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전장의 크리스마스’, 인간이라는 존엄에 대한 기록, 그리고 기억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월 6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전장의 크리스마스’

인간이라는 존엄에 대한 기록, 그리고 기억

 

감독 오시마 나기사

음악 류이치 사카모토

출연 데이비드 보위, 톰 콘티, 류이치 사카모토, 기타노 타케시

 


 

역사는 언제나 무언가를 창조하고, 끝끝내 그 창조된 것들을 파괴하여 한 시대의 마침표를 찍어온 시간을 기록한다. 예술은 그 역사적 시간의 사이사이에 끊임없이 쉼표를 찍으며 시대와 시간, 그 속의 사람들이 숨 쉴 틈을 준다. 우리의 예술은 어떤 사회, 정치적 혼돈, 전쟁의 시간 속에서도 세상의 바깥문을 열어주는 열쇠처럼 단단하고 꼿꼿하게 역사를, 그 시간을, 그리고 그 속의 사람을 기억한다.

2024년 4월 7일, 소설가 한강(1970~)은 노벨 문학상 수상 강연에서 5·18 민주화운동과 계엄을 그린 소설 ‘소년이 온다’에 “인간은 어떻게 이토록 폭력적인가? 동시에 인간은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담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진짜 극악한 현실에서 예술이 맞닥뜨린 질문은 이와 비슷했다.

일본군 장교와 영국군 포로의 만남

제2차 세계대전 중 인도네시아 자바섬. 제국주의의 무사도 정신을 맹신하는 일본군 대위 요노이(류이치 사카모토 분)는 포로수용소에서 영국군 소령 잭 셀리어스(데이비드 보위 분)를 만난다. 사형 직전의 잭을 구해 자신의 수용소로 데려온 요노이는 잭의 자유분방한 매력에 끌리면서도, 자신의 신념과 지위 때문에 갈등한다. 포로 중 유일하게 일본어를 구사하는 영국군 중령 존 로런스(톰 콘티 분)는 영국군과 일본군 사이에서 평화를 위한 중재자 역할을 하지만, 수용소의 분위기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제국주의 이념의 폭력성으로 격앙된다.

목숨 하나 지키는 것이 유일한 가치인 가혹한 현실 앞에서 희망과 이상적인 결론을 기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오직 명분과 증오로 만들어진 역사적 폭압의 민낯을 맞닥뜨리는 순간에도 사람은 살아있고, 사람이기에 살아간다. 웃을 일이 없을 것 같은 순간에도 웃고,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랑이 피어날 여지가 없는 잿더미 속에서도 불쑥 새싹처럼 돋아난다.

오시마 나기사(1932~2013) 감독은 로런스 밴 더 포스트(1906~1996)의 소설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런스’에서 ‘자바섬의 일본군 포로수용소, 영국 장교와 일본 전사의 우연함 만남’이라는 단 한 문장을 읽고 영화화를 결정,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탄생시켰다. 그렇게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제국주의에 사로잡혀 전 세계에 증오와 폭압의 역사를 남긴 일본의 과거를 영화 속으로 되살려냈다.

 

전설이 된 두 명의 아티스트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일본이 저지른 제국주의의 잔인함을 외면하거나 미화하지 않은 채 전쟁 포로수용소 안, 국적이 다른 두 군인의 미묘한 우정 혹은 사랑의 이야기를 녹여낸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전쟁 장면 하나 없이 전쟁의 잔혹함을 제대로 담아낸 전쟁 영화이자, 동시에 전혀 로맨틱하지 않지만 애타게 아름다운 로맨스 영화이기도 하다.

역사의 기록을 끄집어내 그 속의 사람을 기억하는 예술은, 가끔 그 자체로 역사적 기록이 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전설이 된 아티스트,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의 젊은 시절을 담은 하나의 소중한 기록물이다. 1976년 ‘감각의 제국’으로 전 세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일본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배우가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배우가 아닌 음악인 두 명을 캐스팅했다. BBC가 선정한 20세기 가장 위대한 엔터테이너이자 한 시대에 패션·음악 등 다방면으로 영향을 미친 데이비드 보위(1947~2016)와 YMO 밴드 출신으로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영화음악에 처음 도전한 류이치 사카모토다. 마치 음악을 연주하는 것 같은 두 아티스트의 연기는 좋은 화음을 만들어낸다.

예술이 역사를 기억하는 방법

시대의 아이콘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역사적 과오를 저지른 일본의 제국주의에 대해 일본 예술가가 직접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전장의 크리스마스’는 여러 가지로 벅차고 아름다운 영화다. 데이비드 보위와 류이치 사카모토는 물론, 지금은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겸 배우이지만 영화에 캐스팅되었을 당시에는 인기 코미디언이었던 기타노 다케시(1947~), 그리고 크리스토퍼 놀런(1970~) 감독의 ‘오펜하이머’(2023)에 아인슈타인 역할로 출연하여 건재한 모습을 보여준 영국 배우 톰 콘티(1941~)의 젊은 시절을 만날 수 있다.

역사는 언제나 전쟁의 시작과 끝, 그리고 그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의 숫자를 기록하지만, 예술은 그 역사의 순간에 살아있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기억한다. 이런 마음으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포로수용소의 잔혹한 환경 속에서도 사람을 우선 바라본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존엄함은 우리가 어떤 순간에도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라고 말한다.

영화 속 잭 소령은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일지라도 부당함에 맞서 싸우지 않으면, 그 부당함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동료들의 허망한 죽음 앞에 오직 나만 살아남지는 않겠다는 의지로 일본군에 맞선다. 전쟁에서 이기고 지는 건 물리적인 힘 앞에서 굴복하는 문제이지만, 인간의 존엄함은 승패와 무관하게 당연히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다시 한강 작가의 말을 인용해, 인간이 어떻게 그토록 압도적인 폭력의 반대편에 설 수 있는지를 되물어 본다. 나를 향해 총을 겨눈 사람에게서 달아나지 않는 것, 누군가는 침묵하라고 하지만 마지막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것, 포로수용소에 갇혔음에도 인간으로서의 자유의지는 가둘 수 없다고 말하는 것. 이것들은 지금 우리가 모두 다시 새겨야 하는 가치인 것 같다.

폭력적인 역사는 우리에게 언제나 잠자코 있으라고 말하지만, 부당한 권력이 나를 밀어내려 하더라도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와 가장 두려운 순간에도 딛고 일어서자고 말하는 예술가의 용기는 언제나 우리에게 같이 나아가자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예술은 그 손을 마주 잡은 사람들을 다시 기억하고, 그 기억은 기록이 되어, 역사의 마침표 사이사이마다 다시 쉼표를 찍어줄 것이다.

 

[OST] 류이치 사카모토

류이치 사카모토는 동양과 서양이 함께 어우러지면서도 어우러지지 않는 비현실적인 느낌에 영감을 받아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딘가’ ‘언제도 아닌 어느 시간’이라는 콘셉트로 영화음악을 완성했다. ‘전장의 크리스마스’를 모르더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만큼 유명한 주제곡인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런스’는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그의 대표곡으로 손꼽힌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이 영화를 통해 1984년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영화음악인으로 입지를 다졌다. 1987년 ‘마지막 황제’로 아시아인 최초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수상하면서 독보적이고 세계적인 음악인으로 활동했다.

 

| | | set-list 01 Merry Christmas, Mr. Lawrence 02 Batavia 03 Germination 04 A Hearty Breakfast 05 Before The War 06 The Seed And The Sower 07 A Brief Encounter 08 Ride, Ride, Ride – Celliers’ Brother’s Song 09 The Fight 10 Father Christmas 11 Dismissed 12 Assembly 13 Beyond Reason 14 Sowing The Seed 15 23rd Psalm 16 Last Regrets 17 Ride, Ride, Ride – Reprise 18 The Seed 19 Forbidden Colours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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