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1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피아니스트 한옥수
삶의 위안이 되었던 피아노 선율
글 한옥수(1938~) 이화여대 수석 졸업 후, 신시내티 음악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4년 카네기홀에서 데뷔 무대를 갖고, 1967년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을 받았다. 귀국 후 이화여대, 경희대, 단국대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1995년 한·로만손 국제 피아노 콩쿠르 개최 및 2005년 제정한 가원상을 통해 젊은 음악가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있다.
자연과 생명으로부터
#하이든 #교향곡 101번 ‘시계’ #어린 시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베를린 필하모닉
감상 포인트 시계의 초침 소리처럼 들리는 2악장의 선율
어린 시절, 아버님의 음악 사랑 덕분에 여러 악기를 만져보고 들을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풍금, 바이올린, 아코디언, 그리고 축음기에서 나오는 다양한 악기 소리는 제 삶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고, 소리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었지요.
예를 들어, 창밖의 자작나무 잎새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풍경을 보면 그 색색의 잎들이 하나하나 돌아가며 마치 수백 마리의 나비가 춤추는 듯한 느낌이 들곤 했습니다. 그 아름다운 색의 변화와 움직임은 제 맥박을 뛰게 했고, 그때부터 각각의 생명들이 자신의 고유한 맥박을 통해 리듬을 창조해낸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지금도 생명의 움직임이 혼돈의 상태에서 일순간 거대한 조화를 이루며 세상의 질서를 만들어 낼 때 창의성을 실감하게 됩니다.
하이든 교향곡 101번은 2악장의 반주음형이 시계의 초침처럼 들린다고 해서 ‘시계’라는 부제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2악장은 안단테의 변주곡 형식으로, 바순과 현의 피치카토가 규칙적인 리듬으로 연주되는데, 이때 등장하는 바이올린의 우아한 리듬이 마치 시계의 초침 소리를 연상케 합니다.
저 역시 이 곡을 들으며 ‘이 작은 기계(축음기)에서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을까?’라며 놀라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이 곡을 들으면 작은 음악 소리에 즐거워했던 5~6세 때의 제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바흐의 음악적 유산
#바흐 #푸가의 기법 #음악적 멘토
타티야나 니콜라예바(피아노)
감상 포인트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음악으로 표현한 바흐의 유작
바흐의 푸가의 기법은 그가 직접 손으로 쓴 마지막 작품입니다. 하나의 테마 안에 다양한 대위법과 캐논을 다룬 이 곡은 음악 역사상 화성의 정교함에 있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바흐는 눈에 심각한 문제가 생겨 이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그의 유작이 된 이 곡의 초판은 바흐 서거 2년 후인 1752년에 공개되었습니다.
뉴욕에 거주하던 시절, 리버사이드 드라이브 근처에 바흐 스페셜리스트로 잘 알려진 피아니스트 로잘린 투렉(1913~2003)이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바흐 연주에 대한 충언을 듣고자 평균율과 파르티타, 그리고 이탈리아 협주곡 BWV971을 준비해 어렵게 그의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는 연주 중간에 “다음” 또는 “그다음”이라는 말 외에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고 제 연주를 듣기만 했습니다. 저는 긴장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사뭇 두려운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연주가 끝난 후, 그는 저에게 “바흐 연주자가 되고 싶지 않으냐”고 물었고, 저는 당황한 채 “연주 여행을 떠날 때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지금까지도 바흐는 제 음악의 기초이며, 그에게 순종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훌륭한 음악가들은 진정한 음악적 표현이나 음악의 생명을 자연과의 긴밀한 접촉에서 얻는다고 생각합니다. 바흐의 작품들이 그러하며, 그가 자연의 모습을 기초로 인생의 기쁨과 슬픔을 음악으로 표현했다는 것을 굳게 믿습니다.
요즘의 저는 젊었을 때와는 다릅니다. 모든 면에서 그러함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저의 정신적인 멘토를 잊지 않기 위해 바흐의 작품을 계속 공부하고 있습니다. 주제가 나올 때마다 긴장감 속에 심장이 활발히 뛰고 있음을 느끼지요. 작품을 연주하며 서로의 마음을 달래고, 위안을 주고받으며, 음악을 통해 심장이 뛰게 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합니다.
쇼팽의 발자취를 따라서
#쇼팽 #24개의 전주곡 #빗방울 전주곡 #마요르카섬의 추억
블라디미르 호로비츠(피아노)
감상 포인트 쇼팽의 비통한 심정이 담긴 24개의 독립적인 작품들
젊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쇼팽의 건강이 가장 악화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만진 모든 물건을 소각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쇼팽은 이러한 이유로 연인인 조르주 상드(1804~1876)와 함께 스페인의 마요르카섬 발데모사에 위치한 오래된 수도원으로 이주하기로 했습니다. 저도 그곳에서 약 일주일을 보낸 적이 있는데, 그의 흔적을 보며 쇼팽의 작품과 일생을 되새기곤 했지요.
쇼팽은 이곳에서 24개의 전주곡을 작곡하고 완성했습니다. 그는 악화된 건강 상태와 상드와의 불안정한 관계로 인한 어려움 속에서도 짧은 작품 하나하나에 자신의 감정을 집요하게 담아냈습니다. 저는 이 작품들을 어느 것 하나 빠짐없이 자주 연습했고, 지금까지도 즐겨 연주하고 있습니다. 곡을 연주할 때마다 인간의 감정 변화와 그 정도가 음악을 통해 얼마나 쉽게 반응할 수 있는지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작은 주제나 멜로디로 심장의 맥박수를 바꿔 놓을 수 있다는 사실은 모든 예술가, 특히 이 작품을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에게 큰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굴곡이 많았던 제 인생 속에서도 이 작품을 연주할 때면 쇼팽의 대변인이 되었음을 느끼곤 합니다.
‘객석’ 2016년 10월호에 실린 피아니스트 한옥수
“1964년 카네기홀에 데뷔한 그녀는 당시 컬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사의 지사 중 하나였던 에릭 시몬 매니지먼트의 전속피아니스트로 활동했으며, 1966년부터 1973년까지 롱아일랜드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순회공연으로 “바하를 제대로 연주할 수 있는 동양 유일의 여류 피아니스트”라는 호평을 받았던 그녀는 1966년 한국에서 리사이틀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