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먼 레브레히트 칼럼 | SINCE 2012
영국의 평론가가 보내온 세계 음악계 동향
교향곡의 대를 이을 자, 누구인가?
쇼스타코비치(1906~1975) 서거 50주기를 앞두고
교향곡의 빛이 꺼지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1975년 8월, 뉴스 편집실에 앉아 있는데 전신 타자기로 러시아 모스크바발 소식이 전송되었다. “속보예요.” 내가 소리쳤다. “쇼스타코비치가 사망했대요.”
사람들의 얼굴은 무표정하기만 했다. 차이콥스키는 들어봤겠니 싶어 설명을 덧붙였다. “차이콥스키 이후 러시아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 레닌그라드 교향곡 몰라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당시 동료들은 전 세계를 종횡무진하던 기자와 편집자들로 현대사에 박식했지만, 이들 중 미국의 역사와 거의 동일한 시간을 존재해 온 이 예술 형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직업적으로 계속 집중해야 할 대상은 미국이었고, 교향곡은 논외였다. 지금으로부터 50번의 여름을 되돌아간 그날, 나는 교향곡이 죽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덤으로 간 교향곡의 족보
그리고 그 깨달음은 틀리지 않았다.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숨을 거둔 후, 그 어떤 교향곡도 세계를 변화시키거나 공연 레퍼토리를 확장하지 못했다. 비애 어린 구레츠키(1933~2010)의 폴란드 교향곡이나 코릴리아노(1938~)의 에이즈 희생자를 추모하는 패치워크 교향곡이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때도 있었지만, 이러한 칭찬은 오히려 덧없는 말들이었다. 1975년 닫힌 정전(canon)의 문을 연 동시대 작품은 지금껏 없다.
필립 글래스(1937~)가 데이비드 보위(1947~2016)의 앨범을 소재 삼아 세 편의 교향곡을 쓰고, 아르보 패르트(1935~)가 음악으로 소련 연방의 붕괴를 예언하는 등 걸출한 작곡도 있었지만, 이내 스쳐 갔다. 폴란드 그단스크 봉기 도중 작곡된 비톨트 루토스와프스키(1913~1994)의 노련한 세 번째 교향곡은 영속성을 가지기보단, 해당 시대를 반영하는 데에 그쳤다.
교향곡은 우리 삶에서 분리된 지 오래다. 거실에서 가족들이 모여 앉아 쇼스타코비치의 신성한 교향곡 7번, 본 윌리엄스 교향곡 5번, 유일무이한 시벨리우스 교향곡 8번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길 기다리던 시대는 가버렸다. 쇼스타코비치는 마지막 교향곡 15번에서 마치 음표를 체에 거른 듯 일부 페이지를 공백에 가깝게 남겨두었다. 노쇠한 60대의 작곡가는 정전과 함께 땅에 묻혔다.
작곡가 사후, 해석의 갈림길
열광적인 찬사가 뒤를 이었다. 1979년 언론인 솔로몬 볼코프(1944~)가 쇼스타코비치의 회고록이라 칭하는 책을 미국에서 출판했다. 이 책은 작곡가의 작품에 내포된 이중적 의미, 즉 공산당 총재에 대한 거짓 웃음과 동시대 피해자들을 향한 공감 어린 두려움을 통해 쇼스타코비치를 공산당에 대항하는 용감한 비평가로 그려냈다. 구스타프 말러의 음악적 발명이기도 했던 ‘모호함’을 쇼스타코비치는 정치적 논의로 가공한 것이었다. 특히 ‘정당한 비평에 대한 소련 예술가의 응답’이라는 거짓된 겸손으로 포장된 교향곡 5번은 스탈린의 대숙청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기에, 모스크바 크렘린궁이 이에 속은 게 놀라울 지경이었다.
모든 부분은 아니지만, 볼코프가 그려낸 작곡가의 초상은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에게 보증을 받았고, 작곡가의 아들이자 1981년 서구로 망명한 막심 쇼스타코비치(1938~)는 자신의 아버지가 역사의 목격자로서 교향곡을 썼다고 확언했다. 이에 당황한 크렘린궁은 쇼스타코비치가 소련에 충성한 시민임을 맹세했던 문화적 앞잡이었음을 내세웠다.
미국의 음악학자 리처드 타루스킨(1945~2022)은 쇼스타코비치가 음악가 서명으로 사용하던 머리글자 ‘DSCH’가 적힌 악보 페이지를 볼코프 본인이 만든 건 아니냐며 힐문했지만, 사실 그의 주장은 터무니없었다. 개인적으로 타루스킨은 히틀러가 사인한 명령서를 보기 전까지는 그가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사실을 믿지 않겠다던 데이비드 어빙(1938~) 같은 수정주의자라 생각한다. 타루스킨과 그의 무리가 대학 출판부를 장악하는 동안 볼코프는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 루돌프 바르샤이, 키릴 콘드라신과 다른 망명자들의 지원을 등에 업고 언론의 우위를 선점한다.
제3의 해석은 공연장에서 나왔다. 레닌그라드의 지휘자 예브게니 므라빈스키(1903~1988)와 쿠르트 잔덜링(1912~2011)은 교향곡을 처음 본 이후로 상반된 길을 걸었다. 잔덜링은 교향곡 8번의 트롬본 솔로를 해외 임무 중 젠체하는 파티에 참석한 공직자로, 피콜로를 주말 휴가 중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젊은 장교로 그려냈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리허설을 보고 나서야 나는 캐리커처로 가득한 찰스 디킨스 소설 ‘보즈의 스케치(Sketches by Boz)’의 소련 버전은 쇼스타코비치 교향곡이라고 생각했다. 한편, 네덜란드의 지휘자 베르나르트 하이팅크(1929~2021) 등 다른 이들은 쇼스타코비치에 대해 그 어떤 맥락도 더하지 않은 순수 음악으로 접근했다. BBC 프롬스에서 하이팅크가 교향곡 4번에 대해 보여준 굉장한 해석은 구원이자 동시에 문제이기도 했다. 그의 해석에서 음악은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일 수도 혹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 화성인이 이 교향곡을 들으면 음악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무엇을 떠올렸을까? 쇼스타코비치 작품 해석에 대한 분열은 교향곡은 이래야만 한다는 대중의 인식을 뒤흔들었다. 추상적 구성인지, 간접적 전달인지, 문화적 의무인지. 혼란이 뒤따랐다.
오케스트라는 교향곡이 필요하다
교향곡은 본래 현실의 일상에서 벗어난 위안을 위해 고안되었다. 하이든은 무도곡을 썼고, 모차르트는 조성에 다양성을 추가했다. 베토벤은 신성에 가닿으려 했고, 브람스는 안도를 주었으며, 차이콥스키는 카타르시스를, 브루크너는 신의 지지를, 말러는 자기 분석을, 시벨리우스는 차디찬 선명함을 추구했다. 이들의 기념비적인 성취는 우리 사회가 음악가 50~150명에게 연주비를 지급할 준비가 있는 한 귀히 여길 것이다.
사회의 속도는 더 빨라졌고 개인적인 취향과 욕구의 충족 여부와 관계없이 한 시간 이상 이어지는 작품의 마지막 음을 들을 관객의 수는 더욱 줄었다. 쇼스타코비치 사후, 교향곡은 출구가 없는 지뢰밭에 빠져 있다. 교향곡마저 없다면 공연계는 파멸을 맞는다. 공연은 교향곡이 메인 코스인 정식 요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교향곡을 빼 버리면 식당은 문을 닫아야 할 것이고, 개선의 필요성은 공연의 실존과 맞닿아 있다.
살아남기 위해서 오케스트라는 미각을 개선해야만 한다. 헨체 교향곡 7번, 펜데레츠키 교향곡 8번, 맥스웰 데이비스 교향곡 9번, 라우타바라 교향곡 8번, 슈니트케의 마지막 교향곡 세 작품 등 수수한 현대성으로 현세대를 급습해야 한다. 공연장은 기획력 넘치는 오페라하우스가 젊은 교향곡 작곡가에게 협업 의뢰를 해야 한다. 교향곡은 죽었을지언정, 부활 시기를 놓친 것은 아니다. 대중의 관심이 부활하는 데 필요한 사항은 교향곡 형식을 향한 믿음의 서약뿐이다. 그 이외의 대안도, 낭비할 시간도 없다. 새로운 교향곡이 없다면 오케스트라에 남은 것은 진정 죽음뿐이다. 번역 eve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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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remember well the day the symphony died. It was August 1975 and I was sitting in a television newsroom when the teleprinter clattered out a Moscow dateline. ‘Hold the bulletin,’ I cried. ‘Shostakovich is dead.’
I was met by a wall of blank faces. ‘The greatest Russian composer since Tchaikovsky?’ I tried. They’d heard of Tchaikovsky. ‘The Leningrad Symphony?’ Not a flicker.
My colleagues were world-travelled reporters and editors, well-read in modern history. Yet not one of them went to symphony concerts or took an interest in an art-form that had been running about the same length of time as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The USA commanded our constant professional attention. The symphony was peripheral. That day, fifty summers ago, I realised the symphony was dead.
Turns out, I wasn’t wrong. Since the last gasp of Dmitri Shostakovich, not one symphony has changed the world or enlarged the concert repertoire. There was a flash of headlines for Henryk Gorecki’s Polish symphony of sorrowful songs and another for John Corigliano’s patchwork symphony for Aids victims, but these flatteries proved ephemeral. Neither contemporary work has joined a canon which was shut down in 1975.
Symphonies by major names – Philip Glass, Arvo Pärt – came and went, even though Glass based three symphonies on David Bowie albums and Pärt foretold the collapse of the Soviet Union. A masterful third symphony by Witold Lutoslawski, written amid the risings in Gdansk, marked its own time without accruing immortality.
The symphony had simply disconnected. Gone were the days when families clustered around the living-room wireless, awaiting an oracular seventh symphony by Shostakovich, the fifth of Vaughan Williams, the never-to-be eighth of Jean Sibelius.
Shostakovich, in his 15th and final symphony, left some pages near-blank, as if the notes had drained out through a sieve. In his sixties, exhausted, Shostakovich took the canon with him to the grave.
A furore followed. In 1979, a book purporting to be Shostakovich’s memoirs, brought out by the journalist Solomon Volkov, was published in America. It reimaged the composer as a brave critic of Communism, embedding his scores with dual meanings – a fixed smile for Party chiefs and a sympathetic wince for fellow-sufferers. Ambiguity, Gustav Mahler’s musical invention, was reworked by Shostakovich as political commentary. His fifth symphony, delivered in fake humility as ‘a Soviet artist’s response to just criticism’, conveyed Stalin’s Terror so graphically it is a wonder the Kremlin was fooled.
Volkov’s portrait of the composer, if not his every word, was endorsed by the cellist Mstislav Rostropovich. Maxim Shostakovich, the composer’s son who defected to the West in 1981, confirmed that his father used the symphony as a witness to history. The Kremlin, rattled, paraded a row of cultural stooges who swore that Shostakovich was a loyal Soviet citizen.
Then it got ugly. A blustering American academic, Richard Taruskin, demanded that Volkov produce pages of manuscript initialed ‘DSCH’, the acronym Shostakovich used as his musical signature. This was preposterous. I called out Taruskin as a David Irving-like revisionist, refusing to believe Hitler initiated the Holocaust unless he saw a signed order. While Taruskin and his acolytes controlled the university presses, Volkov won the media debate, with backing from Vladimir Ashkenazy, Rudolf Barshai, Kirill Kondrashin and other exiles.
In the concert hall, a third way emerged. The Leningrad conductors Yevgeny Mravinsky and Kurt Sanderling, who had first sight of the symphonies, steered a zigzag line. Sanderling confided to western orchestras that a trombone solo in the eighth symphony depicted a pompous party official on a foreign mission; a piccolo was a young lieutenant on a weekend furlough with his girl. Attending Sanderling’s rehearsals, I understood a Shostakovich symphony as a caricature-filled Charles Dickens novel, a Soviet-styled Sketches by Boz.
Others, like the Dutch maestro Bernard Haitink, approached Shostakovich as pure music, no added context. Haitink’s tremendous account of the fourth symphony at the BBC Proms was at once redemptive and troubling, demonstrating that music could mean anything you want, or nothing at all. What would a Martian make of this symphony, except that it was music? The Shostakovich schism muddied the public perception of what a symphony ought to be. Was it an abstract construct, a coded communication, or a cultural obligation? Confusion ensued.
The original symphony was intended as relief from daily reality. Joseph Haydn wrote dance moves. Mozart added tonal diversity. Beethoven reached for apotheosis, Brahms offered reassurance, Tchaikovsky sought catharsis, Bruckner divine affirmation, Mahler self-analysis, Sibelius icy clarity. Their monumental achievements will be treasured so long as society is prepared to pay for fifty to 150 musicians to perform them.
But society has speeded up and fewer listeners are prepared to wait an hour or more for a resolution of a work that may, or may not, meet their personal taste and needs. The symphony, post-Shostakovich, has stalled in a minefield with no visible exit. Without it, though, the concert is doomed. The concert is a prix-fixe menu with symphony as main course. Take out the symphony and the restaurant will have to shut. The need for renewal is existential.
Orchestras, to survive, must refresh the palate with unfancied modernities – Henze’s 7th, Penderecki’s 8th, Maxwell Davies’ 9th, Rautavaara’s 8th, Schnittke’s last three – to raid the last generation. Concerthalls need to commission young symphonists in the way that enterprising opera houses are engaging with new writers. The symphony may be dead, but it is not beyond resurrection. All it requires is a declaration of faith in the form to revive public attention. There is no alternative, and no time to waste. Without new symphonies, orchestras will die.
글 노먼 레브레히트 영국의 음악·문화 평론가이자 소설가. ‘텔레그래프’지, ‘스탠더즈’지 등 여러 매체에 기고해왔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블로그(www.slippedisc.com)를 통해 음악계 뉴스를 발 빠르게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