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세계 오페라 무대에 새롭게 떠오른 테너 백석종
꾸준한 노력과 간절한 기도
세기의 테너 카를로 베르곤치(1924~2014)와 플라시도 도밍고(1941~)에게는 젊은 시절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해 성공했다는 공통적인 이력이 있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2022년, 런던에서 이들의 뒤를 잇는 또 한 명의 테너가 탄생했다. 로열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의 타이틀 롤로 테너 데뷔를 치른 백석종. 그는 전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주역으로 러브콜을 받으며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잠시 한국에 방문한 백석종을 만났다. 마치 삼손의 기도처럼, 꾸준한 연습과 간절한 기도로 일궈온 노래의 결실이 그의 인생 앞에 이제 막 펼쳐지고 있었다.
INTERVIEW » 테너 백석종 _홍예원
REVIEW »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토스카’ _양승혜
COLUMN » 한국 테너계의 작은 역사와 현주소 _송현민
INTERVIEW
백석종(1986~) 맨해튼 음대에서 석사과정을 전액 장학생으로 마치고,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애들러 펠로우 및 아스펜 음악 페스티벌 영 아티스트를 거쳤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 후, 이탈리아 빈체로 콩쿠르와 미국 로렌 자카리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스페인 비냐스 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다. 2022년 로열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의 삼손 역으로 데뷔, 이듬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나부코’의 주역을 맡았다. 현재 세계 유수 오페라 극장의 주역으로 활약 중이다.
![](https://auditorium.kr/wp-content/uploads/2025/01/Tosca24_2348_C-229x300.jpg)
메트 오페라 ‘토스카’(2024)에서 카바라도시로 분한 백석종 ©Karen Almond
2022년 런던의 중심 코번트 가든에 위치한 로열 오페라하우스(ROH), 녹색의 무대 위에서 금발의 델릴라가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를 부르며 장발의 삼손을 어루만진다. 매혹적인 그녀의 음성에 응답이라도 하듯 삼손의 노래가 겹쳐지며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그날의 관객들은 정직했다. 낯선 얼굴의 테너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그의 목소리에 오페라의 미래가 걸려있음을 직감했다. 새로운 오페라 스타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이는 우연히 찾아온 기회였다. 로열 오페라의 음악감독이었던 안토니오 파파노가 오디션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생상스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의 삼손 커버 배역을 제안한 것. 그는 주역이 다치거나 무슨 일이 생기는 상황을 대비해 예비로 뽑아놓은 존재였다. 그런데 개막 두 달 전, 삼손 역을 맡은 테너 니키 스펜스가 다리 부상을 입어 커버였던 그가 이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검증 없이 커버를 주연으로 세우는 건 극히 드문 경우인데, 제게 어떻게 이런 기회가 오게 되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에요. ‘삼손과 델릴라’는 로열 오페라의 새 프로덕션이었고, 그만큼 기대가 큰 작품이었거든요. 너무 큰 배역이라 떨릴 법도 했지만, 다행히 4주 동안의 리허설 시간이 주어졌고, 덕분에 자신감이 생겼어요.” 무엇보다 삼손 역은 그간 바리톤으로 성장해온 그가 테너로 전향하면서 맡은 첫 번째 배역이었다.
♪ 대역 성악가에서 일약 주연이 되기까지
테너 데뷔 무대(2022)를 앞두고, 가장 염려되었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프랑스 작품인 만큼, 프랑스어 발음에 특히 공을 들였는데 언어를 포함해 연기, 노래, 표현 등은 리허설에서 충분한 연습을 마친 터라 자신이 있었습니다.
‘삼손과 델릴라’는 삼손 역의 비중이 큰 작품입니다. 당시 삼손을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삼손은 이스라엘 군중의 리더이자 종교적인 리더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영웅적인 소리와 강한 연기에 중점을 뒀죠. 특히 마지막 장에 삼손이 자신의 죄에 대한 심판을 받아들이며 신에게 회개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삼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의 존재를 분명히 알고, 인간을 통해 일하시는 신의 성품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상대 배역인 델릴라를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가 연기했어요. 그녀는 현재 세계 오페라 무대를 누비는 별이죠.
엘리나 가랑차와 같은 무대에 섰을 때, 그녀가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 캐릭터에 녹아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저도 그 감성에 자극받아 열심히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날 오프닝 이후 가랑차가 제게 “강철 심장을 가졌다”며 “바리톤으로 오랜 시간 노래했지만, 테너를 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죠.(웃음)
로열 오페라의 바로 다음 공연이었던 마스카니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에서도 테너 요나스 카우프만 대신 주역으로 무대에 올랐으니 행운이 두 번이나 겹친 셈입니다.
리허설 때 마에스트로 파파노가 긴장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보고 있더군요. 그로부터 며칠 뒤, 요나스 카우프만의 코로나 확진 소식을 듣게 되었어요. 마에스트로는 제게 그를 대신해 무대에 오를 수 있는지 물었고, 저는 당연히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 세 차례의 ‘삼손과 델릴라’ 공연이 남아있었기에 하루에 4시간씩 작품 코칭을 받고, 결국 일주일 만에 무대에 오르게 되었어요. 제 커리어에서 가장 위험했던 순간이었지만,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저를 믿고 작품을 맡긴 극장과 안토니오 파파노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안토니오 파파노는 로열 오페라에서 20년 넘게 음악감독(2002~ 2024)을 지냈죠. 그와 함께했던 작업은 어떠했나요?
그는 매우 열정적인 이탈리아 지휘자예요. 리허설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종종 오페라 가수에게 필요한 음악적 요구사항들을 직접 요청하기도 했죠. 저를 무대 위로 끌어 올려주고, 많은 영감을 준 분입니다.
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에서 베르디 ‘나부코’의 이스마엘레 역으로 데뷔했습니다. 뉴욕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유럽 무대에서 테너로 전향한 후,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메트 오페라 무대에 오른 소감은 어떠했는지 궁금합니다.
로열 오페라 데뷔 바로 다음 해에 메트 오페라에 데뷔하게 됐는데, 사실 그렇게 빨리 뉴욕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메트 오페라 캐스팅 디렉터가 런던에서 제가 주역을 맡았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아이다’ 공연을 보고 ‘나부코’ 이스마엘레 역과 ‘투란도트’의 칼라프 역을 제안해 왔어요. 메트 오페라 무대는 유학 생활 내내 제 오랜 꿈이었는데, 꿈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죠! ‘투란도트’ 공연 때 감사하게도 박수가 끊이지 않아 3막에 등장하는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를 앙코르로 불렀던 날이 기억에 남네요.(웃음)
♪ 바리톤에서 테너로, 쉽지 않았던 과정
여기까지만 보면 성공한 여느 오페라 가수의 경력과 다를 바 없는 듯 보이지만, 기도와 노래로만 버텼던 미국 유학 시절과 바리톤에서 테너로의 전향을 고민했던 고뇌의 시간, 로열 오페라와 메트 오페라의 러브콜을 받기까지. 그의 화려한 경력 뒤에는 크고 작은 성공과 좌절의 나날이 있었다.
그는 오페라 가수로서 삶의 전환점이 된 테너 전향 기간에 대해 이렇게 회상했다. “오로지 테너의 소리를 다져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어요. 제 일상은 소리 연습과 작품 연구, 기도가 전부였죠.” 로열 오페라의 감독인 올리버 미어스는 그의 런던 데뷔 무대를 두고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하는 경우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백석종의 데뷔 무대(2022)에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그가 테너로서 한 번도 오페라 무대에 섰던 경험이 없었다는 사실이었다”(‘뉴욕타임스’)라고 밝히기도 했다.
백석종은 테너로서 특유의 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지만, 그가 중저음에서도 매력적일 수 있는 건 바리톤으로 오랜 시간 연습하고 훈련했던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렇기에 꿈의 무대에서 찬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의 성장 과정에 대한 궁금증이 자연스레 따라왔다.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볼까요. 바리톤으로 성악을 시작했는데요. 음악이 가까이 있는 환경이었나요?
어려서부터 운동과 음악, 미술을 좋아했어요. 문학에 뛰어나진 않았지만, 시를 좋아하는 감성적인 학생이었죠. 그리고 유난히 몸을 쓰는 활동을 좋아했습니다. 아버지는 아마추어 중창단에서 바리톤 맡으셨고, 어머니는 늘 집에서 찬송가를 부르셨어요. 저는 성악을 전공한 누나를 따라 김선식 선생님께 레슨을 받으며 노래를 시작하게 되었죠.
맨해튼 음대 진학 후, 석사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뉴욕에서의 생활이 성악가로서 성장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제 유학 생활은 광야와도 같았어요. 남매가 함께 뉴욕에서 공부하며 터무니없이 비싼 학비와 생활비를 벌며 힘든 시간을 보냈죠. 그래서 더 절실하게 매일 4~5시간씩 기도와 노래에 열중했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벨칸토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말하듯이 노래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렇게 20대 중반에 소리가 트였고, 바리톤에는 필요 없는 고음이 나기 시작했어요.
고음에 장점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 무렵부터 테너 발성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제 타고난 재질과 목소리는 바리톤과 드라마틱 테너에 가깝다고 생각해요. 스승이신 애슐리 퍼트넘(1952~/소프라노) 선생님은 저를 ‘영(young) 베르디 바리톤’이라고 부르곤 하셨는데, 저는 그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던 중 메트 오페라에서 주역으로 활동하는 이용훈 선생님(테너)의 조언을 듣고 테너에 도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겼죠.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텐데요. 어떤 조언이 마음을 움직였나요?
2019년 겨울에 이용훈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어요. “석종 씨, 세상에는 노래 잘하는 가수가 너무나 많아요. 그렇지만 위대한 가수는 많지 않아요. 위대한 가수가 되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합니다. 뛰어난 실력, 끊임없는 노력, 그리고 하나님의 터치(touch)입니다.” 테너가 될 수 있다는, 확고하고 진심이 담긴 조언에 마음이 크게 흔들렸어요.
목소리 관리 및 연습에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 같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연습에 몰두하셨나요?
2020년 샌프란시스코 오페라 영 아티스트를 바리톤으로 마무리하고,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테너에 도전했습니다. 팬데믹이 시작된 이후로는 혼자 연습에 매달렸죠. 그렇지만 10개월 가까이 테너의 레퍼토리가 쉽게 나오지 않았어요. 종종 악몽도 꾸고, 가끔 후회도 했습니다. ‘가지 말아야 할 길에 들어섰나? 이러다 원하는 소리를 못 찾게 되는 건 아닐까? 다시 바리톤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죠. 그렇게 1년 반의 시간이 지나자 어느 날부터 노래가 쉬워졌고, 제가 원하는 발성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과거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카를로 베르곤치와 플라시도 도밍고가 그랬듯 테너는 음역이 넓은 만큼 오페라에서 소화할 수 있는 배역도 많은 편이죠.
음역이 넒은 리릭 드라마틱 테너는 소화할 수 있는 역할이 많습니다. 풍부한 저음과 강한 고음에 더 메리트가 있죠. 발성과 노래가 된다면 충분히 리릭 레제로(가볍고 경쾌하다는 뜻의 이탈리아어)부터 드라마틱까지 소화할 수 있어요.
닮고 싶은 발성 혹은 롤모델로 삼았던 테너가 있었나요?
테너 루치아노 파바로티(1935~2007)와 프랑코 코렐리(1921~ 2003)의 연주를 번갈아 들으며 공부했는데, 사실 파바로티를 더 좋아해요.(웃음) 그의 소리가 벨칸토에 더 가깝다고 생각하고요. 저는 노래에 있어서 소리의 밝음과 어두움의 밸런스를 뜻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소리는 밝아야 하며, 동시에 깊이도 있어야 합니다. 이상적인 발성은 오히려 심플해야 해요. 다른 길은 보지 않아도 됩니다.
♪ 무대 위에서 더 깊고 단단해진 ‘나의 길’
백석종은 올해 상반기 런던 로열 오페라하우스(3.19~4.19)에서 ‘투란도트’를, 베를린 도이치 오퍼(5.3~22)에서 ‘아이다’(연출 베네딕트 폰 피터)를, 피렌체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극장(6.19~7.1)에서 주빈 메타/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오케스트라와 함께 ‘아이다’(연출 다미아노 미켈레토)에 출연한다.
“‘투란도트’의 칼라프와 ‘아이다’의 라다메스는 테너로서 굉장히 도전하고 싶은 배역이에요. 제 목소리와도 잘 맞고, 제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운 좋게도 최근 메트 오페라에서 공연했던 작품들이기에 유럽 극장에서의 반응은 어떨지 사뭇 기대됩니다.”
올여름에는 서울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오는 3월, 로열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는 소프라노 손드라 라드바놉스키(1969~)와의 듀오 공연(예술의전당 콘서트홀/8월 중)이 확정되었다. 이외에도 아직은 공개하기 어렵지만, 오스트리아·이탈리아·독일·영국·미국 등 그의 해외 공연 일정은 2027년까지 가득 차 있다.
오페라 무대에서 성악가는 노래는 물론 인물의 감정에 숨을 불어 넣고, 배역에 몰입해 끝까지 서사를 이끌어 가야 합니다. 작품 안에서 캐릭터에 몰입하는 특별한 노하우가 있나요?
가장 중요한 건 탄탄한 가창력입니다. 테너로서 주역을 맡으면, 오페라를 이끌어 가야 하는 경우가 많기에 가창력과 극에 대한 섬세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저는 캐릭터마다 연기와 역할을 새롭게 만들기보다 저만의 자연스러운 모습과 성격을 무대 위에서 꺼내 보이려고 하는 편입니다.
성악가가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하는 시기는 보통 성대 노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60살 전후로 알려져 있습니다. 음악이 가장 무르익는 때는 언제라고 생각하나요?
5~60대 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를 위해 지금부터 소리를 갈고 닦으며 정진해 나가야죠. 요즘 학생들은 조금이라도 빨리 성공하고 싶어 하는데, 주위 시선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걷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청중에게 오페라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오페라는 ‘이해하기 어렵고 지루하다’는 편견이 있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오페라가 특별한 예술이라는 점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해요. 오페라는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클래식 악기와 목소리로 표현하는 종합예술입니다. 기계의 도움 없이 라이브로 이루어지기에 더욱 매력적이죠.
마지막 질문입니다. 앞으로 이루고픈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가족, 지인들과 더욱 사랑하고,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제 음성과 노래로 하나님 앞에 한 걸음 나아가고, 그 앞에서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한 고민이 앞으로 제 삶의 숙제이자 기도입니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황필주·메트로폴리탄 오페라·프레스토컴퍼니
RECORD
![](https://auditorium.kr/wp-content/uploads/2025/01/dvd-박스-근처-QR-로열-오페라-_삼손과-델릴라_-300x300.jpg)
로열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 중 ‘그대 음성에 내 마음 열리고’
생상스 ‘삼손과 델릴라’
안토니오 파파노(지휘)/로열 오페라 오케스트라·합창단/
백석종(삼손), 엘리나 가랑차(델릴라) 외/리처드 존스(연출)
OpusArte OA1371(DVD), OABD7315(Blu-ray)
백석종의 로열 오페라 데뷔 공연으로, 2022년 런던 코번트 가든 실황이다. 백석종은 델릴라 역을 맡은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랑차와 함께 무대에 올라 테너로서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다. 생상스는 총 13편의 오페라를 남겼는데, 그중 ‘삼손과 델릴라’는 베르디 ‘나부코’, 쇤베르크 ‘모세와 아론’ 등과 더불어 보기 드문 성서 오페라의 걸작으로 남아있다. 연출을 맡은 리처드 존스는 영국의 연극·오페라 연출가로, 로열 오페라의 ‘삼손과 델릴라’는 그의 연출작 중 현대적 감각이 강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한국의 디자이너 신혜미가 작품의 무대디자인을 맡았다.
REVIEW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투란도트’
2024. 2.28~6.7
![](https://auditorium.kr/wp-content/uploads/2025/01/백석종-cKaren_Almond_Met_opera-10-300x203.jpg)
©Karen Almond
메트 오페라의 ‘투란도트’는 ‘아이다’와 더불어 웅장한 무대와 강렬한 시각적 효과로 제피렐리의 대표 프로덕션으로 자리매김한 작품이다. 특히 2막의 궁정 장면에서 무대 조명이 차오를 때면 청중의 박수가 쏟아진다. 음악과 연기로 표현되는 아름다움에, 시각적 즐거움까지 가미된 경험을 할 수 있는 장면이다. (중략) 이날 ‘공연 중단’에 가까울 정도로 관객의 큰 박수와 호응을 끌어낸 백석종의 아리아 ‘아무도 잠들지 말라’와, 극의 마지막을 장식한 투란도트와의 듀엣은 공연의 하이라이트였다. (중략) ‘투란도트’ 첫 공연이 끝나자, ‘뉴욕타임스’는 “작품 전체에 활력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은 백석종이 배역의 강단과 자존심을 반짝이는 목소리로 드러냈다”며, “중음의 아름다움과 파스텔 색조의 화려한 음색으로 강직함으로 대변되는 칼라프의 정형성에 우아함과 깊이를 더했다”고 호평했다.
(「객석」 2024년 4월호 : 제피렐리의 전설적인 프로덕션에, 완성을 더한 테너 백석종의 활약)
CHOICE
2025년 상반기 백석종이 선보일 오페라와 공연장
로열 오페라하우스 ‘투란도트’ 3.19~4.19
‘투란도트’는 푸치니가 남긴 12편의 오페라 중 마지막 작품이자, 현대 오페라에 관심이 많았던 푸치니 말년의 미완성 유작으로, 이번 프로덕션은 루마니아 태생의 미국 연출가 안드레이 세르반(1943~)의 1984년 로열 오페라 데뷔작이다. 그는 대담하고, 실험적인 연출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 연극·오페라 무대를 넘나들며 연출가로서의 역량을 인정받았다. 오는 3월의 무대 역시 동양풍의 강렬한 색채를 사용한 무대와 무용을 활용한 역동적인 연출을 선보일 예정이다.
베를린 도이치 오퍼 ‘아이다’ 5.3~22
베를린은 명성을 자랑하는 세 개의 오페라 극장(베를린 슈타츠오퍼·베를린 코미셰 오퍼·베를린 도이치 오퍼)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베를린 도이치 오퍼에서 베르디 오페라 ‘아이다’가 막을 올린다. 연출을 맡은 베네딕트 폰 피터(1977~)는 콘셉트를 ‘유토피아에 대한 레퀴엠’으로 설정했다. 아이다, 라다메스, 암네리스는 오케스트라와 관객들 사이에 배치된 (오페라 합창단에 의해 둘러싸인) 무대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데, 이는 관객이 베르디의 악보를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만든다.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아이다’ 6.19~7.1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는 피렌체에서 매년 개최되는 국제 음악제로, 올해로 87회를 맞이하는 유서 깊은 음악축제다. 피렌체 테아트로 코무날레와 피콜로 테아트로에서 개최되었던 축제는 2011년 마지오 무지칼레 피오렌티노 극장 개관 이후 이곳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축제 기간에 오페라·발레·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의 공연이 이어진다. ‘아이다’의 연출가 다미아노 미켈레토(1975~)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 제네바 그랑 테아트로, 마드리드 레알 테아트로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REVIEW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토스카’
2024.9.25~10.11
![](https://auditorium.kr/wp-content/uploads/2025/01/Aleksandra-Kurzak와-백석종-3-300x224.jpg)
알렉산드라 쿠작(토스카 역)과 백석종(카바라도시 역) ©Karen Almond
뉴욕에 울려퍼진 ‘Vittoria!’ 현지에서 본 백석종의 활약상 ‘뉴욕타임스’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이하 메트 오페라)의 2024년 시즌 오프닝 공연인 ‘토스카’에서 토스카의 연인, 카바라도시 역을 맡은 백석종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무명 가수 백석종이 런던 데뷔 후 ‘나부코’로 뉴욕 무대에 선다는 기사가 나온 지 1년 만이다. “떠오르는 스타, 한국인 테너 백석종의 울려 퍼지는 목소리는 강력하게 오케스트라를 뚫고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는 혁명적인 화가의 모습을 완벽하게 보여주며, 무대에 등장할 때마다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오페라 전문 매체 ‘오페라와이어’ 편집장인 제니퍼 파이론은 이 공연에서 “백석종의 목소리는 완전히 새로운 차원의 음색과 다이내믹을 보여주고 있다”고 언급하며, “그의 개성은 눈과 미소를 통해 빛난다. 그것은 그가 가장 사랑하는 노래를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격찬했다.
1막의 커튼이 올라가자마자, 관객의 호기심 가득한 눈은 백석종에게 향했다. 1막 첫 아리아에서 약간 목이 덜 풀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공연이 진행될수록 그의 영웅적 목소리는 공간을 뚫고 뻗어나갔다. 메트 오페라의 객석은 3천8백 석. 일반적인 유럽의 오페라 극장보다 큰 이곳에서, 그의 목소리는 단연 빛을 발했다. 토스카 역의 알렉산드라 쿠작은 ‘투란도트’에서도 백석종과 호흡을 맞춘 바 있다. 저음과 고음의 선명한 소리, 탄탄한 음역을 보여주며 사랑을 지킬 여인의 역할을 잘 소화했고, 지휘봉을 잡은 시안 장은 격정적인 지휘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었다.
극 중, 카바라도시가 부르는 아리아 ‘승리다!(Vittoria!)’는 극의 긴장감을 높이는 순간에 등장한다. 정치범인 친구를 숨겨준 혐의로 고문을 당하는 카바라도시. 그를 지켜보는 토스카는 내적 압박을 받는다. 그녀는 카바라도시를 위해 진실을 말해야 할지 고민한다. 이때 나폴레옹이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카바라도시는 기쁨에 차서 ‘Vittoria!’를 외친다. 단순히 고문에서 풀려난 기쁨을 넘어, 억압된 정권에 맞서는 자유와 희망을 의미하는 순간이다. 카바라도시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싸운 토스카의 희생에 대한 고마움과 희망을 함께 노래한다. 카바라도시의 심적 변화를 잘 나타내주는 아리아이자, 오페라 전체의 감정적 흐름을 이끌어가는 중요한 장면이다.
무대 위의 백석종이 ‘Vittoria!’를 위해 긴 B플랫 음정을 소리 낼 때, 전설의 테너 프랑코 코렐리가 떠올랐다. 백석종은 다른 고음을 냈을 때와는 다른, 차별화된 발성으로 공기 없이 정제된 소리만을 뽑아내며 선명함과 날렵함을 극대화했다. 바늘구멍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의 단단한 소리였다. 그가 가진 특별함이 더욱 빛나는 순간이었다.
‘토스카’는 두 남녀 주인공의 죽음으로 극을 마무리한다. 오페라에서 결말은 단호하다. 그러나 커튼이 막을 내리면 압도감으로 자석이 끌어당기듯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게 된다. 사람이 가진 목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악기라고 했던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극장을 나오면서도 힐끗힐끗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총 5회에 걸쳐 ‘토스카’ 무대에 오른 백석종은 2025/26 시즌 메트 오페라에서 ‘나비부인’의 핑커톤 역으로 출연을 확정 지었다. 뉴요커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찾아올 그의 무대를 지금도 기다리고 있다.
글 양승혜(뉴욕 통신원) 사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COLUMN
한국 테너계의 작은 역사와 현주소
새 역사를 써온 테너들, 오페라계에 새 길을 내고 있는 테너들
![](https://auditorium.kr/wp-content/uploads/2025/01/백석종-c.황필주-33475-2-300x264.jpg)
©황필주
국내에 ‘테너’라는 직업이 대중에게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박인수의 경우일 것이다. 1983년 서울대 성악과 교수로 부임했던 그는 대중가수 이동원과 함께 ‘향수’를 부르고 ‘국민 테너’라는 별명을 얻었다. 파바로티·카레라스·도밍고가 함께 한 1990년 ‘스리 테너’ 열풍도 테너라는 존재감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한국의 새로운 테너가 탄생할 때마다 세 테너는 비교 기준이 되었다. 파바로티의 하이 C만큼 올라가는가, 도밍고의 연기력을 갖췄는가, 카레라스처럼 드라마틱한가 등.
오늘날 젊은 테너들이 해외 콩쿠르에서의 승전보와 세계 오페라극장 입단 소식을 전해오고 있지만, 1980~90년대에 유학을 떠났던 이들은 지금처럼 현지 승부를 보지 못한 세대였다. 그들 대부분은 귀국 후 대학교 교원으로 안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음악대학의 성악과 선발 인원도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 때였고, 합창단이나 여러 무대가 필요로 하는 테너들을 배출하는 데 열중했다. 또한 테너보다 조수미·홍혜경·신영옥 같은 ‘소프라노 트로이카’가 국외에서 한국 성악계의 위상을 높였다.
그러던 중 테너 최승원이 1993년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콩쿠르에서 우승 소식을 전해왔다. 동양인 남성 최초의 우승이었다. 장애가 있었던 그를 오페라 무대에서 보기는 힘들었지만, 당시는 클래식 음악의 붐이 불었기에 1997년 외환위기(IMF) 이전에 흥했던 여러 공연에 늘 단골로 늘 초청되곤 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젊은 테너들이 현지 오페라극장 입단 소식을 전해왔다. 유학을 떠난 이들이 귀국보다 현지에서 정면승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2001년 강요셉이 쾰른 오페라에서 ‘장미의 기사’로 데뷔했고, 2002년 김재형이 플라시도 도밍코 콩쿠르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김우경은 2007년 메트 오페라에 이어 2008년 런던 코번트 가든에 미미 역을 맡은 소프라노 홍혜경과 함께 ‘라 보엠’에 출연해 로돌포 역을 맡았다. 2008년 이정원은 한국인 테너로서는 최초로 이탈리아 라 스칼라에서 ‘맥베스’로 데뷔했다. 2006년 빈 슈타츠오퍼의 전속 가수로 발탁되었던 정호윤은 2008년 ‘마농’의 젊은 기사 데 그뤼 역을 맡았는데, 상대인 소프라노 안나 네트렙코와 함께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2010년 이용훈은 메트 오페라의 ‘돈 카를로’로 데뷔했고, 실전에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서울대에서 잠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살펴보면 테너의 중요한 시점과 기점은 메이저 오페라극장으로의 진입, 중요 작품의 주요 배역을 맡으면서 그들의 본격적인 경력이 시작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번 호에 만난 백석종 역시 콩쿠르의 입상 전력과, 바리톤에서 테너로 전향한 드라마틱한 성장과정이 그를 조명하는 데 일정 역할을 했지만, 진가를 알린 것은 세계적인 극장에서 세계적인 성악가들과 함께 한 데뷔와 현재의 활약이라 할 수 있겠다.
지금도 새로운 테너의 탄생과 활약 소식은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다. 코로나가 한창이었던 2020년, 본지는 대특집 ‘세계 오페라 무대를 빛내는 한국의 젊은 성악가 75인’을 마련했는데 테너 김세영, 김윤권, 김범진, 박승주, 이현재, 김정훈, 김훈, 도영기, 선태준, 서경한, 이준범, 김영우, 김건우, 이준호, 전권수, 김민석, 문세훈, 김성현, 이효상, 류용현, 송성민, 김효종, 심윤성, 이호철, 박성규 등이 소개되었다. 그들 모두 독일, 이탈리아 등 성악 강국의 오페라극장에서 활약하던 주인공들이었다.
무엇보다 2023년은 테너들이 맺은 풍성한 결실이 빛난 해였는데,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 테너 최초로 우승한 손지훈, 영국 BBC 카디프 성악 콩쿠르의 우승자 김성호가 그 주인공이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