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NGE
연출가 양정웅
국립무용단의 신작 ‘미인’.
춤과 아름다움으로 드러나는 양정웅의 또 다른 연출미학
한국춤을 위한 ‘멋’들어진 놀이판을 만들다
양정웅의 연출은 연극에서 시작해 뮤지컬, 오페라까지 넘나든다. 다양한 장르에 새겨진 양정웅식 각인은, 바로 ‘전통의 접목’이다. 그의 비틀어보기 방식은,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미(美)가 드러내야 하는 고유의 접점을 성공적으로 찾아낸다. 전통을 덧입혀 각색·연출한 연극 ‘한여름 밤의 꿈’은 셰익스피어의 본고장에서 인정받았고, 국가의 문화적 역량을 자랑했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의 개회식 연출도 그의 차지였다.
양정웅만의 ‘전통 접목하기’가, 오는 4월 국립무용단(예술감독 김종덕)과 만난다. 이번 시즌 국립무용단의 대표 레퍼토리인 ‘미인’은, 공공무용단으로서 세계에 선보일 만한 문화적 콘텐츠 제작하겠다는 야심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패션지 ‘보그 코리아’에서 한복을 재해석하며 독보적인 미학을 보여주었던 서영희를 의상 디자이너로, 최근 예술적 결을 곁들인 K팝 뮤직비디오로 주목받고 있는 신호승을 무대 디자이너로 구성한 것이 대표적 예시. 여기에 밴드 이날치의 리더인 장영규의 음악과, 최근 화제를 모은 Mnet ‘스테이지 파이터’의 코치로 등장한 안무가 정보경의 춤까지 더하며 ‘어벤져스’ 제작진을 자랑한다.
이는 아트디렉터 ‘정구호식’ 미장센으로 국립무용단이 대표작으로 삼은 ‘묵향’ ‘향연’이나, 전통춤의 현대적 재해석에 방점을 찍은 최신작 ‘행+-’, 예술감독 김종덕의 취임 후 첫 안무작인 ‘사자의 서’와도 결을 달리 한다. 스물아홉 명의 여성 단원 몸속에 내재한 전통을 바탕 삼아 춤은 재해석됐고, 이를 둘러싼 무대의 요소들은 화려하다. “이 모든 요소가 과연 잘 어우러질까”라며 스치듯 되뇌는 기자의 말끝에, “어우러지게 도와드려야죠. 그게 연출의 역할이니까”라는 양정웅의 확신 있는 답변이 되돌아왔다.
국립무용단 라인업에 ‘양정웅’의 등장은 낯설게 느껴진다. 이번 작품에는 어떻게 합류하게 되었나?
오페라와 무용은 어렸을 때부터 흠모하던 장르다. 이번 무용 작품 도전은, 감사하게도 국립무용단 측에서 여러 해 동안 제안을 주셨다. 수락하고선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은 욕심에 미궁에서 헤맸는데, 국립무용단 PD들이 끈질기게 같이 아이디어를 고민해 주었다. 프로듀서들의 제작 능력에 감탄했다. 이번 작품인 ‘미인’이 표현하고 싶은 강인하면서 포용하는 힘! 무용단 PD들의 모습이 뮤즈 그 자체였다고 말하고 싶다.
무용 작품에서는 ‘연출가’라는 타이틀이 잘 없다. 스토리가 없는 무용 작품 연출이 낯설진 않았는지?
서울국제무용제에 대본을 쓰고 연출했던 경험이 있고, 유니버설발레단의 발레 뮤지컬 ‘심청’ 연출도 했다. 극단 ‘여행자’ 초창기 시절 만든 작품들에 이미 비언어극적인 성격이 많았다. “말 없는 연극을 할 거면 무용 연출을 하지 왜 연극을 하냐”는 얘기를 들을 정도였으니까. 연극을 시처럼 이해하는 편이었는데, 무대 예술 중 가장 추상적이면서 시적인 것이 무용 아닌가. 비선형적인 형태에서 오는 자유로운 상상이 낯설지 않았다.
춤의 무대를 채워내는 연출의 묘
국립무용단의 신작 ‘미인’은 여성 단원들만 무대에 오른다. ‘산조’ ‘칼춤’ ‘놋다리밟기’ ‘강강술래’ ‘부채춤’ ‘탈춤’ 등 11개의 전통춤을 각각 재해석한 무대를 2막에 걸쳐 선보인다. 공연의 시작은 조선 화가 신윤복의 ‘미인도’를 연상케 하는 전통의 실루엣이다. 여성 단원들의 몸짓을 통한 아름다움에 재해석이 끝나면, 오늘날 다시 그려낸 ‘신미인도’가 수미상관을 이루며 마무리될 예정.
연출가가 있으니 작품의 동시대적 메시지가 뚜렷할 것이라 예상했는데,여성 단원들로만 구성된 작품명이 ‘미인’이라 조금 의아했다.
무용수들이 가진 춤에 다 녹아있다는 생각이 있다. 연출적으로는 어깨에 힘을 좀 뺐다고 할까. 무용수들이 만들어낸 한국의 미, 특히 민속춤에 담긴 섬세하면서도 힘 있고, 또 흥 넘치는 다이내믹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신윤복의 ‘미인도’가 단아하고 정갈한 기존의 아름다움이라면, 다양성을 포용하고 조화를 이루는 힘을 갖춘 무용수들의 춤은 마치 김홍도의 민속화를 보는 듯한 새로운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얼마나 무대 구성에 관여할지도 선택의 영역이었을 것 같다.
민속춤으로 작품을 구상하자는 것은 내 제안이었다. 때문에 장면의 전환 등을 제외하고는 정보경 안무가에게 모두 맡겼다. 춤의 콘셉트를 제안한 것이 이미 안무가에게는 제한이었을 것이다. 개별적이면서도 응집되는 안무를 구상하는 능력이 정말 뛰어난 안무가라고 느끼고 있다.
11개의 춤을 묶어내는 연출적 장치가 있나?
무대는 민속춤 자체가 가지고 있는 오랜 시간의 축적성을 이면에 깔고, 전면에 여성들의 미를 묶은 춤을 자유롭게 배분했다. 그리고 직관적이면서도 상징적인 비유들로 장면의 흐름이 진행된다. 예를 들어, 무대에 설치될 ‘달’이 차고 기울고 하는 모습이다. 누군가는 시간의 흐름으로, 혹은 감정의 변화로 볼 수 있는 시적 다의성을 가진 오브제다. 자신만의 스토리를 적극적으로 상상하며 몰입할 수 있는 작품이 될 것이다.
국립무용단의 또 다른 대표작 ‘묵향’(2013 초연) 등과는 무척 다른 개성의 작품이 탄생할 것 같다. 특히 ‘묵향’은 누가 봐도 ‘정구호식’ 연출임이 드러나는데, ‘양정웅식’ 각인은 무엇으로 새겨질까?
정구호 선생님같이 훌륭한 예술가와 비교된다면 영광이다. 나는 연극 연출가로 출발했고, 여러 사람이 같이 모여 흐드러지게 한판 벌이는 종합예술이 연극이라고 생각한다. 뛰어난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조율하고 선보이는 것이 이번 연출의 콘셉트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여 전통을 재해석하는 작업인 만큼, 그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연출가의 일이었을 것 같다. ‘세계 속 한국의 문화’를 해석해 본 경험자로서, 관객에게 전달되기가 가장 원활한 정도의 재해석 지점이 있다고 생각하나?
20세기에는, 문화 인류학적인 측면의 전통 교류가 이뤄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온라인으로 빠르게 공유되기 때문에 더 이상 예전의 전통 교류는 ‘새로운 문화’로 다가오지 않는다. 모든 장벽이 무너지는 지금, 우리만의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동시대성을 갖춘 작품들이 주목받는다. 이번 작품은 그 연장선에 있으면서 동시에 어려운 미학적 요소로만 구성되지 않은, 조금 더 관객의 눈높이에서 전통을 소개하는 작품이 될 것이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국립극장
양정웅(1968~)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후, 다국적 극단 ‘라센칸’에 입단해 활동했다. 1997년 극단 ‘여행자’를 창단 후 동양적 색채를 가미한 셰익스피어 작품 등으로 영국 바비칸 센터·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 등에 초청받았다. 다수의 연극·뮤지컬을 비롯 오페라 ‘천생연분’ ‘보체크’ ‘처용’ 등을 한국에서 연출했으며,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 연출을 맡은 바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무용단 ‘미인’
4월 3~6일 국립극장 해오름
양정웅(구성·연출), 정보경(안무), 서영희(의상·오브제), 장영규(음악), 신호승(무대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