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올리니스트·교육자·지휘자 콜야 블라허, ‘자기만의 길’을 내주는 스승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4년 12월 16일 9:00 오전

COVER STORY

 

바이올리니스트·교육자·지휘자

콜야 블라허

 

‘자기만의 길’을 내주는 스승

 

 

일찍이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던 어린 소년은 ‘아바도 시대’(1989~2002)의 베를린 필하모닉 최연소 악장으로 무대에 올랐다. 눈빛만으로도 지휘자의 의도를 파악하던 젊은 악장은 아바도의 오른팔이 되어 지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 그는 베를린 국립음대(한스 아이슬러) 교수로 재직하며 젊은 음악가들의 멘토로 자리매김했다. 제자들을 향한 냉철하면서도 따듯한 그의 조언은 새로운 세대의 음악가를 길러내는 길잡이가 되고 있다. 제자 최송하와 유다윤이 동석한 베를린 현지에서의 만남을 담았다.

박찬미(독일 통신원)·홍예원 기자(총괄) 사진 콜야 블라허 공식 홈페이지

 


01 INTERVIEW

 

©Felix

베를린 국립음대(한스 아이슬러)에 도착했을 때, 불그스름한 노을이 웅장한 건물 외벽에 내려앉아 있었다. 콜야 블라허(1963~)는 오전 9시에 시작된 레슨 릴레이를 이어가는 중이었다. 레슨실 문을 열자, 그는 마지막 레슨을 마친 제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순을 넘긴 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을 따라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20세기의 명 교육자’ 도로시 딜레이(1917~2002)를 사사한 블라허는 독립적으로 생각하는 음악가로 성장하며 솔리스트는 물론 유명 악단의 악장, 그리고 지휘자와 교육자까지 여러 타이틀을 달았다. 스스로 끊임없이 자신의 역할과 기능을 고민한 결과들이었다. 예전보다 훨씬 각박한 지금의 현실을 백번 이해하고, “나도 실수했다”며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솔직한 태도는 그를 ‘제자들에게 감화를 주는 교육자’로 거듭나게 했다.

젊은 시절, 콜야 블라허는 안네 조피 무터(1963~), 프랑크 페터 치머만(1965~), 크리스티안 테츨라프(1966~) 등과 함께 독일의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로 주목받았다. 동료들처럼 그 역시 솔리스트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30대 초반에 불현듯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가 이끄는 베를린 필하모닉의 악장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는 대단한 뉴스거리였다. 그는 이전까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서의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베를린필 단원들과 아바도의 신임을 얻은 블라허의 악단 생활은 6년간 순탄하게 이어졌다. 악단에서 민주적 리더십을 실천한 아바도에게 깊이 공감한 그는 6년의 베를린필 생활을 마치고도 아바도와 협업을 계속했다. 그들은 루체른에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함께 했는데, 음악을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체에 가까운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블라허는 악장 자리는 물론, 협연과 지휘를 겸하는 ‘플레이 리드’를 이끌었다.

블라허는 항상 자신의 사회적 기능을 추구했다. 독주자로서 스트라빈스키, 베르크 등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여 본격적으로 곡을 알렸고, 오케스트라 활동을 통해 민주적인 악단이란 어떠해야 하는가를 꾸준히 묻고 실험했다. 그리고 악단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고 느꼈을 때, 그는 주체적인 삶을 살기 위해 세계 여러 악단과 교류하는 독주자이자 지휘자로, 학생들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쌓는 교수로의 변화를 꾀했다.

솔리스트로 활약 중인 빌데 프랑(1986~), 베를린 슈타츠카펠레 악장 이지윤(1992~), 그리고 최근 국제 콩쿠르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최송하(2000~)와 유다윤(2001~) 등을 길러낸 블라허는 요즘 젊은 음악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뉴욕으로 향한 독일 소년

이제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

송하와 다윤은 함께 하지 않나요? 두 제자 때문에 이 인터뷰도 하기로 한 건데요.

걱정하지 마세요. 두 분의 인터뷰는 따로 진행될 겁니다.

그렇군요. 그럼 시작하죠!

제자를 생각하는 마음이 벌써 느껴지네요. 사실 몇몇 기사를 읽고 차갑고 냉정한 분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레슨 도중 이지윤 씨를 돌려보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요.

하하. 실제로는 웃으면서 따뜻하게 얘기했어요. “허니, 다음 주에 보자”라고요. 그날 지윤이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는 건 확실했습니다. 이럴 땐 레슨 시간을 채우기보다 연습하라고 돌려보내는 게 효율적이죠. 언젠가 제가 준비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레슨을 해주신 선생님이 계셨는데, 저 스스로 태만해지더라고요.

경험에서 우러나온 레슨 방식이었군요.

그런 셈이죠. 한 번은 다윤이 여름방학을 마치고 돌아와 몇 달 만에 레슨을 받았는데, 금세 그가 연구해야 할 두 가지가 명확해졌어요. 다윤도 스스로 뭘 해야 하는지 깨달았죠. 그 상태에서 제가 뭘 더하려고 하면 득보다 실이 됩니다. 가끔 학생이 더 이상 정보를 흡수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시간이 채워지지 않았더라도 레슨을 끝맺습니다. 식물이 수분을 많이 필요로 할 때와 조금 필요로 할 때가 있는 것처럼요.

수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그들과 비교해 당신의 학창 시절은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송하와 다윤은 잠깐 나가 있을래?(웃음) 요즘 학생들은 어릴 때부터 좋은 훈련을 받고 자라요. 제 고향인 베를린은 음악을 배우기에 아주 풍성한 자원을 갖추고 있었는데, 저는 그런 행운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당시 베를린은 작은 도시였어요. 네 살 때 처음 바이올린 연주를 시작했지만, 선생님을 찾는 것조차 어려웠으니까요.

작곡가인 아버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습득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음악을 배우기에 건강한 환경이었죠. 음악을 수공예나 목공, 집 짓는 일처럼 인식하게 해주셨어요. 교향곡을 작곡하던 아버지는 제게 테크닉 훈련의 중요성을 늘 강조하셨고, 매일 같이 연습하던 어머니는 음악을 대하는 마음가짐을 일깨워주셨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찾은 건 11~12세 무렵이었고, 15세에 뉴욕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했죠.

당시의 뉴욕은 베를린 출신의 열다섯 소년에게 적잖은 충격이었겠군요.

뉴욕은 어마어마한 연주자들의 집합소였어요. 가능한 많은 것을 흡수하려고 공연장에 자주 갔습니다. 입석에서 오페라를 보기도, 매일 저녁 카네기홀에 가기도 했죠. 다비드 오이스트라흐(1908~1974), 레오니드 코간(1924~1982), 이츠하크 펄먼(1945~), 핀커스 주커만(1948~), 도쿄 콰르텟, 과르네리 콰르텟…. 이들의 엄청난 연주를 들을 수 있었어요. 솔직히 이 시기에 연습은 많이 안 했습니다.(웃음)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수많은 연주자를 길러낸 도로시 딜레이(1917~2002)를 사사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무엇이 특별하던가요?

뉴욕에 도착했을 때, 저는 모차르트·베토벤·브람스를 연주하는 ‘옳은’ 방법이 있다고 믿는 순진한 독일 소년이었어요. 그런데 딜레이 교수는 제가 뭘 어떻게 연주하든 “그거 맘에 드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저는 ‘맘에 드는지가 아니라, 맞는지 틀리는지 알려줘야 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죠. 나중에야 그의 접근이 매우 건강하다는 걸 깨달았어요. 뭐든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니, 저만의 해석을 찾아 나설 문이 열리게 되었죠. 동시에 딜레이는 제 해석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도록 음색, 캐릭터, 비브라토를 연주할 수 있게 훈련시켰습니다.

인터뷰 현장의 최송하, 콜야 블라허, 유다윤 ©김예람

‘전통’을 따라가기보다 ‘자기 길’을 개척할 수 있는 독립적인 음악가를 기른 셈이네요.

그게 딜레이 교수의 궁극적인 목표였어요. 머릿속으로 그린 걸 해낼 수 있는 ‘생각하는 음악가’를 육성했죠. 이후에는 오케스트라, 현악 4중주단과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는 사라 장, 미도리, 길 샤함 등 소위 ‘영재’들을 가르쳤는데, 늘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듯한 교육 방식을 추구했죠. 가끔 딜레이 교수가 커리어를 좇는 인물로 오해받기도 했지만, 제가 본 그는 그 너머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이 각자의 삶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방법을 알려줬죠. 제가 직접 학생들을 가르쳐보니 더 확실해졌어요. 지금도 여전히 레슨 중에 딜레이 교수의 말을 인용하곤 합니다. 그의 제자였던 지휘자 조셉 스벤슨은 딜레이 삶의 마지막 한 주를 같이 보냈는데, 그때 이런 말을 했다더군요. “나는 너희들이 무엇을 하든 행복했으면 했단다. 독주자이든, 악단 단원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걸 하든 말이다.”

5년의 뉴욕 생활을 마치고 베를린으로 돌아왔어요. 줄리아드 음악원에서의 배움이 어떻게 발현됐나요?

스무 살, 아직 어린 나이였지만 집에서 혼자 여러 협주곡을 익혔습니다. 비로소 치열한 연습의 시기가 도래한 거죠. 한 번은 헝가리 출신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베그 콰르텟의 창립 멤버인 산도르 베그(1912~1997)의 마스터클래스에 참여했는데, 거기서 느낀 음악이 바로 제가 하고 싶은 음악이었어요. 그래서 몇 달에 한 번씩 그에게 레슨을 받으러 잘츠부르크에 갔죠. 긴 레슨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얻고, 호텔에서 하룻밤 묵고 다시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일정이었어요. 돌아와서는 다시 몇 달씩 홀로 연습하는 시간을 가졌죠.

현악 4중주에 탁월한 스승에게서 특별한 소통법을 배웠겠군요.

산도르 베그는 4중주 안에서 아주 친밀하게 연주했어요. 저는 이 방법을 오케스트라 협연에도 적용하고 싶었죠.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언어를 구성하는 단어와 문법을 익혔다면, 그에게는 말하기와 화법을 배웠습니다. 작품을 제대로 전달하는 법을 배운 셈이죠. 당시 여러 소규모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그 배움을 실천하는 시절을 보냈습니다.

 

베를린과 루체른에서 진화하다

콜야 블라허는 베를린 필하모닉과 몇 차례 협연하며 단원들과 안면을 텄다. 하루는 단원들이 그에게 귀띔했다. 악장 자리가 났으니 지원해 보라고. 그는 망설였다. 그에게 악단 경험은 줄리아드 음악원 재학 시절 교내 오케스트라가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한 단원이 그를 집으로 초대해 두 시간 동안 설득했다. 그의 언변에 홀딱 넘어간 블라허는 오디션을 통해 클라우디오 아바도(1933~ 2014)의 오른팔이 되었다. 그를 악장으로 들이려고 안달복달했던 단원들은 아직 빛을 보지 못한 블라허의 민주적 리더십을 일찍이 간파했던 게 틀림없다. 어쩌면 그들은 아바도의 임무를 받은 사제들이었던 걸지도!

 

프로 오케스트라 경험 없이 악장 생활을 시작해 걱정이 많았을 텐데요.

악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몰래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훔쳐봤어요. 공연에서도 악단 뒤쪽 좌석에 앉아 악장을 관찰했죠. 악장은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아요. 자기 파트는 물론, 악보 전체를 알아야 하고, 언제 누가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어야 했죠. 지휘자가 실수하면 그건 악장 책임이었어요. 그래서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죠. 초반에는 몇몇 단원이 제게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어요.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으니까요. 시간이 흐르며 저도 많이 배웠고, 덕분에 단원들 간의 호흡은 더 좋아졌습니다. 무엇보다 오케스트라의 작동법을 알고 나니, 독주도 훨씬 좋아졌어요. 그 결과, 아바도가 지휘하는 베를린필의 협연자로 거의 매해 무대에 설 수 있었죠.

아바도의 큰 신임을 얻었네요. 그의 임기 중 첫 악장이기도 했고, 아바도가 창단(2003)한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도 악장으로 활약했어요. 아바도는 민주적인 소통의 리더십으로 유명한데, 실제로 그와 일해보니 어땠나요?

그는 단원들에게 엄청난 자유를 줬어요. 각자 원하는 대로 연주해도 되고, 마치 제 심장을 무대에 꺼내놓아도 될 것 같은 환상을 갖게 했죠. 아바도는 그들에게서 나온 재료들을 잘 엮는 데 탁월했어요. ‘자유를 준다’고 하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아바도와의 연주는 늘 도전이었습니다. 자유는 곧 책임을 의미했거든요. 그는 단원들에게 무언가를 직접 주문하는 일이 없었기에, 단원들 스스로 악보를 철저히 공부하고 자신이 추구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했습니다.

아바도와 함께 베를린 필하모닉에 큰 변화를 불러왔습니다. 그렇게 6년 뒤, 악단에 작별을 고했어요.

베를린필에서의 시간은 제 인생의 아름다운 한 장이 틀림없지만, 어느 순간 남은 일생을 같은 일을 하며 보내고 싶은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어요. 고심 끝에 퇴직을 결심하고도 내가 옳은 일을 한 건지 확신하지 못했죠. 아바도는 제게 “나가서 행복하지 않으면 돌아와도 된다”고 말해줬습니다. 몇 해가 지나고 나서야 잘한 일이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이후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 창단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다시 오케스트라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아바도와 함께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건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는 다른 악단들과 정말 달랐거든요. 그저 순수하게 연주하고 싶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악단이죠. 단원들을 경영할 위원회나 매니저도 필요 없었어요. 아주 큰 실내악단 같았습니다. 저 혼자 무엇을 결정하기보다 민주적인 운영 방식을 따랐고, 단원들의 자리도 모두 함께 정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때부터 ‘플레이 리드’를 시작했어요. 지휘자 없이 악장 자리에서 협연과 지휘를 겸했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그렇게 10년 넘게 경험을 쌓고 결심했습니다. 지휘를 해야겠다고요.

이전에도 지휘를 꿈꿔본 적이 있나요?

족히 지난 20년 동안 관심을 둔 분야였어요. 감히 실현해 보려는 생각도 못 하다가 ‘플레이 리드’를 통해 처음 지휘의 맛을 봤죠. 한동안은 여러 악단의 악장 자리에서 연주와 지휘 겸하기를 고집했습니다. 그러던 중 팬데믹이 상황을 바꿔놓았어요. 거리 두기로 인해 오케스트라 배치가 무대에 분산되어 버렸거든요. 베토벤 교향곡 1번을 연주하는데 마치 말러 교향곡 9번을 연주하듯 무대를 다 썼죠. 악장 자리에서 지휘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고, 포디움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더욱 정확하게 원하는 바를 전달하기 위해 지휘 테크닉을 배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습니다.

포디움 위에 직접 서보니, 지휘의 매력은 무엇이던가요?

제게 자유를 줬습니다. 밀리미터의 움직임까지 컨트롤해야 하는 바이올린 연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거든요.(웃음) 독주, 실내악, 관현악, 그리고 제 티칭까지 모두 아우르는 게 지휘입니다. 특히, 수많은 학생을 만난 경험을 토대로 독주자, 악장, 단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감 잡을 수 있었죠. 아바도의 철학을 이어 가능한 단원들에게 자유를 주는 지휘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독주, 플레이 리드, 지휘까지 활발히 겸하고 있습니다. 전업 지휘자를 꿈꾸고 있나요?

언젠가 사이먼 래틀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지휘자가 잘하면 나이 들었다는 뜻이고, 못하면 아직 젊다는 뜻이다. 독주자는 반대로 젊었을 때 최상의 컨디션이 나온다.” 바이올린 연주가 힘에 부치기 시작하는 때가 오면, 그때의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걸 하게 되지 않을까요?

 

다음 세대를 위하여

솔리스트로서의 전성기는 그가 악장, 지휘자, 교육자로서 경험을 모두 쌓은 뒤에 찾아왔다. 블라허는 2000년대 초반부터 바흐·비발디·슈만·닐센·스트라빈스키·베르크·쿠르트 바일·보리스 블라허·번스타인 등의 바이올린 협주곡과 프로코피예프·힌데미트·풀랑크·쇼스타코비치·바인베르크·슈니트케의 실내악 등을 수십 장의 음반에 담았다. 이처럼 그는 독보적일 정도로 다채로운 레퍼토리를 지닌 바이올리니스트다. 그가 솔리스트로서 오랫동안 건강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제자들에게 전수하고 싶은 것 또한, 레퍼토리의 다양성이다.

 

©Felix Broede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 인상 깊었습니다. “유연함을 유지하기 위해 늘 새로운 작품을 배운다”고요.

어릴 때부터 늘 새 작품을 배우는 일정을 짜두곤 했어요. 저는 학교에서 배운 작품들로 경력을 쌓지 않았습니다. 비에니아프스키, 차이콥스키 등의 작품은 바이올린을 배우기 좋은 곡들이지만, 정작 제게 중요했던 작품은 베토벤, 슈만, 스트라빈스키, 베르크, 쿠르트 바일 등이었습니다. 제가 정말 자주 연주하는, 제 커리어와 인생을 만든 작품들은 오히려 단 한 번도 레슨 받지 않은 곡들이었죠.

제자들에게 레퍼토리의 길잡이가 되어주실 것 같네요.

최근 여러 콩쿠르를 순회하며 상을 받는 연주자들이 늘어나고 있지만, 두 시즌 이상 유지할 수 있는 레퍼토리를 갖추고 있는 연주자는 드뭅니다. 단순히 브람스와 차이콥스키 협주곡만으로는 커리어를 이어나가기 어려워요. 그래서 학생들에게 콩쿠르와 공연을 잘 선택하라고 조언합니다. 때론 공연이나 콩쿠르 참가보다 코른골트나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 같은 새로운 작품을 권하기도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매해 수십 명의 콩쿠르 우승자가 쏟아지고 있어요.

제가 활동하던 당시 내로라하는 독일 바이올리니스트는 테츨라프, 조피 무터 등 5~6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쟁자가 수백 명에 달해요. 콩쿠르도 많아졌고, 매년 여러 명의 우승자가 탄생하죠. 오케스트라나 공연 기획사에서도 누구를 택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합니다. 젊은 연주자들이 자기만의 길을 찾기가 더 어렵게 됐습니다. “이 콩쿠르에 나가야 할까? 저 공연을 해야 할까?” 이런 수많은 질문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때 결정을 잘 내리지 않으면 단기적인 커리어로 연주 생활이 끝나버릴 위험이 큽니다. 콩쿠르 참가에 대해서는 속해 있는 매니지먼트의 의견을 들어보라고 조언하기도 해요.

젊은 연주자들이 스스로 어떤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까?

평생 여행하며 살고 싶은지, 안정된 집을 원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호텔과 공항에서 지내고 싶은지, 혹은 가족을 꾸리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해야 하죠. 이런 현실적인 고민도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는 데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니까요. 제가 처음 함부르크 음대 교단에 서게 된 것도 당시 집에 어린아이들이 있어, 여행할 일이 많지 않은 안정적인 일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젊은 시절을 돌아봤을 때, 음악적으로 가장 큰 고민은 무엇이었나요?

제 오랜 커리어는 ‘어디에서 건강한 기능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의 결과이기도 합니다. 저는 젊었을 때부터 슈만과 스트라빈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어요. 이 작품들을 깊이 탐구한 첫 세대로, 당시 클래식 음악의 사각지대를 밝힌 셈이었죠. 루체른에서 새로운 오케스트라를 만든 것도,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여러 오케스트라에서 ‘플레이 리드’로서 보다 민주적인 지휘의 모습을 보여준 것도 제가 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추구한 결과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깊이 생각하면서요. 그러기 위해선 기존에 갖고 있던 역할과 기능도 새로운 목표에 맞춰 바꿀 줄 아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실내악 협연자였다가, 악장이었다가 다시 독주자로. 플레이 리드, 지휘자, 교육자로 계속 변화를 추구한 것처럼요. 시간에 따라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필요합니다.

가르치는 것이 지휘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하신 것처럼, 교육자로서의 경험이 음악가의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들었을 것 같습니다.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지 않은 채, 한 명의 개인으로서 주체적으로 음악 생활을 경영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어요. 악장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제가 없어도 다른 훌륭한 악장들이 연주를 이어 나가죠. 학생들과 개별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는 점이 교육자로서의 가장 큰 장점이었습니다.

학생들과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 가는 편입니까?

지윤과는 7년 정도, 일본의 바이올리니스트 가나가와 마유미(1994~)와는 10년 동안 함께 작업했습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지속하는 관계를 좋아합니다. 학생들이 한곳에 머물며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요즘 학생들은 큰 스승에게 영감을 얻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큰 스승들은 단 한 명의 선생님 아래서 배웠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다소 구식일 수 있겠지만, 학생들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학생과의 일화가 있다면요.

저를 찾아오는 학생 모두와 행복한 관계를 맺겠다는 것은 욕심이겠죠. 제가 제시하는 기술적인 훈련을 받아들이지 않는 학생들이 있어요. 이런 경우 2~3년 후에 관계가 정리되곤 하죠. 몇 년이 지나고 그런 학생들에게서 메일이 옵니다. ‘블라허 선생님, 저는 지금 이 오케스트라에 있습니다. 이제야 왜 그런 훈련이 필요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라고요. 이런 연락을 받을 때 정말 기쁩니다. 저 역시 같은 경험을 해본 적이 있기에 그 마음을 이해합니다. 딜레이 교수와 관계가 썩 좋지 않은 시절이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스승의 가르침을 이해하게 되었죠.

어떤 음악가를 길러내고 싶으신가요?

저와 함께 한 시간이 학생들에게 자기의 의견과 개성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 학생을 가르치며 다양성을 존중하는 방식을 추구해 왔어요. 어떤 학생은 팔이 짧을 수도, 어떤 학생은 목이 길 수도 있죠.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연주하도록 안내하려고 합니다. 테크닉과 더불어 너무 열정적이거나 지나치게 소극적인 마음가짐 등 개개인이 가진 한계를 개선하기도 하고요. 저 역시 한계를 갖고 있어요. 그렇기에 지난 40년 동안 무대에서 꾸준히 지켜야 했던 것들이 있었고요.

재능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한 번은 아내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진짜 재능은 자기 훈련을 할 줄 아는 능력’이라고요. 제 학생 중 성공한 이들은 대부분 수년간 끈질기게 노력하고, 목표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 자신의 ‘재능’을 믿고 그것을 갈고 닦지 않은 사람들은 오래가지 못했어요.

앞으로 어떤 스승으로 기억되고 싶나요?

학생들이 독립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 그리고 그들의 개인적인 면까지 이해해 준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다시 삶의 전환점이 올 것 같나요?

모든 게 잘 풀린다고 가정하면, 앞으로 20년 정도 남지 않았을까요? 확실한 건 일만 하다가 일생을 마치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그래서 일상을 다르게 바라보려고 합니다. 그럼 나무도, 호수와 하늘, 햇빛도, 모든 것들이 특별해 보이죠. 앞으로 학생들을 얼마나 더 가르칠지, 음악 외의 다른 일을 하고 싶은지 스스로 묻곤 합니다. 평생 음악을 하고, 가족을 위해 일해 왔기에 그 외의 다른 것을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지휘를 더 하고 싶고, 음악이 아닌 다른 것도 찾아보고 싶습니다. 아무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때가 온다면, 다른 일을 찾아야 하겠죠. 그럼 지금보다 시간은 많아지겠네요!(웃음)

박찬미(독일 통신원)

 


02 LEARNING

 

한국의 제자들 최송하·유다윤

스승의 가르침 아래, 그들의 꿈은 성장 중

 

지난 5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 세 명의 한국인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 최송하와 유다윤은 콜야 블라허의 가르침 아래 같은 클래스에서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해 몬트리올 콩쿠르 2위(최송하), 롱 티보 콩쿠르 2위 및 모차르트 콩쿠르 1위(유다윤) 등 국제 콩쿠르에서 꾸준한 성과를 내고 있는 이들은 음악적 성장의 요인으로 ‘스승의 진심 어린 조언’을 꼽았다. 좋은 스승은 훌륭한 제자를 키워낸다. 그 사제의 연이 담긴 베를린의 레슨실 풍경을 살짝 들여다봤다.

 

최송하

현재 베를린 국립음대(한스 아이슬러)에 재학 중입니다. 이 학교를 선택했던 계기는 무엇이었나요?

최송하 베를린은 세 개의 오페라 하우스와 다양한 연주 홀, 유럽 최고의 오케스트라, 여러 박물관과 갤러리 등이 풍부해 음악과 문화를 체험하기에 좋습니다. 특히, 이 학교는 다른 대학에 비해 규모는 작지만 학문적 집중도가 높고, 학생들 간의 친밀한 교류가 활발한 편이에요. 마침, 페스티벌과 실내악 활동을 통해 알고 지내던 동료들이 베를린에 거주하고 있어 자연스럽게 이곳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유다윤 어렸을 때부터 아바도/루체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 영상을 보고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중 드뷔시 ‘바다’의 솔로 파트를 연주하는 콜야 블라허 선생님의 연주를 특별히 인상 깊게 들었는데, 선생님이 이 학교에 재직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주저 없이 지원했어요.

블라허 교수의 첫인상은 어떠했나요?

유다윤 학생들에게 엄격하다는 소문과 달리, 첫 레슨 때 미소를 지으며 독일어와 영어 중 더 편한 언어를 물어보시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남습니다.

최송하 런던에서 열린 마스터클래스에서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사흘 동안 레슨을 받고 위그모어홀에서 연주하는 일정이었는데, 처음 보는 학생인 제게 하나라도 더 가르쳐주고자 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어요. 이전까지 연주자보다 청중을 위한 마스터클래스에 익숙했던 제게 선생님의 수업 방식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수업에서는 주로 어떤 점을 강조하나요?

최송하 항상 기본기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학업 초기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내용뿐만 아니라 기초 지식을 재확인하고 이를 습관화하도록 도와주시죠. 또한, 선생님께서 가르쳐주신, 공연장에 따라 소리를 조절하고 아이디어와 감정을 소리로 번역해 전달하는 방법은 제가 무대 위에서 연주하는 데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국내외 여러 바이올리니스트가 블라허 교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같은 클래스에서 수업을 들으며 서로에게 배우는 점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유다윤 처음 접하는 레퍼토리에 대해 의견과 정보를 나누곤 합니다. 종종 서로의 피아노 반주를 해주기도 하고요. 동료로서 많이 의지하는 편이에요.

최송하 다윤이는 도전적인 아이디어와 뚜렷한 음색을 지닌, 배울 점이 많은 연주자예요. 음악적 아이디어가 풍부하고, 작곡가와 곡에 대한 지식이 깊어 새로운 음악이나 리코딩을 추천해 주기도 하죠. 같은 곡을 연주할 때는 서로의 마킹과 핑거링 등을 공유하며 도움을 주고받습니다.

유다윤

블라허 교수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연주하는 음악의 98퍼센트 정도는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연주”라며 실내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실내악 작품 연주 시 두 분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점은 무엇인지도 궁금하네요.

유다윤 현악 4중주는 작곡가의 작품 중에서 중요한 입지를 가진 경우가 많아요. 지휘자는 성악가와 한 무대에 올라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 실내악은 바이올리니스트로서 특히 진지하게 다뤄야 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제1바이올린의 리딩과 제2바이올린의 밸런스 및 구조적인 측면까지 세밀하게 살펴야 합니다.

최송하 실내악은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제 음악적 여정에서 큰 부분을 차지해 왔습니다. 페스티벌에서는 주로 바이올린을 연주했지만, 실내악 활동에서는 비올라 파트를 맡아 중간 음역에 대한 새로운 재미를 발견하기도 했죠. 팬데믹 시기에 일 년간 선생님께 현악 4중주를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당시 효율적인 리허설 방법과 동료와의 음악적 대화법 등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언니(첼리스트 최하영)와의 듀오 무대도 준비하고 있어요.

앞으로 어떤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나요?

최송하 열린 마음으로 다양한 기회를 탐색하며 주어진 모든 기회에 한계 없이 도전하고 싶어요. 음악가로서 성장함과 동시에 청중과도 진심으로 소통할 수 있는 연주자가 되고 싶습니다.

유다윤 한결같이 음악에 헌신하고, 청중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줄 수 있는 바이올리니스트가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석사 과정이 1년 남았는데, 남은 기간 동안 다양한 레퍼토리와 경험을 쌓고 싶어요.

홍예원 기자 사진 더브릿지컴퍼니

 

최송하(2000~)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재교육원을 거쳐 메뉴인 음악원을 졸업했고, 현재 베를린 국립음대(한스 아이슬러)에서 콜야 블라허를 사사하고 있다. 예후디 메뉴인 바이올린 콩쿠르 2위 및 청중상, 프레미오 리피처 콩쿠르 2위 및 특별상을 받았으며, 지난해 몬트리올 콩쿠르에서 2위에 올랐다.

유다윤(2001~) 예원학교·한예종 졸업 후, 베를린 국립음대(한스 아이슬러)에 재학 중이다. 2022년 비에니아프스키 콩쿠르 파이널 리스트, 2023년 롱 티보 콩쿠르 2위에 올랐다. 아레테 콰르텟의 객원 멤버로 모차르트 콩쿠르 1위(2023)에 입상했으며, ARD 콩쿠르에서 ‘크론베르크 아카데미 특별상’을 받았다.

 


RECORD

 

최송하·유다윤이 꼽은 콜야 블라허의 음반 Best 3

 

 

스트라빈스키 & 베르크 바이올린 협주곡(2005)

클라우디오 아바도/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협연 콜야 블라허) DG 4763069

“언젠가 선생님께서 20세기의 음악 어법이 당신과 잘 맞는다고 하신 적이 있어요. 그를 반증하는 듯 뛰어난 연주가 담긴 녹음입니다.”(유다윤)

 

 

 

쇤베르크: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 바이올린 협주곡(2015)

마르쿠스 슈텐츠/쾰른 귀르체니히 오케스트라 (협연 콜야 블라허) Oehms OC445

“쇤베르크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매우 복잡하고, 기술적으로도 까다로워요. 블라허 선생님의 연주는 작품의 다채로운 색채와 드라마틱한 요소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최송하)

 

 

풀랑크: 실내악과 협주곡(2016)

콜야 블라허(바이올린), 에릭 르 사쥬(피아노), 마티외 듀퍼(플루트),

프랑수아 를뢰(오보에), 프랑수아 살크(첼로) 외 Sony G010003457479A

“블라허 선생님이 피아니스트 에릭 르 사쥬와 함께 연주한 풀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FP119가 담긴 이 음반도 즐겨 듣는 편입니다.”(유다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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