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일상에 자리 잡은 동시대 음악의 거장
음반을 통해 살펴보는 루도비코 에이나우디의 음악 세계

© Mary McCartney
미니멀 음악은 난해하기만 했던 20세기 음악사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대중은 열광했고, 이 음악은 앰비언트와 뉴에이지를 관통하며 영화음악과 네오클래식 음악의 중심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그즈음의 많은 작곡가들이 미니멀 음악의 후계자를 자처했다. 에이나우디(1955~)도 그중 하나였다.
루치아노 베리오(1925~2003)와 공부하며 전형적인 아카데믹 작곡가의 길을 걷던 에이나우디는 27살이던 1982년 미국의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미니멀 음악을 접한다. 이후 에이나우디의 음악은 반복하는 단편, 온화한 울림의 화성, 귀에 쏙 들어오는 선율, 너른 음악적 짜임새를 장착하게 되었다. 그렇게 미니멀 음악의 가장 기본적인 기술을 취득한 그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로 동시대 청중에 부지런히 파고들게 된다.
그런데 고민해 볼 지점이 있다. 미니멀 음악에 경도됐던 수많은 20세기의 작곡가 중 현재 에이나우디 만큼의 성공을 거둔 이가 있는가? 그의 성공 요인을 한 가지로 규정하기는 어렵지만 현재까지 발매한 음반을 바탕으로 대략의 이유를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에이나우디는 디지털 매체를 활용하는 21세기 청중의 니즈를 정확히 파악하며, 이들에게 꼭 맞는 음악적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 분명한 사실은 그의 음악 세계가 1988년부터 현재까지 발매한 17장의 스튜디오 음반과 함께 꾸준히 성장했다는 점이다.
에이나우디의 음악적 선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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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말의 에이나우디는 조성과 무조를 두루 쓰며 다양한 음악적 스타일을 탐색했다. 1988년 발표한 무용음악 ‘타임 아웃’(Ricordi)❶은 전자악기에 호기심을 보였던 그 시대 젊은 작곡가의 면모를 드러내며, 미니멀 음악과 재즈, 앰비언트 등 다양한 장르의 영향력이 느껴진다. 몇몇 트랙에서는 신시사이저가 즉흥연주를 펼치고 무조의 선율이 무심히 등장하기도 한다.
1992년 발매한 ‘방’(Decca)❷은 하프를 위한 음반이다(※ 과거 여러 레이블에서 출시되었던 음반들이 최근 데카(Decca)에서 재발매되었다). 가벼운 뉴에이지풍 짜임새에서부터 스티브 라이히(1936~)의 음악을 연상시키는 좀 더 복잡한 성부의 음악까지 다양한 스타일이 혼재한다. 1996년 발매한 ‘파도’(Decca)❸는 버지니아 울프(1882~1941)의 소설에서 영감을 받은 피아노 독주 음반이다. 필립 글래스(1937~)와 마이클 니먼(1944~)의 영화음악을 연상시키는 미니멀 음악의 전형적인 작법이 지배적이다. 일부 곡은 에릭 사티나 쇼팽의 음악을 뉴에이지풍으로 재작업한 것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흥미로운 것은 오리지널 미니멀 음악이 감정적인 동요를 최대한 억제한 채 같은 지점을 뱅뱅 도는 듯한 시간성을 보여줬다면, 에이나우디는 비교적 초기작에서부터 반복하는 악구로 감정적 고조를 만들어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클라이맥스를 창출해야 하는 영상음악으로 사용되기에 탁월했고, 점점 더 많은 대중에 노출됐다. 그렇게 에이나우디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총 70여 편의 장·단편 영화 및 TV 시리즈에 음악을 삽입하거나 작곡했다.
2004년의 ‘어느 아침’(Decca)❹은 피아노가 중심이지만 몇몇 트랙에서 첼로 선율이 돋보인다. 몇 개의 화음으로 구성된 규칙적인 악구 진행을 보여주며, 선법적인 음계는 이국적인 느낌을 풍긴다. 음악적 흐름은 미니멀 음악보다는 오히려 리샤르 클레데르망(1953~)과 같은 뉴에이지 선배가 떠오른다.
2009년에 발매한 ‘나이트북’(Decca)❺의 일부 트랙은 영화나 드라마 배경음악의 전형이다. 특히 수록곡 중 ‘나이트북’과 ‘에로스’는 긴박감 넘치는 비트 위로 선율이 고조되어 영화의 빠른 시퀀스에 잘 어울린다. 다른 음반과 마찬가지로 피아노 독주가 중심이지만 타악기·일렉베이스·첼로 등 다채로운 악기가 등장한다. 이런 2000년대 음반 수록곡의 상당수는 큰 인기를 얻으며 수많은 매체에 삽입 음악으로 활용됐다.
이국적이고 낯선 풍경을 담다

❻ Decca 882020
에이나우디는 다양한 지역의 민속악기를 활용하며, 낯선 풍광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쓴다. 과거의 월드음악 작곡가들이 신기한 음향적 자원을 채굴하러 제3세계를 기웃거렸다면, 에이나우디는 지역의 음악 스타일을 그대로 유지한 채 거기에 자신의 감성을 추가한다.
2003년 발표한 ‘디아리오 말리’(Decca)❻는 서아프리카 말리 공화국의 코라 연주자 발라케 시소코(1968~)와 함께한 음반이다. 코라는 서아프리카에서 유래한 전통 현악기로, 하프와 류트의 특징을 두루 갖춘 독특한 악기다. 다소 거친 듯한 코라의 음색과 피아노가 제법 잘 어울리며, 재즈의 영향력이 강하게 느껴진다. 피아노와 코라는 즉흥연주를 하듯 전개되며, 편안하고도 열정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2015년에 발표한 ‘타란타 프로젝트’(Decca)❼는 아코디언·밴조·만돌라·코라·피들 등 세계 각국에 기원을 둔 낯선 악기를 전면에 배치했다. 몇몇 음악은 포크송을 기반으로 하며 이탈리아의 살렌토 지방·아프리카·중동 등 다양한 기원의 음악을 결합했다. 비교적 흥겨운 비트가 인상적이라는 점에서 에이나우디의 정적인 작업과는 거리가 있는 음반이기도 하다. 이 음반들을 제외하고도 에이나우디의 여러 음악에서 토속적인 선율과 이국적인 꾸밈음 등이 발견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에이나우디 독특한 감성이 완성된다. 세계 음악적 요소들은 다양한 음악에서 영감을 얻고 전 지구적으로 음악가 친구를 사귀는, 21세기 음악가로서의 에이나우디의 작업환경을 대변한다.
디지털 청취 환경의 수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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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오디오 기술은 현대를 살아가는 대중에게 필수품이 되었다.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는 노이즈 캔슬링 기능과 함께 볼륨을 올리면, 연주자의 손끝에서 만들어지는 아주 작은 잡음까지 생생하게 청취할 수 있다. 이런 환경에서 에이나우디는 자신의 음악에 음향의 ‘질감’을 섬세하게 다룸으로써 대중의 귀에 극히 달콤한 청취 경험을 선사한다. 그는 일찍이 2006년 ‘디베니레’(Decca)❽에서부터 음악의 사운드디자인에 특별히 신경썼다. 음향의 루핑과 잔향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가 하면, 현악기의 하모닉스를 도드라지게 표현했다. 이 음반에서는 클라이맥스로 향하는 감정선이 오케스트라로 강렬하게 추동되는 ‘봄(Primavera)’이 큰 인기를 얻었다.
‘시간과 경과에 따라’(Decca)❾는 2013년 발매한 일렉트로니카적 성격이 짙은 음반이다. 칼림바·기타·타악기·첼레스타는 물론 오케스트라의 다양한 악기를 활용하는 등 음색적으로 극히 다채로운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음반은 섬세한 사운드디자인으로 마무리되어 하이파이 오디오 시스템으로 그 진가를 느낄 수 있게 구성되었다. 이제껏 선율과 화음 악기로만 등장했던 피아노가 이 음반에서는 고유의 울림과 잔향을 한껏 드러내고 있다는 점도 흥미롭다.
조금 색다른 작업인 ‘집에서의 12곡’(Decca)❿은 작곡가의 집에서 아이폰으로 녹음, 2020년 발매됐다. 팬데믹 시절 진행한 라이브 스트리밍 콘서트를 디지털 음원으로 출시한 것으로, 음악 전체가 ‘저음질’의 먹먹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완전하지 않은 음향적 충실도가 오히려 아날로그 감성을 자아내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2015년의 ‘원소’(Decca)⓫에서는 작은 모티브의 반복과 변형, 그리고 이를 통한 확장이 여러 트랙에서 펼쳐진다. 피아노를 비롯한 어쿠스틱 악기와 오케스트라를 기본으로 전자음악적 색채를 가미했으며 다른 음반과 마찬가지로 음향의 질감과 잔향 처리에 공을 들였다. 에이나우디가 음반을 구상하며 떠올렸던 창조 신화나 기하학, 초원의 들풀과 같은 다소 추상적이고도 자연적인 개념들은, 이제 청자의 상상력 안에서 디지털 세계 속 새로운 풍경으로 재탄생한다.
일상과 자연이라는 작지만 큰 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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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나우디는 작곡의 초기부터 일상과 자연에서 영감을 받은 곡을 발표했다. 이러한 경향이 극대화된 최근의 작업이 ‘7일간의 산책’(Decca)⓬이다. 이 음반은 2018년 에이나우디가 알프스에서 산책했던 경험과 고민을 총 7장의 시디로 발매한 것이다. 각각의 음반은 ‘첫 번째 날’ ‘두 번째 날’과 같은 이름이 붙어 있고, 산책에서 느낀 자연의 풍경과 거기에서 느낀 감정이 ‘그래비티’ ‘풀문’ ‘콜드 윈드’ 등의 음악으로 제시된다. 흥미로운 점은 동일한 길을 7일간 산책하며 느낀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동일한 음악의 변주로 제시한 점이다. 피아노·바이올린·비올라·첼로로 구성된 여백이 많은 음악이기에, 현대인의 멀티태스킹 작업환경에 청각적 동반자로 제격이다.
일상적 소재와 소소한 감각을 음악화하는 그의 작업은 2022년 발매한 ‘언더워터’(Decca)⓭에서도 여전하다. ‘바람의 노래’ ‘인디언 옐로’ 등 평범한 제목의 이 음악들은 대체제가 없는 에이나우디만의 감성을 보여준다. ‘플로라’와 같은 곡에서 에이나우디는 이제 글래스와 니먼, 클레데르망과 같은 선배들로부터 완전히 독립한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18세기 초 전고전주의 혹은 더 이전 시기의 클래식 음악과의 연결점이 어렴풋이 들리는 듯하다.
가장 최근 발매된 ‘여름 초상화’(Decca)⓮는 대규모 편성으로 특유의 정제된 스타일을 보여준다. ‘시퀀스’에서는 솔로 바이올린의 미세한 보잉이나 음색이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다뤄진다. 자연이라는 주제가 여전히 전면에 드러나 있으며, 격정적인 감정으로 청자를 이끄는 ‘꿈을 기억하며(In Memory of a Dream)’와 같은 트랙이 돋보인다. 자연의 풀벌레 소리가 함께 녹음된 ‘제이(Jay)’는 더 놀랍다. 에이나우디는 자신의 음악 안에 인간을 둘러싼 환경을 온전히 담아낸 동시에, 청자에게 그들만의 새로운 자연을 상상하게 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글 이민희(음악평론가)
PERFORMANCE INFORMATION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내한 공연
4월 2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루도비코 에이나우디(피아노), 페데리코 메코치(바이올린·비올라), 레디 하사(첼로),
프란체스코 아큐리(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 로코 니그로(아코디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