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트 레온스카야, 노장의 음반 인생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5월 1일 9:00 오전

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엘리자베트 레온스카야

5월, KBS교향악단과 함께하는 노장의 음반 인생

 

러시아의 피아니즘을 계승한 엘리자베트 레온스카야는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피아니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1945년 11월 23일에 구소련에 속했던 조지아의 수도 트빌리시의 유대인과 폴란드 출신 가정에서 태어났다. 7세에 음악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했으며, 11세에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협연으로 데뷔했고, 13세에 첫 독주회를 가졌다.

 

연주와 녹음으로 써온 이력

국제적 주목은 모스크바 음악원에 입학했던 1964년에 에네스쿠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시작됐다. 당시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과 작곡가 아람 하차투리안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것도 이 우승에 권위를 더했다. 그리고 재학 중에 파리에서 열린 롱티보 콩쿠르와 브뤼셀에서 열린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도 우승하며 단숨에 정상급 피아니스트로 올라섰다. 그는 소련에서 활동했던 시절에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음악적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다.

레온스카야는 1978년에 철의 장막을 넘어 오스트리아 빈에 정착했다. 그 이후로 그는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독주자로 무대에 섰고, 여러 정상급 지휘자와 함께 연주했다. 그가 살고 있는 빈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제 페스티벌에 정기적으로 초대되었고, 세계 주요 도시에서 열리는 피아노 연주회에서도 만날 수 있었다.

음반 녹음 활동도 꾸준히 하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확장해 갔다. 1986년에 슈베르트와 라흐마니노프의 실내악 녹음을 시작으로 매해 여러 장의 음반을 발매했으며, 작년에도 워너 뮤직 레이블에서 신보를 발매했다. 특히 라벨·에네스쿠·드뷔시의 작품이 수록된 음반 ‘Paris’(eaSonus)는 2014년 인터내셔널 클래시컬 뮤직 어워즈(ICMA)의 올해의 독주 부문에 선정됐으니, 그의 음반은 우리 시대의 명반으로 손꼽히고 있다.

꾸준하면서도 예술적 영감으로 충만한 활동으로, 2006년에 과학과 예술을 위한 오스트리아 명예 십자 훈장 1등급을 수상했다. 이 훈장은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높은 등급이다. 2016년에 조지아에서는 이 나라의 가장 높은 예술적 영예인 ‘예술의 여사제’로 명명했고, 2020년에는 ICMA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현재 빈 콘체르트하우스의 명예 회원이다. 레온스카야의 음반은 공식 홈페이지에 1986년부터 2024년까지 모두 64장의 음반이 소개되어 있다. 이 지면이 닿는 대로 비교적 최근 발매한 여섯 개의 음반을 소개한다.

 

음반 속 그리그를 꺼낼, 5월의 내한

❶ Warner Classics 5419783783

우선, 5월 2일에 KBS교향악단과 연주할 그리그의 피아노 협주곡을 수록한 음반(Warner Classics)❶이다. 음반의 지휘자로는 내한 공연에서 만나게 될 미하엘 잔덜링이 함께했다(2020년 내한 독주회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로 취소된 후 첫 내한). 레온스카야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로부터 직접 멘토링을 받은 연주자로, 슈만·그리그 협주곡 묶음은 리흐테르와 마타치치의 전설적인 1975년 앨범을 연상시킨다. 레온스카야는 이 두 작품을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과장하지 않는다.

이보다는 섬세함과 명료함, 진정성 있는 감정을 어우러지게 하며, 음악의 흐름을 자연스럽고도 설득력 있게 이끈다. 이를 통해 작곡가의 의도를 표현하면서도 연주자의 철학과 감각을 전달하는, 자기 과시가 아닌 음악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다. 이렇게 거장다운 연주를 들려주며 레온스카야가 러시아 음악 전통의 정통 계승자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준다. 더 나아가 러시아 피아노 전통의 정수를 이어받은 살아 있는 전설임을 입증한다.

레온스카야의 신념 중 하나는 무대 위에서 자신이 아니라 연주하고 있는 음악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3·4번 녹음(Warner Classics)❷에는 이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명확한 음색과 자연스러운 프레이징은 베토벤 특유의 강인함과 내재된 감성을 동시에 구현한다(투간 소키예프 지휘·툴루즈 카피톨 국립교향악단).

단 한순간도 극적 표현을 위해 거친 소리를 내지 않으면서도 무게감 있고 강렬하며, 각 성부의 균형이 최적으로 조정되어 있다. 관현악과는 갈등과 긴장을 만들기보다는 서로를 존중하고 친밀한 대화를 나누듯 호흡하는데, 그렇기에 베토벤의 내면적 서사를 부드럽게 풀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음악에 절대적 중심을 두는 이와 같은 연주는 감상자에게 내면의 울림을 전하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음악의 본질에 접근하고 사유하게 하는 연주이다.

 

균형과 가치를 알려주는 독주

❸ Warner Classics 9029628785

레온스카야의 첫 음반은 알반 베르크 사중주단과 함께한 슈베르트의 실내악이었고, 이후 슈베르트의 소나타를 비롯한 여러 피아노곡을 꾸준히 녹음했다. 그럼에도 소나타 전곡 음반은 2022년이 되어서야 발매했다. 이 여덟 장의 음반(Warner Classics)❸에는 그의 음악 인생이 오롯이 담겨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만큼 인생을 담은 깊이 있는 통찰과 사색이 느껴진다. 특히 슈베르트 특유의 이중적 감정 표현은 탁월하다. 햇빛과 구름, 웃음과 눈물, 경쾌한 춤과 고요한 심연 등 복잡한 감정이 섬세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여러 성부가 구성하는 다층적 음향의 구조를 바탕으로 입체적 음향을 들려주는 것 또한 중요한 특징이다. 그의 연주가 남다른 확장성과 흡인력을 가지고 감상자를 몰입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레온스카야의 연주에 대한 평가를 보면 ‘지혜’라는 표현이 눈에 띈다. 연주에 지혜가 깃들어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궁금하다면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음반(Warner Classics)❹을 들어보라.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이루는 균형 속에서 지혜를 배우게 된다. 감정과 이성, 선율과 화음, 음색과 서사 등 표현과 절제 사이에서 감상자를 고전 음악의 숭고한 세계로 이끈다.

하지만 이것을 개성이 없다거나, 예쁜 소리만을 내는 탐미주의로 오해해서는 안 된다. 모든 곡, 모든 악장이 만화경과 같이 저마다의 색채로 빛나며, 다양한 삶의 모습을 투영한다. 간혹 전형적인 모차르트의 연주와 달라서 비판을 받기도 하는데, 감정의 깊이와 논리의 조화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녹음은 2021년 초반 코로나 팬데믹 기간에 이루어졌는데, 그 사실도 이 연주가 이룬 성취에 한몫한다. 외부 활동 없이 오롯이 음악과 마주하며 진중할 수 있던 시간 덕분에 정제된 음향과 깊은 내면적 몰입을 이룬 듯하다.

 

잔잔한 행보에 파격적인 발자국

❺ Warner Classics 2173228826

가장 최근에 발매한 앨범은 쇤베르크와 베르크, 베베른 등 ‘신빈악파’라고 불리는 세 작곡가의 작품을 수록한 음반으로, 믿기 어렵겠지만 그의 유일한 현대음악 음반(Warner Classics)❺이기도 하다. 레온스카야는 이 작곡가들의 음악을 난해함에서 명료함으로 전환하며, 감성적이면서도 매우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베르크의 음악적 언어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연주한 피아노 소나타 Op.1은 선율적 감수성과 구조적 명확성을 동시에 표현하여 서정성과 형식미의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나아가 대위적 구성과 주제의 변형 등을 탁월하게 드러내는 뛰어난 해석은 감상자가 길을 잃지 않고 음악의 흐름을 따라갈 수 있게 한다. 베베른의 변주곡 Op.27은 파편과 같은 음과 음 사이의 관계에서 긴밀한 질서와 조직적 설계를 발견한다. 단정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곡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감상자의 내면적 긴장을 일으킨다.

쇤베르크의 작품으로는 3개의 피아노곡 Op.11, 작은 피아노곡 Op.19, 모음곡 Op.25 등 다양한 시기의 세 곡을 연주했다. 전통적 구조 위에서 현대적 음향을 들려주는 이 곡들로는 표현주의 미학의 농밀한 감정을 끌어낸다. 작은 피아노곡은 작은 음형 하나하나에 깊이를 부여하고, 12음 기법으로 작곡된 모음곡은 고전적 품격과 현대적 긴장감이 공존한다. 이렇게 감성적 접근과 이성적 분석이 균형으로 이루는 연주로, 이 음반은 신빈악파의 음악적 해설이자 이상적 안내자로 확장된다.

 

노래의 견고한 동반자

❻ Orfeo C776082

독주와 협연, 실내악 등 기악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던 레온스카야는 성악 듀오에도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다. 마리야나 리포브셰크, 마티아스 괴르네, 브리기테 파스벤더 등 여러 정상급 성악가가 그의 피아노와 함께했다. 이중 슬로베니아 출신 메조소프라노 리포브셰크의 음반 소개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이 음반(Orfeo)❻은 1987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리사이틀의 실황 녹음이다.

슈베르트와 브람스, 그리고 무소륵스키와 차이콥스키의 레퍼토리로 무대를 꾸몄으며, R. 슈트라우스와 브람스, 슈베르트의 앙코르까지 수록했다. 이 무대에서 레온스카야는 리포브셰크와 음악적으로 대등한 동반자로서 성악 반주의 미학을 들려준다. 성악가를 빛내는 동시에 자신만의 예술적 존재감을 견고히 드러냈으며, 두 연주자의 음악적 대화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풍부한 감정과 유기적 호흡으로 곡의 깊이를 더하여, 언어가 전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더욱 넓혔다. 앙코르곡을 소개하는 멘트도 놓치지 않는 등 실황 공연의 생동감도 담겨있다.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KBS교향악단

 

PERFORMANCE INFORMATION

미하엘 잔덜링/KBS교향악단(협연 엘리자베트 레온스카야)

5월 2일 오후 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시벨리우스 ‘핀란디아’, 그리그 피아노 협주곡 Op.16, 엘가 ‘수수께끼 변주곡’

Back to site top
Translat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