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가 박정희 & 전인철, 타오르는 ‘헤다’의 초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5월 5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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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박정희 & 전인철

타오르는 ‘헤다’의 초상

 

가부장적 틀을 깨고 자유를 갈망하는 ‘헤다’는 어떤 모습일까?

두 연출가의 시선으로 다시 태어난 이 시대의 ‘헤다 가블러’

 

박정희(1958~) 가톨릭대 국문과(학사), 고려대 독문과(석사),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에서 수학했다. 2008년 서울연극제 연출상, 2011년 김상열 연극상, 2014년 한국여성연극인협회 올빛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국립극단 단장 및 예술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전인철(1975~)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했으며, 2019년 김상열 연극상, 제54회 동아연극상 연출상 및 제60회 동아연극상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2015년 창단한 극단 ‘돌파구’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5월, 명동예술극장(5.8~6.1)과 LG아트센터 서울(5.7~6.8)에서 ‘헤다 가블러’가 무대에 오른다. 각각 박정희 국립극단 단장·예술감독과 2023년 연극 ‘키리에’로 동아연극상 작품상을 받은 전인철이 연출을 맡아 기대를 모으고 있다.

‘헤다 가블러’는 노르웨이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1828~1906)이 1890년 발간한 희곡으로, 17세기 노르웨이의 가부장적 제약과 억압 속에서 존재의 자유를 갈망하는 여성의 심리를 다룬다.

국립극단은 2012년 국내 초연(연출 박정희) 이후 13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올리는 작품으로, 지난해 4월 취임한 박정희 예술감독의 첫 연출작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LG아트센터 역시 이번 공연에 특별한 의미를 담았다. 지난해 전도연·박해수가 주연을 맡고, 사이먼 스톤이 연출한 ‘벚꽃동산’ 이후 두 번째로 선보이는 제작 연극이자, 개관 25주년 기념 공연이다.

초연에서 호평받은 배우 이혜영(명동예술극장)과, 32년 만에 연극 무대에 복귀하는 배우 이영애(LG아트센터)가 각각 헤다로 분한다.

 

13년 만에 돌아온 새로운 ‘헤다’

‘헤다를 맡을 배우는 이혜영밖에 없다’며 그녀와 함께 초연을 올렸던 박정희 감독은 이번 작품에서도 이혜영의 ‘헤다’를 가장 먼저 내세웠다.

“처음 이혜영 배우가 캐스팅됐을 때, 제가 어떤 연출가인지 알고 싶다며 계속 만나자고 하더군요. 연출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작품을 진심으로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이번 작품에서 이혜영이 연기하는 헤다는 1970년대 중반, 히피즘이 성행하던 시대를 배경으로 새롭게 탄생한다. 헤다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과 갈망, 그리고 그것을 표출하려는 충동을 드러낼 예정이다.

“그 시대의 자유와 환각, 실험정신의 분위기를 이번 공연의 배경으로 삼기로 했습니다. 물을 건네주거나 전축을 트는 등 헤다와 다른 인물들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물 간의 거리감을 좁히고, 그 안에서 그녀를 더욱 공허하게 표현하고자 했어요. 레브보르그 역시 시대성을 반영해, 마약을 경험한 진보적인 학자이자 이상주의자로 해석했고요. 초연이 고전적인 분위기였다면, 이번 공연은 동시대성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작품이라고 볼 수 있죠.”(박정희)

이번 작품으로 첫 대극장 무대에 도전하는 연출가 전인철은 리처드 이어(1943~)가 현대적으로 각색한 버전의 연출을 맡았다. 리처드 이어의 각색본은 시대를 특정하지 않은 세팅으로 인물 내면에 집중할 수 있도록 유도하고, 대사를 현대적으로 변형해 극의 긴장감을 높였으며, 헤다의 욕망과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해 인물의 갈등과 절망을 강렬하게 드러냈다는 특징이 있다.

두 번째 ‘헤다’ 역에 도전하는 이혜영 ©국립극단

“리처드 이어는 여성을 비극적인 희생자나 충동적인 인물로 그리지 않고, 자기 삶의 방식대로 행동하는 입체적인 인물로 표현합니다. 이번 작품도 이러한 부분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연출하고자 해요. 특히, 작품 속 각 인물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나기를 바랐는데, 이러한 제 생각이 이어의 각색본과 잘 맞았다고 생각합니다.”

전인철의 연출로 무대에 오르는 ‘헤다’는 배우 이영애로, 숨겨진 불안과 욕망, 파괴적인 본성을 지닌 헤다를 강렬하고 입체적으로 표현할 예정이다.

“헤다는 얼핏 보면 그저 예쁘고 인기 많은 미스터리한 인물이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주변의 부조리를 누구보다 명확하게 인식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끊임없이 갈등하며,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하는 인물이에요. 그런 점에서 이영애 배우는 지금 이 시대에 어울리는 ‘한국의 헤다’라고 생각합니다.”(전인철)

같은 시기, 같은 작품을 선보이는 서로 다른 두 연출가의 ‘헤다 가블러’ 연출 방식을 들어봤다.

 

두 연출가의 다른 해석, 다른 주인공

희곡의 내용을 무대에서 어떻게 풀어내고자 했는가?

박정희 초연에서는 헤다의 핵심 정서를 ‘불안’으로 설정했지만, 이번 공연에서는 ‘공허함’으로 잡았다. 공허함은 무대 위에서 하나의 장면으로 구현될 예정이다. 대본에 없는 ‘틈’을 찾아내는 작업을 통해 헤다의 움직임과 음악만으로 구성된 장면을 삽입했다.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는 더욱 풍부한 몸짓을 추가했는데, 헤다를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춤추는 인물로 표현하고자 했다.

전인철 각 인물의 욕망과 감정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사회적 배경보다는 개인의 선택에 초점을 맞췄으며, 각자가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도록 연출했다. 헤다는 세상에 대한 분노를 품고 차가운 냉소를 내뱉는 인물로, 주변 인물들은 각자의 욕망과 열망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존재로 설정해 이 두 세계가 거대한 불협화음으로 극화되는 모습을 구현하고자 했다.

극에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가장 인상 깊은 캐릭터는 누구인가?

박정희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은 뢰브보르그(헤다의 옛 연인)다. 그는 고통과 회복, 비극을 반복하는 다소 클리셰적인 인물이지만, 끊임없이 미래를 꿈꾸는 존재다. 어떤 순간에는 헤다를 구원하고, 또 다른 순간에는 그녀를 파멸로 이끄는, 두 얼굴을 지닌 야누스 같은 캐릭터다.

전인철 줄리아나(테스만의 고모)와 테아(헤다의 동창이자 뢰브보그의 연인)는 세상과 싸우며 버티는 여성 캐릭터로, 함께 살아가는 주변 이들에게 관심을 갖는 인물들이다. 이들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은 삶을 거부하기보다 포용하려는 사람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원작은 헤다의 내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무대에서는 어떻게 드러내고자 했는가?

전인철 음향과 조명을 적극 활용해 긴장감을 조성하고자 했다. 극이 진행될수록 불협화음을 강조했고, 헤다의 내면을 반영하는 기계적인 소리를 더했다. 조명을 극단적으로 사용해 어떤 순간에는 인물들이 그림자로만 보이도록 연출하기도 했으며,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통해 헤다의 고립감과 권태의 크기를 시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한다.

박정희 헤다가 6개월간의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미 권태와 무기력에 타버린 ‘재’ 같은 상태였다. 이러한 정서를 시각화하기 위해 무대 중앙에 화로를 배치했다. 작품 속에서 불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창조의 불, 또 하나는 소멸의 불이다. 권총 역시 장난감처럼 가볍게 다뤄지다가도 죽음을 초래하는 결정적 도구로 변모한다.

불안과 욕망, 파괴를 드러내는 ‘헤다’ 역의 이영애 ©LG아트센터

배경이 헤다의 신혼집이라는 점에서, 무대 디자인에도 신경을 많이 썼을 것 같다.

전인철 무대는 텅 빈 신전처럼 연출했다. 차갑고 기하학적인 공간에 최소한의 가구만 배치했으며, 거대한 벽과 무채색 공간을 통해 헤다의 심리적 상태를 시각화했다. 특히 각 인물을 고립된 위치에 배치해 인물 간 단절감을 강조하고, 빛을 활용해 헤다가 갇힌 내부 공간과 외부 세계의 대비를 드러내고자 했다. 관객에게 감정적 공감을 유도하기보다는, 존재론적 불안과 구조적 억압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선보일 계획이다.

박정희 신혼집을 지하 공간으로 새롭게 구성했다. 마치 지하실에서 비밀이 밝혀지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은밀한 세계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 공간에서 남성 인물들이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고, 관객이 관음적인 시선으로 이 모든 장면을 바라볼 수 있도록 했다.

‘헤다의 죽음’은 연출가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된다. 이러한 결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박정희 헤다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인간이자, 또 다른 차원을 향해 나아가는 불꽃 같은 존재다. 그녀의 자살은 단순히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닌, 스스로 현실을 파괴함으로써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창조적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녀의 죽음이 지나치게 긍정적이거나, 과하게 부정적으로 표현되지 않기를 바란다.

전인철 ‘헤다 가블러’는 사회적 구조 속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운명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헤다는 억압적인 사회 구조의 은유로 해석되고, 브라크(테스만의 친구)는 단순한 협박자를 넘어서 사회 전체 시스템을 상징하는 인물로 표현된다. 그녀는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스스로를 파괴하고, 동시에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존재로 그려질 것이다.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극단·LG아트센터

 

PERFORMANCE INFORMATION

연극 ‘헤다 가블러’

5월 7일~6월 8일 LG아트센터 서울

작 헨리크 입센, 각색 리처드 이어, 연출 전인철 이영애(헤다), 김정호(조지 테스만), 지현준(브라크), 이승주(에일레트 뢰브보그), 백지원(테아 엘브스테드), 이정미(줄리아나 테스만), 조어진(베르트)

 

국립극단 ‘헤다 가블러’

5월 8일~6월 1일 명동예술극장

작 헨리크 입센, 연출 박정희 이혜영(헤다), 김명기(예르겐 테스만), 윤상화(브라크), 김은우(에일레르트 뢰브보르그), 송인성(엘브스테 부인), 고수희(율리아네 테스만), 박은호(베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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