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시작의 첫 순간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
김건/창원시향(협연 문지영)
4월 1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올해로 37회를 맞이한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4.1~20)는 창원시향의 공연으로 시작됐다. 이번 교향악축제는 20일간 18개의 교향악단이 참여했고, 2000년부터 이어져 오던 한화그룹의 후원이 종료되며 공연명을 ‘예술의전당 교향악축제’로 변경해 새로운 축제로의 도약을 꾀했다.
그 ‘새로운 시작’을 위해, 창원시향은 올해 기념 주년을 맞이한 두 작곡가의 작품을 선정했다. 탄생 150주년을 맞은 라벨(1875~1937)과 서거 50주년을 맞은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그 주인공이었다.
1부는 서곡 연주 없이, 문지영의 협연으로 라벨 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이 연주됐다. 오로지 왼손만을 사용해 연주하는 이 협주곡은 라벨이 1차 세계대전에서 부상을 당한 피아니스트 파울 비트겐슈타인을 위해 작곡했다. 관현악법에 능수능란했던 라벨답게, 반쪽짜리 피아노 연주임에도 지루할 틈 없는 구성이 돋보인다. 물론 피아니스트는 한 손만 사용할 뿐이지, 양손으로 치는 것과 동일한 양의 음표를 소화해야 한다. 주선율과 내성, 베이스까지를 왼손에 담아내야 하기에 뛰어난 테크닉은 물론 각 손가락의 음색을 조율하는 능력이 탁월해야 한다.
돌이켜보면 2015년은 한국 피아노계에 특별한 해였다. 조성진은 쇼팽 콩쿠르에서, 문지영은 부소니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뒀다. 그 후로 10년, 두 연주자가 보여준 충실한 레퍼토리의 확장과 성숙은 지금도 탄생하는 새로운 콩쿠르 스타들의 내일을 이끌 중요한 음악적 길라잡이기도 하다. 문지영의 왼손은 그런 점에서 운용 능력을 갖춘 충실한 무게추였다. 작품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지점을 명확히 정하고, 이를 위해 서두르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중심을 잡은 채 흘러가는 음악은 프랑스 작곡가 라벨의 찬란함을 드러내지는 않아도, 공연장의 관객을 만족시키기엔 충분했다. 단악장의 짧은 협연 후, 앙코르곡 또한 스크랴빈의 왼손을 위한 프렐류드 Op.9-1. 이날 공연에서 들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왼손에서 흘러나온 소리뿐이었지만, 그 사실이 전혀 아쉽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운 연주였다.
2부는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10번이 연주됐다. 2012년 창원·마산·진해의 통합으로 새롭게 출범한 창원시향은, 100여 명의 상임단원을 보유한 몸짓을 자랑했다. 다소 느리고 어두운 분위기로 시작해 찬란하게 빛을 밝히며 끝나는, 변화무쌍한 작품의 규모를 품어냈다. 특별히 목·금관 주자들의 호연이 빛났는데, 그중에서도 3·4악장에 등장하는 호른과 바순 솔로가 인상적이었다. 호른 수석의 안정적인 연주와 바순 부수석의 효과적인 음악적 프레이징이 귀를 사로잡을 때마다, 지역 교향악단을 지키는 뛰어난 연주자들을 조명하는 교향악축제의 취지를 상기하게 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예술의전당
두 가지 매력
이베타 압칼나 오르간 독주회
4월 2·5일 롯데콘서트홀·부천아트센터
오르간이라는 악기는 곧장 교회를 연상케하니, 오르간 공연이라 하면 종교 작품을 연주하는 장면이 우선 떠오른다. 그러나 직접 가보면 21세기 청중이 원하는 바를 이보다 충족하는 공연이 있을지, 물음이 생긴다. 수십 가지의 다른 스톱으로 생기는 수백 가지 음향부터, 건반에 따라 달라지는 소리 방향, 그리고 스피커 하나 없이 신체를 짓누르는 진동까지. MIDI 프로그램에 수없이 많은 가상 악기 프로그램을 저장하여 스테레오 오디오에 맞춰 음악을 만들고 재생하는 오늘날의 음악 프로듀서가 과거로 간다면, 오르가니스트가 되지 않을까. 오르간이 주는 감동은 현재도 유효하다.
기자는 같은 프로그램으로 진행되는 2일과 5일 두 공연을 모두 관람하였다. 2일의 공연은 악기 이상으로 인해 2부 공연이 취소됐으나, 1부의 공연이 워낙 인상적이었기에, 감상은 양일 공연을 모두 남긴다.
롯데콘서트홀 오르간의 강점은 특유의 공간을 울리는 거대한 음향이다. 전면 파이프를 사용할 때 느낄 수 있는데, 이 진동에 신체가 반응하여 관객은 악기와 공명하는 감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런 물리적 효과로 음악을 향한 몰입감도 함께 증가하며, 이베타 압칼나(1976~)가 이날 연주한 구바이둘리나의 ‘빛과 어둠’에서 이 점이 빛났다.
작품은 빛과 어둠에 해당하는 선율이 각각 무엇인지 추측하게 만들고, 두 요소가 계속 대립한다는 인상을 준다. 그러나 중반 이후, 청자가 빛이라 생각했던 선율은 어둠으로, 어둠이라 생각했던 선율은 빛으로 변모한다. 두 요소로 나뉘던 빛과 어둠은 정도의 차를 가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옮겨지며, 이를 통해 관객은 이분법에서 다양성으로 나아가는 사고를 마주한다. 특히 마지막에 단독으로 지속된 저음은 롯데콘서트홀 오르간에서만 들을 수 있는 강한 진동으로, 마치 작품이 박동하며 말을 거는듯이 다가왔다.
부천아트센터 오르간의 장점은 명확한 음 전달이다. 자칫 하나로 뭉뚱그려져 버리는 소리 덩어리가 홀의 좋은 음향 덕에 색색이 분리되기에, 연주자의 움직임을 따라가기 좋다. 쇼스타코비치의 ‘므첸스크의 멕베스 부인’ 중 파사칼리아에서 이를 느낄 수 있었는데, 엇박자의 강세와 이어지는 선율선으로 박절이 흐릿한 음악에서도 연주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주고 있었다.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바이올린 또는 피아노로 자주 접할 수 있는 바흐 BWV1004 ‘샤콘’이었다. 큰 긴장 없이 가볍게 곡을 시작한 압칼나였지만, 작품이 가진 경건한 색채가 공간을 덮어 이 순간을 값지게 만들었다. 그는 자국(라트비아)의 작곡가 아이바르스 칼레이스(1951~)의 작품을 앙코르로 연주한 뒤, 오르간에게 박수를 돌리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글 이의정 기자 사진 부천아트센터
그리고, 남겨진 시간
국립극단 ‘그의 어머니’
4월 2~19일 국립극장 달오름

에반 플레이시(극작), 이인수(번역), 류주연(연출)/김선영(브렌다 카포위츠), 최자운(제이슨 카포위츠), 최호재(매튜 카포위츠), 홍선우(로버트 로젠버그), 이다혜(제시카), 김용준(스티븐), 김시영(테스)
‘그의 어머니’는 극작가 에반 플레이시의 장편 희곡으로,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아들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싸우는 어머니 브렌다의 이야기를 다룬다. 작품은 범죄의 원인이나 사건의 실체를 추적하기보다는 브렌다가 겪는 내면의 균열과 그가 어머니로서 마주하는 가혹한 현실에 초점을 맞췄다.(4월 3일 관람)
작품은 브렌다의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극도의 절제와 통제를 선택했다. 무채색 조명,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희미한 빛, 차갑고 건조한 무대는 인물들이 처한 감옥 같은 현실을 형상화한다. 극 초반 깔끔하게 정돈돼 있던 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지럽혀지고, 잘 나가던 건축 디자이너였던 브렌다의 삶 역시 조금씩 무너진다. 그녀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은 음향과 영상, 조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사실, 브렌다의 모성애는 맹목적이지 않다. 오히려 범죄를 저지른 아들 매튜에게 거리감을 두고, 그와의 접촉조차 조심스러워한다. 반면, 매튜는 가택 연금 중에도 운동을 하고, 잠을 자고, 동생과 게임을 하는 등 비교적 평온한 일상을 보낸다. 이 대비는 브렌다의 고통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국립극단(예술감독 겸 단장 박정희)은 해외 신작 시리즈를 통해 정치, 노동, 성별, 위계 폭력 등 동시대의 다양한 이슈를 무대에 올리고 있다. ‘그의 어머니’ 역시 그 흐름 속에 있다. 공교롭게도 최근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4부작 영국 드라마 ‘소년의 시간’ 역시 남성 청소년의 범죄라는 민감한 주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두 작품 모두 ‘소년들의 포르노 시청’ 장면을 포함하고 있지만, 작품 속 어른들은 “요즘 애들 다 그렇잖아”라는 식으로 가볍게 넘긴다. 그러나 이제 포르노 따위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청소년의 살인과 강간 등 중범죄가 빈번해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연출가 류주연은 “이 작품이 가해자를 보호하거나 비난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여지지 않기를 바란다”며, “범죄 자체보다는 주변 인물들과 그들이 겪는 감정에 집중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특히 가해자인 매튜의 표현 방식에 대해선 “건조하고 감정 없이, 전형적인 범죄자나 억울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도록 표현했다”고 덧붙였다. 그 절제된 묘사 덕분에, 관객은 그 안에 감춰진 감정의 본질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
비극은 단지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사건 이후에도 계속되는 삶이며, 남겨진 사람들이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마주하는 수많은 소년의 얼굴은, 이 비극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의 어머니’는 그 질문 위에 서 있다. 이 소년들을 어떻게 길러야 하는가. 무엇이 이들을 그렇게 만들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정말 이 비극과 무관한가.
글 홍예원 기자 사진 국립극단
에벤 콰르텟 & 벨체아 콰르텟 리사이틀
현존하는 최고 콰르텟들의 백투백홈런
4월 3일(에벤)/4일(벨체아) 오후 8시 롯데콘서트홀

에벤 콰르텟 – 피에르 콜롱베·가브리엘 르 마가뒤르(바이올린), 마리 실렘(비올라), 오카모토 유야(첼로) © Co Merz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현악 4중주단을 꼽으라면, 이 두 단체의 이름이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 바로 에벤 콰르텟과 벨체아 콰르텟이다.
4월 3일과 4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차례로 공연을 가진 두 팀은 베토벤과 브리튼의 작품을 연주하며 작곡가의 통일성을 확보하고, 자연스레 비교의 장을 마련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시 ‘명불허전’, 백문이 불여일견이었다. 에벤 콰르텟과 벨체아 콰르텟은 심오한 실내악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어젖히며, 생생하고도 놀라운 감동을 객석에 전달했다.
에벤 콰르텟이 들려준 음악의 질감
3일, 에벤 콰르텟의 공연은 베토벤 현악 4중주 1번으로 시작했다. 1악장은 절도와 부드러움, 진지함과 여유가 어우러졌다. 서로 정밀하게 맞물리는 악기들과 민첩하게 정렬된 연주가 인상적이었다. 2악장은 마치 렘브란트의 그림처럼, 어둠 속에서 입체적으로 비추는 빛을 느끼게 했다. 소중한 대상을 형상화하듯 조심스럽게 연주가 전개되었고, 극적인 곡선에 따라 농담도 섬세하게 조절되었다. 침묵에 가까워지는 순간에는 촛불처럼 떨리며 감정의 격정이 솟구쳤다. 3악장은 무심한 듯 활달했고, 4악장은 감칠맛 나는 전개로 마무리되었다.
두 번째 곡은 브리튼 ‘세 개의 디베르티멘토’였다. 1곡 ‘행진곡’에서는 깔끔한 마무리와 서늘한 저음이 어우러지며, 정교하고 시각적인 즐거움을 주었다. 규칙과 격렬함을 넘나드는 리듬도 인상적이었다. 2곡 ‘왈츠’에서는 제1바이올린과 비올라의 선율이 제2바이올린과 첼로의 피치카토와 교차하며, 고즈넉하고 나른한 분위기 속에 숨은 긴장을 표현했다. 3곡 ‘부를레스크’에서는 강렬하고 빠른 관성의 흐름 속에서 탁월한 연주력을 보여주었다.
베토벤의 통찰을 연주로 펼치다
휴식 시간 뒤, 베토벤 현악 4중주 13번이 시작됐다. 1악장은 중음역의 그윽한 울림이 인상적이었고, 특히 첼로의 연주가 감칠맛을 더했다. 변화무쌍한 곡상을 침착하게 풀어낸, 완벽한 앙상블이 빛났다. 2악장은 쾌속으로 질주하면서도 중간의 엄정한 표정으로 극적인 대조를 이루었다. 3악장에서는 각 멤버가 맡은 바를 유연하게 소화하며 능숙한 호흡을 보여주었다. 에벤 콰르텟의 연주를 들으며, 오늘날 현악 4중주의 기본적인 연주력이 과거보다 얼마나 진화했는지를 실감할 수 있었다. ‘치밀한 여유’라는 말이 딱 어울렸다. 4악장은 네 악기가 서로 미소 지으며 대화하는 듯, 우아하고 섬세했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이어진 5악장 ‘카바티나’는 마치 네 대의 심장이 함께 뛰는 듯한 심오함을 전했다. 착잡하고 회고적인 분위기 속에서 인생을 되돌아보는 듯한 잊을 수 없는 선율이 이어졌다. 촉촉하게 젖은 감성 위로 ‘대푸가’가 격렬한 파도처럼 몰아쳤다(‘대푸가’는 본래 현악 4중주 13번의 6악장으로 작곡됐다). 조용히 가라앉는 순간에는 현대적인 감각이 느껴졌고, 시대를 앞서간 베토벤의 통찰력이 다시금 감탄을 자아냈다.
벨체아 콰르텟의 정교한 균형 감각

벨체아 콰르텟 – 코리나 벨체아·강수연(바이올린), 크시슈토프 호셸스키(비올라), 앙투안 르데를랭(첼로) © Shin-joong Kim
4일에는 벨체아 콰르텟이 무대에 올랐다. 제1바이올린 코리나 벨체아(1975~)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나머지 세 연주자는 검은 정장을 입었다. 이러한 대비는 음악적 구조를 시각적으로도 암시했다. 코리나는 막강한 힘과 리더십으로 전체를 견인했고, 나머지 멤버들은 유연하게 따라가며 완성도 높은 앙상블을 이뤘다. 이들은 에벤 콰르텟보다 연주자 간의 거리를 좁혀 더 가까이 앉았고, 그만큼 응집력 있는 연주를 보여주었다.
이들이 연주한 첫 곡은 모차르트의 현악 4중주 20번 K.499 ‘호프마이스터’였다. 1악장은 세밀하고 우아했으며 화사했다. 제1바이올린에 하중이 실리는 구성 속에서도 각 악기가 민첩하게 체중을 조율하며 안정된 균형을 이루었다. 2악장에서는 코리나의 완급 조절이 빛났다, 3악장 아다지오는 정처 없이 흐르는 듯하면서도 따뜻하고 평온했다. 4악장은 고전적인 품격이 살아 있었고, 도자기를 빚듯 섬세한 손길이 느껴졌다.
두 번째 곡은 브리튼의 현악 4중주 3번 Op.94였다. 1악장은 제2바이올린과 비올라가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시작했고, 첼로와 바이올린이 하모닉스와 피치카토로 다채로운 음향을 만들어냈다. 저음 현은 고통이나 비극을 떠올리게 했다. 2악장은 격렬한 에너지 속에 20세기적 풍경이 흘렀고, 탱고를 연상시키는 열정적인 악구도 인상적이었다. 3악장에서 제1바이올린의 불길한 하모닉스 위로 첼로가 응답했다. 이어서 비올라와 제2바이올린이 차례로 대화를 이어갔다. 코리나의 숨막히는 섬세한 연주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4악장 ‘부를레스크’는 광기와 격정이 뒤섞인 가장 치열한 악장이었다. 각 악기가 대위법적으로 얽히며 감각적이고 정열적인 분위기를 완성했다. 마지막 5악장은 미세한 하모닉스와 트레몰로로 어두운 불안을 자아냈다. 섬세하면서도 싸늘한 정서를 절묘하게 표현했고, 브리튼 특유의 몽환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코리나의 리더십이 빚어낸 결속력
2부의 베토벤 현악 4중주 9번 Op.59-3 ‘라주모프스키 3번’ 1악장은 시작부터 진지함이 깊이 묻어났고, 봄기운처럼 생동감 넘쳤다. 중기 4중주 작품답게 꽉 찬 구성 속에서도 후기 4중주로 향하는 예감을 주었다. 코리나의 확고한 리드 속에서 모든 악기가 정밀하게 어우러졌다. 첼로는 활이 악기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듯한 독특한 주법으로 특별한 질감을 더했다. 2악장에서는 비장한 바이올린 선율 위로 첼로의 피치카토가 따스하면서도 품격 있게 울려 퍼졌다. 3악장 미뉴에트는 베토벤의 자애로운 미소처럼 부드럽고, 중간부에서는 다시금 그의 열정이 살아났다. 4악장은 마치 교향곡 5번의 푸가토처럼 각 악기가 차례로 등장하며 다채롭고 치밀하게 전개되었다.
확고한 연주력과 자유자재의 속도감은 벨체아 콰르텟을 상징하는 키워드였다. 정교한 제1바이올린, 그리고 튀지 않으면서도 제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제2바이올린·비올라·첼로는 이들이 왜 현존하는 최고의 4중주단 중 하나인지를 증명해 주었다. 마치 ‘코리나와 아이들’ 같은 구성이었지만, 그만큼 조화롭고 유기적이었다. 앙코르곡으로 연주된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3번 3악장과 베토벤 16번 3악장에서는 이들의 또 다른 면모와 견고한 실력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목프로덕션
루도비코 에이나우디 리사이틀
선율을 따라가며 기억 속의 장면들을 떠올렸다
4월 2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루도비코 에이나우디(1955~)가 8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2020년 팬데믹으로 인해 내한 공연이 한 차례 취소된 후, 긴 기다림 끝에 성사된 공연이었다.
이번 공연은 피아노, 바이올린, 첼로, 아코디언, 타악기로 이루어진 간결하지만, 한편으로 작은 편성이어서 3,000여 석 규모 대극장의 음향 환경에 적합할지 은근히 걱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공연장에 들어서는 순간, 이러한 우려는 금세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막이 오르기 전부터 스피커를 통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에이나우디의 음악과 무대 바닥에 설치된 여섯 개의 노을빛 조명이 은은한 분위기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엷은 조명을 받아 흐릿하게 실루엣만 드러난 피아노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에이나우디의 공연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이윽고 객석이 완전히 어두워진 가운데, 연주자들이 천천히 무대에 등장했다. 에이나우디(피아노)를 중심으로, 페데리코 메코치(바이올린·비올라), 레디 하사(첼로), 프란체스코 아큐리(타악기), 프란체스코 트람바이올리(아코디언)가 점차 소리를 더해갔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음악이 자연스럽게 실황 연주로 전환되는 순간이 인상적이었다.
공연 프로그램은 연주자의 뜻에 따라 사전에 공개되지 않았다. 관객은 어떤 곡이 연주될지 모른 채, 음악의 흐름에 온전히 집중했다. 올해 1월 발표한 음반 ‘여름 초상화(Summer Portrait)’의 수록곡과 그간 꾸준히 사랑받아 온 대표곡들이 연주되었지만, 구체적인 곡명은 공연이 끝난 뒤에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는 ‘네오클래식의 거장’이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음악을 들려주었다. 때로는 바이올린이 낮은음을, 첼로가 높은음을 연주하며 독특한 음향 효과를 만들어냈고, 때로는 그 누구도 뚜렷한 선율을 연주하지 않았음에도 감미로운 음악이 완성됐다. 특히 ‘여름 초상화’의 수록곡들은 전반적으로 평온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데, 에이나우디가 이 음반을 “끝없는 여름날의 추억, 그 모든 아름다운 순간에 바치는 헌사”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번 공연 역시 관객이 자신만의 추억 속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악기마다 설치된 마이크를 통해 전달된 소리는 스피커를 타고 공연장 전체를 가득 채웠다. 피아노의 울림은 다소 먹먹함을 남겼는데, 이는 업라이트 피아노로 녹음된 그의 음반과도 닮아있었다. 때때로 페달의 움직임이나 해머가 닿는 소리 같은 미세한 음향이 들려와 소리의 질감을 또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시각적 연출도 인상적이었다. 무대 뒤편의 대형 스크린은 곡의 분위기에 따라 붉은빛·물빛 등으로 바뀌었고, 조명은 연주자의 그림자를 크고 작게 만들거나 여러 개로 분산시키며 몽환적인 분위기를 더했다. 무대 바닥의 조명이 밝아질 때면 눈을 제대로 뜰 수 없을 만큼 눈부셨지만, 이마저도 공연의 분위기와 잘 어우러졌다. 그중에서도 조명이 서서히 어두워지다가 다시 밝아지던 순간은 마치 관객에게 희망을 속삭이는 듯해 뭉클함을 남겼다.
관객은 2시간 내내 휴식 시간 없이 이어진 공연에도 끝까지 몰입했고, 마지막 곡이 끝나자 모두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이에 에이나우디는 마치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동료 연주자들을 한 명씩 소개한 뒤, 앙코르로 화답했다.
글 김강민 기자 사진 크레디아
서울시오페라단 ‘파우스트’
당신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4월 10~13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김효종·박승주(파우스트), 손지혜·황수미(마르그리트), 사무엘 윤·전태현(메피스토펠레스), 이승왕·김기훈(발랑탱) 외/ 이든(지휘), 프라임 필하모닉, 위너오페라합창단/엄숙정(연출), 박혜진(예술감독)
천사는 하늘의 신 곁에 있기에, 땅 위의 인간 곁은 악마가 차지했다. 그래서 악마의 속삭임을 숙명으로 여기는 마음이 인간의 본성에 각인돼 있을지도 모른다. ‘파우스트’는 본성의 이야기이다. 인간은 사악한 욕망을 꿈꾸고, 악마의 부정한 거래를 받아들인다. 과연 이를 벗어날 수 있을까?
르네상스 이후 인간의 시각은 신의 구원을 받은 사랑으로 옮겨지며, 신은 사랑 뒤로 숨겨졌다. 원작과 마찬가지로 오페라 ‘파우스트’의 중심에는 이런 사랑이 있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꾀어낼 수 있었던 것도, 파우스트가 메피스토펠레스와 계약을 한 것도, 나중에 이 둘이 멀어진 것도 사랑 때문이었다. 한편, 그 둘이 생각한 사랑의 개념은 달랐다. 마르그리트의 사랑 또한 그들과 달랐다. 이 차이가 ‘파우스트’를 이끌어가는 갈등의 동력이다.
이번 공연의 연출은 이러한 사랑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드러냈다(4월 10일 관람). 우선, 공연장 로비에는 마르그리트를 상징하는 조형물을 포토 존으로 배치하여 지긋하고 진실한 사랑을 강조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든 장면에서 마르그리트를 무대 중앙에 배치한 점 또한 그 의도를 명확히 했다. 소프라노 손지혜(마르그리트)는 주어진 숙명에도 고귀한 정신을 유지하는 극중 인물을 고귀한 음성으로 따라간다.
그 탓에 파우스트가 주변인처럼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메피스토펠레스와의 계약 후 꼭두각시가 된 파우스트의 상황으로도 읽혔다. 파우스트는 영욕을 좇지만, 의지박약하고, 의존적이며, 그저 끌려다닐 뿐이다. 메피스토펠레스는 이처럼 파우스트와 마르그리트의 관계를 조종함으로써 그들의 상황을 극중극으로 연출하며, 세상의 지배자로서 자유롭고 주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사무엘 윤(메피스토펠레스)은 큰 성량과 유연한 음성, 관현악과 동기화된 제스처, 그리고 능청맞기도 하고 카리스마도 느껴지는 자연스러운 연기로 ‘악의 매력’을 형상화했다.
그러다 파우스트가 사랑의 의미를 마르그리트와 동기화하는 순간, 파우스트는 주체자가 된다. 김효종(파우스트)은 소극적인 이끌림에서 적극적인 이끌어감으로 격변하여 이러한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런데 연출은 이 갈등을 끝내 해결하지 않는다. 사라진 마르그리트, 떠나는 메피스토펠레스, 남겨진 파우스트. 극은 이 셋의 만남으로 시작했고, 이별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노년의 파우스트(이 역할은 1막 첫 장면에서 노래해야 했지만, 본 공연은 이를 배우 정동환의 한국어 대사로 바꿨다)와 처음의 무대 장치가 돌아온다. 이 마지막 장면은 ‘파우스트’를 또다시 극중극으로 만든다. 노년의 파우스트는 홀로 남은 젊은 자신을 바라보며 비로소 객석에 인생과 사랑에 대한 무언의 질문을 던진다.
이외에 안정적이고 매력적인 바리톤 음성을 들려준 이승왕(발랑탱), 카운터테너 음색으로 오페라에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한 이동규(시에벨), 노래와 연기가 환상적 조화를 이룬 김주희(마르트), 카리스마 있는 최공석(바그너) 등 개성적 인물이 만들어졌다. 흐느낌이 지나치게 들리고 무대 회전을 기다리느라 극의 흐름이 끊기는 문제가 있었지만, 마르그리트의 환영이나 도깨비불 등 과하지 않고 적절한 미디어 사용은 무대미술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문자로 새긴 상징성과 극적인 동선을 만든 피라미드와 역피라미드, 신과 악마로 대비된 좌우의 벽 등 여러 장치는 관객을 무대 위의 판타지에 몰입하게 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세종문화회관
이자람 판소리 ‘눈, 눈, 눈’
소리, 소설, 삶에 ‘눈’ 뜬 시간
4월 7~9일·11~13일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이자람(작·작창·소리), 박지혜(연출·드라마터그), 여신동(무대), 이준형(고수)
‘눈, 눈, 눈’은 톨스토이의 단편 ‘주인과 하인’을 원작으로 했다(4월 13일 관람). 1800년대 성탄제 기간 러시아의 한 농가. 여러 개의 상점을 소유한 바실리는 고랴츠키노 숲을 사고자 썰매를 끌고 길을 나선다. 영하 28도의 추위라도, 숲을 매입해 얻을 큰 이윤을 떠올리며 길을 재촉하는 바실리에겐 상관없다. 묵묵한 일꾼 니키타와 말 제티는 두껍게 쌓인 눈길 위에서 길을 잃고 눈밭을 헤매며 낭패를 본다. 잠시 이웃마을 그리슈키노에 들러 숨을 돌린 뒤 길을 나서지만, 알 수 없는 곳에서 또다시 길을 잃고 만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자람의 ‘아니리 사용법’은 남다르다. 아니리는 소리꾼이 한 대목에서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 사설이나 상황을 노래 아닌 이야기조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프랑스의 지인이 이자람의 신작을 기대하던 중 이 소설을 추천했다는 사연으로 다스름을 대신한다.
이후 이자람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러시아 문학을 관객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아니리 서비스를 베푼다. “이름이 길고 외우기도 어려우니 간단히 ‘바실리’라 하겠소!”
소설이라면 문장을 읽어가며 주인공의 캐릭터와 성격을 잡아가야 한다. 하지만 이자람의 아니리는 그 수고도 덜어준다. “하인 니키타는 이러이러한 생김새에, 이러저러한 일들이 있어 요러저러한 성격의 소유자라!” 들려줄 노래와 풀어낼 상황에 대한 충분한 사용설명서이자 사전설명서인 그의 아니리는 이자람-판소리-러시아문학-독자-관람객 사이에 놓이는 다리가 된다.
고수와 소리꾼만 덩그러니 놓인 판소리 무대라도, 영상으로 무대를 연출하거나 서사의 분위기를 대변하는 게 최근의 공법이다. 하지만 ‘눈, 눈, 눈’의 무대에는 그 어떤 시각적 장치도 없다. 흑백을 나누는 조명의 잔잔한 연출, 가끔씩 무대를 채우는 연기뿐이다. 마치 추상의 절정을 보여주는 말레비치의 그림 속 같다. 하지만 비어 있는 공간으로 이자람식 아니리는 관객을 공연 ‘속’으로, 이야기의 ‘안’으로 끌어들인다. 소리를 멈춘 이자람은 잠시 숨을 돌리며 “제가 부채를 흔들면 관객 여러분이 바람 소리를 내주세요”라고 한다. 흔들리는 부채를 보며 관객들은 “쉬이 쉬이” 소리를 내어 러시아의 바람을 끌어온다. 그리고 이자람은 겨울바람을 정면으로 내달리는 어리석은 바실리, 묵묵하지만 내심 뒤틀려 있는 니키타, 마차 끄는 제티의 모습을 그려낸다.
바실리의 마차는 길을 잘못 들어 부서졌다. 공연이 2시간을 넘은 지점, 시간과 비용을 악착 같이 아끼던 바실리는 망가진 마차에서 죽어가던 하인 니키타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다 죽는다. 소설의 이야기는 끝났다. 전통 판소리는 마무리할 때 ‘어질더질’이라는 사설을 사용한다. 이자람은 “소리꾼은 목이 아프고, 북잽이는 팔이 아프니 이제 그만 하자”는 농담진담과 함께 마침표를 찍는다. 소설 속 인간을 보며 우리의 삶을 돌아보자는 교훈도 묻힌다. 소설의 마무리는 톨스토이가 했지만, 여운을 이어가게 하는 것은 이자람의 아니리다.
작품 제목이 ‘눈, 눈, 눈’이다. ‘눈’ 바람이 불어오는 위험한 겨울, ‘눈’ 앞의 이익만 보고 달려들었던 어리석은 자였지만, 결국 또 다른 세상사와 가치에 ‘눈’을 뜨는 이야기. 관객은 이자람으로 인해 판소리와 러시아 문학에, 그리고 두 존재가 만든 묘한 경계의 세계에서 ‘눈’을 뜬 순간이기도 했다. 공연장 밖에는 벚꽃이 ‘꽃, 꽃, 꽃’ 거리며 흩날리던 봄날이었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LG아트센터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