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무가 미나미무라 치사토, 몸짓으로 전하는 ‘그날’의 목소리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7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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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무가 미나미무라 치사토

몸짓으로 전하는 ‘그날’의 목소리

 

청각장애 예술가의 시선으로 다시 쓰인 ‘침묵 속에 기록된’ 이야기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로부터 3일 후, 나가사키에도 거대한 버섯 모양의 불기둥이 솟아올랐다. 도시는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했고, 수십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폐허 속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피폭의 후유증과 고통 속에서 평생을 살아야 했다.

‘히로시마에는 그 무엇도 그냥 ‘주어져 있지’ 않다. 모든 몸짓, 모든 말마다 본래 의미에 덧붙여진 또 다른 의미가 특별한 후광으로 드리워져 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 ‘히로시마 내 사랑’ 중

‘히바쿠샤(被爆者)’라고 불리는 피폭자 중에는 어린이, 노인, 그리고 장애인도 포함되어 있었다. 런던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청각장애 예술가 미나미무라 치사토가 오는 10월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에서 1인 퍼포먼스 ‘침묵 속에 기록된’을 선보인다. 작품은 장애와 원폭 피해로 이중고를 겪은 청각장애 생존자들의 서사를 담고 있다.

 

춤으로 감각의 경계를 넘으며

미나미무라 치사토는 무용, 수어, 디지털 기술 등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청각장애 생존자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고, 이들의 몸짓과 말을 무대 위로 끌어 올린다.

현재는 런던의 무용 제작극장인 더 플레이스 극장의 상주예술가이자, 영국 수어 예술 가이드(BSL Performer)로 활동하고 있다. 2012년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 2016년 리우 패럴림픽 문화 올림피아드 등의 무대에서 소리의 시각화를 통해 다양한 안무와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는 그는, 청각장애 예술가로서 청각 외 다른 감각들을 통해 자신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중이다. 다음은 10월 내한을 앞둔 그와의 인터뷰.

 

일본에서 태어나 미술을 전공한 후, 영국에서 무용을 배웠습니다.

일본화를 전공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중 런던의 예술 단체로부터 장애인과 비장애인을 위한 무용 워크숍을 제안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무용수는 음악에 맞춰 춤을 춰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걱정이 앞섰지만, 평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2D’ 예술에서 온몸의 감각을 활용하는 ‘3D’ 예술로 나아갈 기회라는 생각에 제안을 수락했습니다.

장애 무용수와 비장애 무용수로 이뤄진 영국의 칸두코 댄스 컴퍼니(Candoco Dance Company)에 입단하셨죠. 전공을 바꾸고, 전문 무용수로 활동하기까지 어려움은 없었나요?

칸두코 댄스 컴퍼니는 장애 무용수와 비장애 무용수가 동등하게 훈련하며 함께 작품을 만드는 단체입니다. 당시 저는 트리니티 라반에서 1년간의 무용 과정을 수료한 경험밖에 없었기 때문에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비장애 무용수들 사이에서 기술의 한계를 느끼기도 했지만, 무용단 내에서 다양한 신체가 표현하는 예술을 목격하며 장애를 이점으로 활용할 방법을 찾게 되었어요. 이후, 장애는 제 무용 인생의 원동력이 되었고, 안무가로서 무용에 접근하는 방식을 더욱 다양하게 만들어주었습니다.

 

무대 위에 올려진 소리 없는 증언

작품은 ‘히바쿠샤’라고 불리는 원폭 피해자들, 특히 청각장애 생존자들의 서사를 다룹니다. 이러한 주제로 작품을 기획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2018년 일본에서 한 청각장애인을 만났습니다. 그녀는 제게 일본 수어로 자신이 70여 년 전 히로시마에서 겪었던 경험을 털어놓았어요. ‘폭발 직후 운 좋게 탈출했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땐 형체가 없는 검은 닭들만이 뒤틀린 돌처럼 변해 있었다’는 그녀의 이야기는 제 예상보다 훨씬 더 비극적이었습니다. 가장 놀라웠던 점은 그녀가 폭발을 ‘아름답다’고 묘사한 부분이었어요. 라디오나 전화, 구전으로도 소식을 접할 수 없었기에 원자폭탄이 무엇인지 훨씬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비슷한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는 청각장애인으로서, 이들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작업 과정도 궁금합니다. 청각장애 생존자들의 이야기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어려움은 없었나요?

생존자 대부분이 고령이었기에 직접 일본에 방문해서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일본 청각장애인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살았던 청각장애 생존자들을 인터뷰하고, 모든 기록을 영상으로 남겼죠.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는 무척 강렬했지만, 저는 예술가로서 이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무대에 올릴지 고민해야 했습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홀로 안무를 선보일 계획이었지만, 인터뷰 영상에 담긴 청각장애 생존자들의 수어와 표정을 보고, 그들의 ‘목소리’를 무대에 함께 올리기로 했습니다.

어떤 방식으로 그들의 목소리를 표현했나요?

작품에는 춤, 움직임, 수어를 비롯해 3D 애니메이션, 영상, 스크린 등 다양한 디지털 기술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스크린에 수어(한국, 영국)로 된 인터뷰 영상과 자막(한국어, 영어)을 동시에 투사해 시각에 의지하는 청각장애인의 감각을 인식하게 하고, 일부 객석에는 우저 스트랩(진동 감각 기계)을 설치해 공연의 음향을 몸으로 느낄 수 있도록 했죠. 디지털 기술은 제 작업에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 비장애인 제작진들이 청각장애인인 저의 관점에서 사고하며 공연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어요. 이는 기존에 청각장애인들이 비장애인들 사이에서 적응해야 했던 것과 정반대되는 과정이었습니다.

청각장애 안무가로서 히로시마 원폭 피해를 겪은 청각장애 생존자들의 경험을 표현하는 의미와 책임감이 남다를 것 같은데요. 이번 작품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저는 소리나 음악을 듣지 못하지만, 제가 느끼지 못하는 평행세계를 탐구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번 공연에도 청각장애 생존자들의 몸짓과 말을 소리와 음악으로 전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했습니다. 영상, 소리, 빛을 통해 이들의 세계를 경험하고, 제가 들려드릴 소외된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길 바랍니다.

홍예원 기자 사진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미나미무라 치사토 청각장애 안무가이자 영국 수어(BLS) 예술 가이드. 2012년 런던 패럴림픽 개막식, 2016년 리우 패럴림픽 문화 올림피아드 등에 참여했다. 요코하마 국립대학교에서 일본화를 전공(학·석사), 런던 트리니티 라반에서 무용을 배웠다. 현재 영국 더플레이스 극장의 상주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서울국제공연예술제(SPAF) – 미나미무라 치사토 ‘침묵 속에 기록된’

10월 17·18일 오후 7시 30분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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