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로랑 에마르 피아노 독주회 외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1월 1일 9:00 오전

REVIEW

 

CLASSICAL MUSIC

 

피에르 로랑 에마르 피아노 독주회

마법사 에마르

10월 1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피에르 로랑 에마르(1957~)가 레퍼토리를 확장하는 과정은 아마 세계에서 유일한 방식이 아닐까. 어린 시절부터 가장 현대적인 작품을 연주했던 그는 40대 중반에 갑자기 고전을 연주하더니, 이제는 이 둘을 섞어서 연주한다. 정반합과 같은 이 여정은 그 자체로 구별되는 존재감을 드러낸다. 물론 요즘에는 과거와 오늘의 음악을 함께 배치한 연주가 그리 드물지 않은데, 보통 오늘의 음악이 과거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주는 통시적 의도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에마르는 오늘과 과거의 음악이 함께 있음을 보여주는 공시적 의도를 드러낸다. 여기엔 ‘오늘 연주하면 오늘의 음악’이라는 개념이 바탕에 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반복’의 개념처럼, 과거의 작품을 반복해서 연주해도 이는 과거와 동일할 수 없다. 데리다가 말한 ‘차연’의 개념처럼, 오늘의 연주는 과거의 지연으로 차이가 나타나는, 오늘만의 음악이 된다. 그러나 음악회 프로그램이라면 풀어야 할 문제가 있다. 오늘 연주하면 오늘의 음악이 된다는 사실이 과거와 현재의 음악적 어우러짐을 보증하는가?

에마르는 이를 증명해 보는 프로그램을 구성했다(본 공연은 예술의전당 기획 ‘월드스타시리즈-피아노 스페셜’의 일환). 전반부는 리게티(1923~)의 ‘무지카 리체르카타’와 베토벤의 바가텔 Op.119을 번갈아 연주했고, 후반부는 리게티의 연습곡과 쇼팽·드뷔시의 연습곡을 번갈아 연주했다. 그리고 이들을 거의 쉼 없이 연결하여, 관객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각각 하나의 작품으로 인지하게 했다. 또한 각 음의 길이를 리듬과 박자의 개념이 아닌 시간의 개념으로 접근함으로써 음향의 지속과 변화에 집중했다. 베토벤의 작품에서 음악적 시나리오가 변형되어 이질감을 느낀 이유이다.

이러한 이질감은 오히려 리게티의 음악과 조화를 이루는 요인이 됐다. 에마르는 리게티의 ‘무지카 리체르카타’에서 피아노의 잔향을 느끼며 다음 음을 연주하는, 즉 시간의 개념과 소리 나는 음향에 집중하는 연주를 들려주었다. 1980년대부터 시작된 존 케이지의 후기 작곡 스타일에 나타난 시간 개념(존 케이지는 사티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이 바로 리게티의 연주에서 발현됐다(또한 에마르는 리게티가 존 케이지의 플럭서스 음악을 패러디한 ‘세 개의 바가텔’을 이 연주회의 앙코르로 연주했다). 나아가 에마르는 그보다 훨씬 이전인 베토벤의 작품에 이를 적용한 것이다. 시간 개념으로, 모든 작품은 다시 해석됐고 음향은 재설정 됐다.

드뷔시의 연습곡에서도 이 접근 방식은 작품이 추구하는 판타지를 여는 마스터키였다. 음정은 마디선의 빗장을 풀어 자유를 얻었고, 바로 지금 들리는 음향의 즐거움을 느끼게 했다. 이에 비춰보면, 베토벤의 작품에서 이질감 느낀 이유는 작곡가가 시간을 리듬과 박자, 마디로 통제하는 의도를 가졌기 때문이다. 베토벤의 음들은 시간의 지배를 받아야 성립하지만, 드뷔시는 음악 안에서 시간을 유희한다. 에마르는 과감하게 시간의 유희를 베토벤에도 적용했고, 과도기에 있는 쇼팽을 넣음으로써 베토벤·쇼팽·드뷔시·리게티가 연결되고, 오버랩으로 통합됐다.

그의 공연은 단순히 음악의 청취가 아닌, 시간의 유희를 느끼고 그 안에서 음과 음향의 자유를 경험하는 시간으로, 약 200년간의 음악을 모두 지금의 음악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바로 피에르 로랑 에마르의 마법이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예술의전당

 

 

알렉상드르 캉토로프 피아노 독주회

젊은 세대에 다가가는 피아노의 미장센

10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알렉상드르 캉토로프(1997~)의 피아노와 청중 사이에 부드러운 소리의 쿠션이 놓여있는 듯했다. 피아노 때문인지 페달링 때문인지, 오래 들어도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캉토로프의 음악은 단조롭지 않았다. 투명도를 달리하다가, 때로는 몹시 강렬하게 반짝이며 곡에 대한 거리감을 좁히고 긴장감을 부여했다. 첫 곡인 브람스의 랩소디 1번은 엄격함과 서정성이 조화를 이뤘다. 강약의 대비가 확연했고 몽환적인 가운데에서도 통풍이 잘되는 음악 풍경을 만들어냈다. 아주 여린 음으로 끝을 맺었다.

리스트의 초절기교 연습곡 12번 ‘눈보라’는 습윤한 음향 속에서 주선율을 받쳐주는 부단한 움직임이 두드러졌다. 자욱한 저음과 매끄러운 고음 사이의 거리가 아득했다. 스토리텔링의 설계는 오페라적인 끝맺음에서 잘 드러났다.

리스트 ‘순례의 해-제1년 스위스’ 중 ‘오베르만의 골짜기’는 물에 잠긴 듯한 고요함과 여백, 시적인 흐름이 돋보였다. 밝게 피어나는 음향 속에서 잘 제어된 스타카토가 돌출했고, 정적 속을 울리는 표현은 깊이 있으면서도 투명했다. 꿈을 꾸는 듯한 제스처는 오래 기억될 만했다.

슈베르트의 ‘방랑자 환상곡’은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부드럽게 연마된 음향공간에서 펼쳐졌다. 희망적인 포근함과 단조 부분의 숙연함 사이를 오가며 매끄럽게 진행했다. 변주 부분에서는 고요히 눈이 날리는 듯한 아름다운 풍경도 보여주었다. 다시 주제로 돌아온 이후에는 막힘이나 거친 부분 없이 흥미진진했다.

2부 첫 곡이었던 라흐마니노프의 소나타 1번은 멀리서부터 가까운 곳으로 카메라가 이동하듯 입체감과 원근감을 가진 연주로 시작됐다. 러시아 피아니스트들의 망치 같은 차력 쇼가 아니라 불빛이 보이는 안개 낀 마을 같은 공간감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도 꼼꼼한 연주였다. 강렬하게 밀려오는 음표들을 대공 미사일로 요격하듯 하나하나 처리했다. 흔들림 뒤에 오는 고요한 서정성은 쌓인 눈이 소리를 빨아들이듯 청중의 호흡을 멎게 했다. 움직임이 종소리처럼 반짝이며 살아있었고, 명상적이면서도 사색적인 순간들을 만들어냈다. 전체적으로 조심스러움과 간절함의 태도로 밀도를 높여가며 연주했다. 완만한 경사면을 따라 굴러가다가 이내 건반에서 불이 나듯 강렬한 타건으로 마무리하는 모습도 잊지 못할 듯하다.

잘 알려진 바흐/브람스 ‘왼손을 위한 샤콘’에서는 왼손만의 희로애락이 자연스럽게 펼쳐졌다. 눈을 감고 들으면 도저히 한 손 연주라 믿기지 않는 다채로움이 거기 있었다.

첫 앙코르는 생상스의 ‘삼손과 델릴라’ 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였다. 절묘한 터뜨림이 메조소프라노의 유혹적인 목소리 대신 캉토로프의 예민한 건반에서 흘러나왔다. 이어진 브람스의 간주곡(Op.118-2, Op.117-2)에서는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그가 브람스의 음악 세계에 얼마나 천착하고 있는지 가늠할 수 있었다.

공연장을 나서며 캉토로프의 연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하는 젊은 애호가들의 대화를 들었다.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과 함께 ‘피아노계의 젊은 차르’ ‘리스트의 환생’ 등 여러 찬사가 그에게 쏟아졌지만, 음악회 현장에서 느낀 그의 모습은 ‘21세기의 신인류’였다. 압도적인 타건이나 존재감은 없지만, 무한한 미장센의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특별한 피아니스트였다.

류태형(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마스트미디어

 

 

CLASSICAL MUSIC FESTIVAL

하슬라국제예술제

강릉에 새롭게 떠오른 축제, 포문을 열다

10월 13~20일 강릉아트센터 외

 

올해 10월의 강릉에는 새로운 예술의 바람이 일었다. 찬란한 아침의 해가 뜨는 ‘강릉’의 옛 이름이자 순우리말인 ‘하슬라’를 앞세운 예술제가 출범했다. 조재혁은 이 ‘하슬라국제예술제’(10.13~20)의 예술감독으로 함께한다.

기자가 강릉을 찾은 15일은, 예술제의 첫 개최를 이제 막 시작한 설렘의 분위기가 현장에 가득했다. 앞서 13일, 콜레기움무지쿰서울과 협연자들의 바로크 음악으로 화려한 막을 올린 하슬라국제예술제는 15일 오전, 강릉의 초당성당에서 특별한 음악회를 막 선보인 참이었다. 지역 주민과 성당의 신자 100여 명이 객석을 가득 채우고 바흐와 헨델의 선율에 귀를 기울였다.

예술제의 둘째 날 밤, ‘러시안 나이트’를 제목으로 강릉아트센터 사임당홀에서 공연이 펼쳐졌다. 공연에 앞서 마이크를 든 조재혁이 등장했다. “음악회 프로그램을 구상하다 보니, 19세기부터 20세기에 이르는 러시아 음악의 계보를 발견하게 되었다”며 “이에 앞서 들려드릴 포퍼의 작품은 첼로의 현에 불이 붙는 듯한 강렬한 연주”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설명으로 공연의 문을 열었다.

첼리스트 송영훈과 요나단 루제만이 연주한 포퍼의 두 대의 첼로를 위한 모음곡 연주가 끝나자, 마치 격렬했던 앞 작품에 대한 앙코르 같은 라흐마니노프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보칼리제’ 연주가 이어졌다. 요나단 루제만의 연주에 조재혁이 직접 피아노를 연주하며 호흡을 맞췄다.

실내악의 호흡은 이어진 쇼스타코비치 피아노 3중주 1번에서 깊어졌다. 후미아키 미우라(바이올린)·송영훈(첼로)과 함께, 조재혁이 다시 한번 무대에 올랐다. 강렬한 쇼스타코비치의 음악 세계가 공연장을 조금 더 풍성하게 이끌었다.

이어진 2부에서는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가 연주됐다. 서울시향의 제2바이올린 수석인 임가진과, 이번 축제를 위해 조직된 ‘페스티벌 스트링 플레이어스’가 만족할 만한 음향을 선사했다. 첼로와 더블베이스를 제외한 다른 현악기들은 모두 일어선 채 역동적으로 연주에 참여하는 모양새였다.

무엇보다 올해 예술제는 강릉아트센터를 중심으로 갈바리의원, 카페 등에서 누구나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한 것이 눈에 띄었다. 또한 ‘예술’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18일에는 소프라노 이명주, 발레리나 김지원이 만드는 두 장르의 만남도 이뤄졌다. 예술감독으로서 조재혁의 가능성과 역량에 기대어, 앞으로 강원도의 또 다른 예술 축제의 축으로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

조재혁(1971~) 서울예고 재학 중 도미하여 줄리아드 음대에서 학사 및 석사를, 맨해튼 음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스페인 마리아 카날스 콩쿠르 1위를 비롯해 각종 콩쿠르에서 입상했으며, 1993년 뉴욕 프로피아노 영아티스트 오디션 우승으로 카네기홀 와일 리사이틀홀 데뷔 이후 북미와 유럽에서 꾸준한 연주 활동을 펼쳐왔다. 현재 하슬라국제예술제 음악감독을 맡고 있다.

허서현 기자 사진 하슬라국제예술제

 


 

RECORD

 

피아니스트 조재혁

모차르트를 향한 새로운 시선으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23’ Orchid Classic

조재혁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악보를 꺼내 들었다. 그에게 올해는 ‘모차르트의 해’다. 지난 9월, 로열 필하모닉과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음반을 발매했으며, 오는 11월에는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 사이클의 하반기 일정을 남겨두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수없이 펼쳐왔던 모차르트 악보지만, 중견 연주자가 된 지금도 그는 다양한 장르의 모차르트 작품을 찾아 듣고, 고민하며 연주의 폭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팬데믹을 딛고, 모차르트의 세계로

팬데믹의 먹구름이 전 세계를 뒤덮은 2020년 여름, 조재혁은 런던행 비행기에 올랐다. 평소 녹음하고 싶었던 레퍼토리를 하나하나 짚어가던 그의 시선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과 23번 악보에 닿았다. 하지만, 녹음을 위해 도착한 런던 스튜디오의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당시 거리두기에 따라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서로 멀찍이 떨어져 앉아 녹음을 진행해야 했다.

“거리두기로 인해 음향과 앙상블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어요. 특히 관악기군의 소리가 전달되는 타이밍이 평소와 너무 달라 협주곡 20번 3악장에서 피아노와 주고받는 부분에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나네요.”

평소보다 힘겨운 녹음 작업이었지만,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이번 음반에서 로열필의 지휘를 맡은 한스 그라프다. 모차르테움 국립음대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지휘자로서의 연륜과 모차르트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녹음을 이끌어 나갔다.

“함께 연주할 때마다 배울 점이 참 많은 분이에요. 수없이 연주했을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에 대한 다른 시각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여 주시죠. 녹음을 마치고 제게 “세대가 다르고, 삶의 속도가 다른 만큼 곡의 속도와 템포도 다를 수밖에 없는데, 다른 세대의 음악 세계로 나를 꺼내주어 고맙다”고 하시더군요. 아마 제가 연주한 템포가 선생님의 평소 템포보다 조금 더 빨랐나 봐요.(웃음)”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그 이면을 향해

조재혁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음반 발매와 더불어 지난 7월부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사이클을 이어가고 있다. 오는 11월, 두 번의 공연에서 소나타 2·12·15·17번(1일)과 5·7·10·11·18번(2일)을 선보일 예정이다. 그는 공연 전 메모지에 소나타 번호와 길이, 조성을 적어 바닥에 늘어놓고 연주 순서를 고민했다. 공연마다 초기, 중기, 후기 작품이 골고루 들어가도록 작품의 길이와 조성을 고려하다 보니 지금의 순서가 되었다.

대체로 모차르트 소나타는 피아노를 배우는 초기에 접하게 된다. “그때는 악보대로 박자에 맞게 건반을 누르기에 집중하는 시기여서 음악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타건이 익숙해질 무렵이 되어야 음악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지요.” 어느 작곡가든 작품세계 전체를 살펴볼수록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오페라 아리아 등 다른 장르의 작품을 접하며 피아노곡에 대한 시선을 넓혀갔다. 요즘은 소프라노 르네 플레밍이 1996년에 녹음한 모차르트 아리아 음반을 듣는다.

“피아노 소나타도 알고 보면 가사만 없을 뿐, 오페라 아리아와 같은 음악이에요. 기악 연주자들은 마디 단위로 음악을 정리하려는 경향이 강한데, 성악곡은 가사와 멜로디가 음악적 그림과 명확하게 분리되어 작곡가의 의도를 훨씬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이를 토대로 피아노곡 해석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고요.”

이번 공연 역시 이러한 생각과 궤를 같이한다. “모차르트 시대의 악기, 즉 포르테피아노의 한계에 음악을 가두기보다 현대의 피아노에서 느낄 수 있는 튼튼하고 무거운 소리를 통해 모차르트의 피아노곡을 훨씬 더 진하고, 풍부하게 표현해 보고자 합니다.”

조재혁은 이번 사이클을 마치고, 11월 말부터 암스테르담에서 열흘간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음반 녹음에 들어갈 예정이다. 네 차례의 연주를 거쳐 음반으로 선보일 그의 모차르트는 어떤 모습일까. 조재혁의 모차르트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홍예원 기자 사진 목프로덕션

 

PERFORMANCE INFORMATION

조재혁 피아노 독주회

11월 1·2일 예술의전당 IBK챔버홀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2·12·15·17번(1일), 5·7·10·11·18번(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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