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HIND THE MUSIC SCENE 30
세계의 예술경영인을 만나다
에든버러 페스티벌 경영감독 프란체스카 헤기
다름과 마주하는 용기
동시대적 고민을 예술로 길어 올리는 스코틀랜드의 유서 깊은 축제
프란체스카 헤기(1972~) 런던 과학박물관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2005년 런던 올림픽·패럴림픽 조직위원회에서 일했다. 런던 페스티벌의 기금 모금 등을 주도했으며, 킹스 칼리지 런던문화연구소에서 문화 행사에 대한 방법을 연구했다. 2019년부터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합류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럽은 깊은 상실의 분위기에 잠겨 있었다.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바로 이곳에서 오페라 연출가 루돌프 빙(1902~1997)은 ‘예술이 세상을 다시 평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품었다. 그는 이 믿음 아래 음악·연극·무용 등이 전 세계인과 어우러지는 축제를 에든버러시에 제안했고, 1947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페스티벌(이하 EIF)이 탄생하며 초대 예술감독을 맡았다.
70여 년이 흐른 지금, EIF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예술 축제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8월의 에든버러는 도시 전체가 무대가 되는 시간이다. 올해의 축제 주제는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The Truth We Seek)’. 너무 많은 정보와 말들이 넘치는 시대에 도리어 진실은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을 반영했다. 같은 장면을 보고도 각자 다른 해석을 내리는 세상 속에서 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진실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8월 1일부터 24일까지 진행될 축제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기지만, EIF의 경영감독인 프란체스카 헤기는 환한 미소와 명랑한 목소리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에든버러와의 재회

프린지 페스티벌 ©Shutterstock
박물관, 장애인 올림픽 등 다양한 문화예술 프로젝트를 두루 진행한 경험이 있다. EIF 경영감독직에 임명될 당시 심정은 어떠했나?
벅찬 감정이 밀려왔고, 고향에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벌써 30년 전 일이긴 하지만, 내가 처음 학위를 받은 곳이 바로 에든버러였기 때문인 것 같다. 경영감독으로 임명되어 다시 에든버러와의 인연을 이어갈 수 있어 무척 기뻤다. 명망 있는 축제의 일원으로서 훌륭한 예술가·동료와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맡은 업무에 관해 설명해 준다면?
자금 조달, 마케팅 및 소통, 프로그램 운영, 조직 관리 등 축제의 경영적인 면을 책임진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히 협력하며 축제가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경영감독과 예술감독은 역할은 무엇이 다른가. 균형 잡힌 업무 분담이 중요할 것 같다.
역할은 분명히 구분된다. 현재 예술감독인 니콜라 베네데티(바이올리니스트)는 축제의 장기적인 비전과 예술적 방향성을 책임지며 어떤 프로그램을 선보일지 큰 그림을 그린다. 시대의 흐름을 반영해 예술의 경계를 확장하고 세계 각지의 뛰어난 예술가들을 소개하는 것이 그의 역할이다. 나는 그 비전을 구체화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을 맡는다.
기획과 자유의 공존
‘에든버러 페스티벌’과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은 매우 다른 성격을 지녔다.
두 축제는 1947년 동시에 시작되었다. 에든버러 페스티벌(EIF)은 철저히 ‘기획된’ 축제다. 예술적 가치와 사회적 의미를 기준으로 선별한 작품을 초청해 관객에게 선보인다. 반면 프린지 페스티벌은 ‘기획되지 않은’ 축제다. 누구든 원하면 참여할 수 있고 공연 장소만 확보하면 자유롭게 무대에 설 수 있다. 사실 프린지의 시작은 EIF에 공식 초청을 받지 못한 몇몇 극단들이 “우리는 그냥 가서 공연하겠다”고 자발적으로 참여하며 비롯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두 축제는 지금까지 서로 다른 역할로 한 도시 안에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는 ‘기획’과 ‘자유’가 공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사례다.
3주 동안 행사가 집중적으로 열린다. 많은 결정을 내려야 할 텐데 어떤 기준으로 우선순위를 정하나?
축제 기간에는 130여 회의 행사와 공연이 펼쳐져 세심하게 기획해야 한다. 수차례 사전 회의를 진행해 일정을 세분화하고 조율한다. 직원들과 이사회 임원들은 시간 단위로 일정을 관리하며 ‘어떤 예술가를 만날지’ ‘어떤 공연장에 갈지’ ‘후원자나 정부 관계자와의 만남은 언제로 할지’ 등을 꼼꼼히 계획한다. 가능하다면 동시에 여러 장소에서 존재감을 드러내야 한다. 축제 기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예술감독 니콜라이 베네데티 ©Laurence Winram
스태프 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
상주 직원은 약 60명이다. 하지만 축제 기간에는 700~800명 규모로 증가한다. 큰 조직을 운영할 땐 명확한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 핵심이다. 함께 같은 방향을 향할 때, 각자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명확해지고 조직의 운영 또한 훨씬 원활해진다.
매년 EIF를 찾는 관객 수는 어느 정도인가?
EIF만 기준으로 매해 약 12만 장의 표가 판매된다. 에든버러에서는 프린지 페스티벌과 마술 페스티벌 등 총 6개의 예술 축제가 동시에 열린다. 이 기간에 판매되는 표는 총 300만 장을 넘어선다. 도시 전체가 예술로 가득 차는 8월이다.
세계와 진실을 예술로 연결하며

베르흐만 ‘일과 날’
올해 EIF의 주제가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이다. 주제는 어떤 방식으로 결정되나?
축제의 주제는 예술감독이 정한다. 관객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이야기이거나 우리 시대가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에서 출발한다. 올해 주제는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깊은 분열을 반영한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당신의 진실’과 ‘나의 진실’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예술은 서로 다른 시선을 마주하게 하고 안전한 공간 안에서 우리가 미처 꺼내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주제를 통해 예술의 역할을 다시금 성찰하고자 했다.
올해 주제를 처음 들었을 때, 개인적으론 어떤 느낌이 들었나?
무척 흥미로웠다. 요즘은 뉴스를 켜기만 해도 사실이 특정한 시각에 따라 왜곡되거나 재구성되는 장면을 쉽게 접하게 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진실을 곡해하는 경향이 있다. SNS상의 다양한 의견들, 심지어 일상적인 대화 속에서도 그런 현상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럴수록 예술의 역할은 더욱 빛을 발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이라는 화두는 예술의 본질을 되짚으며 진실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출발점이다.
주제와 관련해 꼭 소개하고 싶은 작품이 있다면?
굳이 하나를 꼽자면 벨기에 극단 FC 베르흐만(FC Bergman)의 ‘일과 날(Works and Days)’이다. 인간과 자연, 지구와의 관계에 대한 진실을 탐구하는 공연이다. 이 시대를 살아간다는 것이 과연 어떤 의미인지 등 통과의례 같은 본질적인 질문을 무대 위에 던지는 작품이라고 한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점은 이 작품은 대사 없이, 오직 ‘움직임’만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도 깊이 있는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어 무척 매혹적이다.
다른 장르에서 한 작품만 더 추천해 준다면?
클리프 카디널이 셰익스피어의 희곡 ‘뜻대로 하세요(As You Like It)’를 재해석한 ‘You Like It: A Radical Retelling’을 소개하고 싶다. 원작의 대사를 그대로 사용하면서도 연출과 해석을 통해 전혀 다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같은 문장이라도 사람마다 해석이 얼마나 달라지는지를 아주 영리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 점이 이번 축제 주제와도 깊이 맞닿아 있어 특히 인상 깊다.
주제가 민감하면 정치적 논란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 않나?
우려는 언제나 존재한다. 오히려 그러한 논의 자체가 축제의 정체성에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 EIF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서로 다른 시각과 세계관을 지닌 이들이 예술을 통해 소통하는 장을 만들겠다는 목표 아래 출범했다. 일례로 페스티벌 첫해인 1947년, 유대인 지휘자 브루노 발터가 나치 정권하에 활동했던 단원들이 포함된 빈 필하모닉과 함께 무대에 올랐던 공연이 있다. 축제는 시작부터 서로 다른 관점을 지닌 이들을 한자리에 모으는 역할을 해왔고 그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늘날에도 EIF는 다양한 문화의 예술가들이 공통점을 찾아가는 과정을 본질로 삼는다. 물론 일부 작품은 관객의 반발을 살 수 있고, 모두의 취향을 만족시키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작품이 지닌 예술적 완성도에 주목하며 다양한 반응이 공존할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한다. 반드시 ‘예술’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예술을 통해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예술은 단지 아름다움만을 표현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이들이 한 무대에서 조화를 이루는 장면 자체가 예술이 주는 강력한 메시지가 된다. 축제는 그런 순간들을 통해 사회의 분위기를 바꾸는 힘을 지닌다.
국제 문화외교의 장으로
EIF는 국제 문화 지형 속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는가?
축제는 단순히 공연의 장을 넘어 국제 문화 외교의 무대가 된다. 무대 위에서 복잡하고 민감한 이슈들을 담아내는 동안 그 주변에서는 각국의 -40개국에서 많게는 80개국까지- 관계자들이 문화와 정책을 둘러싼 다양한 논의를 이어간다. 예술가뿐 아니라 정치인·외교관·학자·기업인 등 여러 분야의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여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이런 점에서 에든버러를 ‘문화 외교의 다보스 포럼’이라 부르고 싶다.
문화 외교 활동을 구체적으로 설명해 준다면?
매년 하나의 국가를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만든다. 2023년에는 ‘코리아시즌’(한국)이었고, 올해는 폴란드가 중심 국가이다. 해당 국가의 예술가들이 대거 참여하면 그 나라 정부 및 문화 기관과 협력해 네트워킹 행사 등이 개최된다. 축제는 문화적 교류의 장으로 확장된다. 지난해에는 약 26개국의 정부 대표단이 축제에 참여해 자국 예술가를 응원하는 동시에 서로 자연스럽게 소통할 기회를 가졌다.
올해 폴란드를 집중 조명한 이유는?
특정 국가를 선택하는 기준은 ‘정책’보다는 ‘작품’에서 출발한다. 프로그래밍 부서는 해마다 전 세계를 돌며 축제 주제와 공명하는 작품이나 예술가를 발굴하는데 어떤 해에는 특정 국가에서 유독 강한 예술적 흐름이 감지되기도 한다. 올해 폴란드가 그랬다. 주제와도 잘 맞았고 참여 의지도 강했다. 자연스럽게 올해의 파트너 국가로 이어졌다.
예술이 꿈꾸는 미래를 탐색하며
EIF는 환경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인상적인 행보를 보인다. 구체적으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2045년까지 탄소 배출 ‘넷제로(Net Zero)’ 달성을 목표로 한다. 영국 최초 예술 조직으로 영국표준협회(BSI)의 공식 인증도 받았다. 국제 축제인 만큼 예술가와 단체의 항공 이동은 불가피하지만, 환경을 고려해 ‘상주 단체 모델’을 도입했다. 이것은 일정 기간 에든버러에 머무르며 여러 공연을 선보이는 방식으로, 공연당 최대 150톤의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 또한 무대 장치를 해외에서 운반하는 대신 에든버러 현지 제작자들과 협업하여 운송으로 인한 환경 부담을 줄이고 있다. 관객에게는 대중교통 이용을 권장한다.
지역사회와는 어떻게 협력하는가?
EIF는 연중 내내 지역사회와 긴밀히 협력한다. 일례로 지역 내 학교와 함께 운영하는 ‘Art of Listening’ 워크숍이 있다. 클래식 음악과 오페라를 처음 접하는 초등학생들을 위한 이 프로그램은 올해만도 3천 명 이상의 아동이 참여했다. 이 외에도 병원이나 요양원처럼 외부 이동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찾아가는 공연, 가족 단위의 야외 체험 행사, 시민이 함께 참여하는 합창 공연 등 다양한 형태의 지역사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가격 장벽을 낮추기 위해 10파운드의 저가 표도 제공한다.
Z세대부터 시니어까지 다양한 관객층을 위한 접근 전략이 있다면?
최근 EIF는 ‘정보 제공’에 집중하고 있다. 클래식 음악이나 현대무용이 낯선 관객들을 위해 SNS 콘텐츠 및 공연 전 해설 프로그램 등을 운영한다. 또한 ‘빈백 소파 콘서트’와 같은 실험적인 형식도 도입했다.
앞으로 10년 후, EIF는 어떤 축제로 기억되길 바라는가.
최고 수준의 예술 행사로서 모두에게 열려 있는 축제로 기억되길 바란다. ‘위대한 예술은 일부만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을 넘어 누구나 함께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가 되기를 희망한다.
올해 주제인 ‘우리가 추구하는 진실’은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각자가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여지를 남긴다. 예술은 ‘생각할 공간’을 제공한다. 서로의 생각과 감정을 꺼내고 다른 관점을 마주하며 함께 시간을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에든버러의 이 여름이 누군가에게는 그런 깊이 있는 순간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글 박선민(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에든버러 페스티벌
INFO
2025 에든버러 페스티벌
8월 1~24일 에든버러 축제 극장 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