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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페라역사박물관 세미나 ‘한국 오페라의 여명과 태동’
한·일 오페라의 기억과 기록을 위하여
양국의 오페라 관계자들이 모여 기록을 들추고, 역사 보존의 중요함을 공유하다
기악이 악기라는 물적 토대와 인적 훈련과정을 가져야 하는 것에 비해, 성악은 사람의 몸만 있으면 된다는 조건 때문에 일제 강점기부터 양악 중에서도 성악 전공자들이 유독 많았다. 또한 교회의 찬송가와 학교의 음악교육을 통해 퍼진 근대 창가를 바탕으로 성악은 상대적으로 기악음악에 비해 양적으로 풍부해졌다. 이러한 영향은 해방 후 이 땅에 오페라가 꽃 피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현재 한국 오페라 역사에서 시작점을 끊는 것은 1948년 1월 16~20일에 명동 시공관(현 명동예술극장)에 오른 ‘춘희’(라 트라비아타)이다.
오페라 역사를 위한 박물관을 준비하며
2018년에 ‘대한민국오페라 70주년’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공연과 부대 행사가 오른 것도 이 공연을 기점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춘희’는 한국 오페라 발전에 작은 불꽃이 되었다. 이 공연을 계기로 1940~1950년대는 5개의 오페라단이, 1960년대는 4개, 1970년대는 7개, 1980년대는 8개 단체가 창단되었다. 모두 척박한 환경에서 피운 노래의 꽃과 열매였다.
하지만 공연의 막이 내리면, 그 과정과 시간이 기록장에 보관되기보다 뿔뿔이 흩어지는 시간예술(공연)의 특성상 오페라 관련 자료는 예나 지금이나 흩어져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수집 및 재구성해 번듯한 오페라사를 완성하려는 목표로 2022년 성악가 박수길, 기업인 성규동의 발의 하에 한국오페라역사박물관(이하 박물관) 설립을 위한 추진위원회가 발족하였다. 당시 박수길은 본지와 가진 인터뷰(2022년 9월)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국립오페라단 단장(1995~2001년 재직)으로 있을 때 자료를 굉장히 많이 모았거든요. 그런데 퇴임 후 오페라단 자료 보관 창고가 홍수로 인해 물에 잠겨 많은 부분이 소실됐어요. 안타까운 일이었죠. 국립오페라단도 지금 자료가 충분하지 않아요. 오히려 개인이 가진 자료들을 모으면 의외로 좋은 자료, 몇 가지는 아주 중요한 자료를 발견하곤 해요.”
박물관은 현재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 내에서 전시 ‘한국 오페라 첫 15년의 궤적 1948~1962’를 진행 중이다. 한국 오페라의 첫걸음을 돌아보는 전시다.
조선에서 활동한 일본인 성악가들
지난 11월 28일, 이 전시장 옆에 위치한 무궁화홀에서 전시 연계 학술 세미나로 ‘한국 오페라의 여명과 태동’이 있었다. 손수연 단국대 교수(박물관 사무총장)의 진행으로 박물관 추진위원, 전문위원 등이 참여한 자리였다.
1부는 ‘한국 오페라 여명’이었다. 이번 학술 세미나를 위해 특별초청된 이시다 아사코 쇼와음악대학 교수는 ‘한반도 일본인 성악가들의 연주 활동 기록: 1920년~40년대 초반까지’라는 주제로 근대기 조선과 일본의 시간을 오페라를 통해 살펴보았다.
일본 성악가들은 1920년 5월 소프라노 야나기 가네코의 경성 방문 연주회 이후 내한하여 여러 음악회를 개최했다. 특히 그의 독창회는 근대 조선에서 개최된 첫 번째 클래식 음악회로 평가되고 있으며, 오페라 아리아 등을 불러 관객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이후 경성을 찾은 일본 성악가들의 독창회가 이어지고, 간헐적으로 오페라 공연이 이어졌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경성일보’ 같은 오래된 신문에 기재된 1937년 미우라 타마키 등이 오른 ‘나비부인’ 전막 공연이나, 1940년대 후지와라 요시에의 ‘카르멘’ 공연에 대한 기록 등을 살펴보았다. 이외 세키야 토시코 등 일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 활동하던 일본 성악가들이 경성의 공연장에서 선보인 연주회를 신문 기사를 통해 살펴보았다. 더불어 일본 오페라의 역사도 살펴볼 수 있었는데, 한국의 기원이 ‘춘희’(1948)인 것처럼, 일본의 오페라는 1903년 도쿄에서 선보인 ‘오르페오’였다.
이시다 아사코는 후지와라 가극단의 존재도 강조했다. 테너 후지와라 요시에는 1940년 10월 25~27일에 자신의 이름을 딴 오페라를 이끌고 경성을 방문해 ‘카르멘’을 선보였다. 1934년, 창단공연으로 ‘라 보엠’을 올린 후지와라 가극단은 민간 오페라단이었다.
이번 세미나는 박물관 개관을 위한 여러 사업 중 하나다. 이어진 2부에는 ‘한국 오페라의 태동’이라는 주제로 손수연, 이경재(연출가·전 서울시오페라단장), 필자가 함께 하여 추진위원들의 토론과 기억을 모아보는 자리가 이어졌다.
한국 오페라의 기원 ‘춘희’
오페라 역사 재서술과 정립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자료의 수집과 공유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이러한 교류와 전시의 장이 주는 ‘의미’이다. 특히 20세기 초반에 국내 유입된 서양음악(클래식 음악)은 ‘서양’을 기원으로 한 예술이지만, 제국 일본을 거쳐 이 땅에 유입된 예술이기에 일본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올해는 한·일간 ‘국교 정상화 60주년’이 되는 시간이기도 하다. 1948년 ‘춘희’ 이전을 한국 오페라의 전사(全史)로 볼 때, 당시 일본이 준 영향에 대한 조명은 지금보다 더 많은 자료 발굴과 역사적 의미 부여 작업이 필요하다. ‘춘희’ 이후는 “광복 이후의 혼란, 한국전쟁, 4.19에서 5.16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이자 너무나도 빈곤한 시기였지만, 서양의 예술인 오페라를 공연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꾸준히 공연을 지속했던 선배 음악인들이 있었다”(손수연)는 데에 역사적 조명도 게을리해선 안 될 것이다.
필자는 2016년에 테너 박성원(1941~), 바리톤 박수길(1941~), 소프라노 정은숙(1946~)이 한 자리에 모인 자리를 취재하는 행운을 가질 수 있었다. 한 무대에서 주연으로 만나 노래하던 이들은 차례대로 국립오페라단의 제5대 단장(1989~1994), 제6대 단장 및 예술감독(1995~2001), 제7대 예술감독(2002~2007)을 역임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각자의 ‘기억’들은 오페라 역사의 ‘기록’을 메우는 중요한 조각이 될 수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오페라 역사의 객관적 자료와 물적 토대가 흩어져 있는 지금,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박물관 개관과 학예적 운영을 통해 그 공백을 메우고 기록과 기억을 병치시키는 작업일 것이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 사진 한국오페라역사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