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LLENGE
음악 수퍼바이저 김성수
상상 속에 맴돌던 음악을 구체화하다
햄릿이 오른다. 고뇌에 찬 그의 노래를 놓고 인간과 AI가 손을 잡았다.
서울의 한 카페에서 음악 수퍼바이저 김성수를 만났다. ‘광화문 연가’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등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만한 굵직한 뮤지컬에서 음악을 다듬고 책임져온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조금 특별한 작업에 나섰다.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에서 AI와 협업해 음악을 만든 것이다.
‘보이스 오브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바탕으로, 주인공 햄릿의 내면을 록 콘서트 형식으로 풀어낸 1인극 뮤지컬이다. LED 그래픽과 조명, 라이브 밴드가 인물의 고뇌를 극대화하며 몰입감을 높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햄릿 역에 성별과 나이를 초월해 옥주현·신성록·민우혁·김려원이 캐스팅되었다는 것, 그리고 각 배우의 해석에 맞춰 음악도 완전히 다르게 완성됐다는 것이다. 커피를 앞에 두고 나눈 공연 이야기는 이내 AI와 인간 창작자 사이의 균형에 관한 대화로 흘렀다.
김성수는 AI를 단순히 배척해야 할 기술이나 효율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가 아니라, 최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한 노력과 과정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공연의 주인공 햄릿처럼, 그 역시 AI와의 공존을 위한 창작자로서의 고뇌에 빠진 듯했다. 그의 말 속에서 AI 시대에 예술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엿볼 수 있었다. 그의 흥미로운 실험과 도전에 대한 뒷이야기를 들어보았다.
AI와 인간의 협업, 그 경계에서
배우마다 편곡이 달라졌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차이를 주었나요?
네 명의 배우(옥주현·신성록·민우혁·김려원)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햄릿을 해석했기 때문에, 음악도 그 해석에 맞춰 달라져야 했어요. 배우들은 음역뿐 아니라 캐릭터에 대한 태도, 감정선이 모두 달랐죠. 애초에 20곡 정도를 예상했지만, 배우 수만큼 변화가 필요해 거의 80곡 가까이 편곡하게 됐습니다. 특히 젠더 프리 캐스팅과 1인극이라는 형식이 해석의 폭을 더 넓혀줬고, 리허설 과정에서 실시간으로 음악을 수정하는 때도 많았어요.
‘보이스 오브 햄릿’은 AI를 활용한 작업이라는 점에서 특별합니다. 이번 공연의 음악 수퍼바이저로서의 역할은 다른 작품에서의 음악 감독 역할과 무엇이 다른가요?
제 역할은 개발자들이 몇 년간 만들어온 AI 음악을 제가 전달받으면서 시작됐어요. AI는 책임을 지지 않으니, 결국 누군가는 닻을 올리고, 방향성을 잡아야 하는데, 그게 바로 제 역할이었죠. AI가 제작한 음악의 장점과 보완할 점을 분석하고, 최종적으로 제가 책임질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니 단순한 음악 감독이나 감수자가 아닌, ‘감독 겸 책임자’에 가까운, 정말로 ‘수퍼바이저’의 역할을 하고 있어요. 저는 이 과정에서 “AI와의 작업이 창작자에게 어떤 이득이 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정답은 없지만, 적어도 후배 창작자들에게 도움이 될 선례를 남기고 싶었습니다.
아직 AI가 넘을 수 없다고 느낀 감성이나 영역이 있었나요?
맥락, 정서, 공감 같은 부분입니다. 실제로 AI는 기존 음악 데이터를 바탕으로, 익숙하고 듣기 편안한 선율을 정말 잘 만들어냅니다. 반면 새로운 장르나 파격적인 편곡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그리고 이 부분이 바로 사람의 필요성을 느낀 지점이기도 하고요. 저는 이번 연습 과정에서 연출, 배우들의 감정과 해석을 살피고 의견을 주고 받으며 음악에 반영했는데, 이건 AI가 대응할 수 없는 영역이에요. 처음에 AI가 제시했던 음악과 비교해 보면, 코드 진행을 동일하게 사용한 곡이 단 한 곡도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거쳤습니다.
앞으로 AI와의 상생과 공존을 위해서 필요한 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인간의 창작 능력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AI 프롬프트에 몇몇 단어를 입력해서 원하는 음악을 구현해 내는 것도 어렵고, 프롬프트를 입력하기 위해서는 결국 창작자의 해석이 담겨야 하거든요. 우리가 지향하는 건 작품을 빠르게 제작하는 것이 아닌, ‘최상의 결과’를 만드는 일이니까요.
거친 질감으로 표현한 햄릿
음악 수퍼바이저로서 임하는 작업의 첫 단계가 궁금합니다. 평소에 대본을 읽으면 바로 음악의 방향성을 결정하나요?
저는 음악이 이야기의 도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처음 대본을 읽을 땐 일부러 음악적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이야기의 흐름과 감정을 먼저 이해한 뒤 어울리는 장르를 정하고, 이후에 악기 편성과 톤을 떠올립니다. 보통 영화나 책에서 영감을 얻는 편인데요, 운 좋게 ‘그분’이 오시면 흐름이 착착 맞아떨어지지만, 엉뚱한 분이 오시면 곤란해질 때도 있습니다.(웃음)
극을 음악으로 표현할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가 있다면요?
내러티브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감정은 어느 순간 갑자기 터지는 게 아니라, 흐름 속에서 서서히 쌓여야 하잖아요. 강한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면, 그 감정에 이르기까지 음악이 계속해서 연결되어야 하는 것이죠. 작가가 한 문장 한 문장을 고심해 클라이맥스를 만들 듯, 저도 음악으로 감정의 구조를 고민합니다.
이번 작품에서 특히 깊이 고민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요?
‘햄릿’이라는 인물 그 자체입니다. 그의 상징성과 인간적인 고립, 파괴의 과정을 음악적으로 어떻게 설득력 있게 그려낼지 계속 고민했죠. 그 복잡한 내면을 단순한 감정 표현으로는 담아낼 수 없었기에 더 깊이 들여다보려 했습니다.
이번 작품의 장르로 ‘인더스트리얼 록’을 선택한 이유는요?
햄릿의 복잡한 의식 흐름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무대의 강렬한 비주얼과 어울리는 음악이 필요했기 때문이에요. 록 음악의 에너지에 공장 소음 같은 거친 질감, 기계음이 섞인 인더스트리얼 록은 햄릿의 불안정하고 비선형적인 내면과 잘 맞았어요. 팀에서도 이러한 저의 제안을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고요.
이번 작업을 통해 새롭게 관심이 생긴 장르가 있다면요?
오랜만에 인더스트리얼 록을 다뤄보면서 이런 음악도 내 일부였다는 걸 느꼈고, 새로운 재미도 발견했습니다. 앞으로도 전자음악이나 창작 기반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싶고, 특히 작곡에 더 집중할 생각입니다. 글 쓰는 것도 좋아해서, 언젠가는 직접 쓰고 만드는 작업도 하고 싶습니다.
글 김강민 기자 사진 라바마인
김성수(1969~) 작곡(예명 23)·편곡·프로듀싱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 중인 음악 수퍼바이저.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광화문연가’ ‘베르나르다 알바’ 등에 참여했고, 창작가무극 ‘꾿바이, 이상’, 넷플릭스 ‘오징어게임’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뮤지컬어워즈 음악상(2019·2021·2023)을 수상했다.
PERFORMANCE INFORMATION
뮤지컬 ‘보이스 오브 햄릿’
5월 16일~6월 28일 국립극장 하늘 | 옥주현·신성록·민우혁·김려원(햄릿 역)
김성수 콘서트 ‘23 LIVE’
6월 28·29일 블루스퀘어 SOL트래블홀
차지연·박영수·백형훈·김푸름·송설(28일), 송용진·윤형렬·조형균·김푸름·송설·김혜현(2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