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수길,가을날에 듣는 사랑과 이별의 연가곡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21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9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1 지휘자·피아니스트 김대진 2 피아니스트 이경숙 3 바이올리니스트 이경선 4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 5 베이스 연광철 6 비올리스트 최은식 7 작곡가 이영조 8 첼리스트 조영창 9 바리톤 박수길

 

바리톤 박수길

가을날에 듣는 사랑과 이별의 연가곡

 

 

박수길(1941~) 한양대 음대와 매네스 음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한양대 음대 교수 및 학장을 역임하고, 국립오페라단 단장을 지냈다. 1968년 ‘사랑의 묘약’으로 데뷔한 이래, 소극장 오페라 운동에 전념하는 등 한국 오페라의 발전을 위해 노력해 왔다. 현재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및 예울음악무대 이사장이다.

 

순수하고 진실한 사랑의 발견

#베토벤 #그대를 사랑해 #처음 배운 가곡

페터 슈라이어(테너), 노만 쉐틀러(피아노)

감상 포인트 진정한 사랑의 느낌을 깊이 있게 표현한 페터 슈라이어의 연주

 

65년간 성악가로 살아온 음악 인생에서 의미 있는 세 곡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첫 번째로 소개할 곡은 베토벤의 ‘그대를 사랑해(Ich liebe dich)’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노래를 즐겨 부르고 좋아했지만, 성악을 전공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대학 입시를 한 달여 앞둔 시점에야 친구의 권유로 갑작스럽게 성악 입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입시 곡이었던 ‘그대를 사랑해’는 제가 배운 첫 번째 가곡입니다. 저는 1960년에 설립된 한양대 음악대학에 입학해 4년 뒤, 제1회 졸업생이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한양대 음대 학장으로서 맞이한 정년 음악회(2006년)에서 제자들과 함께 ‘그대를 사랑해’를 부르며 정년을 기념하기도 했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그대가 나를 사랑하듯이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로 시작되는 노랫말은 부부의 진정한 사랑을 꽃피우는 시로 엮어진 아름다운 가곡입니다. 베토벤이 33살에 작곡한 이 곡의 가사는 시인 카를 프리드리히 헤로세(1754~1821)의 시입니다. 원제는 ‘부드러운 사랑(Zärtliche Liebe)’이었는데, 베토벤이 곡을 작곡하며 지금의 제목을 붙였다고 합니다. 늘 아름다운 사랑을 갈망했던 베토벤에게 헤로세의 시가 깊은 울림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베토벤의 가곡은 이후 독일 작곡가들의 가곡보다 선율의 흐름에서 기악적 요소가 많이 드러나지만, 그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순수함과 진실함이 제 마음에 진하게 와닿곤 합니다. 많은 성악가가 이 곡을 즐겨 불렀지만, 그중에서도 진정한 사랑의 느낌을 깊이 있게 표현한 테너 페터 슈라이어(1935~2019)의 ‘그대를 사랑해’를 권합니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마음

#슈베르트 #겨울 나그네 #첫 독창회의 추억이 담긴 곡

게르하르트 후슈(바리톤), 한스 우도 뮐러(피아노)

감상 포인트 겨울 나그네의 마음을 담담히 노래하는 게르하르트 후슈의 음성

 

두 번째 노래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Winterreise)’입니다. 바리톤 게르하르트 후슈(1901~1984)는 1962년 내한 공연에서 ‘겨울 나그네’ 전곡을 연주했습니다. 당시 저는 그의 ‘겨울 나그네’를 들으며 깊은 감동에 빠졌습니다. 특히 어떠한 희망도, 인생의 목표도 없이 골짜기를 헤매는 방랑자의 마음으로 연가곡 중 20번 ‘이정표(Der Wegweiser)’를 담담히 노래하는 게르하르트 후슈의 모습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 당시 후슈의 나이는 61세로, 환갑이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며 저 역시 환갑이 되어도 ‘겨울 나그네’를 노래해야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겨울여행(Winterreise)’이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쓴 독일 시인 빌헬름 뮐러(1794~1827)와 슈베르트는 같은 시기 독일의 베를린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각각 활동했습니다. 슈베르트는 친구를 통해 뮐러의 연작시를 접한 뒤, 연가곡을 작곡했습니다. 뮐러는 친구의 여동생이었던 루이제 헨젤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시로 표현했는데, 슈베르트 역시 뮐러의 시에 담긴 사랑과 실연에 동감하며 이 곡을 작곡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대학 졸업 후, 주로 오페라 무대에서 활동했지만, 독일 가곡에 대한 미련이 늘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1972년 첫 독창회에서 10년 전 후슈의 무대를 떠올리며 ‘겨울 나그네’ 전곡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이후에도 전곡 연주를 네 차례(1972년·피아노 이경래/1993년·1994년·피아노 김준차/1999년·피아노 신수정) 더 가졌으며, 그중 두 번(1993년, 1994년)은 제가 직접 만든 우리말 가사로 연주하고, 음반도 남겼습니다. 2014년에는 조영방(피아노), 채희철(첼로), 김동진(클라리넷)과 함께 성악과 기악으로 곡을 나누어 전곡을 연주하는 특별한 공연을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겨울 나그네’는 독일 출신의 바리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와 헤르만 프라이(1929 ~1998)가 녹음한 음반 외에도 메조소프라노 크리스타 루트비히(1928~2021)의 연주가 널리 애청되고 있습니다. 저는 1962년 게르하르트 후슈 내한 공연의 감동 때문인지, 지금까지도 후슈의 연주를 즐겨 듣는 편입니다.

 

우리말로 전하는 예술가곡의 아름다움

#슈베르트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우리말로 부르는 슈베르트 가곡

프리츠 분더리히(테너), 후베르트 기젠(피아노)

감상 포인트 슈베르트 내면의 감정이 잘 드러난 아름다운 노랫말의 연가곡

 

세 번째 곡 역시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Die schöne Müllerin)’입니다. 뉴욕 유학 시절,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전곡을 영어 가사로 노래하는 미국 성악가의 공연을 감상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독일 가곡을 우리말로 노래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8년 귀국 후, 2년에 걸쳐 우리말 가사(시)를 만들어 1982년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전곡을 우리말 가사로 노래하는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이 공연을 시작으로 여섯 번의 독창회에서 슈베르트의 가곡 100곡을 직접 지은 우리말 가사로 노래했습니다. 지난해에는 ‘우리말로 부르는 슈베르트 가곡집’ 두 권을 출판(음악춘추사)하기도 했습니다.

슈베르트가 뮐러의 시에서 그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듯, 두 사람의 성격은 퍽 비슷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이들은 좋아하는 여인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는, 여리고 순수한 청년이었던 것 같습니다. 1823년 슈베르트는 친구의 책상 위에서 뮐러의 연작시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를 발견한 뒤 곧바로 작곡에 몰두했고, 그렇게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가 탄생했습니다. 가끔 슈베르트가 이 연시에 등장하는 청년(뮐러)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 상상해 보기도 합니다.

저는 주로 프리츠 분더리히(1930~1966)와 페터 슈라이어의 음반을 즐겨 듣는데, 특히 분더리히의 노래에 많은 매력을 느낍니다. 독일 가곡은 원어로 부르는 것이 원칙이겠지만, 우리의 정서에 잘 어울리는 슈베르트의 가곡을 우리말로 부름으로써 앞으로 더 많은 예술가곡이 불리기를 기대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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