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S NOTE 공연수첩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6월 2일 9:00 오전

REVIEW


Editor’s Note

 

섬세함과 단단함으로 표현한 색채감

샤를 리샤르 아믈랭 피아노 독주회

5월 9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샤를 리샤르 아믈랭(1989~)이 작년에 이어 다시 한국을 찾았다. 아믈랭은 늘 프로그램을 진지하게 구성했고, 연주를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새로운 관심사를 제시했기에, 내심 그의 공연 소식이 반가웠다. 지난해 독주회에서는 1부에 그라나도스·알베니즈(스페인 작곡가)와 2부에 쇼팽을 배치했다면, 올해는 1부 드뷔시·라벨·풀랑크와 2부 쇼팽으로 구성했다. 프랑스 작곡가에서 쇼팽으로 이어지는 올해의 프로그램이 흥미로웠다.

1부는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으로 시작해 라벨의 피아노를 위한 소나티네와 풀랑크의 ‘나폴리 모음곡’으로 이어졌다. 찰나의 순간들이 하나의 ‘인상’처럼 기억에 남는 연주였다. 이 작품들은 모두 작곡가들이 20~30대에 쓴 곡이었기에, 만년작에서 느껴지는 원숙함과는 다른, 젊은 시절의 생동감이 느껴졌다.

프랑스 작품의 색채감은 종종 깃털처럼 가볍고 물밑을 유영하는 듯 부드럽게 다가오는데, 아믈랭의 연주에는 그 중심에 단단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드뷔시의 ‘베르가마스크 모음곡’ 중 ‘달빛’의 아주 여린 부분에서도 선율을 깨끗하고 명료하게 들을 수 있었다. 라벨의 ‘소나티네’에서는 페달을 세밀하게 조절하여 구조적이고 절제된 느낌을 강조했고, 풀랑크의 ‘나폴리 모음곡’ 중 3악장에서는 약박의 악센트와 셈여림 변화를 감각적으로 표현해 엉뚱하면서도 재치 있게 느껴졌다. 2부에서는 쇼팽의 스케르초 1~4번(전곡)을 연주했다. 쇼팽은 폴란드와 프랑스의 감수성을 모두 지니고 있어, 1부의 프로그램과 퍽 잘 어울렸다. 아믈랭은 ‘쇼팽 스페셜리스트’라는 별명에 걸맞게, 2부에서는 훨씬 자유롭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언제나 그렇듯, 쇼팽을 통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 듯했다.

아믈랭은 1~4번의 각 곡을 개별적으로 강조하기보다는 네 곡을 하나의 스케르초처럼 묶어 긴 호흡으로 이어나갔다. 1번은 거침없고 날카로운 불협화음으로 시작해, 곧이어 대비되는 서정적인 선율로 평화로움을 들려주었다. 2번에서는 왼손의 아르페지오가 서서히 감정을 쌓아갔는데, 절제된 표현이 아쉬워지려던 순간에 왼손의 옥타브가 감정을 극대화했다. 3번에서는 옥타브 진행 이후 등장하는 고음이 마치 밤하늘을 수놓는 별빛처럼 아름다웠고, 4번에서는 상승하는 화음과 하행하는 화음의 방향성을 표현하며 장난스럽고 유쾌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날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은 세 곡의 앙코르곡이었다. 왈츠 a단조 Op.Posth와 c#단조 Op.64-2, 그리고 야상곡 c#단조 Op.Posth를 연주했는데, 곡들이 마치 작은 보석처럼 느껴졌다. 적당한 무게감이 느껴지면서도 사뿐히 떨어지는 터치, 페달이 없는 순간과 촉촉하게 울리는 소리가 어우러지는 짧은 순간이 매우 아름다웠다. 언젠가 쇼팽의 피아노 소품으로만 구성된 아믈랭의 독주회를 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 정도로 섬세하고 반짝이는 연주였다.

김강민 기자 사진 더브릿지컴퍼니

 

 

보랏빛 욕망의 초상

연극 ‘헤다 가블러’

5월 7일~6월 8일 LG아트센터 서울

 

LG시그니처홀 헤다가 돌아왔다. 5월, LG아트센터 서울(5.7~ 6.8/연출 전인철)과 국립극단(5.16~6.1/연출 박정희)이 같은 시기, 같은 작품을 올렸다. LG아트센터에서는 이영애가, 국립극단에서는 이혜영이 헤다 역을 맡았다. 두 배우가 어떻게 헤다를 구현하고 해석했는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흥미롭다. LG아트센터 서울의 공연 첫날, 이영애의 헤다를 먼저 만났다.(5월 7일 관람)

‘헤다 가블러’는 노르웨이 출신의 극작가 헨리크 입센이 1890년 발표한 희곡이다. 가블러 장군의 딸 헤다는 고지식한 학자 조지 테스만과 충동적으로 결혼하지만, 곧 권태로운 일상에 지친다. 그러던 중 과거 연인 에일레트 뢰브보그가 성공한 모습으로 돌아오고, 브라크 판사는 헤다의 내면을 간파하며 접근해 온다.

이번 작품으로 첫 대극장 연출에 도전한 전인철은 리처드 이어(1943~)의 각색본을 바탕으로 특정한 시대 배경을 지우고, 인물의 내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헤다는 아름답고 매력적이지만, 내면의 무언가를 파괴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모순으로 가득 찬 인물이다. 보랏빛 드레스를 입고 냉소적인 말투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무대를 거니는 그녀는, 차가운 불안과 뜨거운 욕망을 동시에 드러내며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작 헨리크 입센, 각색 리처드 이어, 연출 전인철/이영애(헤다), 김정호(조지 테스만), 지현준(브라크), 이승주(에일레트 뢰브보그), 백지원(테아 엘브스테드), 이정미(줄리아나 테스만), 조어진(베르트)

이영애가 연기한 헤다는 마치 그의 대표작 ‘친절한 금자씨’(2005)를 떠올리게 했다. 차가운 카리스마와 어딘가 슬픈 눈빛이 어우러진 그녀의 헤다는 선악의 이분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인물로 그려졌고, 캐릭터에 대한 관객의 판단을 끝까지 유보하게 만들었다. 특히, 헤다의 감정이 동요할 때마다 무대 뒷벽에 라이브 캠을 통해 실시간으로 클로즈업되는 그녀의 얼굴은 극의 몰입도를 한층 끌어올렸다.

미니멀한 무대는 극단적인 상징성으로 채워졌다. 실내를 떠도는 풍선 더미, 디오니소스의 그림, 불협화음의 음악, 인물 뒤로 길게 드리운 그림자는 헤다가 갈망하지만 끝내 닿을 수 없는 자유를 시각화했다. 전인철은 “각 인물의 욕망과 감정을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고 했는데, 이는 헤다를 둘러싼 인물들 역시 각자의 방식으로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는 점에서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파괴를 통해 자아를 찾고자 했던 헤다의 절박한 몸짓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어디에서 자유롭고,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고전이 다시 태어나는 순간, 무대는 더 이상 과거가 아닌 지금 이 순간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홍예원 기자 사진 LG아트센터

 

 

관객에게 말을 거는 컨템퍼러리

서울시발레단 ‘요한 잉거-워킹 매드·블리스’

5월 9~18일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고전 발레의 아름다움이 시각적이라면, 컨템퍼러리 발레는 무용수의 몸에서 흘러넘치는 힘을 감각하는 것에 가깝다. 중력을 거스르고 극한의 균형을 유지한 고전 발레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밀고, 던지며, 떨어지는 힘. 그 역동성은 언어가 되어 관객의 마음에 즉각적인 질문을 던진다.

지난해 창단된 서울시발레단은 올해 두 번째 시즌을 맞이하며, 단체만의 운영 방식을 모색 중이다. 안정과 적응을 해야 하는 것은 단체뿐만이 아니다. 최근 국내 단체를 통해 해외 안무가의 작품을 감상할 일이 많지 않았던 관객도 그 의미를 이해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 ‘왜 이 공연을 봐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서울시발레단은 컨템퍼러리 발레가 무엇인지 설명해줄 수 있을만한 대표 안무작들을 내세우는 것으로 답하고 있다. 지난 3월에 선보인 안무가 오하드 나하린의 ‘데카당스’, 그리고 5월에 공연된 요한 잉거(1957~)의 더블빌이 그 예다.

지난 시즌 선보인 해외 안무 작품이 한스 판 마넨 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올해의 라인업은 그 수가 늘었고 안무가 연령대도 조금 젊어졌다. 물론 안무가의 최근작은 아니지만, 이 작품들이 ‘스테디셀러’인 데는 이유가 있는 법. 안무가의 철학에 대한 길고 난해한 설명 없이도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5월 14일 관람)

무엇보다 이번 공연에서 반가운 발견은, 이번 시즌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무용수들이다. 시즌별 무용수 체제를 선택한 서울시발레단은 지난해부터 이 방식에 대한 의심을 꾸준히 받고 있으나, 적어도 이번 시즌 무용수들이 보여준 예술에 대한 성실함과 열정은 단체의 위상을 훌륭히 유지한다.

두 작품 중, 1부에 공연된 ‘워킹 매드’에서 보여준 무용수들의 몰입은 뛰어났다. 객원 수석으로 함께한 잉글리시 내셔널 발레의 수석무용수 이상은은 작품의 중심을 확실히 잡았다. 현대 무용의 최전선인 영국 새들러스 웰즈를 본거지로 하고 있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만큼, 안무가의 의도를 완벽히 이해한 춤이 무엇인지 짚어냈다. 라벨 ‘볼레로’와 아르보 패르트 ‘알리나를 위하여’를 활용한 이 작품은, ‘연극적인 무용’이라는 요한 잉거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한 번에 이해하게 한다. 무용수만큼 활발하게 움직이는 벽은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며, 공간의 의미를 시시각각 바꾼다. 무한히 반복되는 선율과 리듬 속에서, 즐겁거나 우습거나 두려운 감정을 품은 무용수들이 각자의 역할을 춤으로 이행한다. 음악은 화려한 관현악곡에서 섬세한 아르보 패르트의 피아노 곡으로 바뀌며 여운을 남긴다. 이 다채로운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은, 우리의 평안은 안녕했을까.

2부에 이어진 ‘블리스’는 재즈 피아니스트 키스 재럿의 쾰른 콘서트 실황 음원을 사용한다. 이 음원은 한 마디로 키스 재럿이 ‘최악의 컨디션’에서 연주한 버전이다. 잠도 자지 못하고, 공연장의 착오로 제대로 조율도, 페달 작동도 되지 않는 피아노로 연주해야 했다. 그럼에도 탄생한 명반은, 오히려 연주자가 품은 음악적 활력으로 넘친다. 이 생생한 음악 속에서, 무용수들 또한 마치 즉흥적인 듯 각자의 기쁨을 품는다. 알록달록한 색감의 옷을 입은 무용수들은, 작품이 담은 정서 또한 체화했다. 그리고 이 작품이 품은 질문, ‘당신의 최고의 행복(Bliss)은 무엇인가’.

예술가 내면의 영감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컨템퍼러리 발레 감상에서 음악은 특별히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서울시발레단의 여러 공연에서 음향이 적절하지 못했던 점을 감안한다면, 감상에 방해가 되지 않을 음향적 환경의 고려 또한 필요해 보인다.

허서현 기자 사진 세종문화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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