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MUSIC SCENE 28
세계의 예술경영인을 만나다
프라하 봄 축제
갈등의 80년 역사가 만든 희망의 선율
프라하 봄 축제 대표 파벨 트로얀
파벨 트로얀(1984~)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지휘를 전공했고, 프라하 공연예술 아카데미에서 음악 경영과 작곡을 공부했다. 2010년부터 프라하 봄 축제에서 일하기 시작해, 2022년부터 축제의 대표직을 맡고 있다.
2차 세계대전으로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1946년. 아픔 속에서도 음악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려는 의지가 담긴 프라하 봄 국제 음악제(이하 프라하 봄 축제)는 세계 각국의 음악가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소통의 장으로 탄생했다.
첫해 무대에서는 젊은 미국 지휘자 레너드 번스타인이 유럽 무대에 데뷔하는 뜻 깊은 순간을 맞이했다. 그러나 1948년 냉전 체제가 심화되며 축제의 국제적인 성격은 점차 희미해졌고, 번스타인은 민주화를 이룬 1990년이 되어서야 다시 프라하를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전쟁과 냉전, 정치적 격변 속에서도 음악을 통한 화합의 가치를 지켜온 프라하 봄 축제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해 왔다.
2025년, 80주년을 맞이한 프라하 봄 축제는 5월 12일부터 6월 3일까지 열린다. 이제 축제는 클래식 음악의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을 더해 새로운 세대의 청중과 소통하며, 체코를 넘어 세계적인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 변화를 이끈 인물이 바로 파벨 트로얀 대표다. 25년 전 어린이 합창단원으로 축제에서 노래했던 그는 이제 축제를 기획하고 운영하고 있다.
평생에 걸친 축제와의 연

2024년 출연한 조성진 ©Petra Hajská
프라하 봄 축제와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2000년, 프라하 어린이 오페라단 단원으로 활동하며 축제와 인연을 맺었다. 이후 프라하 음악원에서 작곡과 예술경영을 전공하며 자원봉사자로도 참여했다. 졸업 후에 직원으로 홍보 및 마케팅을 담당했다. 2019년 부대표가 되었고, 2022년 이사회가 대표로 임명했다.
음악원에서 작곡과 예술경영을 공부한 특별한 이유가 있나?
단순히 악보에 음표를 그리는 이상주의자가 되고 싶지 않았다. 음악이 단지 연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청중에게 전달되어 의미를 만들어낼지 항상 관심이 많았다. 자연스럽게 홍보와 마케팅에도 관심을 갖고 예술경영을 공부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실용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이다.(웃음)
대표가 되기까지 영향을 많이 받은 멘토를 꼽자면?
우선 전임 대표 로만 벨로르다. 20년 이상 축제를 이끌었고, 함께 일하며 어떤 방향으로 축제를 이끌지 청사진을 그릴 수 있었다. 두 번째로는, 작곡을 가르쳐준 바츨라프 리들바우흐 교수다. 체코 국립극장과 체코 필하모닉의 대표를 역임했고, 체코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주 내 작품을 꼼꼼히 검토해주셨다. 새로 작곡한 부분이 많지 않은 상태로 수업에 가서 기존에 썼던 작품을 보여드리면, “이 부분은 지난주에도 봤다”며 세심하게 기억하는 분이셨다. 그의 집중력과 헌신적인 태도는 지금까지도 내게 큰 영감이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다고 믿는 것. 클래식 음악은 강력한 힘을 가진 예술이다. 그 가치를 많은 사람에게 알리는 것은 중요하다. 클래식 음악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의 대중을 위해 존재할 수 있다.
짜임새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방법
축제 기간에 프라하를 방문하는 관객 수가 궁금하다.
매년 3만~3만 5천 명의 관객이 프라하 봄 축제를 찾는다. 그중 해외 관객이 차지하는 비율은 약 15%로, 국제적 관심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
축제 운영 팀의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정규 직원은 평소 약 12명이다. 축제 기간에는 계약직 직원과 자원봉사자를 포함하면 약 100명까지도 규모가 늘어난다.
프로그램의 기획 과정은 어떻게 진행되나?
예술자문위원회와 운영팀이 함께 논의한다. 예술감독이 있긴 하지만, 모든 직원이 의견을 나누는 것이 특징이다. 기획 단계에서는 예술적인 요소 뿐 아니라 홍보, 협찬 및 파트너십까지 고려한다.
현재 몇 년도까지의 프로그램이 확정되어 있나?
2026년까지 확정되었으며, 2027년 프로그램도 거의 마무리된 상태다. 오케스트라들의 공연 횟수, 전통과 현대 레퍼토리의 균형, 신인 연주자 초청 등을 기준으로 정한다. 2028년부터 2030년까지의 개·폐막 공연 관련해서도 몇몇 오케스트라와 상의 중이다.
10대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스프링 틴’ 프로그램이 인상적이다.
스프링(Spring)과 십대(Teen)의 합성어로, 하루짜리 특별 프로그램이다. 청소년들이 클래식 음악에 친숙해지도록 음악과 공학의 만남을 시도한다. 작년에는 스위스의 로봇 공학 회사 ABB와 협력하여 클래식 음악과 로봇 기술을 접목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특히 ‘유미(YuMi)’라는 로봇이 마림바를 연주하는 프로그램이 인기였다. 청소년들이 연주를 하면, 로봇이 반응해서 즉흥 연주를 했다. 올해는 AI를 활용한 음악 창작 워크숍과 VR(가상 현실) 기술을 활용한 오케스트라 연주 체험 프로그램 ‘버추얼 심포니’를 기획하고 있다. 현대 사회에서 스마트폰과 디지털 기기를 통해 음악을 전하는 것이 일상적인 만큼, 클래식 음악도 기술과 융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청중에게 다가갈 필요가 있다.
공산 독재, 혁명 중에도 지속된 축제

키릴 페트렌코/베를린필(스메타나홀) ©Stephan Rabold
프라하 봄 축제가 올해로 80주년을 맞이한다. 시작된 이후, 축제는 어떻게 변해왔나?
프라하 봄 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 체코 필하모닉 창립 50주년을 기념하며 만들어졌다. 초창기부터 국제적인 성격이 강했으며, 당시는 전쟁에서 승리한 국가의 예술가들을 초청하는 것이 주목표였다. 첫해, 레너드 번스타인이 축제를 통해 유럽에 데뷔했다. 하지만 1948년, 공산당이 체코를 장악하며 상황은 급변했다. 번스타인은 더 이상 프라하 무대에 오를 수 없었고, 1990년 체코가 민주화된 후 다시 돌아왔지만 안타깝게도 그 공연이 그의 마지막 유럽 공연이 됐다. 올해 80주년을 맞이하며 번스타인의 유산과 전쟁 종식의 의미를 되새기고자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초청한다. 이 축제에서 커리어를 시작해 거장으로 돌아온 번스타인처럼, 음악제도 성장하며 국제적인 위상을 갖추게 되었다.
한국도 5.18 광주 민주화 운동(1980)을 통해 민중 예술·축제가 발전했다. 프라하 봄 축제도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과 연관이 있다. 예술과 사회가 어떤 관계라고 생각하나?
예술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1960년대 일어난 체코 민주화 운동인 ‘프라하의 봄’도, 음악제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다. 공산 정권 동안, 축제가 ‘열린 창’ 같은 역할을 했다. 외부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통로였고, 1968년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은 ‘국경 안에 갇혀서는 안 된다. 창문을 열고 서방 세계와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 신념을 예술을 통해 실천한다.
앞서 언급한 ‘열린 창’의 예를 든다면 무엇이 있나?
공식적으로는 정부의 통제를 받았지만 서방예술가를 초청하는 것 자체가 공산 정권에 대한 저항이었다. 대표적으로 체코에서 오스트리아로 망명한 소프라노 에디타 그루베로바의 공연이 있다. 빈 슈타츠오퍼는 ‘프라하에서 에디타 그루베로바 없이 공연을 할 수 없다’고 강력히 입장을 표명했고, 공산 정부는 결국 그녀의 입국을 허락했다. 예술의 보이지 않는 힘, 자유를 향한 예술가의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매해 스메타나 ‘나의 조국’이 연주되는 개막 공연 ©Ivan Malý
프라하 봄 축제는 개막 공연에서 스메타나 ‘나의 조국’을 연주하는 전통이 있다.
축제 창립자들은 체코를 대표하는 곡을 연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나의 조국’은 체코의 민족, 역사 그리고 자연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1990년대 이후부터 세계적인 오케스트라와 지휘자들이 이 작품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들려주고 있다. 2017년에는 바렌보임/빈 필하모닉이, 작년에는 페트렌코/베를린 필하모닉이 자신들의 해석을 들려주었다. 음악을 표현하는 방법에는 정답이 없기에,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며 생명력이 계속되는 것 같다. 이 곡을 통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며, 우리의 정체성을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다.
올해 축제에서 주목할 만한 프로그램을 소개한다면?
개막 공연과 폐막 공연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막 공연에서는 체코 필하모닉과 수석 지휘자 세묜 비치코프의 지휘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을 연주한다. 특히 이번 공연은 비치코프가 체코 필하모닉의 수석 지휘자로 임명된 후 처음으로 프라하 봄 축제에서 지휘하는 공연이라 더욱 특별하다. 폐막 공연에서는 말러 교향곡 8번(‘천인 교향곡’)이 연주된다. 이 작품은 규모가 매우 커 자주 연주되기 어렵지만, 8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선정되었다. 숫자 8과 80이라는 상징성이 맞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대규모 합창과 오케스트라가 어우러지는 이 곡은 축제의 장엄한 피날레를 장식할 것이다. 더불어 80주년을 기념하고 번스타인의 업적을 기리고자 미국 오케스트라들을 초청한다.
체코와 한국 간의 문화 교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하다.
지난해 축제에 피아니스트 조성진을 초청하며, 한국과 체코 간의 깊은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 나 또한 한국에 방문해 체코-한국 미래 포럼에 참석했다. 서울을 보며 한국과 체코의 예술적 감성이 생각보다 많이 닮아있다고도 느꼈다. 두 나라 모두 예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다. 올해부터는 ㈜두산이 축제의 공식 후원사로 참여하며 양국 간의 문화적 연결고리가 더 단단해졌다. 앞으로도 활발히 협력하며 함께 성장해 나가길 기대한다.
마지막으로, 올해 축제를 방문할 한국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무엇보다 축제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미리 축제 프로그램을 확인하고 티켓을 예매하는 걸 추천한다. 보통 전해 10~11월에 프로그램이 발표되고 티켓 판매를 시작한다. 음악제가 열리는 프라하의 5월은 붉게 물든 벚꽃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자랑한다. 청명한 하늘 아래의 음악과 고풍스러운 도시의 풍경이 어우러지는 순간은, 축제를 더욱 감동적으로 만든다.
프라하 봄 축제는 단순한 음악제를 넘어, 시대의 흐름을 담아온 문화의 장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시작된 축제는 냉전 시대를 지나 체코의 민주화와 함께 성장하며, 예술과 역사가 맞닿은 자리에서 의미를 더해왔다.
음악은 시대를 기록하는 언어이며, 음악제는 그 가치를 오랜 시간 증명했다. 과거에는 자유를 향한 국제적 연대의 상징이었다면, 오늘날은 전통과 혁신이 조화를 이루며 새로운 세대와 소통하는 축제다.
따뜻한 햇살과 신선한 바람이 어우러진 5월의 프라하를 즐기며, 클래식 음악이 울려 퍼지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그 황홀함은 프라하 봄 축제에서만 느낄 수 있는 완벽한 순간 아닐까.
글 박선민(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프라하 봄 축제
INFO
프라하 봄 국제 음악제 5.12~6.3
프라하 봄 콩쿠르(오보에·첼로 부문) 5.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