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루리, 음악감독 이향하, 연출가 황희원, 긴긴밤, 그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월 1일 9:00 오전

THEME TALK

 

작가 루리 | 음악감독 이향하 | 연출가 황희원

 

긴긴밤, 그 사랑과 연대의 이야기

동화에서 공연으로, 뮤지컬과 판소리로 재탄생한 이야기에 담긴 힘

 

 

‘이 이야기는 나의 아버지들, 작은 알 하나에 모든 것을 걸었던 치쿠와 윔보, 그리고 노든의 이야기이다.’

동화 ‘긴긴밤’ ©문학동네

2021년 출간된 동화 ‘긴긴밤’(문학동네)은 어린 펭귄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세상에 마지막 남은 흰바위코뿔소 ‘노든’과 버려진 ‘어린 펭귄’은 바다를 향해 걸어가며 수많은 밤을 함께 보낸다.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 ‘우리’가 되는 긴긴밤 속에서 이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로 살아갈 용기를 얻는다.

지난 2018년, 지구상에 단 하나 남은 마지막 수컷 북부흰코뿔소 ‘수단’의 죽음이 보도됐다. ‘수단’은 밀렵의 잔인함을 알리는, 자연 보호의 아이콘이었다. 뉴스를 접한 작가 루리는 ‘수단’에 대한 그림책을 구상했다. 그림책은 어느새 장편 동화가 되었고, 세상에 홀로 남은 코뿔소의 이야기는 코끼리, 동물원의 코뿔소, 그리고 펭귄들의 이야기로 확장됐다.

“이러한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서 세상에 복수를 하려 해도 마땅한 ‘수단’이었고, 그에게 복수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가 생겼으면 했어요. 그래서 제가 상상할 수 있는 최선의 이야기를 상상하려고 했습니다.”(루리)

그렇게 탄생한 작품은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는 등 많은 이들의 마음에 울림을 남겼고, 그 울림의 파장은 텍스트를 넘어 판소리와 뮤지컬에도 가닿았다.

2022년 초연한 입과손스튜디오의 창작 판소리 ‘긴긴밤’은 2023년 국립정동극장의 ‘창작ing’ 사업을 통해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재연을 선보였으며, 지난해에는 연말 공연(2024.12.24·25/서울남산국악당)으로 객석을 따스하게 물들였다. 한편, 대학로에서는 창작 뮤지컬 ‘긴긴밤’(2024.10.15~2025.1.5/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2관)이 무대에 올랐다. 작품은 초연임에도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으며 객석을 가득 채웠다.

오는 1월까지 이어지는 두 공연을 앞두고 원작자 루리, 뮤지컬 연출가 황희원, 판소리 ‘긴긴밤’의 음악감독이자 고수인 이향하를 만났다. 원작의 텍스트와 각 장르의 작품이 만들어진 제작 과정에 관한 ‘긴’ 이야기.

 

여러 사랑 이야기가 여러 무대의 이야기로

판소리로 먼저 선보였던 ‘긴긴밤’이 지난해 뮤지컬로도 탄생했습니다. 원작이 있는 작품이 비슷한 시기에 각기 다른 장르로 재탄생했는데요. ‘긴긴밤’과의 첫 만남이 궁금합니다.

황희원(뮤지컬 연출가) » 지방 공연을 가는 길에 간편하게 읽을 책을 챙겼는데 그 책이 ‘긴긴밤’이었어요.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다 읽고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읽고 나서는 누구든 붙잡고 이 책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제일 먼저 했던 것 같아요. 그때 방을 같이 쓰던 친구들에게 책을 들이밀면서 얼른 읽어보라고 호들갑을 떨 정도였으니까요.

이향하(판소리 음악감독) » 책을 읽고 30분 만에 이 이야기로 작품을 만들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긴긴밤’의 주된 내용은 ‘나’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잖아요. 저도 그 당시에 고수로 살아가는 것, 여성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질문이 있었거든요.

최근 여러 문학 작품이 공연예술의 형태로 무대에 오르고 있습니다. 다양한 콘텐츠의 시대에 문학 텍스트가 갖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루리(작가) » 저는 그저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라, 문학이 지닌 의미 같은 커다란 질문에 대한 답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다만, 판소리와 뮤지컬을 보며 ‘이 이야기가 뭐라고 저렇게까지 혼신의 힘을 다해 극을 만든 걸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쩌면 이 이야기를 저 혼자 만든 게 아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판소리도, 뮤지컬도 많은 분들이 애정을 담아 작품을 만드는 걸 보았거든요. ‘긴긴밤’이 사랑받는 이유는 이 이야기가 여러 사람의 사랑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그게 어떤 형식이든 간에요.

이향하 » 모든 콘텐츠의 근간은 텍스트라고 생각해요. 그렇기에 제게 문학 텍스트는 어떤 근간이나 영감의 원천 같은, 무궁무진한 샘 또는 바다 같은 느낌이에요.

황희원 » 어쩐지 어른 같은 말을 하는 것 같아 조금 머쓱한데…(웃음) 텍스트는 자기 세계를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책장을 덮고 머릿속으로 그리는 세상은 자기 안에만 있는 것이잖아요. 그 세상이 풍부할수록 눈에 보이는 세상을 대하는 마음이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문학이라는, 상상력의 상자로부터

공연예술(판소리·뮤지컬)과 문학(소설)이라는 장르적 차이가 있는 만큼, 원작을 무대로 올릴 때 고민하거나 걱정한 지점도 있었을 것 같은데요.

이향하 » 판소리와 문학은 장르는 다르지만, 사실 떼놓을 수 없는 연관성을 지닌 장르라고 생각해요. 판소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르잖아요. 이번 작품에서는 그동안 입과손스튜디오에서 해왔던 공동창작 방식을, 고수로서 판소리 고법이 지향하는 ‘이면’을 담고자 했어요. 한마디로, 이번 작품은 소리꾼의 판소리가 아닌, 고수가 만드는 판소리인 셈이죠.

황희원 » 뮤지컬로 각색하는 과정에서 강조하고 싶었던 점은 ‘연극성’이었어요. 저는 극장을 ‘상상하러 오는 곳’이라고 생각해요. 눈앞에서 실제로 무언가 벌어지고 있는데, 관객은 그걸 보고 머릿속으로 상상하죠. 세상에는 볼거리가 참 많은데 관객들이 굳이 시간을 내어 극장을 찾는 이유가 있을 테니,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작품의 몇몇 장면을 만화처럼 만들고, 연극적인 시도도 많이 했습니다.

루리 » 재창작 역시 하나의 독립된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글을 썼고, 황희원 연출가와 이향하 음악감독 역시 제 글을 읽고 새로운 버전의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모두의 애정과 혼신이 담긴 극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거고요. 그거면 충분합니다.

판소리와 뮤지컬 모두 음악적인 요소가 중요한 장르입니다. 원작의 대사와 내용을 각각 넘버, 아니리와 소리 대목으로 바꾸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는 무엇이었나요?

이향하 » 텍스트를 기반으로 음악을 만들다 보니 조금 더 드라마가 있는 음악을 만들게 된 것 같아요. 앞서 이 작품에 관해 ‘고수(鼓手)가 만드는 판소리’라고 이야기했는데, 고수가 소리꾼의 소리에 맞는 장단을 더하듯 무대 위 소리꾼과 배우의 호흡에 집중해 리듬과 음악을 배치했어요. 소리꾼이 작창한 소리 대목에는 고법이 가진 본연의 기능을 담아내기 위해 장단이 가진 맛을 살리는 데에 초점을 맞춰 작업했고요.

황희원 » 최대한 쉽고 간결하게 만들고자 했어요. 음악은 듣기 복잡하지 않은 멜로디로, 대사는 한 번에 알아들을 수 있게, 장면은 직관적으로 한 번에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였죠. 원작 자체가 담담하면서도 힘이 있는 작품이기에 그 미덕을 공연에도 꼭 담고 싶었습니다.

 

이야기에, 무대언어의 ‘생명’을 불어넣으며

작품은 동물을 주인공으로 합니다. 무대 위에서 동물 캐릭터를 표현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요?

이향하 » 등장하는 캐릭터가 모두 동물이지만, 원작을 읽으면서 동물이라는 생각을 별로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동물보다는 주변 지인들 또는 감정을 지닌 사람으로 표현하고자 했어요. 연출적으로도 직접적인 분장이나 소품을 사용하기보다 부채를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동물마다 상징적인 손 모양이나 동작, 몸의 모양을 개발해 최대한 미니멀하게 표현하려고 했습니다.

황희원 » 신체적 장애가 있는 펭귄 ‘치쿠’와 정신적 장애가 있는 코뿔소 ‘앙가부’를 어떻게 표현할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두 친구가 가진 장애를 함부로 표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장애를 필요 이상으로 부각하거나, 우스꽝스럽게, 혹은 동정의 대상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해 배우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죠. ‘긴긴밤’이라는 작품은 연대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각 동물이 보이는 방식보다, 같이 있을 때 보여지는 모습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배우들에게도 자기를 표현하기보다 상대 배우를 잘 보고, 듣고, 살피고, 어떻게 반응할지 초점을 맞춰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고요.

원작과 비교해 무대 위에서 더욱 효과적으로 드러난 장면이 있는지도 궁금합니다.

황희원 » 과거와 현재가 합쳐진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세상에 없는 노든의 흰바위코뿔소 친구 ‘앙가부’의 염원이 어린 펭귄의 두려움을 없애주고, 아직 알에서 깨어나지 않은 어린 펭귄이 힘겹게 길을 걷는 펭귄 ‘치쿠’를 넘어지지 않게 지탱해 주는 장면들이요.

루리 » 저도 그 장면이 좋았어요. 작은 무대 안에서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이야기를 전개하는 부분, 이미 세상을 떠난 캐릭터가 계속 곁에 등장하는 부분, 그리고 무엇보다 곳곳에서 웃음을 자아내는 유머가 참 좋았습니다. 그 외에도 좋았던 점은 끝도 없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네요.(웃음)

이향하 » 판소리에서는 아무래도 수영 장면이지 않을까요? 노든의 권유로 호수에 들어간 어린 펭귄이 망설이지만, 결국에는 자신의 선택과 본능으로 수영하게 되는 극적인 장면을 표현하고자 연희적인 요소를 가미했어요. 판소리에서는 고수가 소리꾼을 보비위(補脾胃)한다고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배우와 소리꾼이 무대에 오르기 때문에 노든 역을 맡은 배우가 어린 펭귄 역의 소리꾼을 잘 인도하며 표현할 수 있도록 움직임을 만들었죠.

 

긴긴밤을 이겨낼, 사랑과 희망이라는 것

특별히 애착이 갔던 인물 혹은 좋아하는 장면이 있다면요.

황희원 » 모든 캐릭터, 모든 장면을 사랑합니다만, 어린 펭귄이 처음에 호수를 발견하고 뛰어갔다가 실망하는 장면이 자꾸 생각나네요. 어린이들을 실망하게 하고 싶진 않지만, 실망한 어린이는 어딘지 모르게 아주 귀여운 것 같아요. 흐흐!

이향하 » 처음 작업을 시작했을 때는 노든에게 마음이 갔어요. 늘 인간에게 복수를 다짐하지만, 희망을 잃지 않고 계속 사랑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요. 최근에는 어린 펭귄에게 마음이 가는 것 같아요. 어린 펭귄이 노든과 작별하는 순간처럼, 모두가 이별의 순간을 겪고, 같은 숙제를 안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어린 펭귄에게 마음이 쓰이더라고요.

작품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요?

이향하 » ‘나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힘듦, 그리고 그 가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나보다 남들이 보는 시선을 중요하게 여기는 시대지만, 우리는 모두 홀로 우뚝 설 수 있음을 응원하고, 지지하고 싶어요. 물론 그 안에는 연대와 사랑이 있어야 하겠지요.

황희원 » 힘내서 잘 삽시다! 살면서 길고 긴 밤은 반드시 찾아오기 마련입니다. 그래도 주위엔 좋은 이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조금 머쓱하고 쑥스러워도 잠깐 기대서 쉬기도 하고, 초콜릿도 나눠 먹고, 노래도 같이 부르다 보면 얼마 지나지 않아 아침이 찾아옵니다. 기지개 한번 켜고 다시 걷다 보면 그다음에 찾아올 밤은 조금 더 버티기 수월해질 거고요. 그때 누군가한테 내 품을 내어주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사는 게 조금 더 괜찮아지리라 생각합니다.

 

활자의 시대는 지났다고들 하지만, 지금도 활자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고 발전되어 무대 위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다. 노든과 어린 펭귄이 어디 있을지 모를 푸른 바다를 향해 펭귄의 본성을 믿고 걸어가는 것처럼, 창작자들은 원작을 나침반 삼아 창작의 감각을 믿고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간다.

‘두려웠다. 하지만 나는 내가 저 바닷물 속으로 곧 들어갈 것을, 모험을 떠나게 될 것을, 홀로 수많은 긴긴밤을 견뎌 내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긴긴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는 무언가를 찾을 것이다.’

동화 ‘긴긴밤’은 어린 펭귄의 독백으로 끝을 맺는다. 창작자들은 각각의 장르에서 서로 다른, 다양한 감각으로 무대를 구현하지만, 이들의 목표는 하나다. 관객에게 좋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어린 펭귄이 바다를 향해 나아가는 것처럼, 창작자들도 새로운 가능성을 향해 나아간다. 그렇게 이야기는 무대 위에서 생명력을 얻고, 서로의 마음속에 울림을 남기며, 관객과의 깊은 교감을 이끌어 낸다.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정동극장·라이브러리컴퍼니

 

작가 루리(1989~) 미술 이론을 공부했다. ‘긴긴밤’으로 제21회 문학동네어린이문학상 대상을, ‘그들은 브레멘에 가지 못했다’로 제26회 황금도깨비상(그림책 부문)을 받았다. 그밖에 쓰고 그린 책으로 ‘메피스토’가 있다.

 

 

음악감독 이향하(1984~) 한양대학교 국악과 졸업 및 동대학원을 수료했다. 조용복에게 소리북을 사사했으며, 다양한 악기를 섭렵하며 판소리 고수뿐 아니라, 밴드 활동 및 여러 장르의 극음악 제작 및 연주, 장단연구 및 교육 등 다양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입과손스튜디오의 대표이자 고수로 활동 중이다.

 

 

연출가 황희원(1987~) 연극 ‘보도지침’, 뮤지컬 ‘홀연했던 사나이’ 등의 연출을 맡았으며, 연극 ‘내일 공연인데 어떡하지?’ ‘내일 공연할 수 있을까?’ 등 관객참여형 공연을 선보인 바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뮤지컬 ‘긴긴밤’

~1월 5일 링크아트센터드림 드림2관

입과손스튜디오 판소리 ‘긴긴밤’

1월 8일 김포아트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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