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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 이정호
유산을 ‘모색’하고, 새로움을 ‘탐색’하다
국악기와 전자음악이 만나, 전통-현재-미래를 잇는 순간을 보여주다
국악도 관현악, 실내악, 독주곡들이 작곡되어 세상에 꾸준히 나오고 있다. 대학 같은 전문교육기관이 국악작곡 전공자들을 배출하고, 그들에 의해 나오는 음악들이다. 20세기에는 이들을 통해, 오래된 악기에 오늘의 어법으로 빚은 곡들이 담기는 창작국악계가 형성되었다.
작곡이란 무음(無音)의 지대에서 소리를 낳는 작업이지만, 동서양을 막론하고 작곡가들은 0도의 지대에서 막연히 출발하지 않는다. 주위를 살펴 챙겨갈 소리의 유산들을 골라내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관객들의 시선을 살핀다. 이정호 역시 이러한 과정에서 살아가기에 이번 공연의 제목을 (‘유산’(Legacy)을 뜻하는) ‘Legacy of J’라고 지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더불어 자기 작품이 미래음악을 위한 유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스며든 제목이기도 하다.
거문고, 피리, 해금과 정가, 가야금, 대금과 아쟁이 전자음악과 만난 5곡의 독주곡이 오르는 공연이다. 오랜 시간을 머금고 전승된 국악기 ‘소리’에, 오늘을 살아가는 자의 ‘마음’과 ‘소리의 기술’(전자음악)이 담겼다.
공연의 첫 곡으로 대화의 물꼬를 터보자. 거문고와 전자음악이 어우러진 ‘버닝’은 어떤 곡인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욕망의 소리이다. 마치 긴 터널 끝에 보이는 작은 불빛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린다. 심장이 터질 듯 달려 언젠가 모든 이들의 마음에 이 뜨거운 소리가 새겨지길 바라며 작곡한 곡인데, 거문고는 곡 안에서 계속 뛰고 있다.
‘버닝’이 전통악기와 전자음악의 속도감이 빚어내는 곡이라면, 해금·정가·전자음악이 함께 하는 ‘사랑 거즛말이’의 모티프나 분위기는 상대적으로 고전적인 분위기가 물씬하다.
자신은 잠 못 이룰 정도로 너무 그리운데, 작품 속 임은 잠들어서 내가 꿈에 보인다고 하니 야속한 마음에 사랑한다고 한 그 말도 모두 거짓말이라 탓하며 그립고 간절한 마음을 담고 있다. 전통음악 속의 언어를 이해함으로써 우리 음악을 감정적으로 들여다보도록 작곡했다.
전자음악을 사용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전자음악은 소리를 통해 관객에게 직관성을 제공하는 데에 적합하다. 피리와 전자음악을 위한 ‘밤의 절경’에서 ‘밤’이란 오로라가 흐르는 낭만의 밤일 수도, 네온사인이 번쩍이는 도시의 밤일 수도 있다. 피리만 사용한다면 피리 소리가 낯선 관객에겐 지금 말한 밤의 풍경이 잘 상상되지 않을 텐데, 전자음악과 함께 하면 그들에게 직관적인 풍경을 펼쳐낼 수 있다. 나의 소리 세계로 더 친절히 안내하고자 이러한 기술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공연으로 보여주려는 콘셉트나 의도는 무엇인가?
일단 국악 장르의 확장성을 타진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물론 전자음악과 함께한 이런 공연 형태는 예전에도 있었기에 내가 첫 시도라 할 순 없다. 하지만 ‘작곡가 이정호’로서의 첫 시도인 것은 확실하다. 국악계에서 자주 연주되는 나의 곡은 주로 국악관현악 형식이 많아 나는 국악관현악 전문가로 은연중 통용된다. 하지만 나의 작품 목록에 이런 장르와 분위기의 곡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소리의 세계를 짓는다는 것
이정호에게는 바쁘게 위촉이 들어오고, 이를 수용해 다른 빛깔의 창작곡을 써낸다. 또 다른 이정호가 있다고 착각할 정도로 다작이며, 초연 후에는 여러 악단이 그의 관현악곡을 탐낸다. 그의 이러한 곡들을 살펴보면 몇 개의 특징이 도드라져 보인다. 작곡가들이 “이 곡은 국악창작곡이다”라고 외치기라도 하듯 전통음악의 선율을 그대로 차용할 때, 이정호는 과거의 유산(선율)에 안주하지 않는다. 국악적인 요소는 각 악기에도 십분 녹아있다는 믿음 아래 관현악이 연출하는 음향의 크기를 활용해 압도적인 소리의 장을 펼쳐내고, 그 위에 세운 소리의 건축물 역시 정교하다. 그의 이러한 주요작들은 대부분 관현악의 좌표에 위치한다.
독주곡들이지만 일명 ‘이정호표 관현악 어법’처럼 느낄 법한 ‘소리와 세계의 크기’를 보여주는 곡들이다.
여러 소리와 음색이 어우러지는 입체적 형태의 곡 짓기를 좋아한다. 학부 시절에 사사했던 故 이해식 교수님도 ‘입체성’과 ‘변화’에 대해 강요하셨다. 그의 가르침은 이제 내 음악의 방향성이 되었고, 나 역시 학생들한테 이를 강조한다. 한국음악에서의 입체성이라고 할 때 그것은 공간감, 색채감, 악기 음색 등 다양한 것을 뜻한다. 무엇보다 입체감을 살리는 데에 국악기의 개성적인 음색을 살리는 방식이 가장 좋은 것 같다. 서양악기에 비해 저음역의 악기들은 부족하지만, 하나씩 살펴보면 음색이 독특하고, 강한 색채를 지녔다. 이러한 소재들을 바탕으로 곡을 짓다 보면 이 소리를 다 담기 위해 소리와 세계의 크기가 자연스레 커진다.
작곡할 때 가장 염두에 두는 것은 무엇인가?
곡을 짓는다는 것은 자신을 표현하는 작업이자 음악계의 미래를 위한 작업이다. 나를 대변하는 예술성, 관객들에게 가서 닿을 대중성, 음악가들에게 선택받을 수 있는 지속 가능성 등을 생각하며 곡을 쓴다.
작곡가로 성장해 국악관현악단 단원에서 교수로, 또 지휘자로 활동하며 여러 음악적 변화를 거쳤을 것이다. 본인의 작곡 인생을 어림잡아 20년이라 할 때, 시기별 변화의 흐름을 정리한다면?
20대에는 관객이 듣기 좋은 음악을 많이 만들었다. 다작(多作)의 시기였고, 열정의 시간이었다. 세상에 눈을 뜨던 30대에는 그 세계에 나 자신을 알리고 싶었다. 관현악·실내악·독주곡 등을 넘나든 유연한 시간이었다. 40대에 이르러서는 음악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20~30대에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완숙해진다는 느낌과 함께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어가고 있다. 요약하면 20대에는 열정, 30대에는 작곡가로서 성공에 대한 갈망, 40대는 인생과 함께 하는 예술이랄까?
이번 공연은 2019~2021년에 작곡된 독주곡들이 한데 모이는 시간이다. 그간 국악관현악으로 대변되던 이정호의 ‘독주곡 베스트 컬렉션’이며, ‘낯선 이정호’를 표출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 곡들에 거는 기대가 있다면?
국악기를 위해 태어났지만, 무용·연극·영화·미디어아트 등 국악 외 여러 장르와 협업할 수 있는 소리로 다시 태어났으면 좋겠다. 작곡가의 길이란 ‘위촉’에 따라 달라지는데, 국악으로 난 길 외에도 여러 장르와 만날 수 있는 길이 담긴 음악들이다. 다른 무대에서 다른 장르와 다시 태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글 송현민(음악 평론가) 사진 서울돈화문국악당
이정호(1982~) 대학에서 국악작곡을 공부했고, 프란츠 슈베르트 음악대학을 졸업(석사)했다. 온나라국악경연대회, 21C한국음악프로젝트 입상, KBS국악대상, 대한민국작곡상을 수상했다. 2020년 창단한 제이국악오케스트라 예술감독이자, 부산대 한국음악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Performance information
이정호 ‘Legacy of J’
12월 22일 오후 7시 서울돈화문국악당
송다솔(거문고), 박지영(피리), 황한나(해금), 김윤지(정가), 하지희(가야금), 손한별(대금), 정선겸(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