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LCOME 5
홍콩 발레 예술감독 셉팀 웨버
‘홍콩’에 바치는 한 편의 러브레터
16세기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이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한 발레로 재탄생하다
밤거리의 네온사인이 번지는 무대 위, 치파오를 입은 줄리엣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작패가 부딪히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펼쳐지는 무대는 전성기 홍콩 누아르 영화의 오프닝을 떠올리게 한다. 셰익스피어의 익숙한 비극은, 낯선 도시의 경관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홍콩 발레가 2021년 초연한 창작발레 ‘로미오+줄리엣’은 1960년대 홍콩을 배경으로, 도시의 역사와 정체성을 발레 언어로 풀어낸다. 줄리엣은 권위적인 상하이 출신 부호의 딸로, 로미오는 그와 적대 관계에 놓인 가문의 외아들로 재탄생했다. 두 사람의 사랑은 고전의 운명을 그대로 따라가지만, 그들이 마주하는 세계는 완전히 새로운 궤적을 그린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도 중심을 잡으며, 무용수들은 젊은 연인의 사랑과 상실감을 다채롭고 감각적으로 표현한다.
9월 26·27일 양일간 국립극장 해오름에서 공연되는 이번 작품은,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여가문화서비스부(LCSD)가 주최하는 국제 문화교류행사 ‘홍콩위크 2025 @서울’(9.26~10.25)의 개막 공연이자, 2025/26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의 일환이다. 발레단의 첫 내한을 앞두고, 이번 작품의 안무 및 연출을 맡은 예술감독 셉팀 웨버와 이야기를 나눴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홍콩의 역사와 만나면?

거리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신혼부부 ©Tony Luk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특정 시대와 문화 속으로 옮겼다.
1960년대 초반은 홍콩 사회에 큰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특히 상하이 출신의 이민자들이 대거 유입됐고, 제조업과 부동산을 중심으로 막대한 부가 창출됐다. 영화 산업도 활황을 맞으며 진정한 국제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여러 면에서 이 시기는 홍콩의 황금기였다. 불멸의 사랑 이야기를 펼치기에 완벽한 배경이라 생각했고, 여기에 홍콩만의 특별한 디테일을 담았다.
그 시대상이 등장인물과 드라마 전개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이번 프로덕션에는 구체적인 설정이 있다. 줄리엣의 아버지는 사회적 지위를 높이기 위해 딸을 부유한 서양인과 결혼시키려는 상하이계 거물로 설정했다. 티볼트는 ‘타이 포’라는 이름의 구룡성 삼합회 두목으로,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갇힌 줄리엣의 어머니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있다. 원작의 주요 줄거리는 그대로 유지하되, 세부 설정을 현대적으로 변형해 관객이 더 쉽게 공감하고 몰입할 수 있도록 했다.

리틀 막과 타이 포의 쿵후 대결 ©Tony Luk
안무를 구상할 때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무엇인가?
‘로미오+줄리엣’처럼 다층적인 작품일수록 무엇을 목표로 삼을지 분명해야 한다. 우선 무용수들이 기술적으로 도전할 수 있도록 고난도의 테크닉과 극적인 장면을 다수 포함했다. 또한, 홍콩의 문화적 DNA가 무대 전반에 스며들도록 수백 가지 복고적 요소를 작품에 녹여냈다. 마지막으로 관객이 이야기의 스케일에 압도되면서, 친근한 홍콩의 풍경과 감성에 매료될 수 있도록 작품의 속도를 빠르게 유지하며 장대한 서사로 구성했다.
이러한 홍콩의 시각적·문화적 정체성을 어떻게 무대에 옮겼나?
이 작품은 내가 홍콩에 와서 처음 제작한 오리지널 프로덕션이기에, ‘홍콩’이라는 도시에 바치는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팬데믹 기간에 제작해 리허설 시간이 상대적으로 여유로웠고, 덕분에 남성 무용수들이 6개월 동안 전통 쿵후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창작 과정에는 우연의 순간도 많았다. 마작 도박장에서 본 장면, 극장 앞 계단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커플, 단골 식당 엘리베이터에 그려진 홍콩 만화 ‘올드 마스터 Q(老夫子, Old Master Q)’ 같은 요소들이 그대로 무대에 반영됐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은 수많은 ‘로미오와 줄리엣’ 프로덕션에 사용됐다. 이번 해석은 어떤 점에서 달랐고, 음악과 안무의 시너지가 특히 돋보이는 장면이 있다면?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은 20세기 최고의 발레 음악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셰익스피어의 장황한 희곡을 명확한 구조로 압축해, 모든 안무가에게 사실상의 대본을 제공했다. 프로코피예프가 이미 성공의 절반을 마련해 둔 셈이었다. 이번 작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웅장한 음악을 충실히 따르며, 그 선율에서 영감을 받아 역동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동서양의 경계를 넘어 춤추다
1979년 창단된 홍콩 발레는 동서양을 아우르는 혁신적인 레퍼토리로 잘 알려져 있다. 예술감독으로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술적 가치는 무엇인가.
홍콩은 200년 가까이 동서 교류의 중심지였다. 명실상부한 국제도시로, 홍콩 발레 역시 그 특성을 반영했다. 다양한 국적의 무용수와 레퍼토리는 동서양의 감성과 이야기를 담고 있으며, 홍콩뿐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공연을 올리고 있다. 이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단 하나, 바로 ‘탁월함’이다.
아메리칸 레퍼토리 발레, 워싱턴 발레에서 오랜 기간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다. 다양한 국적과 배경을 지닌 무용수들과의 협업은 창작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홍콩, 서울, 뉴욕, 런던,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바나…. 어디에서 작업하든 스튜디오에서의 작업 과정은 같았다. 아름다움을 창조해 관객과 나누는 것. 우리는 열정과 헌신으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전 세계에서 쌓은 경험은 늘 나와 함께하며 홍콩 발레를 이끌고, 작품을 창작하고, 예술을 옹호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위대한 개츠비’ ‘해는 또다시 떠오른다’ 등 문학을 전막 발레로 구현해 호평받았다. 발레가 스토리텔링 매체가 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성공적인 발레가 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이야기에 분명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하며, 개성이 뚜렷한 주역 캐릭터를 통해 무용수들에게 다양한 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 서사가 본질적으로 ‘움직임’을 품고 있어 춤으로 자연스럽게 풀어낼 수 있어야 하고, 훌륭한 음악과 어우러져야 한다. 무엇보다 관객이 작품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작품과 연결될 때 진정한 의미가 생긴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시대를 초월하며 수많은 해석을 낳았다. 이번 작품에서 관객이 느꼈으면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비극의 핵심은 사회가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을 끝내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랑은 어떤 형태로든 존중받고, 지지받고, 소중히 여겨져야 한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프레스토컴퍼니·홍콩 발레
셉팁 웨버(1961~) 쿠바계 미국 출신의 안무가. 아메리칸 레퍼토리 발레(1993~1999) 및 워싱턴 발레(1999~2016) 예술감독으로 재직했다. 2017년 홍콩 발레 예술감독으로 취임 후, 홍콩을 배경으로 재해석한 ‘로미오+줄리엣’(2021), ‘호두까기 인형’(2021) 등을 선보였다. 2022년 ‘호두까기 인형’으로 홍콩댄스어워즈 최우수 안무상을 받았다.
PERFORMANCE INFORMATION
홍콩 발레 ‘로미오+줄리엣’
9월 26·27일 국립극장 해오름
PREVIEW
‘홍콩위크 2025 @서울’ 9.26~10.25
올가을, 서울이 홍콩 예술의 빛으로 물든다. 홍콩특별행정구 정부 레저문화서비스부(LCSD)가 주최하는 ‘홍콩위크 2025 @서울’은 홍콩의 예술을 세계에 알리고 문화예술 교류를 확대하기 위해 마련됐다. 음악·무용·시각예술·영화·패션 등 총 14개 프로그램을 통해 홍콩의 예술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소개한다.
홍콩위크는 지난 7월, ‘우관중: 흑과 백 사이’(7.25~ 10.19/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로 막을 올렸다. 홍콩예술박물관이 소장한 중국 현대미술 거장 우관중(吳冠中, 1919~2010)의 대표 수묵화와 함께, 홍콩 예술가 장한겸이 우관중의 작품 100여 점을 AI로 학습·분석해 구현한 설치작 ‘감성의 연못’을 선보이며 전통과 첨단을 잇는다.
공식 개막작은 홍콩 발레의 ‘로미오+줄리엣’(9.26· 27/국립극장 해오름)이다. 홍콩 발레 창단 이후 첫 내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어 홍콩무용단이 대형 창작무용극 ‘24절기’(10.18·19/국립국악원 예악당)를 선보인다. 자연의 순환과 인간의 리듬을 주제로 한 이 작품은 2024년 홍콩댄스어워즈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은 화제작으로 기대를 모은다. 라보라 테리 아츠는 ‘파지옥’ 한국 편(10.17~19/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을, 시티 컨템퍼러리 댄스 컴퍼니(CCDC)는 ‘미스터 블랭크 2.0’(10.24·25/강동아트센터 대극장 한강)으로 홍콩 현대무용의 현재를 보여준다.
클래식 음악 무대도 풍성하다. 먼저, 옌후이창이 이끄는 홍콩 차이니즈 오케스트라(10.11/롯데콘서트홀)가 소리꾼 김수인, 오르가니스트 박준호, 생황 연주자 천이웨이와 함께 한국과 홍콩의 전통음악을 잇는 협연 무대를 꾸민다. 홍콩 필하모닉(10.19/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은 리오 쿠오크만의 지휘로 피아니스트 선우예권과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진은숙의 ‘수비토 콘 포르차’ 등을 연주하며, 윌슨 응이 창단한 아시안 현대 심포니 오케스트라(10.23/부천아트센터 콘서트홀)는 홍콩 피아니스트 황자정과 라벨 피아노 협주곡 등을 선보인다.
이 외에도 서울 도심 곳곳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진다. 홍콩 만화 문화전(9.26~10.9/스타필드 하남 1층), 서울·홍콩 패션쇼×패션 전시회(9.27~10.11/성수 세원정밀), ‘꿈의 정원: 콘서트와 영화’(10.11/난지한강공원 젊음의 광장), ‘홍콩 영화의 새로운 물결’(10.17~20/씨네큐브 서울 광화문) 등이 관객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