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ON
바이올리니스트 제임스 에네스
‘한국’과 ‘베토벤’의 인연을 쌓아가는 사람
현악 4중주와 협연으로만 만나온 그의 ‘첫’ 리사이틀 들여다 보기
국내에서 제임스 에네스의 이름을 들어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2016년에 있었던 에네스 콰르텟의 내한 공연(4.26/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일 것이다. 당시 에네스 콰르텟의 비올라 주자는 국내 관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아온 리처드 용재 오닐이었다. 그들의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 연주는 6회의 모든 공연이 전석 매진되는 진기록을 달성했다. 용재 오닐은 제임스 에네스에 대해 자신의 “진정한 스타”라고 칭하며, “테크닉과 음악성, 모든 것을 갖추었음에도 항상 겸손하며 높은 가치를 향해 계속 노력하는 모습을 보자면, 저 또한 자신에게 엄격해집니다”(본지 19년 6월호)라고 존경을 표했다. 이는 에네스에게도 마찬가지. 이번 내한에서 ‘한국’과 ‘베토벤’이 강하게 연결되는 데는 이 전곡 연주가 영향을 주었다.
“베토벤은 제 음악 인생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특히 2016년 서울에서 베토벤 현악 4중주 전곡을 연주한 것은 저의 가장 소중한 음악 기억의 파편으로 남아있죠. 그래서 한국에서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하는 이번 공연도 제게 매우 특별한 감상을 줍니다. 한국은 연주할 때마다 보람을 느낄 수 있는 곳이고, 몇 번의 기회로 조금씩 알아갈 수 있어서 기쁜, 그리고 앞으로도 더 알아보고 싶은 나라입니다.”
익숙하지만 새롭게
그가 한국에 방문했던 것은 위의 에네스 콰르텟 공연과 2022년 서울시향(유카페카 사라스테 지휘)과의 베르크 협주곡 협연뿐이다. 즉, 이달에 돌아오는 부천아트센터의 공연은 이렇게 한국을 사랑하는 그도 처음 가져보는 바이올린 리사이틀이다.
그가 연주할 작품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중 1번, 5번, 9번. 베토벤이 직접 붙이지는 않았지만, 5번에는 ‘봄’, 9번에는 ‘크로이처’라는 부제가 있다. ‘봄’은 작품이 연상하는 이미지를 뜻하며, ‘크로이처’는 베토벤이 이 작품을 헌정한 로돌프 크로이처(1766~1831)를 지칭한다.
“물론 5번이 매우 아름답고 목가적이라서 그러한 별명이 붙은 것을 이해할 수 있고, 크로이처 소나타의 초연이나 재헌정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지만, 작품의 부제가 연주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음악을 이야기하는 것은 음악 그 자체니까요. 연주자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은 좋은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고, 베토벤 작품에서는 유약한 아름다움과 강한 힘의 대조에서 균형을 잡아 이야기를 풀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연주로 이를 감상하고, 공연 이후에 베토벤의 나머지 일곱 바이올린 소나타도 탐험해 보길 바랍니다.”
그와 무대에 오르는 연주자는 미국의 피아니스트 오리온 와이스(1981~)이다. 에네스는 2017년부터 오닉스 클래식스(Onyx Classics)에서 피아니스트 앤드루 암스트롱(1974~)과 함께 4장에 걸쳐 베토벤 소나타 전곡 음반(2017·2019·2020·2020)을 발매했기에 이 조합이 다소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둘은 20년 전 시애틀 실내악음악협회에서 만난 사이로, 오래도록 함께해 온 좋은 듀오이다. 이번 시즌에도 한국을 포함하여 미국·영국·노르웨이·일본·홍콩에서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는 에네스 콰르텟을 비롯하여 가까운 사이와 연주하는 것을 무척이나 즐거워하는 연주자이다.
“오래도록 함께한 친구들과 연주할 때야말로 ‘나 자신’이 되는 기분입니다. 물론 그중 누구와 연주하느냐에 따라 악구의 호흡과 해석이 조금씩 변하겠지만, 그럼에도 유사한 음악을 만들게 됩니다. 앤드루와 오리온, 저까지 셋이 무척 친하기 때문에 둘 중 누구와의 연주도 비슷하게 유지되는 것일 수도 있죠. 에네스 콰르텟도 마찬가지입니다. 용재가 우리 악단을 떠난 것은 당연히 큰 손실이었죠! 그렇지만 작년부터 새로운 멤버가 된 비올리스트 체옌 첸도 저희 모두와 오래된 친구였습니다. 에네스 콰르텟의 연주는 조금 변했지만, 소리가 또 그렇게 크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지요?”
바쁘지만 차분하게
용재 오닐이 언급했던 ‘겸손’일까. 그의 인터뷰 답변은 무척 차분하고 여유로운 사람의 언어였지만, 그는 실상 너무나 바쁜 사람이다. 팬데믹 시기에 처음으로 느끼는 여유가 어색하여 집에서 이자이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를 녹음하여 음반(2021/Onyx)을 내놓았던 그는 그 이후로도 바흐 무반주 소나타와 파르티타(2021/Onxy),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2022/Chandos), 닐센 바이올린 협주곡(2023/Chandos), 헨델·시마노프스키 작품(2023/Onyx), 스트라빈스키 바이올린 협주곡(2024/Chandos), 존 윌리엄스·번스타인 작품(2024/Pentatone) 음반을 줄줄이 선보였다. 지금도 시벨리우스 바이올린 협주곡(2024/Chandos)과 브람스·슈만 작품(2024/Onyx) 음반까지 발매를 앞두고 있다. 몸이 열 개라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놀라운 일정을 그는 크게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했다.
“코로나로 인해 취소됐던 프로젝트를 지금도 해나가고 있어요. 이번에 발매되는 시벨리우스 녹음도 세 번이나 취소됐다가 진행된 건데, 마침내 실물을 만나보게 됐네요. 최근에 발매했던 윌리엄스와 번스타인의 작품도 즐거웠죠. 영화음악은 아니고 연주회용 음악인 협주곡과 세레나데이지만요. 이따금 클래식 음악만 듣느냐는 질문을 받는데, 종종 다른 장르의 음악도 즐깁니다. 요즘은 레드 제플린을 많이 듣는데, 몇 년마다 그러고 싶은 순간이 오거든요. 그렇지만 지금은 베토벤에 집중할 때죠. 공연에서 기분 좋은 만족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따뜻하게 마무리한 그의 답변은 사실 대피소로 옮겨 다녀야 했던 플로리다의 허리케인 속에서 날라왔다. 모든 일정이 꼬여 정신없을 시간에도 미소를 잃지 않는 그의 언어를 보며, 이달에 찾아오는 사람은 그가 말한 좋은 ‘이야기꾼’이란 확신이 들었다. 에네스가 들려줄 흥미로운 이야기를 놓치지 말기를.
글 이의정 기자 사진 부천아트센터
제임스 에네스(1976~) 13세에 몬트리올 심포니와 연주하며 데뷔했다. 메도우마운트 음대와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샐리 토머스를 사사, 현재는 캐나다왕립학회 회원으로서 객원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715년에 제작된 ‘마르시크’ 스트라디바리우스를 사용하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제임스 에네스·오리온 와이스 듀오 리사이틀
11월 12일 오후 7시 30분 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
베토벤 바이올린 소타나 1번 Op.12-1, 5번 Op.24 ‘봄’, 9번 Op.47 ‘크로이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