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1
피아니스트 백혜선
치열하고 진실한, 건반 위의 순간들
교육현장과 세계무대를 잇는 예술가. 올해는 음악과 광복의 의미, 베토벤의 깊이를 더욱 다져본다
그와의 대화는 인터뷰 며칠 전, 두어 달 만에 만난 제자 김세현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지난 5월, 롱티보 콩쿠르 우승 후 한국 공연에서 연이은 매진을 기록하는 제자를 오랜만에 부산에서 만났다고. 이틀 사이, 두 사람 모두 8월에 부산콘서트홀에서 독주회가 있었다. 성과를 거둔 제자의 스승으로서 짐짓 무게를 잡을 법도 한데, 소탈한 백혜선의 답변에 대화 내내 유쾌한 웃음이 끊이지 않는다.
“프랑스에서 연주를 많이 하고 오더니… 날고 기더라고요. 그걸 본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잠깐. 지금 이거 심각하다. 쟤 연주를 들어줄 게 아니라, 내 연주 어떡하지?’ 싶었다니까요. 선생 연주인데 뭐라도 조금은 더 나아야 할 거 아니에요! 요즘 제자들 보면, 좀 ‘심하게’ 잘해요. 대체 어디서 뭘 먹었길래, 이런 친구들이 나오는 걸까요?”
탁월한 제자를 길러낸 음악 교육의 비하인드
‘날고 기는’ 그 제자들은 백혜선의 밑에서 스승의 일상을 보고 자랐다. 콩쿠르 우승 후 김세현이 남긴 “음악에 필요한 문법, 음악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자세는 백혜선 선생님께 배웠다”는 인터뷰에서도 대번 드러난다. 백혜선은 2018년부터 뉴잉글랜드 음악원(이하 NEC)의 교수로 재직 중이다.
“NEC에는 온통 열심히 하는 사람들뿐이에요. 학생이라기보다 이미 예술가에 가까운 친구들이죠. 당연히 앞으로 더 성장해야겠지만, 제 나이쯤이 되면 더 뛰어난 거장이 될 것이란 걸 저는 벌써 알고 있어요. 이들은 음악을 마치 생명줄처럼, 자기 숨처럼 붙잡고 살아요.”
백혜선의 일상엔 스승의 권위나 이에 따라 파생되는 은근한 자존심 세우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상대가 제자여도, 음악 앞에서의 그는 정직하다. 그렇다. 한때 서울대 음대 최연소 교수로 이룬 안정도 포기할 줄 알았던 백혜선이다. 평생 쌓아온 ‘정직한 음악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지금의 교육 현장에 녹아 있다.
“한때는 ‘백혜선 제자는 잘 친다’는 말을 듣고 싶기도 했어요. 참 못난 선생이었죠. 지금은 늘 학생들에게 60%만 준다고 말해요. 똑같은 김치찌개여도 ‘내 김치찌개는 치즈가 어울리네’ ‘물 양은 이 정도가 딱 좋다’ 같은 발견은 자신의 몫이라고요. 그 답을 찾도록 돕는 게 제 역할이고, 저를 가르쳐주셨던 러셀 셔먼 선생님의 가르침 방식이기도 합니다.”
현재 백혜선은 NEC의 피아노 학과장을 맡고 있다. 2023년, 손민수가 교수로 임용되며 두 사람의 스승인 변화경(1979년부터 NEC에서 교편생활 시작)을 포함해 NEC의 한국인 피아노 교수는 세 명이 됐다. 몇 해 전 별세한 러셀 셔먼, 그리고 그의 아내 변화경이 평생 NEC에서 심고 기른 음악이 오늘날의 열매로 이어지고 있다.
“변 선생님이 여전히 제일 열정적이세요. 오죽하면 제가 종종 ‘제발 애들 좀 그만 보내고 가시라’고까지 한다니까요. 이젠 60대가 된 제게도 여전히 ‘연습은 했냐’고 하시는 걸요. 사실 저희는 그걸 전수한 사람들이고, 한 명의 음악가는 그런 어마어마한 헌신과 희생이 따르지 않으면 나올 수가 없어요. 배운 대로 학생들에게 물려주는 거죠. 손민수 선생은… 어휴, 말도 마세요. 가끔은 꼭 러셀 셔먼이 살아 돌아오신 것 같다니까요! 동시에 세 한국인 교수의 접근 방법은 각양각색이기도 하죠. 이렇듯 NEC에서의 일상은 도저히 대충 지낼 수가 없어 무척 피곤하고(웃음), 동시에 매우 자랑스럽답니다!”
보스턴, 그 화제의 음악 현장에서
NEC가 위치한 미국 동부, 보스턴은 ‘교육의 도시’다. 보수적인 분위기지만 젊은 사람들의 거주 비율도 높다. 최근 NEC-하버드 대학 이중 학위 프로그램을 밟는 콩쿠르 스타들의 탄생으로 NEC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아졌다.
“이중 학위 과정은 총 5년으로, 하버드 대학에서 4년간 전공을 공부하며 NEC에서 레슨을 받고 하버드 대학 학사 학위 졸업 후, 다시 1년간 NEC에서 공부하여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형태입니다. 이미 국제 콩쿠르 출전할 수 있을 정도의 연주 실력을 갖춘 경우만 뽑기 때문에, 선발 인원이 많진 않아요.”
미국은 백혜선에게 교육의 현장이자, 주요 무대기도 하다. NEC 내에 있는 조던홀은 훌륭한 음향을 바탕으로, 공연장 자체로 보스턴 음악계의 중심이 될 만큼 활발히 공연이 열린다. 10월 3일에는 보스턴의 조던홀에서, 5일에는 뉴욕 더타운홀에서 특별한 연주회도 갖는다고.
“일제강점기, 뉴욕에서의 독립운동 거점에 ‘독립운동전시관’이 조성됐어요. 코로나로 인해 개관이 미뤄지다, 마침 올해 광복 80주년과 함께 개관하게 되어 이를 기념하며 음악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작곡가 김택수의 신작 칸타타 ‘아직 잔디는 자라고 있다(The Grass Still Grows)’가 무대에 오르고 뉴욕 클래시컬 플레이어스가 연주를 맡습니다. 저는 이 무대에서도 베토벤의 협주곡 5번을 연주할 예정이고요. 역사적인 음악회에 대한 기대가 크답니다.”
역사를 기억하며 무대에 오르다
10월 공연에 앞서 오는 9월, 백혜선은 안토니 헤르무스/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 내한 공연 협연자로 투어를 앞두고 있다. 7일 벨기에 현지에서 공연을 갖고, 24일부터 서울을 시작으로 지역 곳곳의 공연장을 찾을 예정. 벨기에는 백혜선에게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입상(3위)하기 전, 1991년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4위) 출전을 위해 방문했던 나라로 기억에 남아 있기도 하다.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가 열리면, 나라 전체에 잔치가 열린 듯해요. 프랑스와 네덜란드어를 모두 사용하는 나라인 만큼 유럽 내에서도 특별한 감성이 느껴지는 곳입니다. 결선 전에 참가자들은 한 주간 ‘뮤직 샤펠’에 머무는데, 세르게이 바바얀 등 주목받는 피아니스트들과 같이 지냈던 시간도 기억납니다. 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는 당시 콩쿠르의 연주를 전담하는 오케스트라였어요. 그게 벌써 30년도 더 전이네요. 치열했던 젊은 날에 대한 만감도 교차하는 공연이 될 것 같습니다.”
협연할 곡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2018년, 백혜선은 국내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협주곡 전곡 프로젝트를 진행한 바 있다. 세월이 흘러 다시 들여다본 베토벤의 음악은, 여전히 “까도 까도 까지는, 양파 같았다”고.
“악보를 보면 간단명료한데, 제대로 된 정신적 준비가 없다면 연주할수록 부끄러워지는 작품이에요. 영혼의 울림이 있어야 하죠. 처음에 베토벤의 음악을 배울 땐 많은 계획을 세우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법안에서 자유를 느끼게 됩니다. 익숙한 선율 속의 생동감을 찾는 작업이죠. 이성과 감성의 조화도 중요합니다. ‘붉은 머리와 하얀 피’라고도 말하는데, 즉 열정과 냉정이 모두 필요한 거죠.”
미국에서 제자 양성과 연주 일정으로 10월을 보내고, 11월에는 다시 한국을 찾아 독주회(11.11/마포아트센터)를 갖는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프로그램이다. 뉴욕에서의 독립운동전시관 기념음악회를 계기로, 국가보훈처로부터 올해 광복 80주년 홍보대사로의 활동을 요청 받았다. 지난 8월에 열린 부산콘서트홀에서의 독주회와 같은 프로그램으로 구상, 광복과 관련된 의미를 담아 직접 선정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3번 ‘고별’은 루돌프 대공의 이야기와 연관되어 있고, 버르토크 피아노 소나타 Sz.80은 자기 나라의 민속 음악을 반영했다는 점에서 선정했어요. 슈만은 언제나 마음의 고향처럼 클라라를 그리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그 감정이 잘 묻어나는 그의 ‘환상곡’ Op.17을 연주합니다. 서주리의 피아노 소나타 2번은 제가 2023년 의뢰를 한 작품이에요. ‘고향의 봄’을 주제로 하고 있는데, 마지막에 이 선율에 다다를 때면 눈물을 흘리는 분들도 많답니다. 광복을 기념하며 아름다움을 풍성히 느낄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글 허서현 기자 사진 H2아트앤컬쳐
백혜선(1965~)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러셀 셔먼·변화경의 지도를 받으며 졸업했다.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1위 없는 3위를 차지했고, 서울대(최연소)·클리블랜드 음대 교수를 역임했다. 2018년부터 NEC 교수로 재직했고, 2019년 대한민국 예술원 음악상을 받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안토니 헤르무스/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협연 백혜선)
9월 24일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 25일 안동예술의전당 | 26일 경기아트센터 27일 공주문예회관 | 28일 대구콘서트하우스
DMZ 오픈 페스티벌-윤한결/벨기에 국립 오케스트라(협연 백혜선)
9월 30일 오후 7시 30분 고양아람누리 아람음악당
모차르트 ‘티토 황제의 자비’ 서곡,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브람스 교향곡 1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