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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블랑’
백색의 발레가 선사할 환상적인 세계로의 초대
‘지젤’ ‘백조의 호수’의 하얀 군무진. 아름다움을 준비하는 비밀창고 속으로!
‘라 실피드’(1832)를 비롯해 ‘지젤’(1841) ‘백조의 호수’(1877) ‘라 바야데르’(1877)는 발레 블랑이 등장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발레 블랑(Ballet Blanc)에서 ‘블랑’은 프랑스어로, 백색을 의미한다. 즉, ‘백색의 발레’라는 의미. 이는 순백의 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군무를 지칭하는 용어로, 19세기 탄생한 낭만 발레 작품에 등장한다. 흰색 튜튜를 입고 대열을 맞춘 무용수들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움은, 발레 군무에서만 느낄 수 있는 환상적이면서도 몽환적인 미장센이다.
군무 속 역할은 요정이나 마법에 걸린 백조, 혹은 유령 같은 초현실적인 존재들이다. 어둡고 푸른 조명 아래서 이어진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작품별로 발레 블랑 장면의 배경이 다르고, 이에 따른 의상의 길이에도 차이가 있다.
최근 발레 공연에 대한 관객의 관심이 높아진 가운데, 유니버설발레단(이하 UBC)은 이번 시즌에 발레 블랑이 포함된 두 작품, ‘지젤’(3·4월)과 ‘백조의 호수’(7월)를 선보인다.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발레 블랑 장면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또한 서로 다른 두 작품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지난 2월, UBC를 직접 찾아 명장면의 뒷이야기를 자세히 들어보았다.
백조는 짧고, 지젤은 길다!
UBC의 베이스캠프와도 같은 유니버설아트센터(서울시 광진구)의 1층 로비. 관계자만 출입할 수 있는 좌측의 문을 따라 들어가자, 발레단의 의상실에 도착했다. 분주하게 오가는 의상팀과 무용수들 사이로, 창고 문 너머에 얼핏 봐도 수백 벌은 넘어 보이는 의상이 걸려 있다. 공연이 끝나면, 발레 의상은 모두 철저히 관리된다. 자주 공연되지 않는 작품일 경우, 보관에 더욱 신경을 쓴다. UBC의 의상감독 정연주는 “지난해 선보인 ‘라 바야데르’의 경우, 1999년 초연 때 제작한 의상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발레 블랑에 사용되는 의상들은 사용 횟수가 많고, 많은 무용수가 착용하다 보니 자주 수선합니다. 흰색이다 보니 오랜 기간 사용하기에 한계가 있기도 하죠. ‘지젤’은 UBC의 1985년 국내 초연 이후, 1996년에 제작한 디자인으로 현재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발레 블랑 의상은 2번 정도 전체적으로 교체 제작을 거쳤죠. ‘백조의 호수’ 역시 의상 디자인은 1992년 초연의 것을 사용하되, 3번 정도 교체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정연주)

유니버설발레단의 군무 의상. ‘지젤’(좌), ‘백조의 호수’(우)
의상실에서 직접 꺼내 온 ‘지젤’과 ‘백조의 호수’의 발레 블랑 의상은 육안으로도 차이가 있었다. ‘지젤’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로맨틱 튜튜이고, ‘백조의 호수’는 다리가 완전히 드러나는 ‘짧은’ 클래식 튜튜. 두 작품 모두 원단은 촘촘한 그물 소재의 튤(Tulle)을 사용하지만, 그 특성은 다르다.
“튤 소재 원단은 종류가 아주 많습니다. ‘지젤’은 가볍고 부드러운 튤 소재로 수직적인 형태라면, ‘백조의 호수’는 강도 있는 튤 소재를 사용해 수평적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발레 블랑은 디자인은 단순하지만 움직일 때의 느낌이 중요한 장면이라, 신중하게 원단을 선택해야 합니다.”(정연주)
움직임을 반영한 조명과 의상

‘지젤’ 군무 의상
‘지젤’의 발레 블랑 장면은 윌리(유령)들의 춤이다. 죽은 지젤의 무덤을 찾아온 남주인공 알브레히트를 둘러싼 이 유령들은, 긴 치마 속에 빠르게 움직이는 스텝으로 마치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백조의 호수’에서는 팔과 다리의 움직임이 강조된다. 정연주 의상감독은 “머리부터 스커트까지는 물 위의 백조 깃털이, 그 아래로는 물밑에서 움직이기 위해 열심히 다리를 휘젓고 있는 백조가 그대로 연상되는 의상”이라고 덧붙였다.
조명의 사용 방식도 다르다. UBC의 조명감독 강낙천은 “세트가 다양한 뮤지컬이나 오페라와 달리, 댄스 플로어만 덩그러니 있는 발레에서는 조명을 잘못 사용할 경우 평면적인 무대가 된다”고 강조한다.
“흔히 ‘발레 조명은 밝게만 하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는데요, 한 색깔로만 큰 무대의 조명을 채울 순 없습니다. 관객에게 보이는 조명은 노란색이더라도,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색의 조명을 사용합니다. 그걸 ‘컬러 믹싱’이라고 하고요. 같은 맥락에서 조명의 위치와 감도도 중요합니다. 저는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조명(다운라이트)을 짙게 써요. 그리고 옆에서 비추는 조명(하이사이드)은 그것보다 조금 더 연하게 하죠. 그렇게 되면 바닥은 어둡지만, 무용수의 움직임이 잘 살아납니다. ‘백조의 호수’처럼 짧은 클래식 튜튜를 입을 경우, 위에서 떨어지는 조명으로는 그림자가 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안무인 다리의 움직임이 안 보일 수 있죠. 이런 경우 안무를 강조할 조명의 각도까지 신경 씁니다.”(강낙천)
UBC에서는 제작팀이 발레단 소속으로 근무한다. 작품 구상 단계부터, 무대·조명·음향·의상 제작팀이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현재 UBC 단원들이 착용하는 ‘지젤’과 ‘백조의 호수’ 의상은 모두 자체 의상실에서 직접 제작했다. 같은 발레 블랑 장면이어도, 이 섬세한 장인들의 눈에는 달리 보인다. 이들에게 ‘하늘 아래 같은 흰색이란 없다’.

‘백조의 호수’ 군무 의상
“발레 블랑에 푸른 조명이 쓰이기 시작한 건 시간과 장소를 표현하기 위함이었을 것 같아요. ‘백조의 호수’의 경우 호숫가고, ‘지젤’도 어두운 숲속이니까요. 그러나 ‘지젤’은 유령들의 등장이니, 조금 더 음침함이 느껴지죠. 깊은 숲처럼 보이도록 나뭇잎 모양의 고보조명(특정 패턴이 만들어지도록 판을 사용해 모양을 만든 조명)을 부각합니다. ‘백조의 호수’의 푸른 조명은 지중해 유럽의 어느 호숫가를 떠올리며 초록빛을 가미합니다. 한국의 호숫가에는 백조가 잘 없잖아요.(웃음) 에메랄드빛이 돌도록 조명의 ‘컬러 믹싱’을 한답니다.”(강낙천)
“무대 의상은 조명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무대에서 어떻게 보이는지를 같이 고민합니다. 때로는 원하는 색감을 얻기 위해 흰색에 아주 미세한 색을 더해 염색하는 경우도 있고요. 푸른빛이 도는 형광 흰색은 무대에서 차갑고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어 피하는 편입니다. 흰색이 가장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어느 색보다 예민하게 봐야 하는 색이에요.”(정연주)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박진호(Studio BoB)
PERFORMANCE INFORMATION
유니버설발레단 ‘지젤’
3월 21·22일 현대예술관 대공연장(울산)
3월 28·29일 세종예술의전당
4월 5·6일 고양아람누리 아람극장
4월 18~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5월 2·3일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유니버설발레단 ‘백조의 호수’
7월 19~27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RECOMMEND
‘발레 블랑’ 베스트 컬렉션
광주시립발레단 ‘라 실피드’(1832)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낭만 발레 작품. 공기의 요정 실피드의 동료 요정들이 로맨틱 튜튜를 입고 숲속에서 발레 블랑 장면을 보여준다.
파리 오페라 발레 ‘지젤’(1841)
유령(윌리)이 된 죽은 지젤. 무덤을 찾은 알브레히트를 둘러싼 윌리들은 로맨틱 튜튜를 입고 발레 블랑 장면을 펼친다.
키로프 발레 ‘백조의 호수’(1877)
클래식 튜튜를 입은 발레 블랑이다. 지그프리트 왕자가 숲속에서 백조 무리를 발견한다. 그중 한 마리는 저주에 걸린 오데트 공주. 백조가 공주로 변하는 이 비현실적인 호숫가에 공주와 함께 저주에 걸린 시녀들이 백조 무리다.
볼쇼이 발레 ‘라 바야데르’(1877)
여주인공 니키아가 죽고 난 후, 절망에 빠진 솔로르는 그녀의 환영을 본다. 어둠 속에서 한 명씩, 클래식 튜튜를 입은 무용수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무대를 가득 메우는 이 장면을 보고 있자면 솔로르가 왜 니키아의 망령을 따라 세속을 떠났는지 약간(?) 납득당할 만큼 환상적이다.
ABOUT
발레 ‘블랑’에서 발레 ‘블랙’까지
발레 블랑은 반드시 ‘흰색’이기 때문에 아름다울까? ‘순백의 신부’라는 형용사가 익숙하게 느껴질 만큼, 흰색이 상징하는 특별함은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혀 있다. 그러나 발레단마다 뛰어난 유색 인종 무용수들이 인정받고 있는 오늘날, 발레 블랑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는 색깔을 넘어야 할 때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 최초의 아프리카계 무용수인 미스티 코플랜드는 2015년 ‘백조의 호수’ 주역을 맡았다. 백색의 군무를 이룬 무용수들을 앞으로, 오데트 공주는 갈색의 팔과 하얀 다리를 뽐냈다. 그의 SNS 상단에는 자신의 피부색에 맞춰 토슈즈에 색을 칠하는, 일명 ‘팬케이크 굽기(pancaking)’ 과정을 찍은 영상이 업로드되어 있다. 중력을 거스른 듯한 발레의 움직임을 더 돋보이게 하기 위해 토슈즈가 피부색과 같아야 하기 때문. 최근에는 아프리카계 무용수들을 위한 다양한 색의 토슈즈와 타이츠들도 출시 중이다.
백조가 가진 아름다운 몸짓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무용수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이어지는 연결된 동작을 감상해야 한다. 하얀 타이츠를 신은 아프리카계 무용수들에게는, 백조의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낼 의상이 아직은 준비되지 않은 듯하다. 더 이상 하얗지만은 않은, 그러나 여전히 환상적인 발레 블랑을 만나는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