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HOT_AUSTRIA
전 세계 화제 공연 리뷰 & 예술가
오퍼 임 슈타인브루흐
거대한 돌이 사라진 곳의 바그너
초대형 오페라 공연장이 된 마르가레텐 채석장. 바그너의 선율이 울리며, 신화가 깨어났다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주 성 마르가레텐에 위치한 로마 시대 채석장은 매년 여름 야외 오페라축제인 ‘오퍼 임 슈타인브루흐’(‘슈타인브루흐’는 채석장을 의미)의 공연장으로 변신한다. 1996년부터 ‘아이다’ ‘투란도트’ 등 대중적 작품을 선보이며 매해 수십만 명의 관객을 모은 ‘오퍼 임 슈타인브루흐’는 올해 처음으로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무대에 올렸다. 예술감독 다니엘 세라핀(1981~)은 이 대담한 시도에 대해, 자신의 예술적 비전과 채석장이라는 공간이 가진 특별한 의미에 대해 설명했다.
적은 자원으로 만든 바그너 월드
바그너의 작품을 선택한 이유를 묻자, 다니엘 세라핀은 “많은 사람들은 바그너를 어렵게 느끼지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판타지와 드라마, 구원의 서사로 가득한 작품”이라고 답했다.
성악을 전공한 세라핀은 2시간 10분의 공연 시간으로, 야외 공연에 최적화된 무대를 기획했다. 짧은 러닝 타임과 직관적인 전개 덕분에 바그너 초심자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특징이다.
무대의 압도적인 존재감은 무대 디자이너 모메 힌리히스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약 100톤의 자재가 사용되었으며, 그중 600㎥의 스티로폼과 42톤의 철, 6km에 달하는 목재가 포함됐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디지털 설계’와 ‘재활용 가능 구조’다. 강철과 스티로폼으로 구성된 60미터 길이의 파도 형상 무대 위에 북유럽 어촌과 괴물 같은 배가 함께 공존한다. 공연 도중 불꽃과 물줄기, 거대한 선박이 회전하며 관객을 압도하고, 채석장 벽면엔 빛과 영상이 투사된다. 실시간으로 비추어지는 성악가들의 얼굴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감정의 밀도를 더해준다. 이 무대를 바탕으로 모메 힌리히스는 보다 적은 자원으로 더 큰 예술을 만들어내고, 환경을 생각하는 문화축제의 미래상을 제시한 셈이다.
인물의 내면을 비추는 깊이 있는 연출
연출가 필립 M. 크렌은 단순한 스펙터클을 넘어 인물들의 내면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여주인공 젠타는 전통적인 희생자 이미지가 아닌, 자유와 환상을 추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지붕 위에서 그림을 그리며 현실을 벗어나는 그녀의 모습은 바람과 음악, 빛이 어우러진 장면에서 더욱 빛난다. 남주인공 에릭은 현실에 집착하며, 질투와 억눌림 속에서 스스로 무너지는 인물로 표현된다. 파트릭 랑게/피에드라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의 연주와 성악진의 에너지가 극의 밀도를 채웠다. 그중에서도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타이게의 젠타는 단연 돋보였다. 강인함과 섬세함, 감정의 파고를 오가는 그녀의 목소리는 공연장을 압도하며 젠타의 내면을 생생히 드러냈다.
채석장의 거대한 자연, 북유럽 신화의 어두운 그림자, 그리고 바그너의 음악이 만난 이 공연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였다. 무대와 음악, 자연과 인간이 조율된 순간, 슈타인브루흐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신화와 현실이 교차하는 특별한 경험이 되었다.
글 이선옥(오스트리아 통신원) 사진 오퍼 임 슈타인브루흐
INTERVIEW 예술감독 다니엘 세라핀
특별한 야외 오페라를 위한 기준들
일명 ‘마르가레텐 극장’이라고도 불리는 채석장 공연이 가지고 있는 특별함은 무엇이며, 오스트리아 문화 산업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이 극장은 지난 몇 년간 많은 훌륭한 예술가를 초청했고, 최고의 예술팀을 구성하면서 지금은 자율적인 시스템으로 운영되고 있죠. 매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이 곳은 오스트리아 문화계에서 중요한 오페라 행사로 확고히 자리 잡았고, 덕분에 저희에게도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매년 직접 연출가와 성악가를 선정한다고 들었습니다. 선정 기준이 궁금합니다.
기준은 오직 ‘질적 수준’입니다. 같은 사람만 쓰지 않고, 과거에 좋은 예술적 성과를 냈는지를 봅니다. 베로나에서 연출 경험이 있어도 이 무대를 다루기 어려워하는 경우도 있죠. 특히 제가 예술감독이 된 이후로는 ‘예술적 발전’을 중요시해 한국 출신의 소프라노들도 무대에 세웠습니다. 한국 성악가들의 훈련 수준과 성실성, 의지는 정말 인상적입니다. 오스트리아에는 테너가 부족해 사람들이 자주 “오스트리아 테너는 어디 있느냐”고 묻지만, 저는 국적이나 종교보다 실력을 최우선으로 합니다. 큰 무대이기 때문에 작고 섬세한 작품보다는 이미지가 강렬한 작품이 필요하기도 하죠.
이번 시즌에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무대에 올랐습니다. 이 작품을 선택하게 된 배경과 특별히 강조한 부분이 있다면요?
팀과 이사진, 모두의 소원이자 도전이었어요. 관객들의 고정관념도 깨야 했죠. 바그너는 어렵고 길다는 인식이 있잖아요. 하지만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공연 시간이 2시간 10분으로 바그너의 오페라 작품 중 가장 짧고, 감정적으로 몰입되는 드라마입니다. 서곡이 시작되면 바로 폭풍 속으로 빠져들죠. 늘 ‘아이다’ ‘카르멘’ ‘나부코’만 공연할 수는 없습니다. 새로운 길을 모색했고, 바그너를 통해 관객층을 유입시키고자 했어요. 예술적으로도,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선택이었습니다.
야외 공연이라는 특성상 가수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런 특수한 무대 환경에는 어떻게 대비하나요?
사전에 예술가나 에이전트와 충분히 조율합니다. 일반 오페라하우스와 다르기 때문에 미리 환경을 이해시켜야 하죠. 가수들은 50개가 넘는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고, 체력이 부족하면 성량에도 영향을 받습니다. 한여름에 36도가 넘는 날엔 순환기 이상으로 성악가의 목에 문제가 생긴 적도 있었죠. 아주 드문 일이긴 하지만요. 어떤 성악가들은 ‘그저 서서 노래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이 무대는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움직임과 지구력이 필수입니다. 우리는 스탠딩 싱어를 원하지 않아요.
성악가 출신의 문화경영자로서 그 경험이 어떻게 도움이 되었나요?
성악을 공부한 것은 저에게 큰 자산입니다. 성대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가수의 한계와 가능성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죠. 저는 ‘데뷔의 순간’을 만들어주는 걸 좋아합니다. 새로운 도전을 통해 성장하는 예술가들을 보는 것이 보람 있죠. 저도 누군가의 믿음으로 기회를 얻었습니다. 2019년 처음 축제를 맡았을 때 그랬으니까요. 완벽하지 않아도, 기회를 통해 자신을 증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