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기, 거장의 음악이 남긴 세 번의 울림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5월 5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6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지휘자 김덕기

거장의 음악이 남긴 세 번의 울림

 

 

김덕기(1953~) 서울예고·단국대 음대·밀라노 베르디 음악원을 졸업했다. 국립오페라단·서울시오페라단·KBS교향악단·서울시향 등을 지휘했으며, 약 30장의 음반 편곡·지휘 및 50여 편의 오페라 지휘·제작을 맡았다. 대한민국오페라상, 대한민국오페라어워즈 금상, 교육부장관 표창을 받았으며, 서울대 음대 지휘과 교수로 정년 퇴임했다.

 

 

‘열정’의 순간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 #마음 속 깊은 울림을 남긴 곡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피아노)

감상 포인트 잔혹과 아름다움 사이의 대비를 펼쳐낸 리흐테르의 연주

 

어려서부터 음악과 피아노를 공부했지만, 문학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중학생 시절에는 청계천 헌책방을 돌며 민중서관에서 출판된 명작문고 시리즈를 절반 가격에 사 모아 읽는 것을 즐기곤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KBS ‘TV명화극장’에서 방영된 독일 소설가 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의 원작을 영화화한 ‘사랑할 때와 죽을 때’를 보게 되었습니다. 나치 장교들이 유대인 수용소에서 벌이고 있는 잔혹한 일들에 대해 술을 마시며 농담 삼아 떠드는 한편, 구석에서는 또 다른 장교가 무심한 듯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3번 ‘열정’의 2악장을 연주하는 모습이 비쳤습니다. 그때의 저는 그 장면이 나치의 잔인함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이었는지, 혹은 그로부터 벗어나고픈 심정을 표현한 것이었는지 감독의 의도를 알 수 없었지만, 어쩐지 그 연주가 제 마음 깊은 곳에 묘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서울예고 1학년 무렵, 실기 시험곡으로 이 곡을 선택해 열심히 연습했던 기억이 납니다. 어린 시절 제 마음에 가장 깊이 와닿았던 연주는 스뱌토슬라프 리흐테르의 연주였습니다.

 

 

스트라빈스키와의 만남

#스트라빈스키 #‘페트루슈카 중 3개의 악장’ #음악적 시야를 넓혀준 곡

마우리치오 폴리니(피아노)

감상 포인트 지난해 작고한 거장의 연주로 듣는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서울예고 재학 시절에도 저의 취미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소설에 대한 관심은 점차 희곡에 대한 궁금증으로 확장되었고, 셰익스피어와 그리스 비극 전집을 사 모으며 읽었습니다. 오페라와 발레 음악에도 자연스럽게 흥미를 갖게 되었지요. 대학 재학 중에는 발레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스트라빈스키의 초기 작품들과 디아길레프와 니진스키가 이끌었던 시대의 역사적 변화에 큰 매력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피아노의 거장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의 요청으로 탄생한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중 3개의 악장’을 마우리치오 폴리니(1942~2024)의 연주로 담은 LP를 듣게 되었고, 이 작품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서울에서는 이 곡의 악보를 접하기 어려웠기에 교환학생으로 미국에 가 있는 동안 어렵게 구해와 귀국 후, 명동에 위치한 시공관(市公館)에서 열린 졸업 독주회에서 직접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로시니의 마지막 기도

#로시니 #작은 장엄 미사 #음악에 담긴 경건한 마음

카리 뢰바스(소프라노), 브리기테 파스벤더(메조소프라노), 페터 슈라이어(테너), 디트리히 피셔디스카우(바리톤)/라인하르트 라팔트(하모니움), 한스 루트비히 히르슈(피아노)/뮌헨어 보칼리스트/볼프강 자발리슈(지휘·피아노)

감상 포인트 종교적 신념이 없는 이에게조차 경건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로시니의 대곡

 

군제대 후, 베르디와 푸치니가 활약했던 도시 밀라노에서 공부하던 중 두 가지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첫 번째는 “베르디의 음악은 리듬이 규칙적이면서도 자유로움을 최대한 허용하는 반면, 푸치니의 음악은 자유롭지만 넘지 말아야 할 어떤 ‘한계’가 본능적으로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 한계의 기준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레치타티보(Recitative)의 변형되는 연주 속에서 마치 규칙처럼 보이는 해석은 어떤 근거에서 비롯되는가?”라는 점이었습니다.

이 질문을 들은 지휘과 교수님은 “문화적 전통은 책에만 기록된 것이 아니라, 구전으로도 전해진다”며 제게 음악학자와 지휘자 몇 분을 소개해 주셨습니다. 그 후 저는 그분들로부터 이탈리아 시의 운율(Prosodia)과 결합된 작곡기법을 배우며, 오랫동안 품어온 여러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놀라웠던 점은, 그들 모두가 오페라 부파의 작곡가 정도로만 알려진 로시니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로시니는 1863년, 71세의 나이에 파리에서 마지막 작품인 ‘작은 장엄 미사(Petite messe solennelle)’를 작곡했습니다. 이 곡은 남성, 여성, 카스트라토를 포함한 12명의 성악가와 두 대의 피아노, 그리고 하모니움을 위한 편성으로 되어 있으며, 로시니는 악보 서두에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주님의 제자 중에는 음정이 부정확한 이들도 있었으나, 안심하소서, 주님! 여기 12명의 천사 중에 그런 이는 없을 것입니다.”

제목에 붙은 ‘작은(petite)’이라는 표현은 편성 규모를 뜻할 뿐, 80분이 넘는 연주 시간과 음악의 깊이를 생각하면 결코 소규모 작품이라 할 수 없습니다. ‘스타바트 마테르(Stabat Mater)’의 화려함과는 또 다른 결을 지니며, 마치 로시니의 일기를 엿보는듯한 이 작품에서 오케스트라 버전은 작품의 본질을 방해할 뿐입니다. 특히 마지막 곡 ‘Agnus Dei(아뉴스 데이)’에서 짧은 서주 뒤,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피아노 반주 위로 알토의 기도 같은 노래가 흐르다 갑자기 멈추며, 무반주 합창이 천상의 소리처럼 울려 퍼지는 부분은 종교적 신념이 없는 이에게조차 경건한 감정을 느끼게 합니다. 작곡을 마친 후, 로시니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오, 하느님! 드디어 끝났습니다. 이 가엾은 작은 미사가. 제가 작곡한 것이 성스러운 음악일까요?(musique sacrée?) 아니면 엉망이 되어버린 음악일까요?(sacrée musique?) 제가 오페라 부파를 위해 태어났다는 걸 잘 아시지요! 지식은 적고, 마음만 조금 담았을 뿐, 저는 그게 전부입니다. 그러니 저를 축복하시고, 천국을 허락해 주소서.”

이 작품은 다양한 음반으로 녹음되어 있지만, 저는 볼프강 자발리슈가 피아노와 지휘를 맡은 1972년 녹음을 가장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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