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CORD COLUMN
음반에 담긴 이야기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 신뢰로 쌓은 음악적 행보
9월 내한을 앞두고 살펴보는 브론프만의 예술적 자화상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서 출생한 예핌 브론프만(1958~)의 눈부신 이력은 이미 세계의 음악 팬들에게 익숙하다. ‘러시아계 유대인’이란 태생적 배경을 타고나 철저한 엘리트 교육에 의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는 자기 계발과 실험을 더해왔다. 그 결과, 내놓는 음원과 연주마다 늘 새로운 회자 거리들을 생산하고 있는 브론프만의 행보는 자체로 ‘신뢰’다. 어느 시대 작품을 무대에 올리든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깊이 있는 화두를 던지는 브론프만이 내한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브론프만을 기다리며, 낭만과 20세기 레퍼토리에서 두드러진 강점을 발휘하고 있는 그의 음반 중, 총 다섯 장을 엄선해 보았다.
젊은 러시안 비르투오소의 호연
1990년 6월 녹음되어 이듬해 출시된 음반(Sony Classical)❶에는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 무소륵스키의 ‘전람회의 그림’, 차이콥스키의 ‘둠카’가 수록되었다. 30대 초반의 러시안 비르투오소가 보여 줄 수 있는 최상치가 담긴 이 음반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전람회의 그림’이다. 음반 전곡은 폭발적인 화력과 엄청난 무게감으로 듣는 이를 압도하지만, 브론프만은 무소륵스키가 건반 위에서 상상한 광활한 우주를 생생하면서도 흥미로운 연출력으로 묘사해 내고 있다.
‘프롬나드’부터 힘차고도 세심한 집중력으로 만들어낸 타건은 매우 고른 동시에 선 굵은 음상으로 듣는 이들을 설득한다. ‘난쟁이’ ‘오래된 성’ ‘튈르리 궁전’으로 흘러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다이내믹 배치와 완급 조절은 소름 끼치도록 정교하며 한 치의 과장이 없다. 포르티시모에 이르는 강타에서 모나지 않은 아티큘레이션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그의 20대 시절부터 이어진 특징으로, ‘비드워’ ‘바바야가’ 등에서 이런 경향이 여실히 드러난다. 긴장감이 높은 악상에서도 맑은 공명으로 개운한 맛을 끌어내는 모습 역시 인상적이다. ‘리모주의 시장’, 마지막 곡 ‘키예프의 대문’에서는 장대하고 폭넓은 음향 속, 투명한 음색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놀라운 연주력을 보여준다.
이 음반이 1989년, 미국 국적을 취득한 브론프만이 서방 세계에서 본격적 활동을 알린 효과적인 신호였다면, 그의 연주 스타일로 미루어 보았을 때 자연스런 수순일 수 있는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가 다음으로 이어졌다. 거대한 존재감을 빙산의 일각으로 가려 놓은 듯한 브론프만의 잠재력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 작품에서 정교하면서도 야무진 테크닉과 잘 다듬어진 리듬감으로 표출됐다. 1991년 9월, 뉴욕에서 녹음돼 1994년 출시(Sony Classical)❷된 프로코피예프 소나타 1번·4번·6번은 프로코피예프 전문가로서 브론프만의 면모가 뚜렷이 드러난 명연이다.
특히 선명한 음색과 적절한 무게의 터치로 아방가르드적 분위기와 즐거운 기분을 동시에 표현한 소나타 6번은 서두르지 않으면서 강렬한 리듬감과 속도감이 어우러진 연주다. 1악장 전개부의 혼란스러움, 2악장의 유머러스함은 각 악장 전체를 고려한 균형감각 속에서 빛났고, 스포티한 쾌감이 발휘된 4악장의 역동성도 탁월하다. 동료 막시밀리안 슈미토프의 비극적인 죽음을 추모한 4번 소나타에서, 브론프만은 복잡하고 입체적인 대위법으로 연주자에게 도전 과제를 던지는 세 악장을 훌륭히 해석했다. 체계적인 성부 배열과 거침없는 직선적 프레이징을 통해, 내성적이면서도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난곡의 깊이를 생생하게 드러냈다.
마지막에 담긴 소나타 1번은 단악장으로, 젊은 시절 프로코피예프의 스타일이 온전히 나타나지 않은 작품으로 분류되나, 브론프만은 충분한 윤기가 흐르는 터치와 페달링을 통해 누구나 알기 쉬운 피아니즘으로 풀어놓는다.
영혼의 이중주
브론프만의 오랜 팬들은 누구나 실내악 주자로서의 눈부신 그의 활동을 기억한다.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의 믿음직한 파트너였으며, 바이올리니스트 초량린·핀커스 주커만·길 샤함, 첼리스트 트룰스 뫼르크·개리 호프만과 피아니스트 엠마누엘 엑스 등 최고의 연주자들이 브론프만과 함께였다.
바이올리니스트 슐로모 민츠(1957~)와의 음반(DG)❸은 초기부터 주목 받았다. 프랑크·드뷔시·포레 등 프랑스 레퍼토리로 시작된 둘의 작업(French Violin Sonatas/DG, 1980년 녹음, 2005년 음반 발매)은 1988년 출시된 프로코피예프 바이올린 소나타집이 나오며 인기를 얻었다. 깨끗하고 투명한 음색, 강한 질감의 음상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민츠의 활놀림은, 브론프만의 묵직한 타건과 절묘하게 어울린다.
프로코피예프의 바이올린 소나타 1번은 대규모 스케일과 신비로운 분위기, 환상곡 풍의 음향이 요구되는 난곡이지만, 브론프만의 터치와 프레이징은 자칫 날아오르기 쉬운 피아노 음향을 현실감 있게 조절하고 있어 바이올리니스트의 음악적 존재감을 돋보이게 한다. 둥근 모양으로 유연하게 움직이는 프레이즈와 마디 배치는 민츠의 자유로운 표현력을 더욱 강조하며, 화려함에 있어서도 음향적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낸다.
플루트 소나타로도 알려진 소나타 2번은 전작에 비해 한결 즐겁고 알기 쉬운 어법으로 이루어져 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긴밀하면서도 밀도 깊은 어조로 이어지며, 작품이 지닌 유희성을 지나치지 않게 나타내는 동시에 프로코피예프 음악이 지닌 절대 음악적 요소를 드러낸다. 지극히 예민한 디테일까지 절묘하게 이루어지는 호흡은 듣는 이들에게 또 하나의 흥밋거리다.
고전 속, 절제와 균형 사이를 견지한 울림
브론프만 음반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중요 작곡가 중 또 한 명을 꼽으라면, 단연 요하네스 브람스다. 올해의 내한 역시 브람스의 작품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만큼, 비교적 최근인 2023년 11월에 공개된 라이브 음원(Euroarts Music)❹은 그의 팬들에게 여간 새로운 반가움이 아닐 수 없다. ‘1987 뮌헨 레지덴츠 리사이틀’로 소개된 이 녹음에는 브람스의 소품 Op.119와 헨델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24가 담겼다. 영상물로도 남아 연주자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이 연주는 시종 이지적인 자세로 절제된 브람스를 표현하면서도, 밝게 열린 음색 덕분에 결코 현학적으로 들리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다.
Op.119의 첫 인터메조는 차분한 어조로 작곡가의 비애를 은유하며, 두 번째 인터메조는 텍스트가 지닌 불안감과 충동을 적극적으로 드러내 매력을 전달한다. 짧은 즐거움과 스치는 상념을 표현한 세 번째 인터메조는 의외로 묵직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으며, 마지막 랩소디에서는 당시 29세였던 연주자의 빛나는 비르투오시티가 멋지게 터져 나온다.
헨델 변주곡 Op.24에서 긴 호흡으로 이어지는 변주 간의 연결고리가 자연스러운 빌드업으로 느껴져 호감을 준다. 바로크적인 단정함과 명쾌함으로 이어지던 타건은 4변주부터 무게를 더하며, 10변주부터는 적절한 스피드와 탄력을 더해가며 음향에 살을 붙인다. 비극적 분위기의 13변주 등 단조에서 기조를 지나치게 바꾸지 않은 것은 큰 그림을 보는 혜안이다. 우아한 율동감이 인상적인 21변주를 지나, 오르골 음향의 22변주와 본격적인 피날레인 마지막 세 개의 변주를 펼쳐 나가는 모습은 물이 오른 거장의 솜씨를 여실히 보여준다.
적재적소에 꼭 필요한 만큼 쓰이는 페달링은 단단한 타건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음향 구조는 마지막 푸가에서 매우 효과적으로 발휘된다. 고른 터치의 손가락들은 다성부로 짜인 텍스트들을 얽어가기에 최적화되어 있다. 브론프만의 해석은 장대한 푸가가 거대한 변주곡의 종곡이기 이전에, 얼마나 정교한 대위법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통렬하게 드러낸다.
정교하게 직조된 음악적 대화
누구에게나 첫 경험은 매우 뜻깊고 평생의 기억으로 남는 법이다. 17세의 브론프만이 본격적인 데뷔 무대를 치른 순간, 무대에는 주빈 메타/몬트리올 심포니가 함께였다.
그날 이래로, 두 사람은 수없이 무대를 함께 했으며, 2024년에는 주빈 메타가 뮌헨필의 명예 지휘자가 된 지 20년을 맞아 역사적인 브람스 사이클에 브론프만을 협연자로 초청했다. 두 차례의 세션(2024년 1월 녹음)에서 남긴 명연(Münchner Philharmoniker)❺은, 이미 2018년 LA필 브람스 사이클에서 호평을 받은 두 사람이 음악적 견해를 따로 나눌 필요가 없을 만큼 일치된 호흡을 보여주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피아니스트와 오케스트라가 큰 규모의 음향 감각을 염두에 두고 있음에도 그 질감과 크기가 전혀 부딪힘 없이 절묘하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부드러운 아티큘레이션과 레가토를 선호하는 메타의 지휘와 이에 따라 움직이는 오케스트라에 브론프만 역시 풍부한 페달링으로 만들어진 커다란 양감으로 맞서는데, 음악적 대화의 묘를 살려서인지 양자의 만남에 부담이 느껴지지 않으며, 오히려 모든 요소가 합일하여 우아한 낭만성을 극대화시키는 결과를 낳고 있다.
불필요한 루바토 없이 단정하게 펼쳐져 확대된 스케일이 느껴진 협주곡 1번의 1악장, 오케스트라의 솔로들과 피아노가 긴밀한 대화가 이루어진 2번의 1악장, 솔리스트를 한껏 배려해 절제된 관현악 사운드가 두드러진 1번의 3악장과 2번의 2악장, 외향적 자세로 피아니스틱한 효과를 맘껏 풀어헤친 2번의 4악장 등이 하이라이트다. 시종일관 연주 전반에 흐른 따스한 분위기는 노거장의 행보를 흔들림 없이 지지하려는 브론프만의 마음이 전해진 듯하다.
글 김주영(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롯데문화재단
PERFORMANCE INFORMATION
예핌 브론프만 피아노 독주회
9월 20일 오후 5시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
9월 21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슈만 아라베스크 C장조, 브람스 피아노 소나타 3번 드뷔시 영상 2권, 프로코피예프 피아노 소나타 7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