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 | 지휘봉 끝에 흐르는 세 곡의 음악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7월 21일 9:00 오전

음악이 내게로 온 순간_18

음악가들이 알려주는 ‘추억의 플레이리스트’

 

지휘자 함신익

지휘봉 끝에 흐르는 세 곡의 음악

 

 

글 함신익(1957~) 폴란드 피텔버그 콩쿠르에 입상(1991)했고, 미국 예일대 교수로 재직했다. 대전시향(2001~2006)과 KBS교향악단(2010~2012)의 예술감독을 역임한 후 2014년 ‘함신익과 심포니 송’을 창단해 예술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깊은 강을 건너며

#로버트 쇼 #깊은 강 #지휘에 매력을 느끼게 된 곡

로버트 쇼 합창단

감상 포인트 아카펠라의 품격을 포함한 합창음악의 새로운 지경

 

저의 음악적 여정은 아버님이 목회하시던 조그만 개척교회 주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전쟁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당시 한국은 하루 끼니를 걱정하며 바쁘게 재건에 힘쓰던 시기였고, 클래식 음악은 서민들과는 동떨어진 사치로 여겨졌습니다. 예배당의 중고 풍금으로 악보 없이 스스로 듣고 싶은 음을 찾아가던 저를 본 어머니는 초등학교 1학년 무렵, 제 손을 잡고 피아노 선생님을 찾아가셨습니다. 그것은 60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음악 활동의 가장 강력한 양분이 되었습니다.

제가 지휘에 매력을 느끼게 된 첫 작품은 로버트 쇼 합창단(Robert Shaw Chorale)의 흑인 영가였습니다. 중학교 시절, ‘Deep River(깊은 강)’ 등이 수록된 1958년 음반에서 유연한 발성, 프레이징마다 변하는 음색,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던 화성의 진행, 완벽한 앙상블과 절묘한 피아니시모, 뚜렷한 음악 해석과 명확한 발성까지, 합창음악의 새로운 지경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약 15년 뒤, 저는 로버트 쇼(1916~1999)를 직접 만나게 되었습니다.

1986년 그의 지휘자 워크숍에 참가해 첫 연습을 마친 날, 저는 그를 찾아가 “제가 미국에 유학을 와서 지휘자가 되기로 결심한 것은 당신의 흑인영가 때문입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매우 기뻐하며, 음반에 수록된 악보는 물론, 자신과 엘리스 파커가 편곡한 흑인영가와 미국 민요 등 귀중한 합창 악보 전집을 선물해 주었습니다.

그 후 저는 오케스트라 지휘에 집중했고, 1995년부터 예일대 지휘과 교수로 재직하던 중 다시 그를 만나 인사를 드렸습니다. 제 성장 이야기를 들은 그는 환하게 웃어주셨고, 그것이 저희의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그는 1999년 세상을 떠났습니다.

 

 

후회와 존경을 담아

#브람스 #교향곡 4번 #일상에서 자주 연주하는 곡

볼프강 자발리슈/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감상 포인트 브람스가 의도한 긴장과 이완의 묘미가 느껴지는 자발리슈의 지휘

 

브람스의 작품은 연주할 때마다 늘 어렵고, 접근하기 조심스러운 보물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한 번 브람스의 음악에 빠져들면, 그 깊고 넓은 세계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조차도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매년 브람스의 교향곡을 한 번 이상은 꼭 연주하겠다는 원칙을 세우고, 지금까지 그것을 지켜오고 있습니다.

미국 이스트만 음대에서 지휘를 공부하던 시절, 직접 오케스트라를 조직해 첫 연주회에서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주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1992년 KBS교향악단과의 데뷔 무대에서도 이 곡을 선택했습니다. 그만큼 제게 브람스 교향곡 4번은 음악적 정체성과 깊이 연결된 작품입니다.

제가 존경하는 지휘자 중 한 분은 볼프강 자발리슈(1923~2023)입니다. 1988년 여름, 로마의 카라칼라 욕장 야외극장에서 열린 음악축제 연주가 끝난 후, 통제가 엄격한 지휘자 분장실의 담을 넘어 자발리슈를 직접 찾아가 “당신과 공부하고 싶습니다. 기회를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는 흔쾌히 자기 주소를 건네주며 “내게 편지를 보내세요. 내가 직접 답장을 하겠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곧바로 편지를 썼고, 그는 “내 집에서 머물며 나의 보조로 함께 지내봅시다”라는 믿기 어려운 제안을 담아 답장을 보내왔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는 갓 결혼한 30세의 유학생으로, 미국 음대에서 제공하는 전액 장학금과 생활비 보조가 포함된 박사과정이라는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을 돌아보면 아쉬운 선택들이 종종 떠오르지만, 이 결정은 지금도 두고두고 후회되는 일입니다.

브람스 음악에 대한 저의 시선을 열어준 이도 바로 자발리슈였습니다. 그는 브람스 교향곡 4번을 연주할 때 각 악장 사이를 아타카(attaca), 즉 멈추지 않고 곧바로 다음 악장으로 이어서 연주하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이 방식이 각 악장의 시작과 끝, 그리고 다음 악장으로 이어지는 조성 간의 음악적인 뉘앙스를 청중과 연주자 모두가 더 깊이 느낄 수 있게 해준다고 보았습니다.

이후 저도 브람스 교향곡뿐만 아니라 다른 교향곡이나 협주곡에서도 음악적 필요에 따라 아타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자발리슈는 제게 많은 것을 남기고 떠난, 깊은 인연의 스승입니다.

 

 

충격과 혼돈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잊을 수 없는 추억의 곡

스트라빈스키/스웨덴 라디오 심포니

감상 포인트 1961년 스트라빈스키가 마지막으로 지휘한 ‘봄의 제전’ 녹음

 

제가 공부하던 라이스 음대와 이스트만 음대의 도서관은 그야말로 천국이었습니다. 음반, 악보, 참고문헌 등 음악에 필요한 모든 자료가 잘 갖춰져 있었고, 혹여 없는 것이 있다면 요청 즉시 빠르게 준비해 주었습니다.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부족한 것은 오직 그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뿐이었습니다.

1986년 무렵, 아마도 휴스턴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을 처음 접한 순간, 저는 이 곡의 초연 당시 청중이 받았던 충격보다 더 큰 음악적 격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음악이 존재하다니’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나?’ ‘과연 앞으로 이런 음악을 해야 하는가?’ ‘이런 음악을 좋아할 수 있을까?’

1970~80년대 초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20세기 초 러시아 음악은 제게 엄청난 도전이었고, 동시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후 말러의 교향곡들을 접하면서, 협소했던 제 음악 창고는 점차 경계를 허물고 확장되기 시작했습니다. ‘봄의 제전’은 아름다운 선율 중심의 화성이나 대위법적 구성을 벗어나, 기존에는 사용되지 않던 악기들이 포함된 대규모 편성과, 자연을 거칠게 재현한 원시적 사운드와 에너지, 불규칙한 박자와 복잡한 리듬, 지나칠 정도로 강렬한 반복과 불규칙한 아티큘레이션, 당당한 불협화음, 숨 가쁜 반음계 진행, 클러스터 화음(Cluster chords), 금기시되던 이교도들의 희생 의식을 무대에 드러내는 대담한 서사까지,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충격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놀라웠던 것은, 그런 음악을 아주 당연한 듯 연주하고 있는 연주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뒤처져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꼈습니다. 현대음악을 수용하는 것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닌 필연이라는 사실을 절감하게 되었고, 이후 저는 주요 레퍼토리에 창작곡과 초연곡을 적극적으로 포함하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저는 예일대 시절부터 이어온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 이후에는 심포니 송에서도 수많은 세계 초연 곡들을 무대에 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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