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스 연광철, 가곡과 오페라 영상에 남긴 예술의 궤적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8월 4일 9:00 오전

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무대 위 성실한 해석자, 그 깊이를 기록하다

베이스 연광철, 가곡과 오페라 영상에 남긴 예술의 궤적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베이스 연광철(1965~)이 올해 환갑을 맞았다. 객관적으로 보면 전성기를 지난 나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무대 위의 제왕’으로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보다, 어떤 경우에도 안심할 수 있는 ‘성실한 해석자’로 더 많은 신뢰를 받아온 그이기에, 아직 무대 위에서 해야 할 역할이 더 남았다고 기대한다.

예술적 삶의 궤적을 돌아보고 남은 과제를 점검해야 할 이 시점에서, 연광철이 남긴 음반과 영상물을 정리한다. 그의 음반 중에는 오페라에서 조연으로 참여한 경우도 여럿 있으며, 희귀한 레퍼토리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이번에는 가곡 독집 세 편으로 범위를 한정하고, 대신 오페라 영상물은 최대한 폭넓게 소개하고자 한다.

 

세 개의 가곡집에 담긴 서정성

우선, 정명훈의 피아노 연주와 함께 한 ‘겨울나그네’(Sony)❶가 있다. 2009년 12월 예술의전당 실황 공연을 담은 음반으로, 당시 베이스가 ‘겨울나그네’를 부른다는 점과 서울시향 음악감독으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정명훈이 피아노 앞에 앉았다는 점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베이스바리톤 한스 호터(1909~2003)를 비롯해 베이스가 이 작품을 부른 예가 없지는 않지만, 바리톤이나 테너에 비해 드문 사례임은 분명하다.

정명훈의 반주는 차가운 겨울의 냉랭함을, 연광철의 무겁지만 둔하지 않은 음색은 처절한 슬픔 속에서 궁극의 안식을 찾아가는 나그네의 자아를 상징하듯 들린다. 연광철은 ‘겨울나그네’에 대해 “첫 곡에서 작별을 고한 주인공이 23번째 곡까지 연인의 집 근처에서 갖가지 상념 속에 밤을 지새우다가, 마지막 곡인 ‘거리의 악사’에서 새로운 출발을 한다는 의식의 흐름으로 이 연가곡을 이해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러한 관점으로 감상하면 이 음반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❷ Universal DU42219

2020년, 코로나 대유행으로 대부분의 공연이 취소되며 국내에 머물던 연광철은 ‘슈베르트·슈만·브람스·슈트라우스 가곡집’(Universal)❷을 스튜디오 녹음으로 발매했다. 독일 리트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네 작곡가의 작품을 각각 네 곡씩 고르게 수록했는데, 모두 일정 수준 이상으로 널리 알려진 곡들이기에 예술가곡 애호가들이라면 “브라보!”를 외칠 만한 구성이다. 함께 한 김정원은 자신의 공연에서도 문학적이고 철학적인 스토리텔링을 시도하며 내면적 깊이를 강조하는 피아니스트로, 이들 모두 독일어 가사의 의미를 깊이 있게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연광철이 빚어내는 신중하고 지적인 분위기가 모든 곡에 어울린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 성악가가 온전히 독일 예술가곡에 집중한 음반으로는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성과다.

2012년 가을, 고양아람누리의 고양국제음악제 중 리사이틀 프로그램북을 집필한 인연으로 그의 무대를 집중해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바그너를 비롯한 다양한 작곡가의 오페라 아리아가 주 프로그램이었지만, 앙코르로 부른 한국 가곡들이 특히 인상 깊었다. 그날 이후로 그의 한국 가곡 음반을 기다려 왔는데, 10년 넘게 기다린 끝에 2023년 ‘고향의 봄-연광철이 노래하는 한국 가곡’(풍월당)❸이 출시되었다.

박서보의 단색화를 표지 디자인으로 사용할 만큼 공들인 이 음반은 풍월당 20주년 기념작으로, 한국 가곡의 중심 주제를 ‘이별의 정한’으로 보고 여백의 미를 살리는 방향으로 해석되었다. 그래서인지 초반에는 너무 잘 알려진 곡들을 연광철 특유의 절제된 감성으로만 부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열정적이거나 민요풍의 노래들은 빠져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중후반으로 갈수록 해석의 폭이 넓어지고, 김택수의 신작 가곡 두 곡에서 절정을 이룬다. 특히 판잣집 풍경을 해학적으로 그린 ‘산복도로’는 변훈이 작곡한 ‘명태’ 이후 씁쓸한 해학을 담은 가곡 반열에 오를 만하다. 마지막 트랙인 ‘고향의 봄’은 피아노 반주 없이 지극히 느리고 감성적으로 불러 깊은 여운을 남긴다. 그는 자신의 고향인 충주 산골에 대한 기억을 담아 이 곡을 노래했다고 한다. 여러모로 감성적인 기획이 돋보이는 음반이다.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엿보인 조연의 미학

❹ Arthaus 111111

연광철은 국내에서 ‘바그너 스페셜리스트’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에도 자주 출연해 왔다. 음반뿐 아니라 영상물도 다수 남겼다. 다만 베이스가 오페라의 주인공을 맡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에, 영상물에서의 연광철은 주로 조역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의 첫 영상물은 베를린 슈타츠오퍼 전속가수 시절이었던 1999년, 다니엘 바렌보임이 지휘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Arthaus)❹ 실황이다. 이 무대에서 연광철은 의사 바르톨로 역으로 출연했으며, 단역에 가까운 역할이지만 그의 모차르트식 파를란도(빠르게 읊조리는 창법)를 감상할 수 있다.

다음으로, 2002년 바르셀로나 리세우 대극장에서 공연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Opus Arte)❺에서는 레포렐로 역을 맡았다. 악동 연출가 칼릭스토 비에이토의 끔찍한 해석으로 유명한 이 프로덕션에서, 조역임에도 음반 부클릿을 넘기면 바로 연광철의 모습이 실릴 정도로 존재감 있는 역할을 선보였다. 특히 의자에 묶인 돈 조반니를 등장인물들이 차례로 칼로 찔러 죽이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을 싫어하면서도 모방하던 레포렐로가 마지못해 복수에 동참하는 장면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개인적으로는 이 영상을 그의 최고작 중 하나로 꼽고 싶다.

 

바그너 오페라로 구축한 베이스의 깊이

❺ Opus Arte OA 0921

연광철의 첫 바그너 영상물은 2010년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된 ‘라인의 황금’(Arthaus)❻이다. 베를린에서 인연을 맺었던 바렌보임이 라 스칼라 음악감독을 맡으며 시작한 ‘반지 4부작’ 프로젝트의 첫 작품에서 연광철은 거인 파졸트 역을 맡았다. 작고 아담한 체구의 동양인이라는 점에서 의외의 캐스팅이었지만, 그림자 효과를 활용해 거인을 표현한 영리한 연출 덕분에 그의 체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작은 거인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다만 후속편에서는 더 이상 출연하지 않은 점이 아쉽다.

그 아쉬움은 같은 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크리스티안 틸레만이 지휘한 ‘발퀴레’(Opus Arte)❼로 어느 정도 해소된다. 연광철은 폭력적인 훈딩 역을 맡았다. 탄크레드 도르스트의 연출은 훈딩을 덜 사악하게 묘사해, 유럽 평단에서는 “아름답게 노래했다” 정도의 작은 호평에 그쳤지만, 연광철은 거의 앉은 채로 노래하면서도 강한 권위와 낯선 남자에 대한 적대감을 동시에 표현해 새로운 캐릭터의 훈딩으로 손색이 없었다. 같은 해 ‘라인의 황금’에도 출연했지만, 영상물로는 ‘발퀴레’만 출시되었다.

연광철의 바이로이트 영상은 2014년 바그너의 ‘탄호이저’(Opus Arte)❽로 이어진다. 유전자가 변형된 듯한 미래 인물들이 등장하고, 산업폐기물 처리장을 연상시키는 세트를 활용한 세바스티안 바움가르텐의 연출은 관객과 평단 사이에서 극단적인 호불호를 불러일으켰다. 연광철은 엘리자베트의 부친인 헤르만 영주 역을 맡아 깊고 유연한 베이스 음성으로, “엘리자베트 역의 카밀라 닐룬트와 함께 커튼콜에서 가장 큰 박수를 받았다”는 호평을 받았다.

국내 오페라 애호가들이 특히 주목해야 할 영상물은 2016년 테아트로 레알 데 마드리드에서 공연된 ‘방황하는 네덜란드인’(Harmonia Mundi)❾일 것이다. 이 공연에서 사무엘 윤이 타이틀 롤을, 연광철은 달란트 선장을 맡아 두 명의 한국인 베이스를 동시에 만날 수 있다. 곡예적 연출로 유명한 ‘라 푸라 델스 바우스’의 알렉스 올레는 거대한 선박 구조물과 파도 영상을 활용해 시각적 완성도를 높였다. 연광철은 자칫 가식적으로 보일 수 있는 달란트 선장의 캐릭터를 특유의 ‘성악적 고귀함’으로 표현하며 인간적인 인물로 그려냈다.

같은 해, 그는 로열 오페라에서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대표작인 도니체티의 ‘람메르무어의 루치아’(Erato)❿에도 출연했다. 연광철은 루치아 가문의 가정교사인 라이몬도 역을 맡았는데, 선량하고 온정적인 성격의 인물로 그의 인상과도 잘 어울린다. 이 역은 감미로운 선율을 지닌 아리아도 포함된 제법 비중 있는 배역이다. 이 프로덕션의 연출가 케이트 미첼은 영화에 버금가는 세세한 연기를 요구하고, 루치아가 아이를 사산한 뒤 피로 뒤덮이는 등 공포 영화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 효과를 추구했다. 이 때문에 라이몬도의 온화한 존재감이 다소 희석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PERFORMANCE INFORMATION

연광철 리사이틀

8월 15일 오후 5시 이천아트홀 대공연장

8월 17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슈베르트 ‘가니메드’, 브람스 ‘4개의 엄숙한 노래’, 김동진 ‘진달래꽃’, 휴고 볼프 ‘하프 연주자의 노래’, R. 슈트라우스 ‘밤’, 김성태 ‘사월의 노래’ 외 (피아노 박은식)

 

연광철·사무엘 윤·김기훈 ‘싱 로우 앤 소프트’

8월 23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8월 24일 오후 5시 청주예술의전당 대공연장

모차르트 ‘눈을 크게 뜨시오’(피가로의 결혼), 바그너 ‘아가야, 이방인을 환영해다오’(방황하는 네덜란드인), 베르디 ‘그녀는 나를 사랑한 적이 없어’(돈 카를로), 김동진 ‘내 마음’ 외 (피아노 김정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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