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속 여인의 삶과 사랑_53
작곡가들이 그린 여인

연재 목록
작곡가들이 그린 오페라 속 여인
01 … 49 카르멘과 집시 50 앤 불린 51 샤를로트 52 이졸데 53 수잔나
수잔나
아름다운 우정으로 탄생한 인물
모차르트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의 주인공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당연히 피가로 아니야?’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꼼꼼히 작품을 들여다보면, 이 오페라는 수잔나에 의한, 수잔나를 위한, 그리고 ‘수잔나의 결혼’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보마르셰의 원작이 존재하지만, 이를 음악으로 옮긴다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창작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수잔나 그 자체였던 여인이 모차르트 주변에 있었다면? 모차르트는 그 여인을 그저 악보에 구현하면 됐다면?
빈의 돌파구로 만든 오페라
모차르트는 1781년 빈에 도달한다. 오페라 작곡가로서 성공하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황제 요제프 2세의 마음에 들어서 음악감독 자리를 얻길 특히 고대했다. 하지만 그의 간절함에도 불구하고 글루크, 살리에리가 굳건하게 버티고 있는 빈의 오페라계는 모차르트에게 쉽게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요제프 2세는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의 작품에 뒤지지 않는 오페라를 원했다. 그는 아예 극장을 장악하여 본인의 뜻을 펼쳐보고자 했다. 프랑스의 오페라 코미크,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와 견줄 빈의 독일어 희극 오페라를 그는 꿈꿨다. 그렇게 탄생한 장르가 ‘노래하는 연극’이라는 의미의 징슈필이며, 대표작으로 모차르트의 ‘마술피리’를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마술피리’는 한참 후의 이야기이다.

취리히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2024) ©Herwig Prammer
시작은 1782년의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이었다. 당시에 유행하는 오리엔탈리즘을 적당히 녹여냈고, 여러 인기 가수를 고용했다. 모차르트 음악 역시 관객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작품에는 극악의 난도를 보여주는 몇몇 소프라노 아리아가 있다. ‘그 어떤 시련이 온다 해도(Marten aller Arten)’나 ‘아, 나는 사랑했어요(Ach, ich liebte)’ 같은 아리아는 극한의 고음과 콜로라투라가 있는 가혹한 곡이다.
모차르트가 이렇게 어려운 곡을 쓴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콘스탄체 역을 노래한 소프라노 카테리나 카발리에리(1755~1801)가 이에 매우 능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스타였던 그녀와 여타 탁월한 출연진 덕에 ‘후궁으로부터의 탈출’은 대성공이었고, 모차르트를 빈에 정착하도록 만들었다. 모차르트는 후에 카발리에리를 위해 ‘돈 조반니’의 돈나 엘비라의 아리아 ‘그 악당이 나를 배신했네(Mi tradì quell’alma ingrata)’를 별도로 작곡할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를 아꼈다.
카테리나 카발리에리에게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그녀가 ‘돈 조반니’에서 돈나 엘비라를 노래할 때, 돈나 안나를 노래했던 소프라노 알로이지아 베버(1760~1839)였다. 역사에는 알로이지아와 모차르트의 관계가 처형과 매제로 기록됐다. 모차르트가 아내(콘스탄체 베버)를 만나기 전에 알로이지아에게 먼저 반해 사랑을 고백했지만 거절당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성은 1779년에 요제프 랑에와 결혼하며 알로이지아 랑에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는 순조로웠다. 처형과 매제, 또한 빈의 스타 소프라노와 장래 유망한 작곡가로 말이다.
문제는 카발리에리와 랑에였다. 두 사람의 관계가 잘 드러나는 것이 모차르트가 1786년 작곡한 징슈필 ‘극장지배인(Der Schauspieldirektor)’이다. 이 작품은 부패한 극장지배인, 히스테리컬한 카스트라토, 무능한 작곡가와 대본가, 그리고 어리석은 프리마 돈나들이 무대를 놓고 다투는 모습을 풍자한다. 여기서 카발리에리는 마드무아젤 질버클랑을, 랑에는 마담 헤르츠 역을 맡아 서로가 빈의 ‘넘버원’이라고 다툰다. 한편, 현실에서 두 사람은 한가롭게 다툴 때가 아니었다. 이미 빈의 오페라계에는 새로운 신성이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돌하고 현명한 여성의 등장

낸시 스토라체
‘극장지배인’은 극장의 온갖 암투를 꿰뚫고 있던 요제프 2세가 모차르트에게 주문한 작품이었다. 황제의 오페라 사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징슈필이 자리를 잡지 못하자 대신 그럴싸한 이탈리아 오페라단을 원했다. 심지어는 좋은 가수를 국제적으로 스카우트하고자 했다. 그렇게 모셔 온 가수 중 한 명이 이탈리아에서 돌풍을 일으킨 소프라노 낸시 스토라체(1765~1817)였다.
런던에서 태어난 그녀는 신동으로 유명했고, 이탈리아로 건너간 후 곧 주요 도시들을 섭렵해나갔다. 이때 그녀의 당찬 성격이 큰 역할을 했는데, 유명한 일화가 있다. 피렌체 극장에서 노래할 때, 그녀는 조역이었고, 주인공은 마르케지라는 스타 카스트라토였다. 그는 마지막 음을 특유의 기교로 마무리했는데, 그게 어찌나 청중을 매혹했는지, 그 부분을 ‘마르케지의 봄바(폭탄)’로 부르기도 했다.
그다음이 스토라체가 노래할 순서였는데, 스토라체는 당돌하게도 그 봄바를 똑같이 노래했다. 관객들의 열렬한 환호가 이어졌다. 마르케지는 격분했고, 스토라체는 그만두라는 요구를 받았음에도 자신도 봄바를 보여줄 권리가 있다며 맞받아쳤다. 결국 그녀를 자르지 않으면 출연하지 않겠다는 마르케지의 엄포에 그녀는 피렌체 극장에서 쫓겨났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그녀는 이탈리아 주요 도시에서 승전보를 전하게 됐다. 겨우 15세 소녀가 유명해진 사연이었다. 요제프 2세의 제안으로 빈에 입성한 18세의 스토라체는 빈의 청중을 사로잡았고, 단숨에 카발리에리와 랑에로 양분된 프리마 돈나 세계를 비집고 들어갔다.
고통을 잊고, 자유를 쟁취하다
희극에 특화된 스토라체의 재능은 모차르트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녀의 성격과 재능이 완벽하게 반영된 역할이 바로 ‘피가로의 결혼’ 속 수잔나였다. ‘명랑하고, 영리하며, 재치가 넘치면서도 매혹적인 하녀’ 수잔나는 스토라체 그 자체였던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단순한 희극을 넘어, 당시 사회적 불평등과 권력 구조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작품에서 수잔나가 부당한 대우를 받는 하녀이기도 했지만, 현실의 프리마 돈나의 삶 또한 온당한 대우가 따라온 것은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 열렬한 환호를 받았지만, 사생활은 가십거리가 되어 소비됐다. 카발리에리는 살리에리의 정부라는 소문에 시달려야 했고, 스토라체는 남편의 폭력으로 고통을 받았다. 결국 요제프 2세가 스토라체의 남편을 추방하기까지 이르렀다. 심지어 6개월 된 딸의 죽음마저 고약한 추문의 소재가 되어 그녀를 괴롭혔다. 결국 그녀는 1785년 무대 위에서 목소리를 잃는 최악의 순간까지 맞이했다.
스토라체가 수잔나 역할을 만난 시기는 가수와 여성으로서 한껍에 닥친 모든 위기가 한바탕 휩쓸고 지난 후였다. 귀족의 억압적인 권력을 극복하고 자신의 사랑과 결혼의 자유를 쟁취하는 수잔나를 어쩌면 스토라체는 자신과 동일시할 수 있지 않았을까. 또는 반대로 위기를 겪고도 긍정적인 기운을 잃지 않는 스토라체를 보며 모차르트는 수잔나라는 역할을 완성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1787년 스토라체는 런던의 킹스 시어터의 제안을 받아 빈을 떠나게 됐다. 모차르트는 그녀를 위해 콘서트 아리아 ‘어떻게 당신을 잊을 수 있나요?(Ch’io mi scordi di te?)’ K505를 작곡하고 다음과 같이 자필 악보에 적었다. “스토라체를 위해 그의 하인이자 친구인 W.A. 모차르트가 작곡했다.” 모차르트는 런던 진출을 꿈꿨고, 스토라체는 이를 실현하기 위해 여러모로 애를 썼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재회는 이뤄지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1791년 세상을 떠났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오페라단 ‘피가로의 결혼’
3월 20~23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이혜정·손나래(수잔나), 김병길·박재성(피가로), 양준모·이동환(알마비바 백작) 외/
다비트 라일란트(지휘)/국립심포니/뱅상 위게(연출)
글 오주영 (성악가·독일 통신원) ‘오페라의 여인들’의 저자. 서울대 성악과를 졸업하고 독일 쾰른과 마인츠에서 오페라를 전공했다. 마인츠 극장에서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로 데뷔한 후 프랑크푸르트에 거주하며 오페라와 종교음악을 노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