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류주연, 틀을, 벗어나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4월 1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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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류주연

국립극단의 남산 복귀작, ‘그의 어머니’로 바라본 인간의 본성과 모성

 

틀을, 벗어나다

 

 

국립극단이 서계동 시대(백성희장민호극장, 소극장 판)를 마무리하고, 14년 만에 다시 국립극장으로 돌아간다. 극단은 남산 복귀를 알리는 첫 작품으로 영국의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의 장편 희곡 ‘그의 어머니’를 택했다. 강간 혐의로 형을 선고받은 아들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으로, 박정희 예술감독은 이 장편 희곡을 읽자마자 연출가 류주연을 떠올렸다. ‘강렬한 드라마와 미묘한 심리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연출가는 류주연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류주연은 프란츠 크사버 크뢰츠(1964~)의 희곡 ‘오버외스터라이히’를 한국적으로 번안한 ‘경남 창녕군 길곡면’(2007), 코죠우 토시노부(1959~)의 희곡을 원작으로 하는 ‘기묘여행’(2010)과 ‘공포가 시작된다’(2022) 등 작품성이 검증된 해외 원작들을 국내 무대에 올리며 연출력을 인정받아 왔다.

내밀한 감정 묘사로 다양한 인간 군상과 시대상을 담아내는 그의 연출은, 올해 국립극단이 집중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 양식’과도 맞닿아 있다. 류주연은 이번 작품에 대해 “궁지에 몰렸을 때 드러나는 작중 인물들의 모습은 어쩌면 우리 모두의 본능적인 모습”이라며 “‘그의 어머니’는 인간의 본성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의 어느 날,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에서 연습을 앞둔 류주연을 만났다. 자신을 ‘카리스마 없는 연출가’라고 소개했지만, 작품을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서 연출가 특유의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국내에서 첫선을 보이는 연극입니다. 처음 작품을 제안받고 어떤 생각이 들었나요?

저는 편견, 통념 같은 개념에 관심이 많아요. 처음 희곡을 읽으면서 작품의 내용이 제 생각과 많이 다르다는 느낌을 받아서 오히려 큰 자극이 되었죠. 제게 자극을 주는 작품은 관객에게도 자극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레 작품에 대한 욕심도 생겼고요.

공연을 앞두고 연습이 한창일 텐데요. 연출가의 시선에서 가장 흥미롭게 느낀 장면이 있다면요.

첫째 아들의 범죄 이후, 이혼한 남편이 막내아들을 데려가겠다고 하자, 아내가 첫째 아들을 데려가라고 하는 장면이 있어요. 인간의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상황이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모성애가 의심되는 상황으로 비춰지죠. 한국에서 양육에 대한 문제가 생겼을 때 “엄마는 뭐 했냐”라는 질문이 먼저 나오는 건 오랜 관습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이에요. 관습은 자극을 통해 변화될 수 있고, 변화는 예술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어요. 우리는 사회에 어떤 통념이 존재하는지 인식하고, 그 통념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해야 합니다. 이 작품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고요.

주로 시대상을 반영하는 작품들의 연출을 맡아 왔습니다. 이번 작품을 통해 조명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요?

‘그의 어머니’는 관객에게 여성과 모성에 대한 고정된 틀을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에요. 작품은 사회적 통념에 휘둘리는 작중 인물들을 비웃지만, 이들을 비웃는 관객 역시 같은 통념에 휘둘리고 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게 다가오죠. 번역극 연출에서 중요한 요소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은 문화의 차이예요. 번안을 통해 관객이 이해하기 쉽게 만들고, 어떤 부분은 아예 삭제하기도 하죠. 결국, 작품 속에서 문화의 이동을 어떻게 하는지가 가장 중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인간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

지난해 서울시극단의 ‘퉁소소리’(각색·연출 고선웅) 오디션에서 10개 역을 꿰차며 심사위원과 배우들을 놀라게 했는데요. 연출가로서 놀라운 도전이었습니다.

연출가는 작품에 대해 개념적으로 설명할 수는 있어도 각 인물의 내면까지 깊이 파고들 수는 없어요. 반면, 배우는 한 인물에 깊이 파고들죠. 그런 경험 때문에 연기를 해보고 싶었어요. 저도 제가 연기를 잘할 거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욕심은 있거든요. 그래서 오디션을 봤어요. 농담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고, 실력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싶었어요. 아무쪼록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웃음)

지금까지 40편가량의 작품을 무대에 올렸습니다. ‘연출가 류주연’만의 스타일은 무엇인가요?

여러 사람의 의견을 듣고 종합해서 결정하는 게 제 연출 스타일이에요. 고선웅 연출가처럼 정해진 방향으로 강하게 이끌어가는 스타일이 있는 반면, 저는 생각이 자주 바뀌기 때문에 배우들에게 “이쪽으로 가자!”라고 말하기가 어려워요. 가다가 이 길이 아닌 것 같으면, 다시 방향을 바꿔야 하니까요. 그래도 이런 성향 덕분에 자연스레 여러 의견에 귀 기울이게 되고, 그 과정에서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다고 생각해요.

연출작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소개해 주세요.

카리스마 넘치는 연출가들 사이에서 재능이 부족하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중 ‘경남 창녕군 길곡면’이라는 2인극의 연출을 맡았어요. 그 당시 연출가에게 적극적으로 제안하며 무대를 만들어가는 김선영 배우와 이주원 배우를 보면서 강한 성격이 아니어도 연출을 할 수 있겠다는 용기를 얻었죠. 이번 작품에서 오랜만에 김선영 배우(브렌다 역)와 호흡을 맞추다 보니,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작품의 초기 구상 단계에서 영감을 얻는 요소가 있나요?

주로 고전 작품을 읽어요. 고전은 오랜 세월을 지나 살아남은 작품이잖아요. 오랫동안 사랑받는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요. 앞서 이야기했던 인간의 본성과 통념 등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가치들이 담겨 있기도 하고요. 요즘은 극단 배우들과의 독서 모임에서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를 읽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국립극단이 국립극장으로 돌아와 둥지를 트는 첫 작품입니다. 서계동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국립극단의 작품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2021년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청소년극 ‘더 나은 숲’을 인상깊게 봤던 기억이 나요. 기존의 청소년극에서 벗어난, 더 과감한 느낌의 작품이었어요.

이번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요?

‘그의 어머니’는 우리가 인간을 판단하는 방식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좋다, 나쁘다, 거만하다며 쉽게 평가하지만, 인간은 고정된 틀 안에 있지 않아요. 한 사람이 철저하게 무너졌을 때, 원래 갖고 있던 성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지요. 작품에는 모든 걸 잃고, 실패한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봤을 땐 그리 나쁘지 않은 인생들이에요. 우리는 흔히 비극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라고 하듯, 비극 또한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요소인 셈이죠.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극단

 

류주연(1971~)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극단 백수광부에서 10년간 배우와 조연출로 활동했다. ‘경남 창녕군 길곡면’ ‘기묘여행’ ‘12인의 성난 사람들’ ‘1945’ 등을 연출했으며, 제47회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 제4회 이데일리 문화대상 연극부문 최우수상, 제37회 영희연극상, 제24회 김상열연극상을 받았다. 2008년 극단 산수유를 창단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극단 ‘그의 어머니’

4월 2~19일 국립극장 달오름

작 에반 플레이시, 번역 이인수, 연출 류주연 김선영(브렌다 카포위츠), 최자운(제이슨 카포위츠), 최호재(매튜 카포위츠), 홍선우(로버트 로젠버그), 이다혜(제시카), 김용준(스티븐), 김시영(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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