over. He introduced Berlin to living composers – Ligeti, Gubaidulina and Widmann, Ades and Turnage. He’d look up to the right as he came on stage to see if Angela Merkel was in her seat. ‘She’d say, in the middle of the great immigration crisis, this is the only place I can be undisturbed for three hours’.

Did he ever see a British Prime Minister? ‘Thatcher,’ he remembers. ‘She came to Porgy.’

Sixteen years he lasted at the wheel of the orchestral Porsche before he walked away again. ‘As a conductor in Berlin,’ he says, ‘it can be friendly, it can be polite, but you are not a member of the guild. They are the mastersingers. They are the ones who remain. Conductors come and go.’ His successor, Kirill Petrenko, is an introvert who never gives interviews or makes recordings. Rattle is delighted. ‘They have a great conductor to work with who is totally uncompromising in areas where I compromised. Kirill never gives up, and I’m sure it drives them completely crazy but he’s made them an orchestra that’s… much easier … for the rest of us to conduct.’

Battered by Berlin, he got talking to the London Symphony Orchestra. ‘These were a bunch of friends of mine from the (Royal) Academy, or earlier. This felt like something where we could simply make music and see where it would go.’ The LSO asked him to help them get a new hall. ‘I said: I hope this doesn’t become the single subject that we talk about for the next few years,’ he recalls. But it was. And then Brexit and Covid killed the scheme, along with his tolerance for tours. The players needed more than he could give. He was done with being a music director.

Just then, a friend in the Bavarian Radio Symphony Orchestra sweet-talked him onto a high-speed train for a couple of concerts. He remembered their sound from his boyhood in Liverpool. In Munich the players gave him a t-shirt emblazoned with ‘You’ll Never Walk Alone’ – in Bavarian dialect. ‘A bit like Scouse,’ he laughs.

Once again, the hall is a problem. The BRSO shares with the Munich Philharmonic. A new hall was promised, but it has been postponed to 2036. ‘You’ll be 81,’ I point out. ‘My job is to persuade them to move more quickly,’ Rattle maintains diplomatically. ‘But I am perfectly fine carrying the process on for whomever my successor might be.’

I have never seen him so relaxed. He had his cataracts done during Covid and he mentions deflecting one of my questions to his shrink. I tell him he looks happy and he thinks for a long moment before saying ‘that’s nice of you… I love working here, the orchestra is like a family, it’s very easygoing and yet they play like demons. I feel a truly lucky man being here.’ Two cappuccinos have gone stone-cold on the coffee table. I thank him for making the time. ‘Norman,’ he says softly, ‘after 40 years we owed it to each other.’

 

The Lebrecht Interview with Sir Simon Rattle will be broadcast on BBC Radio 3 at 2145 on August 24, after the Prom concert, repeated on 6th Sept at 1915.

 

노먼 레브레히트 영국의 음악·문화 평론가이자 소설가. ‘텔레그래프’지, ‘스탠더즈’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블로그(www.slippedisc.com)를 통해 음악계 뉴스를 발 빠르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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