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꾼 정효선, 북녘의 전통 노래와 해학을 이어가는 후예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9월 2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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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꾼 장효선

북녘의 전통 노래와 해학을 이어가는 후예

 

 

16세의 성춘향이 이몽룡과 사랑에 빠졌다면, 18세의 배뱅이는 스님과의 금지된 사랑을 이루지 못한 채 죽는다. 문벌 높은 집안의 무남독녀로 태어난 배뱅이는 태어날 때 모친의 꿈에서 비둘기 목을 비틀어 버렸다고 하여 이름이 배뱅이가 되었다. 배뱅이의 이야기가 담긴 ‘배뱅이굿’은 제목 때문에 ‘굿’으로 오인하지만, 사실은 서도소리의 하나이다.

 

어릴 때 듣던 ‘배뱅이굿’을 토대로 한 창작극

서도소리는 1984년 국가무형유산(국가무형문화재)으로 지정된 노래로, 북녘에서 전승된 민요 중 하나다. 국가유산청(전 문화재청)은 북한의 전통예술들을 ‘이북5도 무형유산’이라 하여 보존·전승하고 있다. 재담꾼으로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이은관(1917~ 2014)은 서도소리의 하나인 ‘배뱅이굿’으로 ‘명인’의 칭호를 획득한 예능보유자이기도 했다.

9월 4·5일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예술감독 유지숙)이 신작으로 선보일 ‘왔소! 배뱅’은 ‘배뱅이굿’을 토대로 한 창작품이다. 본래 ‘배뱅이굿’은 1인의 창자가 40~50분의 노래와 재담을 도맡는 형식이나, 민속악단의 재직 단원들이 배역을 나눠 맡는 창극 형식으로 각색되었다. 연출은 음악극 ‘정조와 햄릿’(2021), 오페라 ‘나비부인’(2024) 등을 맡은 임선경이 함께 한다. “어렸을 때 배뱅이굿이라 하면 ‘왔구나! 왔어~’ 하는 소리로만 알고 있었는데요. 제대로 들었을 때는 구슬프고 아름다운 음악에 ‘우아한 느낌’이라는 첫인상을 갖기도 했어요. 그러면서도 노래 사이로 웃음이 터지는 해학적인 요소! 저한테는 큰 매력이었습니다.”(임선경)

배뱅이의 부모는 죽은 딸을 위로하려고 무당을 불러 굿판을 펼친다. 전국에서 용한 무당들이 총출동한다.

 

슬픈 배뱅이도 엉터리 무당을 보고 웃는다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왔소! 배뱅’ ©황필주

‘배뱅이굿’이나 ‘왔소! 배뱅’의 문제적 인간은 타이틀 롤의 배뱅이가 아니라 박수무당이다. 배뱅이의 혼령을 위로하는 넋풀이를 하는데, 박수무당이 영락없는 엉터리다. 선무당이 사람 잡고, ‘배뱅이굿’에선 무당이 일촉즉발 일으키는 해프닝이 관객의 배꼽을 잡는다. 심지어 이번 공연에는 ‘박수무당’ 옆에 ‘평양건달’이라고까지 적혀 있으니 캐릭터의 성격이 훤히 보인다. 결국 교묘한 수단을 써서 거짓 넋풀이를 해주고, 많은 재물을 얻는 박수무당. 장효선은 이 박수무당의 역할을 맡았다. 민속악단 공연에서 서도소리나 ‘배뱅이굿’을 노래하고 재담을 맡아왔던 유지숙의 중요한 역할을 장효선이 물려받는 시간이기도 하다.

“입 밖으로 웃긴 대사가 술술 나와야 하는 것은 기본이요. 그냥 내지르는 것 같은 소리에도 소리목 대목이 있어서 엄청 신경 써야 합니다. 예를 들어, 이은관 명인이 ‘왔구나~!’라며 외치고 굵게 소리를 떠는 ‘시김새’가 있는데, 그 짧은 대목에도 서도소리만의 특성이 진하게 들어가 있어요.”

연습을 거듭할수록 ‘이은관’과 ‘유지숙’이 될 수 없다고 느낀 장효선은 이번 역할에 ‘장효선’을 녹여 넣기로 했다.

“스승(유지숙)만큼 할 수 없으니, 저만의 색깔을 담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다만 박수무당이 엉터리 무당이라는 점이 위안이 되네요. 뭔가 실수를 해도 관객들이 ‘의도된 엉터리’로 봐주신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지금은 이 엉터리 안에 ‘치밀함’이 담겨야 한다는 것 때문에 또 힘이 드네요.(웃음)” ‘엉터리’가 최종 목표지점이지만, “연습만큼은 엉터리로 할 수 없다”라며 웃는 그녀의 얼굴로 한여름의 뜨거움을 대변하는 땀방울이 떨어진다.

 

서도소리로 단련한 시간

©황필주

민요를 공부하는 이들은 각자만의 독특한 언어적 성장 과정을 겪는다. 장효선도 그러하다. 그는 대전에서 나고 자랐다. 당연히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고 들으며 컸다. 하지만 서울말로 대학 공부를 마쳤다. 그리고 민속악단의 서도소리 단원으로 재직하는 그는 서도소리의 본고장인 황해도 말로 노래한다.

대전예고에 입학해 민요를 전공하던 장효선이 유지숙을 만난 때는 고등학교 3학년 때이다. 스승과의 만남을 통해 공부의 깊이가 깊어졌다. “서도소리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깨달음을 느낄 때였습니다.”

중앙대 음악극과에 입학한 뒤, 한눈팔지 않고 꼿꼿하게 제 길을 갈 수 있었던 것도 스승 덕분이었다. 공연으로 바쁜 스승의 ‘진한 가르침’은 ‘길’ 위에서 행해지기도 했다. “유지숙 선생님과의 동행 시간이 곧 레슨 시간이었어요. 특히 선생님께서 공연에 가실 때 저도 보조석에 늘 동행했었는데요. 직접 운전하시는 자가용 안에서의 레슨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추억입니다.”

어찌 보면 젊은 선생이나 어린 제자나 무조건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참으로 철없는 믿음으로 단단히 무장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실 스승인 유지숙이 민요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스무 살이 넘어, 그것도 반듯한 직장을 얻고 나서였다.

“선생님께서도 뒤늦게 민요 공부를 시작하셨으니, 뒤늦게 서도소리에 입문한 제자의 마음을 늘 이해해 주셨던 것 같아요. 뭔지 모를 내적 공통점이 느껴졌어요.”

 

민속악단의 저력을 보여줄 소리꾼

장효선은 대학 4학년 때인 2009년에 첫 독창회(창덕궁 소극장)를 가졌다. ‘서도소리 발표회’라고 이름 지었던 만큼 서도소리와 함께 할 것을 약속한 순간이었다. 이후 꾸준히 독창회를 가져 작년에는 ‘봄의 소리에 물들다’(문화공간 아이원)에서 서도좌창 한바탕을 올렸다.

 

장효선은 2016년에 국립국악원 민속악단에 입단했다. 1979년에 창단된 민속악단은 예나 지금이나 예인들이 일군 ‘민속악계의 사관학교’이다. 특히 서용석(1940~2012)이 음악감독을 맡았던 1980년대에 그는 전국의 민속악 자원을 모아 레퍼토리로 재구성하며 민속음악계의 발전을 도모했다. 하여, 훌륭한 음악가는 연주를 통해서만 나올 수 있고, 무대를 통해서만 클 수 있다는 믿음 아래, 자신의 영역만 공부한 좁은 시야의 소유자도 명인과 예인들의 ‘곁’에서 기라성 같은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이 민속악단이기도 하다.

장효선은 입단 전에 출전한 강원 전국 경·서도·강원소리 경연대회를 비롯해, 입단 후에도 강화 전국 국악경연대회, 한국 민속예술축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입상했다. 하지만 “여러 대회를 나가면서도 때로는 자만하고 긴장의 끈을 스스로 놓아 안 좋은 성과도 있었어요”라는 그녀는 “인천의 어느 대회에서 한눈에 봐도 참가자들이 취미생들이었는데, 그들을 낮게 보았다가 예선부터 참패”한 아픔도 갖고 있다.

예인들이 모인 민속악단에서 ‘자신’을 돌보고, 더불어 자신을 일으켜 ‘단체’의 발전을 꾀해온 장효선은 지금까지 여러 무대에 섰다. 그중 가장 뜻깊은 무대를 꼽아달라고 하니 작년에 선보였던 ‘왔구나! 왔어! 3인의 배뱅이’를 꼽는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소리 인생에서 새로운 도전의 시간이었어요.” 이번 ‘왔소! 배뱅’은 이것의 연장선이다.

 

돌이 모래가 되는 부단한 노력으로

장효선의 취미는 스킨 스쿠버다. 바다나 소리의 세계나 ‘깊이’ 들어갈수록 새 세계가 보인다는 공통점에 대해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소리 공부를 할 때 가장 포기하고 싶은 부분들이 사실은 저를 유혹하는 가장 매력적인 지점들이에요. 이 깊이를 이겨내고 고비를 넘기면 저 소리들이 저의 것이 되는 것이죠. 장비를 챙겨 바다 깊숙이 들어가면 새로운 생명체들이 일군 놀라운 세계가 보이듯이, 서도소리의 세계도 깊이 들어갈수록 매력적인 것 같아요.”

서도소리를 대표하는 노래들 중 하나인 ‘수심가’의 가사 중 “若使夢魂行有跡(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半成沙(문전석로반성사)”를 가장 좋아한다는 장효선. ‘만약 꿈속 내 영혼이 발자취가 있다면, 그대의 집 앞 돌길들은 반쯤 모래가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뜻이다. 그리움에 젖어 임의 문 앞을 드나들며 밟은 돌이 모래가 되어 있을 만큼, 장효선도 소리의 길을 수없이 오가며 연습해 돌을 가루로 만드는 성실함으로 하루하루를 채워나가고 있다.

이번 공연에 대해 유지숙 예술감독은 “관객들이 ‘우리 음악이 이렇게도 즐거울 수 있구나’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웃음과 해학, 풍자가 넘치는 민속악의 또 다른 매력을 전하는 데 힘쓰겠다”고 한다. 9월 16일(월)부터 18일(수)로 이어질 추석 연휴를 앞둔 공연이다.

송현민(편집장) 사진 국립국악원

 

장효선(1987~) 중앙대에서 수학(학사·석사)했고, 2016년부터 민속악단 단원으로 재직 중이다. 국가무형유산 서도소리 전수자, 평안남도 무형유산 향두계놀이 이수자로 활동 하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기획공연 ‘왔소! 배뱅’

9월 4·5일 오후 7시 30분 국립국악원 우면당

유지숙(예술감독·대본·도창), 임선경(연출), 장효선(박수무당), 김세윤(배뱅이), 박성호(상좌중) 외 민속악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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