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하오천 피아노 독주회/앙상블오푸스 제24회 정기연주회/다니엘 로자코비치 바이올린 독주회/연극 ‘땅 밑에’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0월 1일 9:00 오전

REVIEW


 

CLASSICAL MUSIC

 

장하오천 피아노 독주회

꿈과 환상의 수수께끼

9월 4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중국 피아니스트 장하오천(1990~)이 내한 독주회를 가졌다. 커티스 음악원에서 게리 그래프먼을 사사한 그는 2009년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츠지이 노부유키(1988~)와 공동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처음을 장식한 전채 요리 격인 슈베르트의 알레그레토 D915에서는 슈베르트 특유의 대조와 수수께끼가 묻어났다. 장하오천은 울림을 충분히 기다리며 다음 건반으로 이행했다. 음의 응집력이 높아지며 환상적 수수께끼도 늘어만 갔다.

이어진 슈베르트 피아노 소나타 18번 D894의 1악장은 안개 속의 노래 같은 선율로 시작했다. 갑자기 땅이 푹 꺼지고, 장하오천은 너른 세계로 나갔다. 충분한 호흡으로 한 음 한 음 꾹꾹 눌러 담았고, 아르페지오 표현은 강렬했다. 저음을 강하게 칠 때 음색이 몇 겹으로 나뉘었고, 소리가 커질 때는 천둥같이 갈라지는 강철 타건이었다. 장하오천은 신중하면서도 애정 어린 접근으로 곡의 수위를 달리 표현할 줄 알았다. 비극적 아름다움이 감싸고도는 가운데에도 고음은 탱글탱글했다. 악장의 끝은 정중했다.

2악장은 깊고 고요한 타건으로 꿈속을 헤매는 듯했다. 엄혹한 세계에서도 서정을 잃지 않는 슈베르트의 특징이 드러났다. 느리면서 존재감 있는 타건으로 이계와 현계는 하나가 됐다. 3악장은 담담하게 노래하는 와중에 묵직함과 가벼움이 대조적이었고, 4악장에서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충분히 펼쳤다. 날카로운 사운드는 잘 벼린 칼 같았다.

휴식시간 이후 장하오천은 리스트의 12개의 초절기교 연습곡 S.139 전곡(12곡)을 연주했다. 무시무시한 기교를 노출한 제1곡 ‘전주곡’은 크고 밝고 우렁찼다. 제3곡 ‘풍경’은 서정적이면서도 고음이 빛났다. 대체로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제4곡인 ‘마제파’는 격렬함의 표현이 돋보였다. 음이 뭉개지지 않도록 음표 하나하나를 강조했다. 다른 곡에 비해 덜 매끄러운 표현이 느껴지기도 했다.

제5곡인 ‘도깨비불’은 모든 곡 중 가장 매끄러운 연주였다. 윤활적인 손가락으로 만들어내는 빛나는 음색의 연속이었다. 이어진 제6곡 ‘환영’은 우울하게 억눌린 잿빛 정서를 잘 표현했다. 이 곡부터는 연주가 훨씬 더 자연스러워져 연주자의 몸이 많이 풀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제7곡 ‘영웅’은 당당하고 부드러운 면모를 강조했다. 진지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연주였다. 제8곡인 ‘사냥’은 기교적이고 빠른 패시지가 앞섰다. 여기에 명랑함도 함께 실어내고 있었다. 메기고 받는 식의 대화 패시지에서 응답이 상당히 민첩했고 피날레가 멋졌다. 제9곡 ‘회상’은 매끄러운 전개가 돋보였다. 아름다운 음색과 강렬한 트릴이 뇌리에 남았다. 제10곡 ‘알레그로 아지타토 몰토’는 맑은 음색의 랩소디풍 연주였다. 응답이 빠르고 전개가 자연스러웠다. 마무리에서는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는 바위처럼 급박한 낙차도 보여줬다. 제11곡 ‘밤의 하모니’는 피아노에 앉아 있는 피아니스트의 존재감이 돋보였다. 마지막 제12곡 ‘눈보라’는 아직 남은 힘을 총동원하듯 강렬한 타건에, 건반에서 연기가 나는 듯한 착시를 경험했다. 홀에 불이 들어오고 로비로 나가 바깥 공기를 마셨지만, 장하오천이 초대한 ‘슈베르트와 리스트를 잇는 꿈과 환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데는 시차에 적응하듯 시간이 필요했다.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인아츠프로덕션

 

 

앙상블오푸스 제24회 정기연주회

모두가 모여 만든 생의 찬미

9월 10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왼쪽부터) 백주영(바이올린), 김상진(비올라), 김규연(피아노), 심준호(첼로), 김홍박(호른), 최인혁(트럼펫)

문학·미술·음악·영화 등 여러 영역의 많은 작가가 고전에 필적하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예민한 감각으로 인류의 정신을 읽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그 작품은 자연스레 고전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고전이 주는 감흥은 오늘날 경험해도 새롭기에, 다시 읽히고, 무대에 오른다.

슈베르트의 음악이 많은 사랑을 받으며 무한히 재현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친구와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듯 편안한 선율과 진솔하게 공감하는 화음. 안 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한낮을 보내고 고요한 밤에 듣는 이러한 슈베르트의 음악은 나의 마음에 대한 반향으로 들린다. 이지혜(바이올린)와 김상진(비올라), 김민지(첼로)가 들려주는 슈베르트의 현악 3중주 1번 D471이 바로 그러했다. 마치 세 친구가 격의 없이 이야기를 나누듯 저마다의 역할을 배분하고 서로를 기대어 조화를 이룬다. 곡이 펼치는 장면에 따라 조금씩 다른 뉘앙스를 만들어 간다. 마치 하루에 있었던 일상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듯 했다.

반면에 50분이 넘는 대작인 현악 5중주 D956은 일생의 이야기를 건네는 듯하다. 앞서 만난 3중주에 백주영(바이올린)과 심준호(첼로)가 가세한 앙상블은 기대와 희망으로 가득한 첫 악장에서 자신감 넘치는 보잉과 두 대의 첼로가 받쳐주는 든든한 저음으로 풍부한 소노리티를 만들었다. 2악장에서는 멈춰 선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 방향성 없이 맴도는 두 대의 첼로는 내면을 들여다보는 듯 신비감마저 들었으며, 제1바이올린은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을 담담하게 노래했다. 격동의 삶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3악장은 단호하고 격렬하게 표현했으며, 큰 축제와 같은 4악장은 광란의 극한으로 몰고 가며 자축했다. 앙상블오푸스는 마음속 심연에서 들려오는 듯한 미세한 소리부터 압도하는 음량과 폭발적이고 다이내믹까지 폭넓게 표현하며, 현악 오케스트라에 필적하는 극적 표현력을 보여주었다.

슈베르트는 이렇게 우리의 일상과 일생을 들려주었다면, 이 두 곡 사이에 세계 초연된 류재준(1970~)의 6중주는 우리가 호흡하는 오늘의 이야기였다. 현악기, 금관악기, 건반악기의 세 종족이 각자의 문화를 갖고 있으면서 공존의 미학을 구축하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꿈꾸는 세계이기도 하다. 제스처는 천진하고 선율은 무리가 없으며, 악기들의 조합은 예측할 수 없지만 어색하지 않다. 각 악기군은 대비되기도 하고 대화하기도 하는 공존의 여러 방법이 제시되었다. 이 모든 것이 짜맞춘 논리가 아닌 우리에게 익숙한 음악적 표현과 자연스러운 의식의 흐름으로 성취된다는 것은 류재준 음악에서 발견되는 변치 않는 경이이다.

여섯 명의 연주자인 최인혁(트럼펫)·김홍박(호른)·김규연(피아노)·백주영(바이올린)·김상진(비올라)·심준호(첼로)는 류재준의 음악 언어에 유창한 연주자이기에 이러한 특징을 능숙하게 표현했다. 특히 마지막 악장의 대단원에서 모두가 같은 리듬으로 하나 된 순간에는 이상향이 눈앞에 펼쳐진 듯 뭉클함마저 느꼈다. 여기에는 자칫 한 종족이 침략하고 점령할 수 있는 편성임에도 여섯 명의 연주자가 성공적으로 균형을 유지하며 조화로운 앙상블을 만든 것에도 큰 공로가 있다. 이 역시 우리가 원하는 세상의 모습이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오푸스

 

 

다니엘 로자코비치 바이올린 독주회

공간의 울림, 인상적인 여운

9월 10일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스웨덴 태생의 바이올리니스트 다니엘 로자코비치(2001~)는 아름다운 연주를 들려주는 아름다운 사람이다. 이 명제를 확인하기 위한 1시간 20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바이올리니스트라면 누구나 부담스러워할 바흐의 바이올린 독주곡인 파르티타 3번·소나타 1번·파르티타 2번(연주순)은 무거운 과제였지만, 로자코비치는 투명한 날개가 달린 듯한 활로 이 극단적인 무게의 작품들을 공중에 사뿐 떠오르게 했다.

파르티타 3번은 그가 유일하게 악보를 놓고 연주한 곡이다. 첫 번째 악장 ‘프렐류드’에서 시작의 설렘을 느낀 듯, 연주 중 약간의 숨 가쁨을 보였다. 악상이 피아노일 때 소리가 갑자기 멀리서 들리는 듯한 공간감을 보여주어 살짝 놀랐는데, 이러한 공간감은 점차 확장되어 이날 연주의 ‘큰 그림’을 완성했다. 마지막 곡 파르티타 2번 중 ‘샤콘’에서 느껴진 큰 동굴 속에 있는 듯한 음향 폭의 진원은, 이 파르티타 3번 도입부의 작은 물방울들과도 같았던 두 마디 주제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두 번째 악장 ‘루르’ 역시 피아니시모로, 작고 미묘한 틈새에서 음악의 공간을 확장했다. 모두가 ‘크게 더 크게’를 생각할 때 그는 ‘피아노’의 의미와 깊이, 속삭임의 힘에 관해 깊이 탐구한 듯 보였다. 이러한 ‘작음’을 선보일 때, 어디선가 자꾸 들려오는 쿡쿡거리는 관객의 기침 소리는 아쉬움을 남겼지만 말이다. ‘가보트’부터는 음량을 조금 더 키우며 중요한 음들을 강조했으나, 여전히 힘을 조절해 어떠한 기준선을 넘지 않았다. ‘지그’에서는 말재주가 있는 친구처럼, 복잡한 이야기를 단숨에 간결히 끝마쳤다.

이어서 연주한 소나타 1번은 비브라토는 줄이고 부드러움은 배가시킨, 로자코비치만의 ‘아다지오’였다. 유연하지만, 결코 여리지 않은 그의 소리에는 듣는 사람을 몰입시키는 힘이 있었다.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하고 싶다가도, 도대체 이런 소리는 어떻게 내는지 보고 싶어 눈을 뜨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었다. ‘푸가’는 속도감 있게 진행하고 이전보다 거침을 허용하며 음량을 확 키웠고, 이어지는 ‘시실리아나’는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소리로 시작해 듣는 이의 마음을 꽉 쥐었다. 마지막 악장 ‘프레스토’는 중요한 음들을 빠짐없이 살리며 정석적으로 시작했다. 후반부에는 속도를 높이며 마지막 음까지 자신감 있게 몰아쳐 바흐 무반주 공연에서 흔하지 않은 관객의 “브라보” 외침과 환호성을 끌어냈다.

마지막 곡이었던 파르티타 2번은 앞선 두 곡보다 큰 음량과 편안한 소리로 시작했다. 부드러운 프레이즈 연결이 인상적인 ‘사라반드’와 ‘지그’는 장중한 마지막 악장 ‘샤콘’을 감상하기 위한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었다. ‘샤콘’의 단단한 첫 화음과 깨끗한 음정, 그리고 화려하고 빠른 스케일이 로자코비치의 밝은 면을 보여줬다면, 고요하기까지 한 중간의 악상들과 공간을 크게 울리는 보잉은 그가 어째서 때때로 거장에 비견되는지를 증명했다. 마지막 음에 도착해 여운을 남기며 1분간 활을 멈추고 있을 때, 관객 역시 숨소리마저 조심하며 사유의 순간을 즐겼다. 베르사유궁 초청 연주에서 영국 왕과 프랑스 대통령도 침묵하며 기다린, 그 여운이었다.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ICM매니지먼트코리아/토마토클래식


 

THEATER

 

연극 ‘땅 밑에’

제한된 경험이 주는 반전의 몰입

8월 28일~9월 8일 우란2경

 

김보영(원작), 장영(각색), 정혜수(연출), 정승준(공간 디자인), 정유석(조명 디자인)/김다흰·권정훈·최희진 외(목소리 출연) © 김신중

공연장에 도착한 관객은 평소보다 한 층 위로 올라갈 것을 안내받는다. 극장에 들어가면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좌측 아래로는 무대가 펼쳐져 있다. 가운데에 놓인 큰 돌을 중심으로 한 원형의 객석이다. 허공에는 바위처럼 보이는 조각들이 떠있다.

탄광에 있을 법한 삐걱거리는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 객석마다 헤드라이트가 달린 헤드셋이 놓여있다. 극 전체는 이 헤드셋을 통해 흘러나오는 소리를 통해 진행된다. 무대는 있지만, 배우는 등장하지 않는다. 김보영의 동명 SF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연극은 지하미로를 탐사하는 ‘하강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일종의 이머시브 연극이다.

대부분의 이머시브 공연은 관객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관조적인 자세로 객석에 앉아 있던 관객도 이머시브 공연에서는 걷거나 만지고, 극에 따라 미션을 수행한다. 여러 감각을 통한 경험으로 몰입도는 높아지고, 능동성을 갖춘 관객은 더 많은 관람 방식의 선택지를 얻게 된다.

하지만 연극 ‘땅 밑에’가 제시한 몰입의 방식은 반대의 노선이다. 오히려 시각적 정보를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청각을 통한 몰입을 의도했다. 여기에는 사운드 아티스트(정혜수)의 정교한 음향 기술이 적극 활용된다.

주인공 ‘윤형’은 더 이상 탐사를 못 할 건강 상태가 되었음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땅 밑에서의 “내려오라”는 소리를, 그가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오디오북을 듣는 것처럼, 헤드셋을 통해서는 주인공 시점의 내레이션과 대사들이 중첩되어 들린다. 소설에 서술된 장면과 공간에 대한 묘사가 촘촘한 음향적 효과로 구현되어 있었다. 관객은 주인공 ‘윤형’이 되어 줄지어 내려가는 탐사대의 앞사람과 뒷사람의 거리를 구분해서 느낄 수 있다. 말이 울리는 정도에 따른 공간의 크기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공연의 절반 이상은 완벽한 암전이다. 공연 중반에는 다소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암전이 주는 피로감이 높았지만, 이에 따라 극의 결정적 순간 조명을 활용한 연출 효과는 극대화됐다. 어둠 속에서 헤드셋 위에 달린 헤드라이트가 켜지면, 관객은 고개를 움직여 공간을 탐색하는 듯한 경험도 할 수 있다. 지진으로 미로가 끊어질 때 의자에 느껴지는 강렬한 진동 또한 몰입을 돕는다.

작품은 결국 이 긴 어둠 끝에 마주한, 아스라이 빛나고 있는 수많은 별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깊은 땅속으로 홀린 듯 들어가다 고립된 주인공 ‘윤형’은 그 끝에서 새로운 빛 한줄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낯선 음성. 본인을 “스페이스 콜로니의 메인 컴퓨터”라고 소개한 이 빛은, 지금의 세계가 지구를 떠난 이들이 만든 이주 공간이라고 설명한다. 땅속이라 생각했던 방향은 하늘 끝을 향하고 있었고, ‘윤형’은 언젠가 내 선조가 살았을 푸른 행성을 마주하게 된다. 그제야 ‘윤형’은 끝없이 땅속으로 향하고 싶던 본인 욕망의 이유를 찾게 된다. 모두가 만류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끝에, 결국 진실에 도달할 수 있었음을 말이다.

지하 미로라는 배경에 걸맞은 새로운 몰입 방식은 창작진들의 정교한 솜씨를 뽐낼 좋은 소재였다. 관객 참여가 아닌, 기술과 연출을 활용한 몰입형 공연은 이 장르의 새로운 예술적 접근을 제시하며 막을 내렸다.

허서현 기자 사진 우란문화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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