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 뮤직센터 대표 레이철 무어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8월 18일 9:00 오전

BEHIND THE MUSIC SCENE 31

세계의 예술경영인을 만나다

 

도시의 다양성을 품은 공간

화려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부터 2천5백만 달러를 투입한 광장까지, 다양성과 혁신을 품은 예술공간

 

로스앤젤레스 뮤직센터 대표

레이철 무어

 

레이철 무어(1964~) 1984년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이하 ABT) 무용수로 입단했으나, 부상 이후 브라운·컬럼비아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보스턴 발레 이사를 역임했고, 2004~2015년 ABT의 이사로 재직했다. 2015년부터 뮤직센터의 대표로 재직 중이다.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Mario De Lopez

로스앤젤레스(이하 LA)는 미국 서부의 문화 수도이자, 인종·언어·생활양식이 복합적으로 공존하는 도시다. 문화적 정체성이 교차하는 이곳은 ‘경계 없는 다문화성’을 체감할 수 있는 도시로 손꼽힌다.

뮤직센터는 도시 중심부에서 이 다양한 문화를 잇고 어우르는 장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964년,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의 개관과 함께 출범했다. 이후, 건축가 프랭크 게리(1929~)의 설계로 완공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을 비롯, ‘아만슨 극장’ ‘마크 테이퍼 포럼’, 그리고 ‘제리 모스’ 광장과 ‘글로리아 몰리나’ 대공원 등 야외 공간이 더해지며, 뮤직센터는 지금처럼 공연장 이상의 복합문화캠퍼스로 확장됐다.

LA 필하모닉·LA 오페라·LA 합창단·센터 시어터 그룹이 상주하며, 매년 13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맞는다. 오페라부터 클래식 음악, 연극, 현대무용은 물론 여름마다 수천 명이 모여 춤추는 댄스파티까지 전통과 실험, 대중성과 예술성을 아우르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이 복합 문화예술공간을 이끄는 대표 레이철 무어는, 무용수로서의 무대 위 경험을 바탕으로 예술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동시에 경영적 감각도 갖추고 있다. 화면 너머, 마치 LA의 햇살처럼 밝고 따뜻한 그녀를 만났다. 에너지 넘치는 그와의 인터뷰에서, 예술기관이 도시의 다양성·공공성을 어떻게 실현해 나가는지 그 전략과 철학을 살펴볼 수 있었다.

 

몸으로 이해하고, 머리로 설계한다

아메리칸 발레 시어터(ABT)의 무용수였다. 어떤 계기로 경영과 인연을 맺기 시작했나?

ABT의 무용수로 활동하며, 동시에 노조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특히 계약 관련 업무에 관여하며 경영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두게 됐다. 사실, 경제학자인 부모님의 영향도 컸던 것 같다. 부모님과 단체 운영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리 낯설지 않았으니. 그러다 24세쯤 발목을 크게 다쳤다. 무대에서 물러나기를 결심했고, 다른 예술가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예술기관을 제대로 운영해, 그들이 예술에만 온전히 몰입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예술경영인으로서 보람을 느꼈던 순간은 언제인가?

2006년에 재직 중이던 ABT에는 여성 무용수를 위한 출산휴가가 없었다. 휴가 제도 개선을 위해 노력했고, 결국 무용수들이 실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정책을 바꾸는 데 성공했다. 두 번째는 무용수의 교육이었다. 무용수의 삶 이후를 준비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롱아일랜드 대학교와 함께 스튜디오에서 문학·서양사·작문·기초 비즈니스 같은 교양 수업을 열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돌아보게 했다. 무용수들이 이때 얻은 ‘자신감’은 이 강좌가 안겨준 가장 큰 선물이었다.

2017년, 저서 ‘예술가의 나침반(The Artist’s Compass)’에는 ‘공연예술로 삶과 생계를 꾸리는 완벽 안내서’라는 부제가 붙었다. 책을 쓰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나?

젊은 무용수였던 시절, 나 또한 예술계의 산업 구조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아무 준비 없이 시작하는 젊은 예술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예술 노동조합은 무엇인지, 급여나 세금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같은 기본 정보를 담았다. 무엇보다 예술가들에게도 비즈니스 마인드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학생에서 성인 예술가로 전환하는 과정을 위한 실용적 지침서라 할 수 있다.

 

공공 자산으로 시민의 삶을 바꾸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적 배경을 지닌 LA라는 도시의 특성을 프로그램에 어떻게 반영하고 있나?

의미가 있는 프로그램, 함께 공감할 방법을 먼저 고민한다. 뮤직센터는 공공기관이라, 다양한 사람들을 위한 형평성을 고려해야 한다. 내게 형평성이란, 모든 사람을 도덕적으로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이는 뮤직센터에 위치한 제리 모스 광장 수리 과정에서 중요하게 반영됐다. 에스컬레이터 등을 설치해 나이·장애와 상관없이 누구나 공간을 이동할 수 있도록 했다.

다양성·형평성을 반영한 대표적인 프로그램들을 소개한다면?

가장 먼저 소개하고 싶은 프로그램은, 발달 장애 아동을 위한 예술 축제(Very Special Arts Festival: Family Day)이다. 이 축제는 26년간 하루만 열리다가, 2022년부터 이틀간 진행하고 있다. 이틀로 확대하는 데에는 뮤직센터의 한국인 이사 송미미의 후원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비영리단체인 슈페리어 재단(Foundations for Superior Performance)을 설립해, 청소년 교육과 건강을 위한 프로그램을 꾸준히 지원하고 있다.

2023년에는 네덜란드 국립 발레를 초청, 프리다 칼로의 삶을 바탕으로 만든 공연도 올렸다. LA 지역 주민의 절반이 라틴계임에도 뮤직센터는 지역의 다양성을 충분히 담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했고, 당시 뮤직센터에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관객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오른다’는 이유만으로 극장을 찾았다.

더불어 매년 여름이면, 뮤직센터 광장에선 대형 댄스 축제가 열린다. 8~10주간 진행되는데, 벌써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2~3천 명 정도가 함께 모여 탱고부터 디스코, 힙합 장르의 춤을 추며 서로의 문화를 경험한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타문화를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을 앞으로도 계속 만들고 싶다.

이사회, 경영진 구성에도 다양성이 고려된 것 같다.

일을 시작하며 세운 원칙 중 하나다. 이사회와 사무국의 인적 구성이 LA의 인구 분포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 각 지역 사회에서 리더십 있는 인물을 찾아 이사진으로 영입했다. 재산보다는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기준으로 삼았고, 여성 이사의 비율도 높였다. 2015년에는 이사회 내 다양성 비율이 6%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63%에 이른다. 경영진도 마찬가지다. 현재 보고를 받는 간부는 여섯 명으로, 남녀 비율은 반반이며 유색인종과 백인의 비율도 동일하게 맞추고 있다.

 

예술 경영의 양과 질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 ©Mario De Lopez

뮤직센터 내 공간들을 소개해 달라.

총 네 개의 공연장을 운영한다. 잘 알려진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2,265석)은 음악 전용 공연장이다. 도로시 챈들러 파빌리온(3,156석)은 오페라·발레·무용·연극 등 대형 공연이 가능하며, 아만슨 극장(2,084석)은 연극·무용·음악은 물론, 코미디 공연을 할 수 있다. 마크 테이퍼 포럼(739석)은 원형 형태로 관객에게 친밀한 공연을 보여준다.

뮤직센터가 글로리아 몰리나 대공원까지 운영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약 10년 전, LA시 주도로 공원을 재공사했는데 도심 속 가족 공간으로 거듭나도록 잔디밭, 반려견 공연 등을 조성했다. LA시가 “공원에서 예술 프로그램이 활발히 열리길 바란다”며 운영과 관리 전반을 맡아달라고 요청해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예술 플랫폼이 탄생했다.

한편 제리 모스 광장 개보수를 위해서 A&M 레코드의 공동창립자인 제리 모스(1935~2023)가 엄청난 액수를 기부했다. 50년간 ‘제리 모스’의 이름을 사용하는 이유도 그 때문인 것 같은데….

제리 모스는 스팅과 같은 세계적인 아티스트와 함께한 인물인데, LA에서 큰 성공을 거뒀기에 지역사회에 공헌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다. 무려 2천500만 달러(한화 약 350억 원)를 기부했고, 뮤직센터 역사상 최대 규모의 단독 기부다. 기부금은 공연장을 포함한 공간 조성은 물론, 시민 참여 프로그램에도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예술 교육 프로그램은 어떻게 운영되며, 그 효과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매년 LA 전역의 약 15만 명에 이르는 어린이와 교사에게 프로그램을 제공하며, 이는 서부 해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예술 교육 프로그램으로 평가받는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선 아이들의 연령대와 거주지를 섬세하게 고려한다. 3년 전부터, ‘사회적 영향 측정 시스템(Social Impact Measurement System)’을 도입했다. 경제적 영향력이 아닌, 사회적 영향력을 측정하는 방식이다. 관객 수는 늘 집계해 왔지만, 정성적인 평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참가자들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자신이나 공동체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거나 스스로 변화했다고 느꼈는지 등을 측정하고자 했다.

뮤직센터의 10년 후를 상상한다면?

LA의 모든 시민이 뮤직센터를 ‘나를 위한 공간’이라고 느끼길 바란다. 더 많은 예술 단체가 자유롭게 이곳에서 공연하길 바라며, 무엇보다 ‘접근성의 민주화’를 실현하고 싶다.

예술계의 리더로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예술은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그리고 이 업계에서 종사하는 사람은 ‘공공을 위한 봉사자(Public Servant)’이다. 예술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쁨, 위로, 치유를 전달해야 한다. 우리가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이유는, 누군가의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뮤직센터는 단순한 공연장을 넘어, 도시의 삶과 깊이 연결된 공간이다. 레이철 무어에게 예술은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누릴 수 있어야 하는 삶의 권리이자 사회 공동의 자산이다. LA 시민의 다양한 구성만큼이나 서로 다른 배경과 이야기를 지닌 이들이 예술을 통해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하며, 연결될 수 있도록 하는 것-그것이 뮤직센터의 존재 이유이며, 레이철 무어가 강조하는 예술의 사회적 책임이다.

예술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나아가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킬 힘을 지닌다. 뮤직센터는 바로 그 가능성을 실현하는 공간이다. 뮤직센터는 ‘모두를 위한 무대’를 넘어 ‘모두가 예술의 중심에 설 수 있는 공간’을 지향하며 그 여정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

박선민(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뮤직센터

 


 

ABOUT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지은

전 세계의 이색 문화예술 공간들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은 독특한 외관과 뛰어난 음향으로 유명한 건축물이다. 건축가 프랭크 게리가 설계했으며, 돛을 형상화한 외관의 유려한 곡선미와 스테인리스 스틸 패널의 조화가 특징이다. 딱딱한 건축물이 아닌,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에너지가 느껴진다.

독창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건축가인 만큼, LA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 외에도 전세계 문화예술과 관련된 공간들을 다수 설계했다. 대표작은 1997년에 스페인에 개관한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이 미술관은 당시 쇠퇴한 공업도시였던 빌바오를 활성화할 만큼 랜드마크 역할을 톡톡히 했고, 이후 상징적인 문화시설을 통해 도시 재생 효과를 얻는 것을 ‘빌바오 효과’라고까지 칭하게 됐다. 아랍에미리트의 수도 아부다비에는 그가 설계한 구겐하임 아부다비가 공사 중이다(2026년 개관 예정). 원한다면 서울에서도 그의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루이뷔통 메종 서울’(2019)은 그가 우리의 전통 춤 ‘동래학춤’에서 받은 영감을 반영해 만든 매장이다.

뮤직센터 내의 월트 디즈니홀을 비롯, 미국 곳곳에는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다수의 공연 공간이 있다. 마이애미에 있는 뉴월드 센터(2011)는 유수의 청소년 단원들을 모아 운영하는 뉴월드 심포니의 본거지다. 대형 프로젝트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벽이 인상적인 홀이다. 중서부로 올라오면 시카고의 밀레니엄 파크에 위치한 야외 공연장 제이 프리츠커 파빌리온(2004)에서도 그의 설계 스타일을 발견할 수 있다. 하얏트 호텔의 소유주인 프리츠커 가문의 이름을 딴 것으로,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만든 가문이기도 하다. 프랭크 게리는 이미 1989년에 이 상을 받았다.

음악가와 가장 긴밀한 협업으로 탄생한 공간은 독일의 피에르 불레즈홀(2017)이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창고를 개조해 ‘바렌보임 사이드 아카데미’가 입주했다. 다니엘 바렌보임은 이곳을 인문학적 예술의 장이 될 홀로 만들고자 했다. 타원형 구조의 독특한 홀은, 월트 디즈니홀 설계를 거치며 공연장 설계에 경험을 쌓은 프랭크 게리가 음향 전문가 야수히사 토요다와 함께 무료로 홀의 탄생에 기여했다.

허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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