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안 게르하허의 명반 탐독기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3월 3일 9:00 오전

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가곡과 오페라를 넘나드는 목소리

3월 9일 첫 내한 앞둔 바리톤 크리스티안 게르하허의 명반 탐독기

 

© Gregor Hohenberg/Sony Music Entertainment

크리스티안 게르하허(1969~)의 특징이라면 가곡에서는 오페라적인 열정을, 오페라에서는 가곡적인 해석력을 발산한다는 점이다.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1925~2012)의 뒤를 이어 영웅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독일 바리톤의 계보를 이어나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마티아스 괴르네(1967~)가 조금 더 섬세하고 깊이 몰입하는 이지적인 해석가에 가깝다면 게르하허는 이보다는 훨씬 극장적인 흥분과 직선적이고 감성적 호소력이 강한 명창에 가깝다고나 할까.

게르하허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독일 바리톤으로서 공연은 물론이고 바쁜 일정 속에서도 음반 작업 또한 활발하게 이어왔다. 독일 레퍼토리를 중심으로 가곡·종교음악·오페라 등 모든 장르를 아우르며 자신만의 독보적인 디스코그래피를 만들어 나가는 중이다.

15년간 심혈을 기울인 슈만

게르하허의 대표적인 음반을 꼽으려면 독일 리트에서 출발해야 한다. 한 가지 특기해야 할 사항은 그가 오직 피아니스트 게롤트 후버(1969~) 한 사람과 모든 리트 녹음을 진행해 오고 있다는 점. 그중에서도 슈만 가곡은 게르하허가 가장 공을 들인 분야일 것이다. 피셔디스카우 이후 슈만의 음악에 이만큼 정성을 기울인 바리톤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 오페라적인 폭발적인 감정과 섬세하기 이를 데 없는 여린 감수성을 대비시키며 텍스트 안에 숨어 있던 슈만의 시성과 아름다움을 새롭게 드러냈다. 그의 호방하고 빛을 발하면서도 짙은 호소력을 지닌 발성, 그리고 일말의 향수를 자극하는 듯한 청년미가 배어 있는 음색 그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으로 영원한 젊음을 갈구했던 슈만의 음악적 지향점과 잘 맞아떨어진다.

그는 2021년 총 11장으로 구성된 슈만 가곡 전집(Sony)❶을 발매했는데, 이는 그가 15년에 걸쳐 한 장 한 장 발매해 온 299개의 슈만 가곡 음반을 묶은 기념비적인 유산이다. 유명한 연가곡들의 해석도 대단히 훌륭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가곡들의 가치를 진지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재조명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한다. 작품번호 100번대 부근의 후기 가곡들이 지닌 절제된 감수성을 비롯해, 가곡들을 표현하는 게르하허의 통찰력과 시성은 남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특히 비극적인 사랑과 격양되면서도 허무한 심정을 담아낸 작품들에서 슈만의 자전적인 면모와 세월에 따른 감성의 변화를 오롯이 끌어내며, 차원이 다른 슈만의 자화상을 그려냈다. 이 음반은 2021년 그라모폰의 크리틱스 초이스와 에디터스 초이스, 디아파종 도르를 비롯하여 많은 음반상을 휩쓴 바 있다.

한편, 슈베르트 가곡 음반을 발매하는 속도는 조금 느린 편이다. 신중하게 음악을 분석하고 공감하는 그만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방대한 양의 슈베르트 가곡 전곡 녹음을 장담하기란 어려운 것이 사실. 그럼에도 그는 꾸준하게 음반을 발매하며 슈베르트로 향하는 여정에 자신감과 확신을 보여주고 있다. 2003년과 2017년(Sony)❷ 두 번에 걸쳐 발매한 ‘아름다운 물레방앗간 아가씨’, 2008년의 ‘겨울나그네’(RCA)❸, 그리고 1999년의 ‘백조의 노래’(Arte Nova)❹까지 슈베르트의 3대 가곡집이 대표적이다. 각각 2006년과 2014년에 발매한 가곡집 ‘리더(Lieder)’와 ‘밤의 바이올린(Nachtviolen)’ 등도 추천한다.

이 외에도 베토벤·쇤베르크·하이든·베르크의 가곡이 수록된 2012년 출반한 가곡 음반 ‘멀리 있는 연인에게’, 2017년에 발매한 브람스 ‘아름다운 마겔로네’도 추천하는 음반이다.

 

오페라 가수로서의 면모

게르하허의 활약은 오페라에서도 상당하다. 특히 파비오 루이지가 이끈 취리히 오페라의 실황 영상물을 두 편을 추천한다. 2016년 베르크 ‘보체크’(Accentus Music)❺는 게르하허의 모든 것이 담겨 있기에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기에 손색이 없다. 특히 보체크라는 캐릭터가 지닌 불안한 심리상태부터 광기 어린 발작까지 폭넓은 감정 스펙트럼을 목소리와 눈빛으로 완벽하게 소화하며 명연기와 가창을 보여준다. 이보다 더 뛰어난 보체크를 만나려면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2021년 베르디 ‘시몬 보카네그라’에서 그가 맡은 타이틀롤 시몬 역 또한 기억할 만한 명연이다.

2017년에 발매된 드뷔시의 ‘펠레아스와 멜리장드’(LSO Live)❻는 사이먼 래틀/런던 심포니와 함께한 실황 음반이다. 게르하허는 명료하면서도 아름답게 펠레아스를 소화하며, 막달레나 코체나(멜리장드 역)와 좋은 앙상블을 이뤘다. 여기에 래틀의 지휘가 더해져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명연주를 만들어냈다.

게르하허가 오페라 가수로서 진정으로 가장 빛을 발할 수 있는 작곡가는 다름 아닌 바그너다. 무엇보다도 뮌헨 바이에른 슈타츠오퍼에서 그가 등장한 ‘탄호이저’의 볼프람 폰 에센바흐 역은 언제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바그너 오페라 전집 중 ‘탄호이저’(PentaTone)❼에 볼프람으로 등장한 게르하허의 맹활약도 놓칠 수 없다. 독일 바리톤의 전형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그는 바리톤 하인리히 슐루스누스(1888~1952)로 대변되는 전설적인 계보를 이어 나가기에 모자람이 없다. 2013년 야노프스키/베를린 방송교향악단의 실황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 음반(Sony)❽도 게르하허의 디스코그래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2015년,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돈 조반니’ ‘피가로의 결혼’ ‘코지 판 투테’ ‘마술피리’의 유명 바리톤 아리아들을 섭렵한 음반이다. 그의 낭창하면서도 확산감이 뛰어난 모차르트 스타일을 확인할 수 있는 명반이기에 우선적으로 추천할 만하다.

2012년에는 하딩/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과 바그너·슈베르트·슈만·베버의 오페라 가운데 유명한 바리톤 아리아들을 수록한 음반 ‘로맨틱 아리아’를 발매했는데, 오페라 가수로서의 게르하허를 보여준다.

 

말러의 새로운 매력을 전하다

게르하허의 넓은 레퍼토리 가운데 말러의 작품은 대단히 특별하다. 그는 오페라적인 표현력을 바탕으로 텍스트에서 기인하는 감정표현과 독일어의 고유한 발음적 뉘앙스를 개성적으로 소화하여, 기존의 바리톤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말러의 웅장하면서도 소박한 정서를 직관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2010년 음반인 말러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DG)❾가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불레즈/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의 연주에 맞춰 메조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제나와 함께한 이 녹음은 1968년 조지 셀/런던 심포니와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가 남긴 역사적인 명반의 아성에 도전하는 초절(超絕)명연을 펼쳐냈다. 그리고 오케스트라 가곡집(Sony)❿은 그의 말러 음반 중에서도 가장 추천할 만하다.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뤼케르트 가곡’이 수록되어 있으며, 나가노/몬트리올 심포니의 연주로 녹음됐다.

또한 2009년에 발매된 가곡집 ‘리더’(RCA)⓫에는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와 ‘뤼케르트 가곡’이 피아노 반주로 수록돼 전혀 새로운 말러의 감수성을 보여주는 만큼, 다른 음반에 우선하여 들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2023년 ‘대지의 노래’(Sony)⓬에서는 테너 피오트르 베찰라(1966~)와 함께 바리톤만이 표현할 수 있는 색다른 감동을 안겨준다. 두 음반 모두 게롤트 후버가 피아노를 연주했다.

 

오케스트라와 빚어낸 강렬한 순간들

오케스트라와 함께한 레퍼토리에서도 게르하허의 존재감은 단연 돋보인다.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에서 오케스트라의 휘몰아치는 광풍이 끝난 직후 중요한 계시를 울리는 바리톤 솔로는 뭇 성악가들의 로망이 아닐까. 2017년 블롬슈테트/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는 베토벤 교향곡 전집을 발매했고, 게르하허는 그중 9번 ‘합창’에 등장해 가슴을 울리는 우렁차면서도 고양감에 가득 찬 목소리를 들려준다. 그의 디스코그래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대목이다.

2010년 대니얼 하딩/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DG)⓭, 2005년 래틀/베를린필과 녹음한 두 종의 오르프 ‘카르미나 부라나’를 통해, 현재 누구도 대적할 적수가 없을 정도로 뜨거운 절창을 선보였다. 2013년 얀손스/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과 함께한 브리튼의 ‘전쟁 레퀴엠’(BR Klassik)⓮에서도 그의 무시무시한 포효가 귀를 잡아끈다.

게르하허는 종교작품에서도 뛰어난 기량을 보여준다. 뮌헨에 거주하고 있어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의 예술감독인 래틀과 자주 호흡을 맞추는데, 올해 2월에 발매된 하이든의 오라토리오 ‘천지창조’(BR Klassik)⓯에서의 역할 또한 대단히 인상적이다. 종교작품에 오페라적인 감정 고양을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게르하허의 개성적인 스타일은 그 자체로서 충분한 설득력을 발산한다. 2004년 아르농쿠르/콘센투스 무지쿠스 빈과 녹음한 같은 곡의 음반은 이번 음반보다 정격적인 스타일이 강하고, 게르하허의 목소리 또한 한결 젊어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이외 아르농쿠르와 협업한 또 다른 음반으로는 2006년부터 2010년 사이에 발매된 바흐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와 ‘칸타타’ BWV29·61·140, 하이든의 ‘오를란도 팔라디노’와 ‘사계’를 강력히 추천한다.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

 

 

PERFORMANCE INFORMATION

크리스티안 게르하허 리사이틀

3월 9일 오후 5시 성남아트센터 콘서트홀

슈만 ‘아이헨도르프 시에 의한 리더크라이스’ ‘로망스와 발라드 3집’ 외(피아노 게롤트 후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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