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3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소프라노 박정원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다
글 박정원(1957~) 한양대학교 음대 및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했다. 콜럼비아 아티스트 매니지먼트(CAMI)에 소속된 국내 최초의 성악가로서 미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세계 무대에서 활약했으며, 귀국해 한양대 음대 교수 및 학장을 역임했다. 현재 한양대 명예교수이자 서울사이버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성악가의 길에 들어선 삶
#로시니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방금 들린 그대 음성’ #내 인생을 바꾼 첫 아리아
조르주 세바스티안/파리 국립 오페라 관현악단 (협연 마리아 칼라스)
감상 포인트 마리아 칼라스의 독창적인 음악적 표현력과 음색
일곱 살,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전차를 타고 종로경찰서 옆 삼흥음악원에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제가 피아니스트가 되길 바라셨고, 그래서 유치원 대신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지요. 이제와 돌아보면 삼흥음악원은 예원학교와 서울예술고등학교의 전신으로 볼 수 있는 영재 음악원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학교의 설립자이자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지휘자 임원식(1919~2002) 선생님께서 학원장으로 계셨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바람과는 달리, 제 음악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음악 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본격적으로 성악을 공부해 서울예고에 진학했고, 2학년 때 로시니 오페라 ‘세비야의 이발사’ 중 로지나의 아리아 ‘방금 들린 그대 음성’을 배우며 처음으로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다는 꿈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 시절 음악을 접하는 환경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열악했습니다. LP 음반 몇 장이 전부였던 당시, 명동의 음악감상실에서 헤드폰을 끼고 이 곡을 들었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특히,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1923~1977)의 음반으로 처음 들었을 때의 전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칼라스의 독창적인 음악적 표현력과 음색은 제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매일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오페라 가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특유의 기교와 발성은 제가 성악적 테크닉을 연마하는 데 큰 영감을 주었고, 로지나의 사랑스럽고도 영리한 성격은 오페라의 이야기와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노래를 통해 아름다움과 조화를 배우다
#R.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 중 조피와 옥타비안의 이중창 #오페라 선율이 가르쳐 준 삶의 하모니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지휘)/빈 필하모닉/아넬리세 로텐베르거(조피), 세나 유리나츠(옥타비안) 외/ 폴 크지너(연출)
감상 포인트 아리아의 아름다운 선율과 오케스트라와의 완벽한 조화, 오스트리아의 전통 의상이 어우러지는 오페라 무대
한양대 음대에서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가곡과 몇 개의 아리아를 배우고, 1981년 도미해 줄리아드 음악원에서 많은 서양음악 작품을 접하고 배웠습니다. 당시 저는 오페라 전공을 선택했기에 재학 중 오페라 아리아와 앙상블을 비롯해, 두 번의 오페라 작품에서 주역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특히 R. 슈트라우스 오페라 ‘장미의 기사’는 제 인생에서 평생의 사랑이 된 작품입니다. 작품을 처음 접한 건 오페라 앙상블 공연을 위해 조피와 옥타비안의 이중창을 준비할 때였습니다. 조피의 멜로디는 저를 단숨에 매료시켰고, 이후 대학원 석사 논문 주제로도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장미의 기사’는 R.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으로, 귀족들의 복잡한 연애와 인간관계를 다룬 다소 코믹하면서도 섬세한 감정 표현이 돋보이는 오페라입니다.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1874~1929)의 대본에 기초한 이 작품에서 R. 슈트라우스의 음악은 각 인물의 감정을 아름다운 멜로디와 풍부한 화음으로 표현하고, 오케스트라와의 조화를 이루며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프랑스 니스 오페라 극장에서 소프라노 루치아 포프(1939~1993)와 함께 이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던 기억은 제 음악 인생에서 소중한 순간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아름다운 음악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성악가가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신이 만드신 악기로서 추구해야 할 아름다움과 조화를 일깨워 준 작품이기도 합니다.
음악과 삶, 그리고 노래를 위해 바친 나의 열정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 중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 #노래와 사랑에 담긴 진심
서희태/모스틀리 필하모닉 오케스트라(협연 박정원)
감상 포인트 토스카의 절절한 감정을 담은 가사와 극적인 선율, 예술과 사랑을 위해 살아온 주인공의 삶에 공감하며 감상할 것
푸치니 오페라 ‘토스카’는 제 음악 인생에서 특별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특히, 토스카의 아리아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는 음악과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 곡이자, 가장 공감할 수 있었던 곡입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한양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어 연주와 교육에 전념하며 지내던 중, 2016년에 한양대 개교 77주년 기념행사로 노천극장에서 ‘토스카’를 무대에 올리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59세가 되던 해였고, 토스카는 처음 해보는 역할이었으며, 매일매일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었기에 이 작품은 그 자체로 저에게 큰 도전이었습니다. 오로지 음악에 대한 열정과 사랑으로, 그리고 토스카라는 인물의 삶에 깊이 공감했기에 성공적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곡은 예술과 사랑을 위해 살아온 토스카의 고백으로, 그녀의 삶과 감정이 진솔하게 담겨 있습니다. “예술을 위해 살았고, 사랑을 위해 살았다”는 토스카의 고백은 성악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이 곡을 부를 때마다 음악과 사랑을 위해 바쳤던 모든 시간과 노력이 떠올라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2016년 토스카 공연 이후, 저는 이 노래를 여러 무대에서 연주했습니다. 그중에서도 2020년 예술의 전당 무대에서 직접 연주했던 이 곡의 음원은 제 음악 인생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소중한 기록입니다. 이 곡을 통해 많은 이들이 사랑과 예술에 대한 자신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