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뻗어나간 한국의 발레 무용수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14일 9:00 오전

SPECIAL ISSUE

 

세계로 뻗어나간 한국의 발레 무용수들

뒤늦게 시작된 한국 발레의 해외 진출 역사와 비하인드 스토리,

국가별 한국 무용수들의 분포 현황, 활동까지 총력 탐구

한국의 발레는 지금 ‘수용’을 넘어 ‘진출’의 역사를 다지고 있다. 국내에 수용된 지 아직 한 세기도 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로 향하는 한국 발레 무용수들의 발걸음이 힘차다. 이번 특집은 해외 진출의 길을 먼저 닦아온 선배 무용수들의 이야기를 모아 이들의 동력에 힘을 싣는다. 현재 이들의 활약이 펼쳐지고 있는 각 국가별 정보도 한 데 모았다.

총괄 허서현 기자


 

01. CHRONOLOGY 한 눈에 보는 진출의 역사

 

한동인

1946 일본 유학파들의 ‘서울발레단’ 창단

1940년대, 일본으로 떠나 러시아 발레를 익힌 한동인·정지수·진수방 등이 있다. 해방 후 이들은 1946년, 서울발레단을 창단하며 발레 공연을 올렸지만 6.25 전쟁이 발발하며 명맥을 잇지 못했다. 한국 발레 역사의 초창기에 등장하는 이들이지만, 한동인과 정지수는 이후의 행적이 북한에서 발견되었다. 진수방은 1960년대 미국으로 떠나 재미 무용가로 활동한다.

1952 임성남, 일본의 핫도리 시마다 발레단 공연

서울발레단의 한동인 문하에서 발레를 배운 그는, 1951년 일본 고등음악학교에 피아노과로 입학했으나, 핫도리 시마다 발레단의 ‘라 실피드’ 공연을 보게 된다. 이후 발레단에 입단, 1953년 도쿄청년발레그룹의 ‘백조의 호수’ 공연에서 지그프리드 왕자 역을 맡기도 했다. 이듬해에 귀국한 임성남은 체계적으로 발레를 배운 유일한 인물로, 국립발레단 창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기록에 따르면 임성남은 1967년 ‘백조의 호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 일 년간 세계 곳곳을 다니며 발레 수업을 받는 혜택을 얻었다.

1967 ‘백조의 호수’ 전막 초연

강수진

1977 전설로 남은 발레 무용수, 이상만

‘전설’로 불리는 이상만(1948~2014)은 서라벌예대 작곡과에 입학 후, 무용과 수업을 듣고 전과, 한양대 무용학과로 편입한다. 1970년 임성남 발레단에 입단했고, 1974~1977년 국립발레단 주역으로 활동했다. 당시 이상만은 영국·독일·미국 등의 5개국에 영상을 보내고, 1977년 미국 일리노이 예술학교에 장학생으로 유학길에 오른다. 학교생활 4개월 만에, 일리노이 발레 예술감독의 눈에 띄어 발레단에서 활동하며 한국 남성 발레 무용수 최초로 외국 발레단 진출인으로 이름을 남긴다. 그는 1985년 한국으로 돌아와 ‘Lee발레단’을 창단했다.

1980 1세대 해외 진출 발레리나들의 등장

1세대 해외 진출 발레리나들의 움직임은 1980년대가 시작되면서부터 감지된다. 김인희·문훈숙·허용순이 1980년 모나코 왕립 발레 학교에 입학했고, 1981년 강수진도 뒤따라 이곳으로 유학을 가게 된다. 한국 무용수들의 해외 발레단 진출은 이처럼 유학 생활을 거친 이들로부터 시작됐다. 모두 선화예고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1982 문훈숙, 워싱턴 발레 입단

유니버설 발레단의 상징적 존재로 현재까지 자리매김하고 있는 문훈숙(현 유니버설 발레단 단장)이 2년간 미국에서의 활동 후 1984년 귀국했다. 문훈숙

1984 허용순, 프랑크푸르트 발레 입단 허용순은 1세대 무용수들 중 가장 다양한 발레단을 거쳤다. 프랑크푸르트 발레 이후 1986년에 취리히 발레, 1988년에 바젤 발레, 1996년 뒤셀도르프 발레에서 활동했다. 뒤셀도르프에서는 발레 마스터이자, 뒤셀도르프 발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후 안무가로 활동 중이다.

제임스 전, 모리스 베자르 발레 입단

미국에서 성장, 줄리아드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한 제임스 전이 1984년 모리스 베자르 발레에 입단한다. 이후 그는 플로리다 발레와 유니버설발레단, 국립발레단을 거쳐 1995년 서울발레시어터를 창단한다.

1985 강수진, 로잔 콩쿠르 한국인 최초 우승

1986 강수진, 슈투트가르트 발레 입단

1980년대 해외 진출 무용수 중, 가장 오랫동안 한 발레단에서 무용수로 활약했다. 입단 후 1994년 솔리스트 승급, 1997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했으며, 2015년까지 주역으로 활동했다.

1994 유니버설발레단 무용수들의 미주 진출

선화예고를 졸업하고, 1986년부터 유니버설발레단의 무용수로 활동 중이던 김혜영이 1994년, 미국 애틀랜타 발레에 입단했다. 1996년 입단해 최연소 주역을 맡았던 강예나는 1998년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 입단해 6년간 활약했다. 1987년 유니버설발레단 단원이었던 이유미 또한 1999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네바다 발레에서 단원으로 활동했다. 캐나다 국립 발레 학교를 졸업한 서동현은 2000년에 캐나다 발레에 입단했으며, 2009년에는 유니버설발레단 단원으로 입단했다.

1995 유지연, 마린스키 발레 한국인 최초 입단

바가노바 발레 학교를 졸업한 유지연이 한국인 최초로 마린스키 발레에 입단한다. 그는 2010년까지 솔리스트로 활약했다. 유지연

1998 김용걸·김지영, 파리 콩쿠르 듀엣 부문 금상

2000 21세기 무용수들의 신호탄

21세기에 들어서자, 한국 발레 무용수들의 해외 진출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1990년대 초반, 러시아와의 교류가 활발해지며 유학을 경험한 학생들이 늘어난 것이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 김용걸·김지영 등 국내에서 활약하던 무용수들이 해외 오디션 도전에 성공하며 사례를 남긴 것 또한 자극이 됐다.

전은선

김용걸, 파리 오페라 발레 입단

2002 김지영, 네덜란드 발레 입단

전은선, 스웨덴 왕립 발레 입단

2003 장유진, 독일 에센 발레 입단

최유희, 아시아인 최초 영국 로열 발레 입단

2004 수석의 자리까지 오르는 이들

2004년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입단한 강효정은 수석의 자리를 차치한 후, 현재 빈 슈타츠오퍼의 수석무용수로 활동하고 있다. 같은 해 스위스 취리히 발레에 입단한 김세연은 네덜란드 발레를 거쳐 2012년 스페인 무용단에서 활동, 수석무용수의 자리까지 오른다. 현재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주역인 서희도 같은 해(2004년)에 수습 무용수로 입단, 2005년 군무, 2010년 솔리스트, 2012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했다. 이윤경, 프랑스 리옹 발레 입단 강효정

2005 한국예술종합학교 졸업생 배출

1996년에 개원한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이 졸업생을 배출하기 시작하면서, 이들의 해외 진출에 대한 주목도도 올라갔다. 이 해에 안효진이 드레스덴 젬퍼 오퍼에 입단했으며, 김수진이 프랑스 보르도 발레, 유서연이 네덜란드 발레, 한상이가 몬테카를로 발레에 입단 기록을 남겼다.

박세은©Paris Opera Ballet

2006 남민지, 스웨덴 왕립 발레 입단

유서연, 네덜란드 발레 입단 최리나, 러시아 브리스 에이프만 발레 입단

2007 박윤수, 함부르크 발레 입단

하은지, 핀란드 발레 입단

2011 K-발레 전성기의 시작

2011년 해외로 진출한 두 명의 발레 무용수, 박세은과 김기민은 최고의 발레단에서 가장 높은 등급까지 승급하며 한국 발레의 자랑이 됐다. 박세은은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김기민은 마린스키 발레에서 주역으로 활약하는 중이다. 2010년부터 현재까지 다수의 젊은 무용수들이 해외로의 진출을 활발히 시도하고 있다. 현재 국가별로 분포되어 있는 한국 무용수들의 현황은 p.138에 자세히 수록돼 있다.

 


 

02. FOCUS 시대별 무용수 이야기

1960s 해외 발레단 진출의 서막을 연 주인공 김혜식

 

스위스 취리히 오페라 발레(1967~1969),

캐나다 레그랑 발레단(1969~1972)

 

서양의 발레가 국내에 유입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였다. 처음에는 서양의 여러 무용이 신문물이라는 명목으로 들어왔고, 지금처럼 공연의 개념과 형식이 또렷하지 않았다. 서양음악의 연주가 끝난 뒤, 유명 인사의 연설이나 강연이 있고, 중간에 무도(舞蹈)나 무용이 발표되었다. ‘근대’를 구성하는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한 자리였고,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신기하게 구경했다.

한국 발레 역사의 시작에 동참하다

그러던 중 한국 최초의 발레 공연으로 기록된 것은 1932년, 서울 YMCA강당에서 있었던 슈하로프의 무대로, ‘발레’라는 또렷한 형식이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공연이었다.

해방 후인 1946년 조선무용예술협회가 창단되었고, 예하에 현대무용부와 발레부가 있었다. 발레부에서 처음 두각을 나타낸 이는 한동인(1922~미상)이었다. 그는 1949년 서울발레단을 창단했다. 그들이 공연한 ‘라 실피드’는 한국 발레사에 한국 무용수들이 직접 출연한 한국 최초의 발레 공연으로 기록된다.

오페라사에서는 ‘춘희’가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 이후 한국 성악가들에 의해 공연된 최초로 기록된다. 1950년 한국전쟁은 예술의 흐름을 단절시켰다. 하지만 전장에서도 선동과 사기 진작, 기록을 위해 예술이 필요했다. 연극과 영화가 선동하고, 음악가들을 흡수한 군악대가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문학과 미술가들이 종군작가로 현장을 기록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이 많았던 무용과 발레는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군대 내에서의 기능을 찾지 못했다. 서울발레단을 이끌던 한동인도 전쟁기에 월북했다.

이러한 상황에 등장한 발레리노 임성남(1929~)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당시 발레 무용수들의 성장 과정은 지금과 차원이 달랐다. 임성남의 경우 그가 본격적으로 발레를 공부하기 시작한 것은 20대 초반이었다. 전주사범학교를 졸업(1947)하고 한동인이 운영하던 발레단에서 활동했지만, 1952년 백성규가 운영하던 발레연구소에 입학했을 때는 이미 그의 나이 23살 때였다. 1951년 3월 니혼고등음악학교 피아노과에 입학한 후, 핫도리 시마다(服部島田) 발레단의 ‘라 실피드’ 공연을 보고 환상적인 장면에 감동하여 1952년 재일동포 백성규가 운영하던 발레연구소에 입학했다.

임성남은 한국 무용사(史)에서 발레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주체이기도 했지만, 해외 발레단 진출의 첫머리를 장식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1953년에 창단된 도쿄청년발레단의 ‘백조의 호수’ 2막 공연에서 주역을 맡았다. 1953년 5월에 귀국한 그는 임성남발레연구소를 열었고, 경기여자대학과 수도여자사범대학 전임강사로 있으면서 서구식 발레 교육을 시도했다.

하지만 당시 발레계의 인적·물적 자원은 충분치 않았다. 대표적인 발레 작품의 전막 공연은 불가능했다. 고전 작품을 올린다 해도 ‘전막’ 아닌 ‘부분’만 가능했다. 일례로 임성남은 1954년 ‘백조의 호수’ 2막을 포함해 ‘목신의 오후’ ‘장미의 정’ 등의 특정 대목만 선보였다. 창작 발레라 할지라도 서구의 작품을 뛰어넘는 우월한 작품이 아니라, 테크닉과 체형이 서구의 고전을 올리기에는 미흡해 이를 메우고자 임시방편으로 안무한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공연들을 선보인 임성남은 1964년 서울예술고등학교 무용과장으로 부임해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했고, 1972년부터 1992년까지 30년 동안 국립발레단의 단장직을 맡았다.

불모지에서 피어난 발레리나의 영광

위와 같은 역사 속에서 1960년대에 스위스 취리히 발레와 1970년대에 캐나다 레그랑 발레에서 활약한 김혜식의 존재는 독보적이었다. 김혜식이 해외 발레단 진출 ‘1세대’이긴 했으나, ‘세대’라고 손쉽게 명명할 수 없는 것도 그녀의 행보와 나란히 보폭을 맞춘 동료나 가까운 선후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 이전에도 일본 무용계로 진출했던 백성규(1919~2013)가 있었지만, 발레의 본토인 유럽으로 진출한 것은 김혜식이 처음이었다.

김혜식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교통부 해운국장 등을 역임한 부친 아래서 성장한 그는 부유한 환경 속에서 공부했다. 유치원 시절부터 무용을 좋아했던 그녀는 이화여자중학교 재학 중 임성남무용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발레를 배웠다.

이화여중 3학년 때 ‘꽃의 왈츠’ 군무의 일원으로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섰고, 이화여고 3학년 때 출연한 ‘백조의 호수’에서는 스승(임성남)의 파트너로 함께 하며 본격적으로 데뷔했다.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대에 입학했지요. 그때는 대학 1·2학년 때 미국으로 유학을 많이들 갔었어요. 그런데 선배 언니들이 모두들 일 년도 못 되서 포기하고 말더군요. 사실 발레라는 게 얼마나 힘들고 신체적 조건으로 볼 때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모두들 경제적으로 체력적으로 감당을 못하더군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에 이화여대에 재학하던 김혜식은 여러 무대에 섰다.

 

영국 로열 발레 스쿨 친구들과 함께 (1966년)

임성남 씨에게 9년간 사사한 김혜식(22) 양은 임성남·발레·단에서도 꽃다운 존재. 아직 이대에서 무용공부를 하고 있지만 무대경험이 상당히 있는 「베테런」. 얼굴도 우아하고 몸도 날씬하여 「백조」를 연상케한다. (…) 여태 음악이 느린 「발레」를 해왔으나 앞으로 「템포」가 빠른 춤을 추고 싶다고. 하루 4시간의 연습을 하고 나면 발이 아플 때도 있으나 무대에만 서면 그런 고통은 금방 가신다고 말하는 것으로 무대에는 상당한 정열이 있는 모양. “결혼요? 춤을 못 추게 될 때 생각할 문제죠” 영국의 전통적이고 점잖은 분위기가 좋아 학교를 마치면 그곳에 갈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동아일보 1964년 4월 16일]

“그때 저는 미국이 아닌 영국의 로열 발레를 생각하게 되었고, 마고트 폰테인의 ‘온딘’을 영화로 보게 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지요. 그래서 대학 다니면서 편지를 쓰고 사진과 추천서 등을 로열 발레 스쿨(The Royal Ballet School)로 보냈어요. 물론 나이가 18~19세로 제한되어 있었지만, 외국인들을 위한 특별 케이스로 뽑혔어요. 근데 막상 가려고 하니 수속은 다 끝났는데도 공무원이셨던 아버지의 월급으로는 어림도 없는 엄청난 돈이 필요했어요.”
이 사실을 알게 된 조동화를 비롯한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공화당 의장이었던 김종필이 5·16 장학생으로 선정하여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다. 김혜식은 1964년 제1회 동아콩쿠르 입상자(금상)여서 동아일보사에서 생활비도 지원받을 수 있었다(동아무용콩쿠르는 3차례 개최(1959~1961)된 신인무용발표회를 모태로 1967년에 동아무용콩쿠르로 개칭했다).
영국과 스위스, 그리고 캐나다로
1960년대에 해외 진출은 유학이든 현지 예술단 취업이든 국내는 물론 국외에서도 승인이 까다로웠다. 1988년 국내여행자유화가 허용된 이후 지금은 국내외 입·출국이 자유롭지만, 당시에는 국가가 통제하고 있었다. 유학을 위해서도 국가가 지정한 ‘자격’이 필요했다. 일례로 문교부에서는 유학생들을 위한 검증 시험이 있었다. 국사, 영어 등을 시험쳤고, 합격자 발표를 중앙청 벽보에 붙일 때였다. 당시 동아무용콩쿠르 우승자라는 징표는 언론사의 문화적 명성을 토대로 이러한 과정을 부분적으로 생략하는 역할을 했다. 전국의 음악대학을 갓 졸업한 대학생들이 출연하는 조선일보 신인음악회도 이러한 역할을 했다.
발레 전공생들의 유학과 진출의 대상지도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발레의 왕국이라 불리는 곳은 러시아다. 하지만 1960년대에 러시아는 ‘철의 장막’이라 불리며 서방세계와 차단된 곳이었다. 이러한 러시아가 봉쇄를 풀고 한국 예술계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1988년 서울올림픽으로 인해 볼쇼이 발레가 서울을 찾으면서부터였다. 따라서 그전까지 발레에 재능이 있었어도 러시아에서의 교육이나 활동은 그 누구도 불가능했다.
1966년과 1967년에 영국 로열 발레 스쿨에서 수학한 김혜식은 1967년 스위스 취리히 오페라 발레에 드미 솔리스트로 입단했다. “로열 발레에는 매년 여름에 단원 보충을 위해 세계 각국에서 감독들이 방문하곤 하는데, 그때 취리히 발레단장이 저에게 스위스로 오라는 제안을 했어요.” 김혜식이 취리히 발레 입단 전에 국내 언론으로 보내온 로열 발레에서의 수업기와 취리히 발레 입단기를 통해 그의 시간을 엿볼 수 있다.

외국에서 무용수업을 한다는 것은 여간한 인내와 노력 없이는 어렵다는 것을 그동안의 체험으로 느끼었다. 실기가 과목의 전부를 차지하는 무용 분야는 학과 시간의 일거일동(一擧一動)이 평가의 대상이 되고, 협력보다는 경쟁이 앞서는 긴장과 초조의 연속이었다. 세계 각국에서 유능한 학생들이 모여 들기 때문에 그들의 능력을 측정할 길 없어 불안스러웠으나 첫 시간에 보인 나의 실기가 지도교수의 눈에 들어 짤막한 찬사를 받게 되면서부터 무한한 격려가 된 것은 잊을 수 없는 일이다. 그후 1년간 수업을 계속하다가 학과정이 끝나기 한달 전에 단원 1명을 선출차 「로열·발레·스쿨」을 방문하게 된 「베리오소프」 씨에게 발탁되어 「줄리히·오페라·발레」단(團)의 멤버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베리오소프」 씨는 현 「로얄·발레」단(團)의 프리마 발레리나인 「스베틀라나·베리오소바」의 부친이며 무용계에서는 이름있는 디렉터이다. (…)

「베리오소프」 씨가 3백 여명의 학생들의 학과 실기를 보고난 뒤 나를 지명하고 결국 가입계약서에 서명을 했을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 기쁨을 누를 길이 없었으며 앞으로는 세계무대에서 한국의 이름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줄리히 발레단 입단기’ 동아일보 1967년 8월 5일]

「베리오소프」 감독은 이 자리에서 김(金) 양이 「백조의 호수」 3막 중 32번 「훼데」가 들어 있는 「바리아숑」을 완벽하게 해내는 것을 보고 감탄(당시 ‘훼데’로 표기된 ‘푸에테’는 발끝으로 몸을 지탱한 채 다른쪽 다리로 말채찍을 휘두르는 32회전을 하는 동작이다), 즉석에서 입단을 교섭해왔다고 한다. (‘「취리히발레단」에 진출-김혜식양 한국인으로는 처음’ [경향신문 1967년 7월 31일]

1967년부터 1969년까지 취리히 발레단에서 활약한 김혜식은 미국의 발레단으로 이적을 준비했다. 김혜식의 동생과 모친이 미국에 거주하고 있었다. 가족의 영향도 있지만, 세계발레사에서 미국은 신흥 종주국으로 부상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권인 구소련에서 활동하던 무용수들이 미국을 비롯해 서유럽 등지로 자유를 찾아 망명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1970년 서유럽으로 망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의 꽃을 피운 나탈리아 마카로바(1940~), 구소련 키로프발레의 스타였지만 미국으로 망명한 미하일 바리쉬니코프(1948~) 등이 미국에 정착하며 러시아 발레의 메소드를 전하며 미국의 발레계를 들어올렸다.

취리히 발레단장은 김혜식을 위해 추천서까지 직접 작성해주었다. 하지만 “발레 부흥기를 맞은 뉴욕으로 갔는데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에는 영주권 등 법적 절차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1969년에 캐나다 레그랑 발레의 솔리스트로 입단한 김혜식은 1972년까지 재직했다. 이후 1975년부터 1992년까지 미국 캘리포니아 프레즈노 주립대 발레 주임교수로, 1993~1995년 국립발레단장, 1996~200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장을 역임했다.

(※인터뷰와 사진 자료는 문애령과의 인터뷰,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구술채록 자료, 박용구 ‘한반도 르네상스’, 동아일보에서 인용)

송현민 편집장

 

 

1970s 해외 진출의 토양을 닦다 최태지

 

일본 가이타니 발레단(1968~1980)

 

(왼쪽부터) 국립발레단 시절 이원국, 김지영, 최태지, 김주원, 김용걸

재일동포인 최태지는 일찍이 1960년대 일본의 발레 교육을 받고 자랐다. 백성규의 추천으로 일본 문화청 장학생이 되어 해외에 나갈 기회도 얻었으나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소됐다. 그래도 “프랑스에 가보라”는 백성규의 권유로, 프랑스에 나가 1년간 스튜디오 생활을 하기도 했다. 한국보다 발레 문화가 선진화 되어 있던 일본에서 보고 듣고 자란 것, 그리고 프랑스에서 전설적인 무용수들의 움직임을 실제로 마주했던 것, 최태지는 “작품을 본 경험이 있다는 것 덕분에, 국립발레단 초기에 많은 부분을 전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고 회상한다. 그는 1983년 국립발레단 무용수로 재직하기 시작해, 제3대 단장을 역임(1996~2001)하며 한국 무용수들이 본격 해외로 진출을 시작하게 된 변화의 시기도 함께 겪었다. 그는 “지금 해외에 나가 있는 우리 무용수들이 다 국내 발레계의 자산이 될 것”이라며, “많은 작품을 경험하고 있는 지금의 젊은 무용수들이 좋은 스승으로 남아 역사를 이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1960년대, 일본의 교육 환경은 어떠했나?

인구가 10만 명이 되지 않는 작은 소도시였음에도, 발레를 배울 수 있는 좋은 학원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도쿄에 계신 큰 선생님(가이타니)께 배우며 이미 전막 발레 공연에도 참여했다. 당시 일본은 고도 성장기였고, 세계적인 발레단의 공연을 일본에서 모두 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꿈을 꾸고 살 수 있는 환경이었다.

당시 일본 발레는 러시아 발레를 수용하는 것도 원활했나?

백성규 선생이나 임성남 선생 모두 이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1988년 이전에는 해외와의 교류가 무척 어려웠지만, 일본은 이미 많이 개방된 상태였다. 그럼에도 일본으로 발레를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고, 임성남 선생이 초기에 이를 경험한 몇 안 되는 분으로 한국에서 많은 노력을 하셨던 기억이 난다.

당시 일본 문화청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외국에 갈 기회를 얻었지만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취소되어 가지 못했다고.

장학생으로는 가지 못했지만, 백성규 선생께서 “그래도 프랑스에 가보라”고 권유를 해주셔서 프랑스의 스튜디오에서 1년 정도 생활했다. 발레단에 입단할 기회도 있었지만, 당시 동양 문화권에서 오래 살았다보니 프랑스의 개방적 생활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전설적인 안무가들과 무용수들을 직접 본 것은 좋았지만, 결국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고, 그 이후 백성규 선생의 권유로 한국으로 오게 됐다.

당시 한국 발레의 상황에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일본은 대학을 진학하지 않고, 일찍 발레단에 진출하고 있었다. 1970년에 국제 콩쿠르를 섭렵하고, 1980~90년대에는 이미 해외 발레단에 진출한 일본인들이 많았다. 그런데 당시 한국은 발레 교육도 잘 이뤄지지 못할 때였고, 한국예술종합학교도 생기기 전이었다. 1988년에 볼쇼이 발레가 처음 한국을 찾았으니, 발레 공연을 볼 기회도 거의 없다시피 한 것이다.

이제는 한국도 일찍부터 발레단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다.

얼마 전에 선화예고가 40주년을 맞이했고, 한국예술종합학교도 30년을 넘어가고 있지 않나. 이런 교육 환경의 발전이 한국의 무용계를 이만큼 이끌어왔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한국이 일본을 앞섰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국내에서 좋은 선생님께 배울 수 있고, 한국 무용수들의 실력을 전 세계에서도 인정한다.

2000년대 초반, 국립발레단 단장 시절 김용걸·김지영 등 해외 발레단에 도전하는 후배 무용수들의 노력도 가까이서 지켜봤겠다.

당시 유학 없이 국내 교육만 거쳤던 김용걸이 해외 발레단 오디션을 받는 것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참 의미있다고 생각했다. 실력이 좋다고 해서 모두가 잘 되는 것도 아니었을 거다. 발레단이 나와 잘 맞는지 스스로 판단도 해야 했고, 잘 맞지 않으면 가방을 메고 또 다른 발레단을 찾아 나설 적극성도 있어야 했을 것이다. 운도 필요했고. 지금 다시 하라고 하면 다들 못한다고 하지 않을까.(웃음) 지금 생각해보면 그 힘든 걸 어떻게 견뎠는지. 그러나 어려우니까 또 더 재밌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많은 발레 무용수들이 해외로 진출한다. 다양한 레퍼토리를 겪고 싶다는 것이 가장 큰 동기인 것 같은데.

다 나가는 상황이 아쉽기도 하다. 오케스트라와 같이 전막 발레를 할 수 있는 국가가 유럽에서도 줄고 있고, 국내 발레단의 상황도 그에 비하면 나쁘지 않은데…. 물론 무용수는 작품을 찾아가는 것이긴 하다. 조금 작은 규모의 발레단이더라도, 자기가 추구하는 작품이 있는지가 중요하다. 자신감 있는 젊은 무용수들은 3년 정도씩 여러 발레단을 경험하기도 하더라.

현재 해외 발레단에 있는, 또한 도전할 후배 무용수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좋은 작품 많이 경험하고, 꼭 한국에 돌아와 주길! 지금 당장은 나가 있는 무용수들이 많은 게 아깝지만, 나중엔 분명 한국 발레계에 대단한 재산이 될 것이다. 위대한 안무가들의 초연작을 직접 경험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러시아 발레가 아직도 무너지지 않고 있는 이유는, 위대한 무용수들이 발레단에 남아 ‘작품을 코치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배우는 기본기 교육도 중요하지만, 작품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는지를 가르쳐줄 코치가 필요하다. 지금 해외 발레단에서 활동하는 후배들은 현명한 이들이니, 이 부분을 분명히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지금 경험하고 있는 작품에 대해, 언젠가 스승이 되어 가르치며 한국의 발레계를 발전시킬 것이라고 기대한다.

허서현 기자

 

 

1980s 한국 발레, 세계의 자랑이 되다 강수진

 

슈투트가르트 발레(1986~2016)

 

꽃과 풍선이 가득한 무대 위, ‘오네긴’의 타티아나로 분한 강수진이 양팔로 하트를 그리며 객석을 가득 채운 관객의 환호에 화답한다.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이날 공연은 1986년부터 2016년까지 30년간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무용수로 활약한 강수진의 공식적인 은퇴 무대였다.

슈투트가르트의 프리마 발레리나

한국 무용수들의 해외 무대 진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1980년대 중반부터였다. 1982년, 강수진은 선화예고 재학 중 한국을 찾은 모나코 왕립발레학교 교장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눈에 띄어 모나코로 유학을 떠났다. 김인희·문훈숙·허용순 등과 함께 발레 유학 1세대로 불리는 그녀의 해외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985년, 강수진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졌다. 발레 무용수들의 등용문인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서 동양인 최초로 1위에 입상한 것. 로잔 콩쿠르 우승 후, 세계 어느 발레단의 주역으로도 캐스팅되어 무대에 오를 수 있던 19살의 강수진은 스승인 마리카 베소브라소바의 권유로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최연소 군무(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입단했다.

“슈투트가르트만큼 좋은 발레단이 없다고 생각해서 여기를 택했다. 여기서 보낸 15년간 세상의 모든 안무가들과 모든 작품을 해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많은 무대에 섰다.” [‘객석’ 2001년 9월호]

입단 7년 만에 주역을 따낸 그녀는 1995년 ‘잠자는 숲 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로 시즌 개막 공연 무대에 서는 프리마 발레리나의 자리에 올랐다.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 한국인은커녕 동양인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1990년대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프리마라는 이름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런 건 관객들이 부르는 이름일 뿐 나는 언제나 똑같다. 주어진 역에 최선을 다할 뿐 어느 위치에 있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전막 발레든 소품이든 마찬가지고, 주요 배역이든 군무든 마찬가지다. 무대에서 넘어지거나 실수를 해도 돌이켜 보면 그 무대 역시 최선을 다했다. 그게 진짜 프로의 정신이다.” [‘객석’ 2001년 9월호]

‘프로의 정신’은 그녀의 이름을 다시 한번 ‘최초’에 이르게 했다. 1999년 존 노이마이어가 안무한 ‘카멜리아 레이디’의 마르그리트 역으로 한국인 최초로 브누아 드 라 당스 최고 무용수상을 받으며 세계 정상의 무용수에 등극한 것이다(현재까지 한국인 수상자는 강수진을 비롯해 김주원(2006년·전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2016년·마린스키 발레 수석무용수), 박세은(2019년·파리 오페라 발레 에투알), 강미선(2023년·유니버설발레단 수석무용수)까지 총 5명이다). ‘카멜리아 레이디’는 ‘로미오와 줄리엣’ ‘오네긴’과 함께 지금까지도 강수진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국립발레단의 수장으로

슈투트가르트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은퇴 공연 ‘오네긴’의 커튼콜 ©Stuttgart Ballet

슈투트가르트 발레는 유럽의 어느 발레단보다 안무 레퍼토리의 개런티가 높다. 슈투트가르트 발레를 세계 정상의 수준에 올려놓은 안무가 존 크랑코(1927~1973)의 작품을 단독으로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6년 처음 독일에 가서 2년 동안 너무나 힘들었지만, 떠나지 않고 30년이나 활동할 수 있던 이유 중 하나는 세계 여러 나라의 안무가들이 그곳에 모이기 때문이었다. 글렌 테틀리·한스 판 마넨·이르지 킬리안을 비롯해 미국과 유럽, 러시아 등 곳곳에 있는 안무가들이 슈투트가르트를 찾아왔고, 나는 그곳의 무용수로서 완전히 다른 여러 스타일을 경험했다. 신진 안무가로 와서 경험을 쌓아 세계적인 안무가가 되는 과정을 목격하며 배운 것도 많다.” [‘객석’ 2018년 2월호]

군무부터 차근차근 프리마 발레리나 자리에 오른 그는 “발레단 생활 속에서 얻은 게 많다. 원래 내성적인 성격이었는데 발레를 통해서 마음을 여는 법을 배웠다”며 독일에서의 생활을 돌아봤다. 20여 년간 슈투트가르트 발레의 예술감독(1976~1996)을 지낸 마르시아 하이데(1937~)가 인정한 강수진의 성실함과 그만의 독특한 카리스마는 2014년 국립발레단의 제7대 예술감독 겸 단장으로 발탁되며 빛을 발했다.

“존 크랑코가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남기고 간 정신,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안무가와 무용수들, 그 외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만난 예술가들로부터 배운 것이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이다. (…) 무용수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을 스스로 발견하고,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끄집어내는 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본다. 또한 이 시대에 품는 ‘진심’이 후대에 클래식으로 남을 거라는 믿음으로 꾸준히 창작을 지원하려고 한다.” [‘객석’ 2018년 2월호]

강수진은 2016년 슈투트가르트 발레 은퇴 후, 2017년과 2020년 그리고 지난해까지 네 번째 연임에 성공하며 총 12년간 국립발레단을 이끌게 됐다.

홍예원 기자

 

 

2000s 국내 교육만으로 다져, 세계로! 김용걸

 

파리 오페라 발레(2000~2009)

 

1995년 국립발레단 입단 후, 주역으로 활약한 김용걸은 1997년 모스크바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하고, 이듬해 파리 콩쿠르에서 김지영과 듀엣 부문 금상을 수상하며 무용계의 스포트라이트를 한 몸에 받았다. 많은 이가 해외 유학을 통해 경력을 쌓았던 반면 김용걸은 유학을 거치지 않은 국내파로서 발레 본국에 도전장을 던지고 있었다. 이처럼 화려한 날들이 이어지던 2000년, 그는 돌연 국립발레단에 사표를 냈다. 새 천년에는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고 싶었기 때문. 누구보다 간절했던 27살의 김용걸은 동양인 남성 무용수 최초로 파리 오페라 발레에 발레 군무(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입성했다. 2002년 드미 솔리스트를 거쳐 2005년에는 솔리스트 자리에 올랐다. 2009년 국내에 복귀한 그는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자 안무가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국립발레단의 주역을 맡았던 만큼, 해외 진출에 큰 결심이 필요했을 것 같다.

해외 발레단에서 외국 무용수들과 직접 부딪혀 보고 싶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었다. 2000년이 되자마자 국립발레단 최태지 단장님께 해외로 나가고 싶다고 말씀드렸다. 국립발레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얻었지만, 손에 쥐고 있는 걸 놓지 않고선 새로운 걸 얻을 수 없다는 마음으로 떠났다. 해외 발레단 입단에 실패할지라도 국내에 돌아와 다시 설 곳이 없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다.

파리 오페라 발레 입단 정보를 어떻게 접했나?

당시에는 주로 비디오테이프(VHS)로 외국 영화와 영상들을 접했는데, 그중 하나가 파리 오페라 발레의 ‘호두까기 인형’이었다. 지금은 클릭 한 번이면 어떤 영상이든 다 볼 수 있지만, 그때는 그 테이프가 유일했기에 소중한 보물처럼 느껴졌다. 러시아, 미국 스타일과는 또 다른 프랑스 발레 스타일이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구체적인 입단 과정이 궁금하다.

첫 해외 진출이니만큼 소규모 발레단이 많은 미국으로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때 프랑스에 거주하던 서미숙 선생님이 파리 오페라 발레 견습 단원 오디션을 권했고, 5명을 뽑는 오디션에 덥석 3등으로 합격했다. 정단원 오디션을 위해 견습 단원으로 활동하는 5개월 동안 미친 듯이 연습했다. 그렇게 계약이 만료될 즘, 오디션에 합격해 군무(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입단하게 되었다.

한국인 무용수 최초로 파리 오페라 발레에 입단했다. 당시 발레단의 분위기는 어떠했나?

처음에는 여기가 바로 비디오에서 봤던 ‘호두까기 인형’ 무용실이라는 생각에 그저 신기했다. 주역들도 다들 그대로였다. 지금은 세계 어디서든 한국을 잘 알지만, 당시에는 다들 내가 중국인인 줄 알았다고 하더라. 남한과 북한에 대한 개념도 전혀 없었다. 예컨대 왜 너희 대통령은 자꾸 미사일을 쏘냐며 내게 묻기도 했다.(웃음)

파리에서 9년의 시간을 보냈다. 해외 발레단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나?

언어가 제일 힘들었다. 새로운 안무가와 작업할 때 서툰 프랑스어 때문에 캐스팅에서 밀리는 일도 있었다. 언어에 익숙해지기까지 3~5년이 걸렸다. 프랑스어가 편해진 기간과 새로운 발레 스타일에 적응하게 된 기간이 비슷했던 것 같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경험한 다양한 레퍼토리들이 현재 안무가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궁금하다.

루돌프 누레예프(1938~1993)의 수만 가지 동작, 피나 바우슈(1940~2009)의 연극적인 요소, 이르지 킬리안(1947~)의 작품 철학, 그리고 윌리엄 포사이스(1949~)의 경계를 넘어서는 동작 등. 이들은 모두 내가 존경하는 안무가들이다.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안무 스타일이 안무를 구상할 때 종종 섞여 나오곤 한다.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교육자의 길을 걷고 있다. 해외 진출을 목표로 삼는 학생들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학생들에게 목표도 중요하지만, 먼저 춤을 추는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고 한다. 나 역시 승급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해 자책한 적이 있다. 그런데 목표를 버리고, 목적을 생각하니 파리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고, 발레가 보이고, 안무가들의 작품이 보이기 시작했다. 해외 진출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내가 춤을 추는 목적과 이유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 보길 바란다.

홍예원 기자

 

 

국내 최고의 무용수에서 해외로 진출 김지영

 

네덜란드 발레(2002~2009)

 

다양한 레퍼토리를 경험하고 싶다는 춤에 대한 순수한 열망은 김지영을 해외로 이끌었다. 예원학교 재학 중, 바가노바 발레 아카데미에 입학해 졸업했지만 귀국 후, 1997년부터 국립발레단 단원으로 생활 중이었다. 1998년, 김용걸과 함께 파리 콩쿠르에서 듀엣 부문 금상을 받은 후로 직접 미국과 유럽을 돌아다니며 발레단의 문을 함께 두드리기도 했다고. 그렇게 2002년, 김지영은 네덜란드 발레에 입단했다. 2005년에 솔리스트, 2007년에 수석무용수로 승급했고, 2009년까지 활동했다.

네덜란드 발레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접했나?

유럽 발레단에 대한 관심은 1998년, 파리 콩쿠르를 나가면서부터 관심을 가지게 됐다. 그때부터 여러 발레단에 비디오를 보내며 문을 두드렸다. 1999년도에는 국립발레단에 함께 재직하던 김용걸과 문예진흥기금을 받아 한 달 동안 해외 연수를 다니며 오디션을 보기도 했다. 미국과 독일, 프랑스를 다니며 맨 땅에 헤딩하듯 정보를 얻었다.

구체적인 입단의 과정이 궁금하다.

비디오를 제출했는데, 네덜란드 발레에서 오라는 연락을 해왔다. 당시 네덜란드 발레는 오픈 오디션이 없을 때였다. 단원들과 같이 클래스를 하고 있으면, 그 모습을 단장이 와서 보는 형태의 ‘프라이빗 오디션’이었다. 클래스가 끝나고, 단장실로 불려 갔을 때야 그곳의 단장이 로열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 비디오에서 봤던 주역 무용수 웨인 이글링이란 걸 알았다. 다음날 한 번 더 클래스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주일 뒤, 집으로 국제 전화가 걸려왔고 합격 소식을 들었다.

당시 해외 진출이라는 미지에 발을 내딛기 위해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 같다.

네덜란드 발레의 최초 한국인이었다. 내가 ‘프롬 노스 코리아’라고 농담한 걸 단원들이 일 년 넘게 의심 없이 믿었을 만큼,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 자체도 낮았다. 그럼에도 도전한 건 춤에 대한 열망이었던 것 같다. 국립발레단에서 재직할 때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하게 되며 신고전주의에 대한 관심도 커졌다. 당시 외국 발레단은 해외 유학을 거친 한국 무용수가 입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 국내 발레단에 재직하는 무용수가 해외 발레단에 입단하는 것은 특이한 사례였다. 이후로는 그런 도전을 하는 무용수들이 많이 늘어났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겪은 해외 발레단 생활은 어땠나?

가장 좋았던 건 극장 안에 상주하고 있는 단체라는 환경이었다. 인종차별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다양한 국적의 무용수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전막 발레는 물론 현대 작품까지 다양한 작품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7년간의 해외 발레단 생활이 본인에게 남긴 것이 있다면?

입단 3개월 만에 부상을 당해서 긴 슬럼프를 겪었었다. 그렇게 큰 부상도 처음이었고, 해외라는 압박도 심해 정신적으로 타격을 크게 받았다. 힘든 시기였지만, 그만큼 나를 강하게 만들어주었고, 내 몸에 대한 이해도 더 깊어졌다. 어느 안무가가 내게 “네 춤을 바꾸고 싶으면, 환경을 바꿔라”라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맞다는 걸 실감했다. 서양 문화권에서 생활하며 춤에 필요한 정서를 자연스럽게 체득한 시간이었다.

당시 네덜란드 현대 무용에 큰 영향을 미친 한스 판 마넨의 작품 무대에도 다수 올랐다.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에 안무가 킬리안이 영향을 많이 미쳤다면, 한스 판 마넨은 그와 다른 색깔로 네덜란드 발레에 큰 영향을 미쳤다. 네덜란드 사람 중 한스 판 마넨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의 춤은 언뜻 단순한 동작인 듯 보여도 그 속에 안무가의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는 에너지가 담겨있다. 네덜란드 발레 재직 당시, “순서만 외워서는 안된다”며 작품을 만드는 과정을 강조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오는 10월 한국에서 그의 작품 ‘캄머 발레’의 공연 주역으로 무대에 설 예정이다.

그의 춤은 마치 장인이 만든 아주 세련된 가구 같다. 보는 사람은 잘 알아채지 못할 1mm의 차이의 미를 추구하며 만들어지지만, 전체를 놓고 보면 누가 봐도 품격이 느껴지는 것 같달까. 당시에는 음악적으로 이 작품을 이해했다면, 이제는 음악을 물론 안무에 담긴 에너지도 더 많이 이해하며 표현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관객들 또한 무용수들의 표현을 통해 춤 속에 담긴 에너지를 충분히 느낄 수 있길 바란다.(10.9~12/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허서현 기자

 

 

발끝으로 뉴욕의 중심에 서다 서희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2004~)

 

2012년,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이하 ABT)의 최초 동양인 수석무용수가 탄생했다. 서희의 이름이 올랐을 때, 동료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외부 무용수의 입단이 아닌, ABT에서 성장한 무용수의 성장였기 때문이다. 미국 발레의 자존심, ABT에서 그는 주역으로 우뚝 서 있다.

선화예중을 거쳐 미국으로

다소 늦은 나이인 열두 살에 발레를 시작한 서희는 선화예중·고 주최 콩쿠르의 장려상 수상을 계기로 선화예중에 입학한다. 당시 유니버설발레단이 키로프 발레 아카데미와 밀접한 교류를 맺고 있었고, 오디션을 통해 유학길에 올랐다.

“어렸을 때부터, 워싱턴 D.C.에서 학교에 다녔습니다. ABT가 케네디 센터에 공연을 오면 보러 가곤 했죠. 유명한 무용수도 많았고, 규모도 큰 발레단이었기 때문에 발레를 배우는 학생으로서는 당연히 알고 있는 단체였습니다.”

2003년, 서희는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YAGP)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전 세계의 9~19세의 무용수가 모여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같은 해 스위스 로잔 콩쿠르 파이널에서는 네 번째로 이름을 불리며 한 걸음 더 성장했다. 로잔 콩쿠르 입상으로 슈투트가르트 발레 산하의 존 크랑코 스쿨에서 일 년간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리고 서희는 ABT 스튜디오 컴퍼니의 입단 제의를 수락했다.

“YAGP와 로잔 콩쿠르에서 모두 입상을 한 후로, 여러 발레단에서 이미 컨택을 받은 상태였어요. 부모님께서 학교를 우선 졸업하길 바라셨기에 이를 따랐고, 발레단에는 일 년 후에 입단하게 되었습니다.”

ABT는 단원 선발을 위한 정규 오디션이 없다. 콩쿠르나 다른 발레단에서의 활동을 보다 입단 기회를 제공하는 식이다. 그렇게 2004년 스튜디오 컴퍼니의 수습 무용수로 출발한 서희는 이듬해 군무(코르 드 발레)로 정식 입단한다. 2009년에는 군무 단원으로는 이례적으로 ‘로미오와 줄리엣’의 주역으로 발탁되며 실력을 입증했다. 2010년 솔리스트로 임명됐고, 2012년 그는 예술감독 케빈 매켄지로부터 수석무용수의 자격을 인정받았다. 그해, 서희는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올해의 무용수였다.

“학교에 다니면서도 발레단에 들어가고 싶다는 열망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발레단에 입단하고 훌륭한 무용수와 예술가들을 직접 경험하고 나니, 저한테 딱 맞는 신발을 드디어 찾은 느낌이 들었죠. 어쩌면 입단 후에야 평생, 이 일을 하겠다는 결심이 선 것 같아요.”

자유로운 미국 발레의 세계를 공유하다

ABT는 클래식과 모던 발레를 아우르는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발레단이 정식으로 창단된 것은 1940년. 이후 1980년 새 예술감독으로 임명된 미하일 바리시니코프가 고전 작품들로 대중성을 확보했고, 1992년 ABT의 수석무용수 출신 케빈 매켄지가 이 발레단의 저력을 세계로 확장했다. 그리고 서희가 ABT에 재직 중이던 2006년, 발레단은 그 공을 인정받아 미국연방의회로부터 미국의 국립 발레단으로서의 칭호를 얻었다. 현재는 수석무용수 출신 수전 재프가 2022년부터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ABT 소속 무용수들은 각자의 개성이 뚜렷하고 의욕이 넘칩니다. 상상을 제한하는 한계도 없죠. 예술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만큼 새롭게 생각하는지, 또한 그것을 얼마만큼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지에 따라 평가받는 직업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예술은 머리에서 시작해 몸으로 표현되기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자신의 미래를 주체적으로 계획할 수 있다는 점에서 ABT는 제게 완벽한 울타리입니다.” [‘객석’ 2016년 8월호]

해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서희는 재능 있는 한국 무용수들을 위한 행보에도 적극적이다. 2011년, 사단법인 서희를 창립한 것. 그는 이를 통해 자신의 국제 행보에 발돋움하게 됐던 YAGP의 한국 예선 유치를 추진했다. 미국을 제외하면 이 대회의 예선이 열리는 국가는 한국을 비롯해 브라질·호주(3개 지역)·프랑스 등이 있다.

“제가 지닌 네트워크를 활용해 세계의 발레단 및 발레 학교에 한국 학생들이 많이 진출하면 좋겠습니다. 실제로 발레단에 입단했을 때 자립성이 부족한 친구들이 좀 더 잘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도 주고 싶어요.(…)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보고 들은 아름다운 것들을 제가 나고 자란 한국에서도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습니다.” [‘객석’ 2016년 8월호]

허서현 기자

 

 

2010s 해외 발레단 입단 후, 더 큰 꿈 좇아 이적 이상은

 

드레스덴 젬퍼 오퍼(2010~2023),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2023~)

 

김용걸과 김지영 이후 국립발레단에서 해외 발레단으로 이적하는 경우도 있지만, 해외 발레단 ‘입단’ 이후 또 다른 꿈을 찾아 해외에서 ‘이적’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2004년에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입단한 강효정이 빈 국립 발레로 이적(2021년)한 소식이 국내에 들려온 지 얼마되지 않았을 때, 드레스덴 젬퍼 오퍼 이상은의 이적 소식도 들려왔다. 과거에 입단을 통해 후배들 진출의 터를 다진 무용수들은 이제 ‘이적’을 통해 해외 발레단 진출 역사에 새로운 장을 쓰고 있다.

발레를 배우기 시작한 1990년대는, 국내도 교육 환경이 나쁘지 않았을 것 같다.

동네 스포츠센터에서 수영을 배우다가 발레 스튜디오를 발견하고 취미로 시작했다. 유니버설 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보고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해, 유니버설 발레 아카데미에 다녔고 자연스럽게 선화예중·고를 졸업하며 유니버설 발레단에 입단했다. 중간에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아 그만둘 위기도 있었는데, 최민화 선생님께서 재능을 눈여겨봐 주셔서 장학생으로 예중 입시 준비를 할 수 있었다.

해외 발레단 입단 전, 해외 발레에 대한 경험이 있었나?

2004년에 스위스 로잔 콩쿠르에 나가면서 해외 발레단 입단에 대한 꿈이 생겼던 것 같다. 다른 나라 무용수들을 보면서 내 실력을 나름대로 판단해보는 기회도 되었고. 특히 로잔 콩쿠르 때는 외국에서도 명성이 높은 지도자에게 직접 코칭을 받을 수 있었다. 2003년에 서희, 앞서 2002년에는 강효정 선배가 로잔 콩쿠르 수상을 했었다.

드레스덴 젬퍼 오퍼 발레(이하 드레스덴 발레)에 대한 정보는 어떻게 알게 되었고, 어떤 과정을 거쳐 입단했나?

2008년 유니버설 발레단에서 ‘인더 미들 썸왓 엘리베이티드’(윌리엄 포사이스 안무)라는 작품을 할 때, 작품을 세팅하러 온 로라 그레이엄이 드레스덴 발레의 마스터였다. 내 영상 DVD를 로런 그레이엄을 통해 전했고, 개인 오디션 초청을 받았다. 단원들과 함께 클래스를 했고, 고전 발레와 컨템퍼러리 발레 작품 하나씩을 리허설 형식으로 선보였다. 발레단 측이 리허설을 통해 단장님의 지시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드레스덴 발레 입단 후의 생활은 어땠나.

2010년에 군무로 입단, 이후 매년 코리페, 드미 솔리스트, 퍼스트 솔리스트로 승급했다. 2016년에 주역으로 승급했고, 큰 키임에도 배역에 맞으면 캐스팅 될 수 있었다. 안무가들의 창작 작품에 참여했던 경험은 특히 기억에 남는다. 마치 기성복이 아닌, 나만을 위해 맞춰진 옷을 입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후 해외로 진출하는 더 많은 후배 한국인 단원들을 보면서 세월의 변화를 실감하기도 했을 것 같다.

입단 후 10년 동안 발레단에 한국인은 나뿐이었는데, 이후 정서현(현 드레스덴 발레), 심지은(현 빈 슈타츠오퍼) 두 한국 무용수가 들어왔다. 영어도 잘했고, 배우는 속도가 빨라 발레단에 금방 적응하더라. 후배들에게는 많이 경험해보라고 꼭 얘기해준다. 유럽에서 가장 좋았던 것은 다양한 문화를 접한 것이었다. 예술 뿐 아니라 여러 이슈에 대해 소통하며 많은 감정과 생각을 경험했다.

지난해 9월,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로 이적했다.

드레스덴 생활은 만족스러웠지만, 오페라 하우스에 소속되어 있어 발레 공연 횟수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적 후 발레단 정기 공연뿐 아니라, 갈라 공연에도 출연하며 더 많은 기회를 얻고 있다. 특히 런던은 문화의 집결지라, 크리스탈 파이트의 어셈블리홀, 로열 발레, 탄츠테아터 부퍼탈 등의 무용 공연뿐 아니라 콘서트, 전시회, 작은 클럽에서 열리는 스탠딩 코미디까지 다양한 공연을 볼 수 있다.

이적 후 접하게 되는 작품의 변화도 실감하는가?

영국에는 안무를 맡은 전문가(Choreologist)가 따로 있고, 그 이후 발레 마스터들이 리허설을 진행한다. 지난 시즌에는 전체 출연자가 100명이 넘는 드렉 딘의 ‘백조의 호수’를 대규모 프로덕션으로 로열 앨버트홀에서 공연했다. 올해 시즌 첫 공연은 새들러스 웰스에서 아크람 칸의 ‘지젤’ 마르타 역이다. 예술감독인 에런 왓킨과 안무가 에리얼 스미스가 공동으로 작업한 새로운 ‘호두까기 인형’도 준비 중이다.

이제는 누구든 다양한 해외 발레단의 정보를 습득하고, 접근할 수 있다. 앞으로 이적을 통해 성장하는 무용수들의 시대가 올까?

이적의 이유는 다양한 레퍼토리와 안무가들과의 신작 작업 경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요즘은 한국에도 해외 라이선스 작품들을 많이 들여오고, 서울시발레단의 창단으로 신작을 올릴 기회도 생긴 것 같다. 유럽의 각 극장이 개성 있는 작품을 많이 올리지만, 때로는 비슷한 작품이 겹칠 때도 있다. 물론 이적을 통해 새로운 환경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 무용과 문화에 대한 시각이 넓어지고 성장하는 것을 느낀다. 다만 이제는 이적의 이유가 단순히 무용에 국한되기보다는, 개인의 문화적 욕구가 더 반영되는 시대인 것 같다.

허서현 기자

 


 

03. DISTRIBUTION MAP 국가별 분포도

 

한국 발레 무용수의 해외 진출 현황

이번 특집을 위해 본지 편집부가 조사한 결과 약 120여 개의 발레단 중, 38개의 발레단에 한국인 단원이 진출해있었다(※2024년 9월 14일, 발레단 공식 홈페이지 게재 기준). 가장 많은 발레단을 보유한 대륙은 유럽과 미국인데, 진출률이 높다기보다는 해당 국가 내에 발레단의 수가 많기에 한국 단원을 수용할 여지도 높다. 본지에서 기준으로 삼은 발레단은 주로 국립·왕립·주립(시립)에 해당한다.

(민간 발레단의 경우, 시즌 오픈으로 전막 발레 공연 횟수가 공개될 경우를 포함한다)

 

독일 한국 사람들이 사랑하는 진출지

독일 발레의 발전 양상은 오페라와 유사하다. 대부분의 주립 극장에 발레단이 상주하고 있어 극장마다 작품의 개성도 뚜렷하다. 때문에 안무가가 발레단의 예술감독으로 있으며, 자신의 창작 작품을 지속적으로 발표할 수 있다는 특징도 있다.

현재 독일 발레단 중 가장 많은 한국인 단원이 활동 중인 곳은 라이프치히 발레다. 라이프치히 극장의 유래는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라이프치히 발레의 전통도 오래되었으나, 1960년 현재의 오페라 하우스 건물이 들어서며 본격적인 전막 발레들을 선보였다. 1991년, 라이프치히 발레에 안무가 우베 숄츠(1958~2004)가 부임하며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그는 신고전주의 안무 작품을 남겼으며, 라이프치히 발레는 현재 새로운 창작 발레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이윤경·최수정이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며, 2013년 입단한 조안나도 군무 단원으로 함께 하고 있다.

독일의 발레단 중 한국에 가장 잘 알려진 곳 중 하나는 단연 슈투트가르트 발레다. 1986년 강수진(현 국립발레단 단장)이 이곳에 한국인으로서 처음 입단했고, 1997년부터 수석무용수로 활동하며 국내 발레계에 많은 기록을 남겼다. 현재는 빈 국립 발레로 이적한 강효정도 2004년부터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입단, 2011년부터 수석무용수로 10년간 활약했다. 안무가 존 크랑코(1927~1973)에 의해 성장하고, 현재도 그의 작품을 유산으로 삼고 있는 슈투트가르트 발레에는 현재 2018년에 입단한 남민지(군무)가 단원으로 유일한 한국인으로 활동 중이다.

뒤셀도르프에 위치한 도이치 오퍼 암 라인의 상주 단체, 발레 암 라인에는 2020년부터 서덕인이 활동하고 있다. 발레 암 라인은 단원 등급이 없는 것이 특징. 서덕인은 포르투갈 발레·바이에른 발레를 거친 이력이 있다.

그 외에도 드레스덴 젬퍼 오퍼 극장에 2022년부터 정서현이 군무로, 데트몰트 발레에는 2023년부터 안소영이 활동 중이다.

그간 한국인 단원이 있었던 함부르크 발레·비스바덴 헤센 발레·베를린 발레를 비롯해 독일에는 바이에른·뉘른베르크·다름슈타트 등 다수의 주립 극장에 발레단이 있으나, 현재 한국인이 활동하고 있는 곳은 없다.

허서현 기자

 

노르웨이 소수정예의 발레단이 가진 힘

노르웨이 국립 발레는 1957년 설립 이후, 2008년 문을 연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에 터를 잡았다. 남부 해안가에 위치한 오슬로 오페라 하우스는 피오르와 빙하를 형상화한 공연장으로, 체력 단련 시설 및 수제 토슈즈와 분장 도구 제공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시설과 복지 환경을 자랑한다. 이르지 킬리안(1947~), 크리스토퍼 휠든(1973~) 등 유럽에서 활동하는 유수 안무가들이 직접 리허설을 지도하는 등 신진 무용수들의 성장에도 힘쓰는 편이다.

이 발레단에서 14년 동안 안무가·무용수로 활동한 잉리 로렌첸(1972~)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으며, 고전발레부터 네오클래식, 컨템퍼러리 발레까지 다양한 레퍼토리로 시즌을 채운다. 지난해까지 유니버설발레단의 드미 솔리스트로 활약했던 권세현(1989~)이 한국인 최초로 노르웨이 국립 발레에 입단했으며, 강수진(국립발레단 단장)·문훈숙(유니버설발레단 단장)·김인희(서울발레시어터 단장) 등 발레 유학 1세대들이 거쳐 간 모나코 왕립발레학교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해 화제를 모았던 고영서가 2018년 이 발레단의 종신 단원으로 입단해 활동 중이다.

홍예원 기자

 

영국 한국 발레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곳

영국은 프랑스, 러시아 등 전통적인 발레 강국들에 비해 역사는 길지 않지만, 짧은 기간 내에 그 문화를 꽃피우며 지금까지 세계 발레의 한 축을 지탱하고 있다. 20세기 이후 영국 왕립 발레를 대표하는 로열 발레와 버밍엄 로열 발레, 런던의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와 런던시티발레, 그리고 영국 중북부의 노던 발레와 스코티시 발레 등이 각각의 특색으로 영국 발레계를 이끌고 있다.

케빈 오헤어(1965~)가 이끄는 로열 발레는 프레더릭 애슈턴(1904 ~1988), 케네스 맥밀런(1932~1989)의 전막 발레로 이어지는 정제된 스타일을 추구한다. 한국인 단원으로는 2003년 입단한 최유희(퍼스트 솔리스트), 2020년 입단한 김보민(퍼스트 아티스트)·박한나(아티스트) 등이 있으며, 2017년 한국인 남성 무용수 최초로 입단한 전준혁이 2024/25시즌부터 퍼스트 솔리스트로 무대에 오른다.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는 2012년부터 발레단 개혁에 앞장서 온 타마라 로호(1974~)의 뒤를 이어 2023년부터 애런 왓킨(1969~)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드레스덴 젬퍼 오퍼 발레단장으로 있던 왓킨을 따라 이적한 이상은(수석무용수)을 포함해 최정아(2006년 입단, 퍼스트 아티스트), 강민주(2022년 입단, 주니어 솔리스트) 등이 활약 중이다. 이 외에도 1978년 설립 이후, 올해 30년 만에 다시 문을 연 런던시티발레의 김지민(2024년 입단) 등 여러 무용수들이 영국 무대에서 한국 발레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홍예원 기자

 

체코 오랜 전통을 함께 만드는 한국 무용수

중부 유럽에 위치한 체코는 발레의 맥을 잇는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를 키운 중요한 예술감독이자, ‘20세기 최고의 안무가’로 일컬어지는 이르지 킬리안도 체코 출신이다.

수도 프라하에 있는 체코 국립극장에는 1883년부터 체코 국립 발레가 상주하고 있다. 고전적 전막 발레는 물론, 체코의 유명 소설가 카프카의 문학에서 영감을 받은 창작 발레 등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선보인다. 16세에 국내 최연소로 전문 단체(유니버설발레단, 드미 솔리스트)에 입단하며 화제를 모았던 김유진(2001~)이 최근 이 발레단의 군무(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입단했다. 한편, 드미 솔리스트까지 올랐던 김윤식은 2020년까지 활동 후 현재 사진작가로 활동 중이다.

이 외에도 체코에는 올로모츠 발레, 오스트라바 발레 등 주요 도시에 위치한 오페라 극장마다 상주하는 다수의 발레 단체가 운영 중이다. 체코 제2의 도시라고 불리는 브르노에는 브르노 국립 발레가 있다. 이곳 역시 1919년부터 이어져온 유서 깊은 발레단으로 특별히 프로코피예프의 발레 ‘로미오와 줄리엣’을 초연했다. 안무가인 마리오 라다코브스키가 2013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2023/24 시즌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물러날 예정. 브르노 국립 발레에는 2020년, 안세현이 군무(코르 드 발레)로 입단, 3년 만에 수석무용수로 빠르게 승급하며 현재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허서현 기자

 

스페인 플라멩코 나라의 발레 문화

스페인은 여러 왕국과 민족이 연합한 역사를 지니고 있어, 지역마다 다양한 문화적 특징이 반영된 독특한 춤 문화가 형성돼 있다. 1978년에 설립된 스페인 국립 발레(BNE)는 스페인의 풍요로운 춤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단체다. 이들은 플라멩코·볼레로·판당고 등 스페인의 전통 무용 레퍼토리를 창작하고 보존해 왔다. 스페인 무용을 널리 알리기 위해 대규모와 실험적인 소규모 공연 등을 선보이며, 스페인 무용의 기준을 세우고 있다. 2019년 루벤 올모가 예술감독을 맡았으며, 윤소정(2019년 입단, 코르 드 발레)이 한국인 최초로 이곳에 입단해 활동 중이다.

스페인 국립무용단(CND)은 스페인 국립 발레와 함께 스페인 무용계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곳이다. 특히 1990년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나초 두아토(1957~)가 20년간 단체를 이끌며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기존의 레퍼토리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창작 작품을 선보이며 스페인 국립무용단을 성장시키는 동시에 단체의 기반을 탄탄하게 다진 것이다. 2024년부터 예술감독에 오른 무리엘 로메로도 독특한 레퍼토리로 특별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박예지(2012년 입단, 솔리스트)가 단원으로 활약 중이며, 현재 안무가로 활동하는 김세연(2012년 입단) 또한 이곳에서 활동한 바 있다.

김강민 기자

 

스웨덴 발레와 현대무용의 조화

1773년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 3세가 창설한 스웨덴 왕립 발레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발레단이다. 단체의 오랜 역사를 증명하듯, 앙투안 부르농빌(1760~1843)·미하일 포킨(1880~1942) 등이 풍부한 레퍼토리를 쌓았고, 20세기에는 앨빈 에일리(1931~1989)·조지 발란신(1904~1983)을 비롯한 안무가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 결과 고전 발레와 현대무용을 모두 아우르는 스웨덴 최대의 무용단으로 성장했다. 현재 니콜라스 르 리셰 예술감독의 지휘 아래, 총 68명의 전속 무용수가 활동하며 단체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전은선(2003년 입단)과 남민지(2007년 입단)가 이곳의 종신 단원으로 활동한 바 있다.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 컴퍼니는 스웨덴 제2의 도시 예테보리를 대표하는 단체다. 본래 고전 발레를 선보이는 예테보리 발레로 시작했으나, 2010년에 단체의 이름을 예테보리 오페라 댄스 컴퍼니로 변경하고, 현대무용단으로 탈바꿈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했다. 대담하고 혁신적인 무대로 현대무용계를 선도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2023년 첫 내한 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20개국 출신의 38명의 무용수로 구성된 특징에 대해 카트린 할 예술감독은 “다국적성은 예테보리 댄스 컴퍼니가 추구하는 다양성에 크게 기여한다”고 설명했다. 김다영(2023년 입단)과 정지완(2024년 입단)이 이곳에서 활약 중이다.

김강민 기자

 

핀란드 빠른 성장, 관객들의 뜨거운 애호

핀란드의 발레 사랑은 각별하다. 헬싱키에 자리한 핀란드 국립 오페라에는 1년 내내 다채로운 발레 작품이 오르고, 이곳을 찾는 발레 애호가들의 발걸음 또한 끊이지 않는다.

핀란드 국립 오페라·발레의 역사는 러시아의 통치하에 놓였던 1870년대의 핀란드 대공국과 1917년 독립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핀란드 최초의 오페라단인 핀란드 국립 오페라는 1911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1922년, 오페라 연출가였던 에드워드 파저의 주도 아래 핀란드 국립 발레가 창단됐다. 발레에 관심이 있었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무용수 조지 게(1893~1962)를 고용하고, 새로운 무용수를 유치하고자 발레 훈련을 제공하는 등 발레단을 빠르게 성장시켰다. 이들의 공연은 1993년 현재의 오페라 극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알렉산더 극장 무대에서 열렸다.

핀란드 국립 발레는 고전 작품과 함께 현대 작품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매년 평균 3회의 초연작을 포함해 다양한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과거에 하은지(2007년 입단, 수석무용수)가 이 발레단의 유일한 한국인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현재는 강혜지(2018년 입단)·김민영(2022년 입단)·김서연(2020년 입단)이 메인 컴퍼니의 무용수로, 강유정이 유스 컴퍼니 소속 단원으로 활동 중이다. 2022년부터 하비에르 토레스가 발레단의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김강민 기자

 

네덜란드 세계적 무용수들과 함께 하는 기회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두 도시, 수도 암스테르담과 행정수도 헤이그. 이 도시들의 공통점은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춤꾼들이 모여든다는 것이다. 헤이그에 모던발레의 선두 주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댄스 시어터(NDT)가 있다면, 암스테르담에는 1961년 설립된 네덜란드 발레가 자리하고 있다.

고전발레부터 모던발레까지 넓은 레퍼토리를 아우르는 네덜란드 발레는 2003년부터 안무가 출신의 테드 브랜드슨(1959~)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특히, 네덜란드 출신의 안무가 한스 판 마넨(1932~)과 루디 반 댄치그(1933~2012)가 60여 년간 상주안무가로 활동하며 네덜란드 발레를 모던발레의 중심지로 일궈놓았다.

네덜란드 발레 스타일이 궁금하다면, 오는 10월 서울시발레단이 선보이는 ‘캄머 발레’(10.9~12/세종문화회관 M씨어터)를 통해 한스 판 마넨의 안무를 직접 만나볼 수 있다. 이번 무대에는 2002년 네덜란드 발레에 입단해 2009년까지 수석무용수로 활약했던 김지영이 특별출연해 기대를 모은다.

2010년대에 들어서 한국 무용수들의 네덜란드 발레 입단 소식이 연달아 들려왔다. 2011년 군무(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입단해 2016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한 최영규부터 박로빈(2022년 입단, 군무), 박상원(2023년 입단, 견습 단원) 등이 활발히 활동 중이며 김세연, 한상이, 권세현 등이 이 발레단을 거쳤다.

홍예원 기자

 

스위스 현대발레의 거장을 품다

발레는 16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러시아로 확산하며 유럽 전역에서 발전했지만, 안타깝게도 스위스는 발레의 중심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이는 중립국으로서 독립성과 자국의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스위스 발레는 20세기에 접어들며 빠르게 성장했다. 세계적인 안무가들이 스위스에 머물며 발레단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스위스의 대표 발레단인 취리히 발레는 취리히 오페라극장을 기반으로 활동하며, 현재 36명의 무용수로 구성돼 있다. 안무가이자 오페라 연출가인 크리스티안 슈푹(1969~)이 2012년부터 11년간 예술감독을 맡아 ‘로미오와 줄리엣’ ‘레퀴엠’ ‘겨울 나그네’ 등을 선보였고, 장르를 넘나드는 표현 형식을 통해 발레의 가능성을 확장했다. 2023/24 시즌부터 안무가 캐시 마스턴이 예술감독으로 부임했으며, 임수정(2017년 입단, 솔로 위드 그룹)이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20세기 발레의 혁명가’로 불리는 무용수 겸 안무가 모리스 베자르(1927~2007)는 1987년 스위스 로잔에 정착해 베자르 발레 로잔(BBL)을 설립했다. 그는 관객에게 무용의 세계를 열어주는 것을 목표로 철학적인 주제와 사회적 이슈를 작품에 담고, 금기에 도전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2007년 이후에도 단체의 명맥은 이어지는 중이다. 새로운 예술감독들이 ‘봄의 제전’ ‘볼레로’ ‘교향곡 9번’ ‘삶을 위한 발레’ 등과 같은 모리스 베자르의 상징적인 안무작을 포함해, 단체의 레퍼토리를 유지·개발하기 때문이다. 2024년 줄리앙 파브로가 예술감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민경(2020년 입단)이 단원으로 무대에 오르고 있다.

김강민 기자

 

프랑스 역사와 전통으로 세계 발레의 표본이 되는 곳

세계의 유명 발레단으로 손꼽는 단체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를 빼놓을 수는 없다. 2021년 6월 박세은이 에투알로 승급한 후, 몇 번의 내한 공연을 통해 발레단 자체의 인지도를 더욱 높인 파리 오페라 발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립 발레이다. ‘태양왕’이라는 이명으로 유명한 루이 14세(1638~1715)가 직접 설립했으며, 세계의 여러 발레 단체가 파리 오페라 발레의 체계를 모델로 삼아 창립되었다. 박세은이 입단했던 2007년 당시에는 그가 유일한 한국인이었지만, 현재는 쉬제로 있는 강호현, 코리페로 있는 윤서후, 군무를 추는 이예은까지 파리 오페라 발레에 소속되어 있다. 현재는 파리 오페라 발레의 에투알로 활동했던 호세 마르티네즈(1969~)가 2022년부터 예술감독으로 단체를 이끌고 있다.

발레의 강국인 만큼 이 밖에도 다양한 발레단을 여러 지역에서 만나 볼 수 있다. 프랑스 남동부에 위치한 리옹 오페라 발레, 남서부에 위치한 보르도 오페라 발레, 그리고 동쪽 국경을 따라 흐르는 라인강에는 라인 오페라 발레가 있다. 다만 파리 오페라 발레만큼 긴 역사를 가진 발레단이 많은 것은 아니다. 이 가운데 오래된 단체로는 1780년에 설립된 보르도 오페라 발레가 있는데, 파리 오페라 발레에서 활약했던 에리크 퀼레레가 2017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 독자적인 레퍼토리를 넓혀가고 있다. 신아현이 2019년에 이 단체에 입단한 후 2021년 솔리스트로 승급해 지금까지 활동하고 있다. 이외의 발레단은 대부분 20세기에 설립됐으며, 한국인 무용수가 있는 단체로는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정연재가 라인 오페라 발레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의정 기자

 

오스트리아 발레단에서도 드러나는 빈 예술의 명성

오스트리아 빈의 첫 발레 공연은 1622년에 열렸다. 황제 페르디난트 2세(1578~1637)의 아내인 엘레오노라 곤차가(1598~1655)가 황실의 축하 행사에서 오페라와 발레 공연에 참석하는 전통을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덕분에 오스트리아는 발레와 오페라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다만 당시에는 귀족 사이에서 새롭게 유행한 것이었기에 전문 예술단이 자리를 잡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으며, 18세기 초가 되어서야 전문 발레단이 설립될 수 있었다.

1920년에 창단된 빈 국립 발레는 오스트리아를 대표하는 발레단이다. 빈 슈타츠오퍼와 빈 폴크스오퍼를 주요 무대로 활동하며 고전 발레부터 현대 작품까지 폭넓은 레퍼토리를 선보이고 있다. 마르틴 슐레퍼가 2020/21 시즌부터 빈 국립 발레의 발레감독·수석 안무가이자 빈 국립 오페라 발레 아카데미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했으며, 2022년 발레 전문지 ‘탄츠’가 빈 국립 발레를 ‘시즌 하이라이트’로 선정하며 그의 활약을 인정했다. 2004년 독일 슈투트가르트 발레에 입단해 명성을 쌓았던 강효정(2021년 입단, 수석무용수)과 지난 2년간 드레스덴 젬퍼 오퍼에서 군무 단원으로 활동한 심지은(2024년 입단, 코르 드 발레)이 이 발레단에 새로 둥지를 틀었다.

김강민 기자

 

덴마크 왕실의 전통을 이어가는 낭만 발레의 요람

1748년 덴마크 왕실에 의해 설립된 로열 덴마크 발레는 1671년 창단한 파리 오페라 발레, 1740년대 설립된 마린스키 발레와 함께 세계에서 세 번째로 오래된 발레단으로 손꼽힌다. 현재는 로열 덴마크 발레 무용수 출신으로, 1980년대 발레단의 간판 무용수로 활약한 니콜라이 휘베(1967~)가 2008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 이끌고 있다.

덴마크 발레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덴마크 발레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귀스트 부르농빌(1805~1879)이다. 부르농빌은 파리 유학 후, 로열 덴마크 발레의 주역무용수이자 안무가, 발레 마스터로 활약했으며, 총 150여 편의 작품을 안무하며 19세기 낭만 발레의 황금기를 장식했다. 그의 대표작은 단연 ‘라 실피드’다. ‘라 실피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낭만 발레로, 지금까지도 로열 덴마크 발레의 주요 레퍼토리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지난 2014년 홍지민이 발레단의 유일한 아시아인 단원으로 입단했으며, 현재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다.

홍예원 기자

 

모나코 한국의 유명 무용수들을 키운 곳

세계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 모나코에는 특별한 역사를 지닌 왕립 발레단이 있다. 1931년, 발레 뤼스를 잇기 위해 ‘발레 뤼스 드 몬테카를로’가 모나코에 자리를 잡았으나 해산했고, 이후 영화 배우 출신의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의 왕비가 되며 모나코 왕립발레학교를 만든다. 한국의 강수진·문훈숙·김인희 등이 공부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후 딸인 캐롤린 공주에 의해 1985년 지금의 몬테카를로 발레가 창단됐다. 몬테카를로 발레는 1993년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를 예술감독으로 임명하며, 그의 창작 작품을 통해 명성을 쌓게 됐다. ‘로미오와 줄리엣’ ‘신데렐라’ 등의 모던 발레 대표작들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몬테카를로 발레 최초 입단 무용수는 윤혜진(2012년)이며, 2016년 코르 드 발레로 입단한 안재용이 이듬해 세컨드 솔리스트로, 2018년 수석무용수로 승급하며 지금까지 발레단의 주역으로 활동 중이다. 올해 9월, 한국예술종합학교 출신의 이수연이 이 발레단에 입단했다는 따끈따끈한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허서현 기자

 

폴란드 니진스키의 영혼이 서려 있는 곳

긴 역사의 대부분을 러시아와 서유럽 등 주변 국가에 의한 침략에 시달린 만큼, 폴란드의 문화에는 이들의 영향이 짙게 묻어난다. 17세기부터 이미 서유럽의 발레를 들여와 공연했다. 20세기 최고의 남성 무용수로 불리는 니진스키(1889~1950)가 폴란드계 러시아인이었다는 사실도 폴란드의 발레 역사에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가 탄생할 당시 폴란드는 1918년 독립 이전이었고, 니진스키는 폴란드어를 잘 구사하지 못했음에도 본인을 폴란드인이라 밝히곤 했다. 그는 생의 후반기에 폴란드 국립 발레를 이끌기도 했으며, 첫 시즌 동안 5개의 신작을 발표하기도 했다.

폴란드 국립 발레는 국왕 스타니스와프 아우구스트 포니아토프스키(1732~1798)가 1765년에 직접 단체를 설립했으며, 지금까지 폴란드의 가장 큰 발레 단체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리옹 오페라 발레, 네덜란드 국립 발레 등에서 활동했던 크시슈토프 파스토르(1956~)가 2009년부터 15년이 넘게 폴란드 국립 발레의 예술감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클래식 레퍼토리와 함께 그의 다양한 신작을 매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2024/25 시즌에도 예술감독의 새로운 안무작인 ‘프로메테우스’ 등을 계획 중이다. 2016년 입단한 정재은이 퍼스트 솔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폴란드 각 주요 도시에도 큰 발레 단체가 자리 잡고 있다. 18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브로츠와브 오페라 발레부터, 1919년에 설립된 포즈난 발레, 1954년 설립된 크라쿠프 오페라 발레 모두 이름있는 폴란드의 발레 명가이다. 이 단체들 모두 클래식 발레와 모던 발레의 레퍼토리를 폭넓게 소화하고 있다.

이의정 기자

 

헝가리 알고 보면 숨겨진 발레 선진국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헝가리 국립 발레는 1884년에 설립되어 올해 140주년을 맞이했다. 1884년 헝가리 국립 오페라 하우스가 문을 열며 함께 시작했으며, 설립과 동시에 유럽에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독특하게도 설립 당시 60명의 단원 중 여성과 남성의 비율은 59:1로 즉, 남성 무용수는 오직 한 명이었다. 당대부터 이탈리아와 오스트리아 영향을 받았으며, 20년대 후반기에는 대부분 서유럽과 미국의 레퍼토리를 공연했다. 그러다 1996년부터 2005년까지 예술감독으로 활동한 안무가 줄러 허런고조 2세(1956~) 이후 헝가리 고유의 레퍼토리를 넓히게 됐다. 현재는 터마시 솔리모시(1971~)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다가오는 시즌에는 줄러 허런고조가 안무한 ‘코펠리아’를 비롯하여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과 같은 전통 레퍼토리가 기다리고 있다. 이 단체의 한국인 무용수로는 2023년 입단하여 솔리스트로 활약 중인 이수빈이 있다.

이의정 기자

 

슬로바키아 정치적 독립과 발레 문화의 독립으로

슬로바키아와 체코는 1993년 평화 분할 독립하였지만, 문화와 경제 부분에서 여전히 긍정적인 교류와 협력을 이어가고 있다. 이로 인해 슬로바키아의 문화에서는 체코의 영향을 다분히 찾을 수 있고, 발레도 예외가 아니다. 1920년 설립된 슬로바키아 국립 발레는 슬로바키아의 가장 큰 발레 단체로, 이 단체의 첫 예술감독은 체코의 무용수인 바츨라프 칼리나였다. 현재는 슬로바키아 국립 발레를 비롯해 빈 국립 발레에서도 활동했던 무용수 니나 폴라코바(1985~)가 2021년 예술감독으로 선임되어 2022년부터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인 무용수로는 국립발레단 출신의 이승용이 2019년 입단하여 솔리스트로 활약하고 있다. 한편 21세기부터는 슬로바키아의 독자적인 예술 자원을 활용한 레퍼토리도 넓혀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슬로바키아 작곡가인 티보르 프레쇼(1918~1987)의 음악을 활용한 신작 ‘벌레가 탄생했다’(2021)가 있으며, 이 작품은 이달에도 재연되는 슬로바키아 국립 발레의 주요 레퍼토리다.

이의정 기자

 

미국 명성 높은 발레단에 포진한 한국 무용수

50개 주로 이루어진 미국에는 주의 3배 수에 달하는 주요 발레 단체가 있다. 150개가 넘는 단체를 모두 살펴볼 수는 없으니,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몇 개의 발레단을 소개한다. 우선 1939년 설립된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를 거점으로 하는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이하 ABT)가 있다. ABT는 민간단체가 많은 북미 땅에서 2006년 ‘국립’의 이름을 얻었으며, 22년 동안 이 단체에서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던 수전 재프(1962~)가 2022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 단체를 이끌고 있다. 이 단체에 소속된 한국인 무용수로는 2005년 입단하여 2012년 ABT 최초의 동양인 수석무용수로 승급된 서희를 필두로, 수석무용수 안주원, 솔리스트 한성우·박선미, 군무의 서윤정이 있다.

한국인이 많이 소속된 단체로 1963년 설립된 보스턴 발레도 빼놓을 수 없다. 뉴잉글랜드 주의 가장 오래된 발레단으로, 견습생이나 주니어 단원을 위한 ‘보스턴 발레Ⅱ’의 단원까지 포함하여 현재는 총 7명의 한국인 무용수(채지영·한서혜·이선우·이상민·김석주·정민서·이수민)가 재직하고 있으며, 그중 2013년에 입단한 채지영과 한서혜는 현재 수석무용수로 활약 중이다. 동부의 캘리포니아로 가면 샌프란시스코 발레가 있으며, 수석무용수인 박원아를 포함해 4명의 한국인 무용수(최지현·이선민·윤서정)가 있다. 남부의 텍사스에는 미국에서 5번째로 큰 발레단인 휴스턴 발레에 3명의 한국인 무용수(조수연·김단비·양채은)가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워싱턴 발레에 2016년 입단한 이은원이 있으며, 한국인 무용수는 없지만 뉴욕 시티 발레, 시카고의 제프리 발레 등이 클래식 발레를 공연하는 주요 단체로 꼽힌다.

이의정 기자

 

러시아 한국 무용수들, 발레 왕국에 뿌리를 내리다

러시아 발레의 발전은 17세기부터 시작됐다. 표트르(1672~1725) 대제가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유럽에서 발레를 도입해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국가적인 성장을 이룬 것이다. 안나 이바노브나(1693~1740) 여제는 1738년 당시 수도였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황실연극학교를 설립해 러시아 발레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어린 무용수들은 러시아 황실발레단의 일원이 됐다. 황실발레단은 키로프 발레로 개칭되었다가, 사회주의가 붕괴한 후 마린스키 발레가 되었다. 현재 마린스키 극장의 총 예술감독은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이며, 발레단의 예술감독은 안드리안 파데예프다. 김기민(2011년 입단, 수석무용수)과 전민철(2025년 입단 예정, 솔리스트)이 한국인 단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마린스키 발레와 함께, 러시아 발레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볼쇼이 발레도 빼놓을 수 없다. 1776년 창단된 페트로프스키 발레가 전신으로, 1825년 볼쇼이 극장을 인수하면서 볼쇼이 발레가 되었다. 1964년 유리 그리고로비치가 예술감독으로 부임하며 기존 작품을 극적으로 재해석하는 등 발레단의 명성을 공고히 했다. 현재 블라디미르 우린이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1996년 배주윤이 한국인으로는 처음 볼쇼이 발레에 입단해, 유일한 한국인 무용수로서 활약했다.

김강민 기자

 

호주 넓은 대륙이 뿜어내는 발레단마다의 다양성

호주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발레단은 서호주 발레다. 1952년에 창단된 이 발레단의 창립자는 발레 뤼스의 무용수 키라 보우슬로프(1914~2001). 그는 퍼스에 서호주 발레를 만들었고, 발레 학교 설립에도 힘쓰며 호주 발레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현재 서호주 발레의 수장은 데이비드 맥알리스터(1963~)로 무용수 출신인 그는, 2001년부터 20년간 호주 발레의 예술 감독을 지낸 베테랑이다. 그는 재직 시기에 존 노이마이어의 ‘니진스키’, 크리스토퍼 휠든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유리 포소호프의 ‘안나 카레리나’와 같은 작품을 들여왔으며, 2015년에는 직접 안무를 맡은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202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호주 발레의 예술감독을 떠난 그는, 현재 서호주 발레의 초빙 예술감독직을 맡고 있다. 김혜진이 2023년에 이 발레단에 입단(코르 드 발레)해 활동 중이다. 서호주 발레단이 호주 서쪽의 대표 발레단이라면, 동쪽에는 멜버른과 브리즈번에 손꼽을 만한 발레단이 있다. 멜버른에는 호주 발레가 있다. 국립 발레의 칭호를 얻은 호주의 대표적인 발레단이다. 현재 호주 발레에 한국인 단원은 없는 상태. 하지만 브리즈번에 있는 주립 발레단, 퀸즈랜드 발레에는 두 명의 한국인 단원이 활동 중이다.

퀸즈랜드 발레는 1960년, 찰스 리스너(1928~1988)에 의해 시작됐다. 처음에는 리스너 발레로 시작했으나, 1962년 현재의 이름으로 바뀌며 호주 최초의 주립 발레단이 되었다. 뉴질랜드 왕립 발레와 공동 제작한 ‘한여름밤의 꿈’, 서호주 발레와 공동 제작한 ‘코펠리아’, 애틀랜타·홍콩 발레와 공동 제작한 ‘코코 샤넬’ 등 새로운 발레 전막 레퍼토리들을 만들어가고 있다. 현재 한국인 단원은 솔리스트 김리나로, 열 살부터 브리즈번에서 살며 퀸즈랜드 무용 학교를 졸업하고 2010년 발레단에 입단했다. 한편, 이지나는 올해부터 퀸즈랜드 발레의 제트 파커 영 아티스트로 활동 중이다. 한편 이지나는 2022년부터 퀸즈랜드 발레 아카데미를 통해 프리프로페셔널 프로그램을 거쳤다. 뉴질랜드에는 1953년 시작되어, 1984년 엘리자베스 여왕 2세로부터 왕립의 칭호를 받은 뉴질랜드 왕립 발레가 있으나, 한국인 단원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허서현 기자

 

중국 격변의 현대사와 국제화로의 발돋움

중국 발레의 역사는 문화대혁명(1966~1976)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9년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당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50년대 북경무도학원과 실험발레단(현 중국국립발레단)을 창설했다. 1964년에는 중국국립발레단이 ‘홍색낭자군(紅色娘子軍)’을, 이듬해 상해무도학원이 ‘백모녀(白毛女)’를 선보이며 서구의 고전발레와 중국 경극의 특색을 결합한 중국 발레극을 탄생시켰다. ‘봉건적 악습 타파’라는 두 작품의 주제는 마오쩌둥이 내세운 혁명 이념에 부합했고, 문화대혁명의 탄압 속에서 모범극(樣板戱)으로 선정되며, 지금까지도 국가대극원 등에서 수차례 공연되고 있다.

한편, 17년간 워싱턴 발레의 예술감독을 역임한 셉티메 웨브레가 이끄는 홍콩 발레는 다채로운 무대 디자인과 의상, 다양한 국적의 단원 구성 등으로 발레단의 새로운 도약을 꾀하고 있다. 다국적의 무용수들로 구성된 만큼, 한국인 무용수들의 활약도 눈에 띈다. 2019년 입단한 김은실은 현재 솔리스트로 활동 중이며, 올해 최자연이 군무(코르 드 발레) 단원으로 입단했다.

홍예원 기자

 

일본 민간 발레단이 일군 튼실한 전통

일본의 발레 문화는 대체로 민간이 주도해 왔다. 1997년 일본 유일의 국립극장인 도쿄 신국립극장 개관과 함께 신국립극장발레단이 설립되었지만, 이를 제외한 발레단은 모두 민간 소속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무용수를 양성하는 발레학교를 갖고 있는데, 유럽의 주요 발레단에 속한 부속 학교의 개념과 달리 발레 전문학원에 가까운 편이다.

신국립극장발레단은 현재 영국 로열 발레의 수석 객원무용수이자, 일본 K-발레단의 수석무용수로 활동했던 요시다 미야코(1965~)가 예술감독을 맡고 있다. 1999년 영국 로열 발레 수석무용수로 활동한 쿠마가와 테츠야(1972~)가 설립한 K-발레단은 연간 약 5편의 전막 발레를 올리며, 일본의 민간 발레단 중 유일하게 방송국(TBS홀딩스)으로부터 공연 제작비를 지원받고 있다. 1968년 설립되어 지난해 창립 55주년을 맞이한 도쿄시티발레에서는 한국인 무용수 김세종(2011년 입단, 수석무용수), 김경록(2023년 입단), 김보연·조민영(2005년 입단) 등이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홍예원 기자

 

 

Book review

발레리나가 되는 길

가빈 라슨 저|오은수 역|23,000원|동글디자인

무용수들에게 커리어의 비결을 물으면 하나같이 ‘연습’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하루에 19시간씩 발레 연습을 했다는 ‘연습벌레’ 강수진의 노력담은 그가 오랜 시간 정상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오리곤 발레 수석무용수 등으로 활약하며 18년 동안 무대에 오른 저자 가빈 라슨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발레 무용수의 삶을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그녀 역시 눈을 뜬 순간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오직 무용과 발레로 가득 채워진 하루를 보냈다.

“발레 무용수는 매일 찾아오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는 초인적인 결단력과 열정이 있어야 하며 강철 같은 몸과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무용수들은 매일매일 그저 뒤처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또 다른 레슨과 리허설을 견디고 공연을 위해 활기를 찾으려고 노력하며 참고 견디는 것이다.”(246쪽)

가빈 라슨은 동료와의 관계부터 레슨이 주는 압박감, 공연이 주는 짜릿한 희열, 실수와 부상으로 좌절하고 안도하는 애증의 시간까지 미국의 여러 발레단을 거치며 겪은 다양한 에피소드를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풀어낸다. 동시에 무용수이자 한 명의 평범한 인간으로서의 자신을 돌아본다.

“지금에 와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니 내가 정말 궁금한 건 무용수로서 나는 누구였나 하는 것이다. 나는 무용수로서의 자신과 내가 같은 사람이라는 사실에 경외감이 들었으며, 가끔은 믿기 어려울 때도 있었다.”(10쪽)

저자는 이제 막 무용을 시작한 어린 학생, 발레단 입단을 준비하고 있는 새내기 무용수들에게 춤을 추는 이유와 함께 무용수로서 삶의 방향을 고민하게 한다.

홍예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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