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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츠 주립극장 ‘일 비아지오’ 10.19~11.22
인간이 지닌 고독함의 경계
삶을 돌아보게 하는 오페라. 한국 지휘자 가진이가 표현한 그 여정의 무게
린츠 주립극장에서 현대 오페라 ‘일 비아지오(이탈리아어로 ‘여정’)’가 초연됐다. ‘일 비아지오’는 이탈리아의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루이지 피란델로(1867~1936)의 소설을 대본으로 한다. 피란델로의 250여 편의 중편 소설 중 비슷한 내용의 두 소설 ‘다른 집으로부터의 빛’과 ‘여정’이 오페라로 만들어졌다.
극작가 겸 작곡가 알로이스 브뢰더(1961~)는 이 두 단편을 읽자마자 악상이 떠올라 짧은 시간에 작품을 완성했다. 그는 오늘날까지 110여 개의 오케스트라·실내악·성악 작품을 남겼으나, 주요 작품이 현대 전자음악이었기에 대중에게는 그의 진가가 늦게 알려진 편이다. 팬데믹 이후, 오페라계는 새로운 작품을 찾던 중 브뢰더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오페라 ‘죽은 자들의 아내들’(2013)과 ‘예상치 못한 재회’(2014)가 독일 오페라계에서 큰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어둠과 빛 사이
오페라 ‘일 비아지오’는 유럽이 혼란에 빠져들던 1930년대 이탈리아 시칠리아섬의 변두리를 배경으로 한다. 사랑은 어디로 갔는지, 증오가 팽배한 시대다. 그리움은 잊히고, 무관심이 외투처럼 걸쳐지고, 전염병 같은 나태함이 만연하다.
이 오페라의 첫 번째 이야기 ‘다른 방으로부터의 빛’은 어렸을 때 아버지로부터 받은 폭력적인 기억의 트라우마를 가진 청년 툴리오 부티의 삶을 조명한다. 성격이 괴팍하고, 악명 높은 외톨이인 툴리오는 클로틸디나 니니가 운영하는 여인숙에 묵는다. 방에는 전등이 없어 어둠에 잠겨 있다. 툴리오가 헤어 나오지 못하는 폭력의 트라우마는 그 시대의 폭력성을, 방 안의 어둠은 시대적인 암울함을 상징한다.
툴리오의 방이 길 건너편 집의 창문에서 들어오는 빛으로 밝아진다. 그는 이제 반대편 아파트에서 부부와 아이들이 단란한 가정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여인숙 주인 클로틸디나는 툴리오가 이웃 가족을 지켜본다는 사실을 알게되고, 마르게리타 부인을 찾아가 이 사실을 고자질한다. 하지만 마르게리타는 커튼을 닫는 대신 자주 창가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들은 몇 마디 말만으로 함께 사랑을 나눈다.
툴리오는 어두운 방을 떠나고, 마르게리타도 가족을 떠나 툴리오와 함께한다. 그러나 얼마 후 툴리오와 마르게리타는 클로틸디나의 여인숙 방을 빌린다. 마르게리타의 아이들을 관찰하기 위해. 이제 두 사람은 관중으로서 이상해진 불빛을 아래에서 사건의 흐름을 몰래 지켜본다.
사랑과 죽음의 경계
오페라의 두 번째 이야기인 ‘여정’은 짧고 불행한 결혼 생활 후 남편과 사별하고 13년 동안 고독하게 살아온 아드리아나 브라지의 삶을 그린다. 그녀는 시칠리아섬에서 두 아이와 시동생 체사레 브라지와 함께 살고 있다. 형수를 오랫동안 사랑해 온 체사레는 둘이 여행을 떠나 서로 마음껏 사랑하자고 권한다. 그러나 아드리아나는 암 투병 중으로, 오랜 투병으로 인해 고통스럽다. 체사레는 다른 의사에게 진단받으러 여행을 떠나자고 재차 권하고, 이에 아드리아나는 생애 처음으로 시칠리아를 떠나게 된다.
체사레와 함께 나폴리에 도착한 아드리아나는 체사레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인정한다.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더 멀리, 베네치아로 향한다. 아드리아나는 체사레와의 새로운 삶을 꿈꾼다. 하지만 아들들이 보내온 우편물을 발견하면서, 다시는 시칠리아로 돌아갈 수 없음을 직감한다. 그녀는 육체적 한계를 느끼며, 목숨을 끊는다.
이 오페라는 인간에게 주어진 조건의 경계선을 다룬다. 억압적인 과거와 상황에 무기력해진 상황에서 사랑이라는 유일한 무기에 의존해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이와 함께 찾아온 고통을 피할 수 없었다. 결국 마르게리타와 아드리아나, 두 주인공 모두 궁극적인 비극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이 더 진화해야 하는가? 아니면 신앙이 더 필요한 것인가.
지휘의 능력을 충분히 ‘가진이’는 누구?
고전·낭만·현대 전자음악까지 모두 섭렵한 작곡가 알로이스 브뢰더의 음악은 신선했다. 낯설지 않은 음향에서 이전에 몰랐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언어와 음악이 일치하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빛과 어둠의 음색이 교차하고 서로 크게 충돌하는 괴음까지 발했지만, 결국은 희락의 미래를 약속할 수밖에 없는 평화로운 음색으로 이끌었다.
지휘자 가진이(Jinie Ka)는 이를 훌륭하게 표상하며, 오케스트라의 협연과 오페라의 흐름을 전반적으로 잘 조정했다. ‘다른 집으로부터의 빛’에서 비명을 지르는 듯한 마무리, ‘여정’에서 길고 아주 조용하게 소멸해 가는 마무리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매우 치밀하게 설계된 미니멀리즘적인 무대에는 기차·마차·증기차·곤돌라가 설치됐다. 다양한 이동 수단이 만들어내는 여행의 소리를 오케스트라가 탁월하게 표현했다. 특히 아드리아나가 긴 여행을 통해 체사레와의 사랑에 새롭게 눈을 뜨고 황홀감에 잠기는 모습을 찬송가로 들려준 솜씨는 청중의 억압된 가슴을 해방했다. 가진이는 모두의 ‘여정’에 승리를 심어 주는 듯했다.
가진이의 지휘 경력은 상당하다. 린츠 주립극장의 부지휘자인 그녀는 건국대에서 피아노를, 드레스덴 국립음대에서 반주를 전공한 후 2006년 브레멘 극장에서 반주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어린이 합창단과 극장 합창단 지휘자, 합창 총감독을 거쳐 2011년 상임 지휘자인 마르쿠스 포슈너의 부지휘자로 승격했다. 2017년 포슈너가 린츠 주립극장의 음악총감독 겸 브루크너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로 자리를 옮기게 되자 그녀 역시 부지휘자로 함께했다. 가진이는 린츠 주립극장의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총괄하며, 제2의 오페라 공연장으로 불리는 ‘뮤직 박스’에서 지휘를 맡아 왔다. 음악감독으로서 오펜바흐(1819~1880)의 ‘페피토’와 페터 안드로슈(1963~)의 ‘학교’ 등을 이끈 바 있고, 올해는 ‘일 비아지오’를 맡았다. 마르쿠스 포슈너의 부지휘자로 본격적인 지휘계에 뛰어든 지 13년 만에 유럽에 한인 여성 지휘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이날 출연자 중 바리톤 크리스토프 게르하르투스(툴리오 역), 소프라노 제네시스 베아트리스 로페즈 다 실바(마르게리타 역), 소프라노 자스키아 마아스(아드리아나 역), 테너 마틴 엥거 홀름(체사레 역)의 노래와 연기가 좋았다. 그레고르 호레스의 연출도 우수했다.
글 김운하(오스트리아 통신원) 사진 린츠 주립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