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의 사랑법, 파랗게 아팠고, 찬란하게 푸르렀던 시절의 이야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1월 11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대도시의 사랑법’

파랗게 아팠고, 찬란하게 푸르렀던 시절의 이야기

 

감독 이언희

음악 프라이머리

출연 김고은, 노상현

 

모두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으면서 시간이 지나면 모두 푸르렀다고, 그립다고 말하는 시간이 있다. 스무 살이 시작되던 시간이다. 꿈만 꾸기엔 어리지 않고, 꿈을 접기엔 너무 이른 나이. 성인이 된 척 무게를 잡았지만 사실은 아직 세상을 잘 몰랐던 시간, 이제 내 삶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것 같은데 자꾸 삶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것 같던 시간, 모든 순간을 정리해야 하는 마감이 시작된 것 같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살아도 되느냐는 뜨거운 질문은 뙤약볕 아래 자갈처럼 뜨거워 찬물을 끼얹어도 쉬 식지 않고, 불을 붙이려 해도 절대 불타오르지 않았다. 우리가 한때 청춘이라 불렀던 시절이다.

청춘의 파란 기억

자유분방한 차림과 행동으로 성별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시선을 끄는 재희(김고은 분)와 그런 그녀에게 눈길은 가지만 딱히 관심은 없는 흥수(노상현 분)는 이태원 클럽에서 만난 이후, 둘을 둘러싼 소문을 공유하면서 친구가 된다. 이들은 연인보다 더 뜨겁고 친구보다 더 진한 우정을 나누다가, 결국 흥수가 재희의 집으로 들어오면서 동거를 시작한다. 그리고 여전히 보수적인 사회에서 이러한 자유로운 선택은 주위 사람들에게 숨길 것이 많아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언희(1976~) 감독의 ‘대도시의 사랑법’은 아주 파랗게 미래가 열린 것 같지만 과거에 갇혔던 묘한 시절, 우리가 청춘이라 불렀던 그 시절 속으로 관객을 초청한다. 뜨거웠던 몸과 차가웠던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던, 아파서 청춘이었던 시절이 아니라 청춘이라 아팠던 그 시절 말이다. 과거를 추억하기보다 청춘을 재현하기 위해 설정된 아주 가까운 과거는 말랑말랑한 낭만이 아닌, 모두에게 ‘한 때’였던 시간을 현재로 불러오는 역할을 한다.

전형적이기에 더 진짜 같은 이야기

‘대도시의 사랑법’은 어떤 면에서 무척 전형적이다. 격식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 그리고 그녀와 동거하는 속 깊은 게이 남성의 우정. 자유로운 여자는 난잡하다는, 게이 남성은 정신병자라는 편견이 가득한 세상과 그에 맞서는 주인공들. 사랑보다 진한 두 사람의 우정은 기본값으로 두고 두 사람에게 나타난 연인. 영화는 우리가 흔히 보고 듣고 이야기하던 에피소드와 기대할 수 있는 결말로 이어진다.

하지만 ‘대도시의 사랑법’의 전형성은 진짜 이야기처럼 보이게 만드는 묘한 진정성을 담고 있기에 뻔하지 않다. 이언희 감독은 생생하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촘촘하게 이야기를 엮어내고, 김고은과 노상현은 재희와 흥수라는 캐릭터가 느끼는 통증과 설렘, 고민과 성장을 이끄는 감정을 진짜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특히 재희의 결혼식에서 흥수가 부르는 미쓰에이의 ‘배드 걸 굿 걸’은 재희의 서사를 노랫말로 그대로 담아낸 것 같다. 원작 소설을 읽을 때는 영상으로 만들었을 때 살짝 낯 뜨거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장면이었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게 영화의 가장 예쁜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영화는 박상영(1988~) 작가의 동명 소설 ‘대도시의 사랑법’ 중 약 70쪽 분량의 단편인 ‘재희’를 원작으로 한다. 함축적으로 표현된 소설의 에피소드를 원작과 다르게 확장하거나 인물의 서사를 단단하게 각색한 부분이 영화를 더욱 다채롭게 만든다. 원작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한다면 영화는 성소수자 혐오와 자유분방한 여성에 대한 차별, 여전히 유령처럼 남아있는 유교적 잔재 등 사회적 편견 속에 재희와 흥수를 놓아두면서 더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이야기가 되었다.

‘영혼의 단짝’을 찾는 판타지

‘대도시의 사랑법’은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에 가장 비현실적인 판타지를 엮어 통증과 대리만족을 함께 느끼게 하는 영화다. 사실 어느 시절, 어느 시점을 배경으로 하더라도 딱히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여성과 소수자에 대한 차별, 그런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배경으로 깔고, 그 위에 주인공을 올려둔다. 아웃팅과 성 착취물 등 개인을 공격하는 사회적 맥락에 관한 이야기도 자연스럽게 녹였다.

재희의 집은 그 시절을 겪어온 우리 모두의 판타지였다. 부모에게서 벗어나 오롯이 혼자 사는 투 룸, 화려하진 않지만 궁색하지도 않은 적당히 독립적인 공간. 그 속에서 나의 가장 친한 친구와 함께 살아보고 싶다는 판타지는 우리가 청춘 시트콤에서 흔히 보던 모습이다. 대학생부터 사회 초년생, 결혼을 고민하는 30대 초반까지 재희와 흥수의 서사만이 아닌 청춘을 지나온 사람들이라면 모두 겪고, 느끼고, 고민했을 시절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면서 그 시절 속의 나를 불러들인다.

속 깊은 게이 친구와 자유분방한 여자 친구라는 판타지 속에서, 재희와 흥수는 서로가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들어 주는 사람, 즉 우리가 흔히 말하고 원하는 ‘영혼의 단짝’이다. 그런 두 사람의 관계는 있을 법하지만, 현실에서는 흔하지 않다는 점에서 모두가 바라는 판타지이다. 재희와 흥수는 청춘이 아팠던 우리 자신과 닮아서 우리의 청춘을 자꾸 현실로 소환한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 자꾸 나의 청춘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그 시절 우리는 사람들 속에 섞여 조금 퇴폐적으로 놀기도 했고, 못난 자신을 들킬까 봐 예민하게 사람을 밀어내기도 했다. 재희와 흥수는 그런 우리를 닮아 못나 보이기도 하고 무척 사랑스럽기도 하다. 우리는 가장 나다운 것은 뭔지, 어떤 건지 그 고민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았다. 하지만 또렷한 발자국은 남지 않고 마음만 종이처럼 구겨졌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그 구겨진 종이를 펼쳤더니 청춘의 흔적이 길처럼 남아 있더라. 파랗게 아팠고 찬란하게 푸르렀던 시절의 흔적이다.

 

[OST] 프라이머리 | 뮤직앤뉴

DJ이자 음악 프로듀서인 프라이머리가 음악감독으로 참여했다. 샘김, 스텔라 장 등이 참여한 OST는 자유분방한 재희와 디스코·R&B·하드록 등 21세기 초반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정서를 잘 풀어낸다. 원작에서는 주인공 영(영화의 흥수)이 재희에게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불러주지만, 영화의 흥수는 미쓰에이 ‘배드 걸 굿 걸’을 부른다. 소설에서는 핑클 노래가 꽤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영화에서는 미쓰에이 노래가 신의 한 수가 됐다. 아주 살짝 서툴지만, 꽤 멋진 노상현의 노래와 춤은 영화에서만 볼 수 있다.

 

| | | set-list

01 Old love 02 Friends 03 La Danse De La Joie 04 Back To You 05 What Love Looks Like 06 Sigh 07 Prologue 08 Playing Pretend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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