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체코 필하모닉 & 상임지휘자 겸 음악감독
세묜 비치코프
2025년 10월, 130번째 시즌을 맞이한 체코 필하모닉이 세계적 거장 세묜 비치코프와 함께 다시 한번 한국을 찾는다. 팬데믹 종식 후, 수많은 해외 악단들이 내한했던 2023년에 “오케스트라 대전의 진정한 승자”라는 찬사를 받았던 체코 필하모닉은 올해 더욱 깊어진 예술적 통찰과 전통의 울림으로 관객과 다시 마주한다
총괄 홍예원 기자
INTERVIEW 세묜 비치코프 _송현민
HISTORY 민족과 자유의 소리에서 세계와 화합의 소리로 _송주호
DISCOGRAPHY 체코 필하모닉, 전통과 현대를 잇다 _박제성
01 INTERVIEW
음악의 심장에 손을 얹다
체코의 ‘필(Feel)’로 쓰는 시대의 서곡
1950년대생 지휘자 중 세묜 비치코프(1952~)는 켄트 나가노(1951~), 리카르도 샤이(1953~), 발레리 게르기예프(1953~), 사이먼 래틀(1955~)의 유명세에 비해 다소 저평가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한국과 진하게 얽힐 음악적 사건이 없었던 게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팬데믹 종식 후 2023년 체코필과 함께 내한했던 공연은 ‘그들만의 드보르자크’를 챙겨와 ‘우리의 드보르자크’로 만들어내는 마법 같은 순간이었다. 비치코프의 매력과 체코필의 마력에 빠져들었던 10월의 가을날. 그 마법의 순간이 올해의 10월에도 펼쳐진다. 그들의 사운드로 체코-비치코프-체코필의 매력에 진하게 얽힐 시간이다.
고국의 젊은 영웅에서 망명의 지휘자로
세묜 비치코프는 1952년 구소련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5살이 되던 해에 레닌그라드의 명문 글린카합창단학교에 입학한 그는 10여 년 동안 합창은 물론 피아노와 이론 교육을 받으며 기초를 닦았다. 단순한 배움의 시간이라기보다 호흡을 맞추며 ‘하모니’의 감각을 체득한 시기였다. 17살 무렵에는 러시아 지휘계의 거장 일리야 무신(1903~1999)의 제자로 발탁되어 레닌그라드 음악원(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음악원)에 입학했다.
1973년, 21살의 비치코프는 라흐마니노프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라흐마니노프 탄생 100주년을 맞아 국가적으로 치른 행사였으니 영광과 영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부상으로 므라빈스키가 이끌던 레닌그라드 필하모닉을 지휘할 기회가 주어졌다. 하지만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려 한 비치코프는 출국 비자를 신청했다는 이유로 모든 영예를 박탈당했다. 구소련이 ‘철의 장막’으로 불리던 때였다. 이는 예술과 자유를 둘러싼 모순된 현실을 뼈저리게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결국 1974년 그는 진정한 자유를 찾고자 조국을 떠났다. 손에 들린 100달러가 전부였다. 빈으로 향하는 기차에서 그의 마음은 불안과 설렘, 두 감정이 교차했다.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비치코프는 뉴욕 매네스 음악대학에서 공부했다. 학내의 아카데믹한 공기 속에서 그는 서구의 연주 문화와 인적 네트워크를 익혔고, 줄리어스 루델 등과의 인연을 통해 무대에 오를 기회를 확장했다. 이후 그랜드 래피즈 심포니(1980~85), 버펄로 필하모닉(1985~89) 등 미국의 중소도시 악단의 음악감독 경험을 통해 그는 지휘자로서의 리더십을 단련했다. ‘작은 공동체’의 심장을 박동시키는 법을 체득하던 때였다. 이후 1989~98년에 파리 오케스트라, 1997~2010년 쾰른 WDR 심포니(서부독일 방송교향악단)를 이끌었다. 유럽으로의 복귀는 더 큰 스케일의 시험이었다. 악단마다 고유한 음색을 끌어내는 능력이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특히 파리에선 프랑스 음악의 우아함과 투명한 질감을, 쾰른에선 구조적 엄밀성을 동시에 길러냈다. 그는 어느 한 전통에 갇히지 않는 지휘자였다.
어느 지휘자와의 어긋남이 체코필과의 끈끈한 인연의 아교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2013년의 대타로 포디엄에 오른 그와 체코필 사이에서는 진한 전류가 흘렀다. 그러고 나서 2018/19 시즌 이후의 음악감독 취임으로 둘의 인연은 정식으로 맺어졌다. 프라하 루돌피눔에서 체코필의 어느 수석이 “당신은 우리 안의 최선을 이끌어낸다. 우리에게 ‘아빠’가 되어 달라”라고 말한 일화는 단순한 미담이 아닌 상호 신뢰의 선언이었다.
‘나의 조국’(스메타나)으로 초대
그 신뢰 위에서 비치코프는 체코필의 역사적 자원을 현대적 감수성으로 재해석하는 대담한 프로젝트들을 밀어붙였다. 드보르자크·스메타나·야나체크와 같은 체코의 핵심 레퍼토리를 재조명하고, 말러 사이클 같은 대형 프로젝트에도 과감히 손을 대었다.
2024년은 비치코프와 체코필에게 잊지 못할 해였다. 10년마다 열리는 ‘체코 음악의 해’는 연도 끝자리가 ‘4’로 끝나는 해에 돌아온다. 1924년 스메타나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시작된 전통으로, 체코 음악사를 빛낸 음악가들의 출생과 서거 연도가 유난히 ‘4’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스메타나(1824~1884), 레오시 야나체크(1854~1928), 안토닌 드보르자크(1841~1904) 등이 그러하다. 2024년은 이 기념비적인 축제가 100주년을 맞은 시간.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비치코프는 통증을 이겨 내며 체코필과 북미 투어에 나섰다.
2025년 비치코프/체코필은 10월, 한국에서 두 차례 공연을 선보인다. 28일(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 스메타나 ‘나의 조국’을, 29일(롯데콘서트홀)에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협연 한재민)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선보인다. 다음은 그와 나눈 일문일답.
2023년 체코필과 내한이 당신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드보르자크의 ‘사육제 서곡’, 피아노 협주곡(협연 후지타 마오), 교향곡 7번과 같이 올 ‘드보르자크’의 작품들로만 선보였다. 당시 한국 관객들로부터 받았던 인상이 궁금하다.
따뜻하고 집중력 높은 관객들로 기억된다. 서울의 거리마다 젊은이들이 가득했고, 그들에게 나오는 에너지가 굉장했다. 연주회장에서 만난 관객들에게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 한국에 속히 가서 관객 여러분을 다시 만날 생각에 매우 기대가 크다.
10월 28일 공연은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만 연주한다. 단 하나의 곡으로 채운 셈이다.
먼저 10월 28일은 체코가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1918)한 기념일이다. 우연치고는 너무나 상징적이라 ‘운명의 장난’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프로그램을 구성하거나 연주 날짜를 정할 때만 해도 아무도 그것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래서 더 의미 있는 것 같다. ‘나의 조국’은 체코의 운명을 담은 상징적인 작품이다. 스메타나가 살았던 시대에 체코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은 문화적 뿌리, 언어, 정체성을 지키고자 모든 방법을 생각했을 것이다. 이 곡에는 그러한 민족적 정서가 담겨 있다. 비록 나는 체코에서 태어나진 않았지만, 자유를 그리워해 본 경험이 있는 한 사람으로서 전적으로 그에게 공감한다.
당신에게 스메타나는 어떤 작곡가인가?
그는 바그너(1813~1883)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과 한 지평선에 있으면서도 체코의 음악적 전통을 잃지 않으려 했던 예술가다. 다른 문화와 호흡하면서도 자기만의 정체성을 지키려면 문화적 정신력이 얼마나 강해야 했을까? 6개의 악장으로 된 ‘나의 조국’ 중 4개 악장은 청력을 상실한 채 작곡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그를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음악이란 소리를 통해서만 생명을 얻는 예술이다. 하지만 전혀 들을 수 없었다는 사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상상해 보라. 그는 도대체 어떻게 작곡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가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일지도 모른다. 베토벤이 썼던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스메타나도 자신을 위해 쓸 수도 있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점에서 내게는 두 사람이 더욱 가깝게 느껴진다.
한국도 지난 8월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와 조국에 대한 깊이 있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 곡을 연주할 때마다 ‘조국’에 대한 의미가 다르게 다가올 것 같다.
‘나의 조국(Má vlast)’은 물론 ‘My Homeland’(영어) ‘Mein Vaterland’(독일어) ‘Patria mia’(이탈리아어) ‘Ma Patrie’(프랑스어) ‘Rodina’(러시아어) 등 우리는 모두 각자의 ‘조국’을 갖고 있다. 그 이름은 달라도 느끼는 감정은 같다. 뿌리와 소속감에서 오는 정체성과 살아가며 받아들여야 하는 역사 속의 아픔 같은 것들. 첫 번째 ‘나의 조국’은 태생지인 러시아, 두 번째 ‘나의 조국’은 이민 후에 정착한 미국이다. 그리고 인생의 절반 가까이 살고 있는 프랑스 역시 ‘마 파트리(Ma Patrie=나의 조국)’다. 각 나라는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으며, 이러한 것들이 국경을 넘어 공존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스메타나의 음악은 우리에게 그 길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의 조국’은 시대를 초월해 울림을 주는, 보편적이면서도 동시대적인 작품이라 생각한다.
뿌리(드보르자크)와 확장(차이콥스키)과 함께
추억해 보면 체코필이 한반도의 땅을 밟을 때마다 전면에는 ‘드보르자크’를 내세웠다. 연도의 뒤가 ‘4’로 끝나는 2014년 5월 ‘체코 음악의 해’를 기념하고자 이르지 벨로흘라베크(1946~2017/2012~2017년 재직)와 내한한 체코필은 교향곡 6번을, 2017년 9월 페트르 알트리히터(1951~)와 함께 내한한 9월의 두 공연에서는 첼로 협주곡(협연 이상 앤더슨), 교향곡 8번과 9번을 선보였다. 2023년 비치코프는 ‘올 드보르자크’를 꾸려와 국내서 실연으로 접하기 힘든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을 선사하기도 했다.
다가오는 10월 이튿날의 공연에는 드보르자크의 첼로 협주곡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을 선보인다. 특히 2015~2019년에 체코필 상주홀 루돌피눔(드보르자크홀)에서의 실황으로 담아온 차이콥스키 전곡 음반(Decca) 프로젝트는 그들의 결실 중 하나다.
‘나의 조국’(10월 28일)으로 문을 열고 29일 공연에서는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협연 한재민)을 선보인다. 드보르자크는 어떤 작곡가라 생각하는가?
스메타나나 드보르자크 음악의 뿌리가 체코의 민속음악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수천 년 전 인류가 동굴에서 생활하던 때도 노래와 춤이 있었고, 악기라고 부르기 어려운 도구들을 두드려 음악을 발전시켰다. 인간은 이미 어떤 방식으로든 노래하고 있었고, 그로부터 민속음악이 시작된 것이다. 스메타나나 드보르자크는 매우 정교한 방식으로 작곡했지만, 그 뿌리는 여전히 그들의 민속음악에 있다.
‘차이콥스키’는 당신에게 어떤 작곡가인가?
열두 살 무렵, 구소련 레닌그라드 시절에 차이콥스키의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을 보았다. 아주 강렬했다. 당장 중고 악보를 샀고, 가족이 잠든 뒤 좁은 공용 아파트 부엌 한편에서 악보를 펼쳐놓고 지휘를 흉내 내던 밤이었다. 모든 첫사랑이 그러하듯, 이 사랑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연주할수록 ‘차이콥스키와 그의 음악은 하나였다’는 사실을 깨닫곤 한다. 그는 진실되고, 삶을 사랑하는 기쁨을 알았으며, 동시에 의심과 번민에 시달렸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음악에 고스란히 묻어난다. 이렇듯 거짓 없이 자신의 진심을 음악에 담았기에, 그의 음악은 오늘날까지도 국경을 넘어 전 세계인들의 마음을 울릴 수 있을 것이다. 차이콥스키는 러시아 동료들로부터 ‘러시아적이지 않다’라고, 서구에서는 ‘너무 러시아적이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표트르 대제의 서구 개방 정책과 전통을 지키고 싶어했던 민족 사이의 ‘내적 갈등’이 있던 시대에 차이콥스키는 이러한 갈등을 예술가로서의 전문성으로 뛰어넘은 사람이었다.
차이콥스키 프로젝트는 당신과 체코필의 위력을 보여준 중요한 산물이다. 어떤 계기로 시작하게 되었나?
이 프로젝트는 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한 페이지다. 2013년, 예정된 지휘자가 급작스레 취소하는 바람에 체코필의 급한 요청을 받고 프라하에서 함께 했다. 그런데 그후 체코필에서 전곡 녹음 의사를 물었고, 나는 30초 만에 승낙했다. 체코필과 함께한다면 새로운 해석과 표현이 가능할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체코필은 슬라브 문화가 녹아있는 악단이자, 서구의 문화와 전통에도 속하는 악단이라 이러한 요소들이 흥미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5년에 시작해 2019년까지 전곡 녹음을 이어갔다. 나에게, 악단에게 매우 중요한 경험이었다.
이번 내한 공연에서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6곡 중 교향곡 5번을 선곡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유는 간단하다. 체코에서 다양한 작품을 연주하는데, 그럴 때마다 악단의 강점을 드러내는 작품을 선곡해야 한다. 그때마다 교향곡 5번은 체코필의 면모를 잘 드러내는 무기 중 하나다.
러시아와 체코는 20세기 역사에서 닮은 점이 있다. 동유럽권의 예술적 정서, 20세기에 체험한 사회주의, 작곡가들이 작품에 담아내고자 했던 민족적 정서 등. 양국의 문화와 예술에서 어떤 ‘공통점’과 ‘차이’가 있는지 말해 달라.
역사적 운명과 규모는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러시아는 13~15세기에 몽골의 지배 아래 있었고, 이는 민족의 문화적 DNA에도 영향을 미쳤다.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체코도 1918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제1공화국이 만들어져 자유를 누렸지만, 제2차 세계대전 발발로 나치 독일에 점령되었고 전후에는 소련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1989년 벨벳 혁명으로 다시 민주화가 돌아왔다. 사회의 변화는 예술에도 영향을 미친다. 러시아의 작가 솔제니친(1918~2008), 체코의 작가 바츨라프 하벨(1936~) 같은 이들은 민족의 정서와 영혼을 반영한 글을 썼다. 러시아에 쇼스타코비치(1906~1975)가 있었다면 체코에는 미로슬라프 카벨라치(1908~1979)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예술은 역사와 삶과 무관하지 않다. 두 나라는 그런 시대를 예술에 담았다는 점에서 서로 닮았다.
엔진(오페라)이 되고 새로움(말러)을 향하며
2018년은 체코 독립 기념 100주년이던 해였다. 그해 10월 올 체코 프로그램으로 독립 100주년 공연을 치른 그는 첫 정기연주회인 10월 10일 말러의 ‘부활’(교향곡 2번)로 악단 내 오랫동안 묻혀 있던 말러의 불씨를 끄집어냈다. 이 불씨는 바츨라프 노이만이 상임 재직기(1968~1989)에 남긴 말러 전곡(1976~1982년 녹음)의 역사를 들추었고, 상임 카렐 안체를(1950~1968년 재직), 즈데넥 마칼(2003~2007년 재직)이 부분적으로 남긴 말러의 기록들을 상기시켰다.
비치코프로 인해 체코필과 말러의 간극이 좁혀짐과 동시에, 유럽 명문 오페라극장에는 그의 이름이 자주 올랐다. 바이로이트(2018)의 ‘파르지팔’, 빈 슈타츠오퍼(2020)와 파리 오페라(2022)의 ‘엘렉트라’, 프라하 국립극장(2022)과 로열 오페라(2023)의 ‘루살카’, 바이로이트(2024)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이 그의 지휘로 완성한 종합예술의 거탑이다.
오페라야말로 각 민족의 신화나 전설 등을 소재로 했기에 민족의 분위기가 가장 짙은 예술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오페라를 지휘할 때와 교향곡, 협주곡을 지휘할 때 어떤 차이를 느끼며, 오페라 지휘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오페라는 복합적인 장르로 음악이자 연극이며, 시각예술이기도 하다. 언어로 진행되기에 교향곡 지휘와 단순하게 비교하기는 어렵다. 오페라가 매력적인 이유는 언어와 이야기가 담겼기 때문이다. 다른 언어로 번역되더라도 서사와 주인공들의 성격은 변치 않는다. 그리고 오케스트라는 성악가들을 반주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이끌어 가기도 해야하기에 지휘자란 엔진과 같다. 오페라를 지휘할 때 등장인물들과 나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을 상상하며 지휘한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2024)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지휘할 때 어떤 순간에는 내가 트리스탄이 되어야 하고, 이졸데, 쿠르베날, 브랑게네, 마르케 왕이 되어야 할 때도 있다. 인물의 행동, 그들이 누구이고 자신을 어떻게, 왜 표현하는지에 대해 공감해야 한다.
2022년부터 체코필과 말러 교향곡도 녹음 중이다. 왜 ‘말러’를 택했는지 궁금하다.
1970~80년대에 체코필은 상임지휘자 바츨라프 노이만과 함께 전곡(1~9번) 녹음을 진행했지만, 오래되어 잊혀진지 오래고, 당시 함께 했던 단원은 현재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말러가 체코필, 체코의 관객, 체코라는 공동체에서 보여주는 의미다. 많은 이들이 말러를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알고 있다. 빈에서 중요한 창작기를 보냈고, 이전에는 함부르크 오페라에서 지휘했기 때문인데, 사실 그가 체코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즉 그의 뿌리는 체코에 있다. 젊은 나이에 고국을 떠났더라도, 태생지와 분위기는 평생에 영향을 끼치는 어떤 조건을 형성한다. 그래서 말러는 체코 문화와 거리가 멀고 낯선 작곡가가 아닌 ‘우리 사람’이다.
2018년 당신과 체코필의 첫 만남에도 말러가 있었다. 악단에 스며있는 몇십 년 전의 연주와 녹음의 경험을 다시 끄집어내는 데에는 남다른 준비가 필요했을 것 같은데.
2018년 취임 후 말러 전곡 녹음을 결정했을 때, 체코필이 말러에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체코필이 상주하는 루돌피눔홀은 규모가 작기에 말러가 요구했던 연주 인원을 수용하기에는 다소 무리였다. 그래서 무대를 확장했고, 이것이 음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궁금했다. 그런데 루돌피눔의 음향은 예전만큼이나 훌륭하고, 체코필은 말러의 언어를 자연스레 표현했고, 심지어 말러의 음악을 자기 집처럼 편안하게 느꼈다. 전곡 녹음을 마쳤고, 2026년 봄에 발매를 앞두고 있다.
말러는 유대인이었지만, 반유대주의적 분위기에서 빈 슈타츠오퍼의 감독직을 얻기 위해 불가피한 선택으로 개종까지 했다. 당신도 러시아에서 유대인으로 성장했지만, 이로 인한 인생의 아픔이 있다. 그런 점에서 말러의 인생과 삶을 바라볼 적에 어떤 생각이 드나?
말러(1860~1911)는 자신이 세 번 배척당했다고 말했다. 독일인들 사이에선 체코인으로서,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선 독일인으로, 그리고 온 세상에서는 유대인으로서 배척을 당했다고. 이는 말러가 자신의 위치를 어떻게 보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고백이다. 그가 가톨릭으로 개종(1897)했다는 사실에 대해 많은 사람이 빈 극장의 감독으로 임명되고자 내린 기회주의적 결정이었다고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보진 않는다. 그는 진정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서신들, 교향곡과 가곡을 위해 선택한 텍스트 등은 그가 지녔던 근본적인 신앙심을 보여주며, 유대인으로 존재하고 유대인으로 느끼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 예수가 유대인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나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유대인들이 회당에 가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그 이유로 처벌까지 받던 때였으니 미국에 가기 전까지 회당에 가 본 적도 없다. 나는 말러의 경험과 반유대주의 문제에 깊이 공감한다. 반유대주의는 불합리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분명히 존재한다.
체코필의 도시 프라하는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예술의 도시다. 끝으로 체코필의 지휘자로서 체코의 음악유산과 음악 문화를 느껴보기에 좋은 명소를 추천한다면?
프라하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담겨 있다. 말러의 교향곡 7번과 드보르자크의 ‘성서의 노래’가 초연된 루돌피눔, 모차르트가 직접 지휘한 오페라 ‘돈 조반니’와 ‘티토 황제의 자비’가 초연된 에스테이트 극장도 놓칠 수 없다. 블타바 강변을 거닐거나, ‘나의 조국’ 중 제1곡(비셰흐라드)에 등장하는 비셰흐라드 요새에서 전경을 바라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다. 체코의 음악 유산과 연결된 아름다운 장소들은 얼마든지 많다. 체코필은 스메타나의 고향 리토미슐에서 열리는 음악축제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며, 말러와 모차르트 등의 예술가들이 다녀간 올로모우츠 지역도 아름답다. 체코 서부의 아름다운 온천 도시들은 베토벤이 요양을 위해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글 송현민(음악평론가) 사진 인아츠프로덕션
세묜 비치코프(1952~)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음악원(일리야 무신 사사), 미국 매네스 음악대학에서 수학했다. 1985년 베를린필에 데뷔했고, 미국 랜드 래피즈 심포니(1980~1985), 버펄로필(1985~1989), 파리 오케스트라(1989~1998), 쾰른 WDR 심포니(1997~2010)를 거쳐 2018년부터 체코 필하모닉을 이끌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세묜 비치코프/체코 필하모닉
10월 28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스메타나 ‘나의 조국’
10월 29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드보르자크 첼로 협주곡(협연 한재민), 차이콥스키 교향곡 5번
아시아 투어
14일 타이페이 국립콘서트홀
19일 오사카 심포니홀(협연 조성진)
20일 도쿄 NHK홀 21일 도쿄 분쿄 시빅홀(협연 조성진)
22일 도쿄 산토리홀(협연 조성진)
23일 도쿄 산토리홀
25일 사이타마 도코로자와 시민문화센터 뮤즈
02 HISTORY
베드르지흐 스메타나(1824~1884)는 오페라 ‘팔려간 신부’와 교향시 ‘나의 조국’에 민족의 언어와 정서를 음악 속에 심어 넣으며, ‘체코 음악의 아버지’로 불린다. 스메타나가 확립한 체코 음악의 전통과 정신은 체코필의 정체성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체코 필하모닉의 130년 역사
민족과 자유의 소리에서 세계와 화합의 소리로
혁명과 전쟁, 망명과 귀환 속에서 지켜온 체코 필하모닉의 역사와 힘
1896~ 민족 음악을 꿈꾸며 시작하다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체코 작곡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는 체코어 오페라를 만들며 민족 음악을 이끌었다. 그는 교향시 연작 ‘나의 조국’을 작곡하며 관현악 연주회도 활성화되길 바랐으나 그 꿈을 이루지 못했다. 이러한 스메타나의 열망은 그의 사후인 1896년 1월 4일 오후 7시 30분, 루돌피눔 콘서트홀에서 ‘체코 필하모닉’의 역사적인 첫 연주회가 열리면서 실현되었다. 지휘는 뉴욕 국립 음악원 원장으로 국위선양을 하고 귀국한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맡았으며, 프로그램도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를 비롯한 드보르자크의 작품으로 꾸몄다. 사실 ‘체코 필하모닉’(이하 체코필)은 프라하 국립극장의 오페라 오케스트라가 관현악 음악회를 열 때 사용하는 이름이었지만, 관현악 연주회를 정례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체코필은 매년 국내외에서 최소 네 차례 이상 관현악 연주회를 개최했다. 그러다 1901년 2월 국립극장에 맞서 파업을 벌인 단원들이 해고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해고자들은 체코필을 자립형 교향악단으로 전환했으며, 루드비크 첼란스키(1870~1931)를 초대 수석지휘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민간 악단은 예나 지금이나 운영이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 투쟁한다는 정신으로 여러 도시에서 끊임없이 연주했다.
스미호프 양조장에서도 정기적으로 음악회를 열었으며, 12월 8일 이곳에서 스메타나의 ‘나의 조국’ 전곡을 연주했다. 체코필은 창단한 해 12월에 오스카 네드발의 지휘로 빈에서 첫 외국 순방 연주회를 가졌고, 이듬해 5~6월에는 영국에서도 수차례 공연을 열었다. 사실 영국에서의 성공은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었던 체코 바이올리니스트 얀 쿠벨리크가 함께 하면서 ‘쿠벨리크 보헤미안 오케스트라’라는 이름으로 공연한 것도 적잖이 한몫했다.
영국 공연 이전에 사임한 첼란스키를 뒤이어 1903년 1월에 빌렘 제마네크(1875~1922)가 수석지휘자가 되었다. 그는 야나체크(1854~1928)·수크(1874~1935)·노바크(1921~1984) 등 체코 작곡가들의 작품들을 초연하면서 여러 나라의 작곡가들로 레퍼토리를 확대했다. 보헤미아 출신인 구스타프 말러가 체코필과 자신의 교향곡 7번을 초연한 것은 이러한 확장의 결과였다. 수익을 위해 레스토랑 공연도 지속했으며, 1904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 1905년과 1909년 여름의 바르샤바 투어 등 제마네크는 기획력과 조직력을 발휘했다. 그 덕에 체코필은 재정적 안정을 찾았지만, 제마네크의 권위주의적 리더십과 강한 규율에 지친 단원들은 1918년에 그를 해임했다.
1918~ 독립, 그리고 나치 점령기
이듬해에 바츨라프 탈리히(1883~1961)가 수석지휘자로 선임되었다. 그는 이전에 체코슬로바키아가 독립국으로 선포되고 이틀 후인 1918년 10월 30일에 수크의 교향시 ‘성숙’을 성공적으로 초연하면서 새로운 나라의 새로운 지휘자로 주목을 받았다. 그는 개성과 즉흥성, 적절한 음색의 균형, 작곡가의 의도 등을 강조하여 개별적인 음악성과 전체적인 체계를 고루 갖추게 했다. 특히 사회적 역할에도 관심을 가졌다. 노동자, 청소년, 다양한 단체들을 위한 콘서트도 개최했고, 1923년에는 적대적 정서를 가졌던 러시아·오스트리아·독일인 단원들을 위해 자선 음악회도 열었다. 세상의 분열이 커지던 때에 “정치가 결코 바꿀 수 없는 다른 민족의 고통과 더불어 인류의 단결”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음악의 5월’이라는 음악제도 열었다.
하지만 나치 점령기(1939~1945)에 예술가들은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어떤 때보다도 ‘나의 조국’을 자주 연주한 시기이기도 했다. 심지어 금지곡 목록에 올랐음에도 1941년 2월에 요제프 괴벨스가 마련한 베를린과 드레스덴 공연에서 탈리히와 체코필은 ‘나의 조국’ 전곡을 연주했다!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는 용감하고 과감한 시도는 큰 성공을 거뒀고, 금지곡에서 해제되는 결과를 이끌어냈다. 하지만 히틀러의 55회 생일 기념 연주회를 갖는 등 나치를 위해 연주해야만 했다.
1941년 가을에 얀 쿠벨리크의 아들인 라파엘 쿠벨리크(1914~1996)가 새로운 수석지휘자로 임명되었다. 1934년 1월에 19세의 나이로 체코필을 지휘한 적이 있었던 그는 체코의 민족적 작품들을 자주 연주했지만, 1945년 종전 후에는 세계 여러 나라 작곡가의 작품으로 확대하면서 다양성을 확보했다. 그 해에 체코필은 국립 단체가 되어 활동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고, 이듬해에 ‘음악의 5월’을 이어받아 ‘프라하의 봄 국제 음악제’를 창설했다. 하지만 1948년 7월 쿠벨리크는 공산화된 고국을 떠나 망명하면서 수석지휘자는 다시 공석이 되었다.
1949~ 불안정한 역사의 한 페이지
이러한 불안한 상황은 야망을 품은 자에게 기회가 된다. 쿠벨리크가 떠나기 직전에 지휘를 시작한 비올리스트 단원 바츨라프 노이만(1920~1995)이 한 시즌을 이끌어 지휘자의 자질을 검증했다. 하지만 1949년 5월, 수석지휘자 자리는 1922년부터 지휘를 해왔던 베이시스트 카렐 셰이나의 차지가 되었다. 그는 새로 들어선 공산 정권의 정치적 영향으로 뜻을 펼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단원들이 참기 어려운 만행이 벌어졌다. 1950년 10월에 정부가 단원들의 의견 청취 없이 카렐 안체를(1908~1973)을 수석지휘자로 임명한 것이다. 연주자들은 그를 정치적 침입자로 여겼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고자 공개적으로 저주하고 조롱하기도 했다. 안체를은 침착하게 인내하면서 오직 음악적 질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마르티누 등 20세기 체코 작곡가들과 동구권 및 소련 작곡가들의 작품을 레퍼토리로 삼았다. 결국 안체를은 체코필에 큰 국제적 명성을 안겨다 주었고, 유럽뿐만 아니라 미주와 호주, 중국 등 투어의 범위를 확대했다. 하지만 그 역시 1968년 8월 소련의 침략에 항의하며 망명길에 올랐다.
노이만은 또다시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12월에 수석지휘자로서 첫 무대에 올랐다. 드보르자크·마르티누 등 주요 체코 작곡가뿐만 아니라 베토벤·말러 등의 고전, 그리고 20세기 작품으로 레퍼토리의 폭을 넓혔다. 또한 ‘수프라폰’ 레이블에서 음반을 내면서 체코의 음악 대사로서의 면모를 공고히 했고, 1970년대에는 TV 프로그램 ‘체코 필하모닉과의 공연 및 대담’으로 대중의 인기도 얻었다. 예술의 사회적 책무도 외면하지 않았다. 1969년 1월에 대학생 얀 팔라흐가 소련에 항거하며 분신하자, 4월에 추모 음악회를 열어 드보르자크 ‘슬픈 성모’를 연주했다. 그리고 1989년 10월 정부가 약속한 인권과 시민권의 이행을 촉구하는 ‘헌장77’ 서명자들에 대한 정권의 박해에 항의하며 방송사와의 협력을 중단했다. 관현악단 단원들도 그 뜻에 동참하여 각계 사회 운동가들의 연설과 함께 연주회를 열었고, 12월 14일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연주로 체코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이때 ‘헌장77’의 주도자인 바츨라프 하벨이 무대에 올라 갈채를 받았다.
1990~ 자유 속 체코필만의 사운드를 찾아
그리고 40여 년간 망명 생활 중이었던 쿠벨리크가 돌아왔다! 그는 1990년 5월 ‘프라하의 봄’ 개막 공연의 포디움에 올라 ‘나의 조국’을 연주하여 프라하 시민들에게 뭉클한 감동을 주었다. 체코필은 그에게 9월에 임기가 종료될 노이만에 이어 수석지휘자를 제안했다. 하지만 그는 심한 관절염으로 지휘를 많이 하지 못했고, 제의 또한 고사했다. 이후 혼란의 시기가 시작됐다. 이르지 벨로흘라베크(1946~2017)·게르트 알브레히트·블라디미르 발레크는 모두 2년 만에 사임했다. 그래도 벨로흘라베크와 알브레히트는 1996년 체코필 100주년 기념연주회에서 지휘를 나눠 맡으며 그 이름을 역사에 각인했다.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는 1998년부터 미국과 아시아 투어를 이끌며 5년 동안 자리를 지켰지만, 2003년부터 맡은 즈데네크 마칼은 활발한 녹음 활동을 뒤로하고 4년 만에 내려왔다. 2009년에 자리를 이어받은 엘리아후 인발은 전설적인 말러 교향곡 녹음을 남기고 3년 만에 사임했다. 이 시기에 야나체크·드보르자크 등 체코 작곡가의 오페라를 녹음하고 영국에서 여러 음악회를 이끌며 이 악단의 위상을 재각인시킨 찰스 매커라스의 공도 빼놓을 수 없다.
2012년 10월, 다시 돌아온 벨로흘라베크는 갈피를 잡지 못했던 체코필을 안정시켰다. 드보르자크의 교향곡 전곡 녹음으로 체코필 고유의 음향을 만들었고, 세계 주요 공연장을 투어하며 그 독특한 음향을 널리 알렸다. 하지만 그는 5년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추모 음악회에서는 드보르자크 ‘스타바트 마테르’가 연주되었다.
2018년, 새로운 수석지휘자로 세묜 비치코프가 임명되었다. 그는 2013년 2월에 체코필을 처음 지휘한 이후, 차이콥스키 교향곡 전곡을 녹음했다. 그는 러시아인이지만, 체코필 고유의 프로그램과 음향을 존중하며, 이를 장점으로 부각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렇기에 ‘나의 조국’으로 꾸며진 이번 내한 공연이 매우 기대된다. 지난해 스메타나 탄생 200주년 기념으로 이 곡을 녹음했으니, 모든 단원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번 시즌부터 시작한 상주작곡가에 브라이스 데스너(1976~)를 선임한 것 또한 악단에 신선한 자극이 될 것이다. 비치코프는 2028년까지 계약이 연장되었으며, 2028/29 시즌부터는 체코 출신의 야쿠프 흐루샤가 그 뒤를 이을 예정이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체코 필하모닉 아카이브
03 DISCOGRAPHY
체코 필하모닉, 전통과 현대를 잇다
세묜 비치코프와 함께 써 내려가는 새로운 황금기의 음반들
2024년 그라모폰 어워즈에서 ‘올해의 오케스트라’로 선정된 체코 필하모닉. 그 배경에는 역대 체코 출신 상임지휘자들이 지켜온 명예와 전통이 큰 힘이 되었겠지만, 2015년 ‘올해의 지휘자’를 수상한 세묜 비치코프가 2018/19 시즌부터 음악감독을 맡으며 만들어 낸, 작지만 강력한 변화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진정한 마에스트로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인물이다.
비치코프는 빈 필하모닉과의 슈미트 교향곡 2번(Sony) 녹음이나 2016년 여름음악회에서 보여준 특유의 절제감과 고유의 탐미성을 고스란히 간직하며, 오케스트라의 일체감과 음향을 한층 현대적인 단계로 이끌어 올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체코 필하모닉(이하 체코필)이 2027/28 시즌까지 그와의 계약을 유지하므로, 현재 진행 중인 말러와 드보르자크 교향곡 전집 완성도 가능할 전망이다.
차이콥스키의 낭만을 새롭게 그리다
체코필과 비치코프의 첫 음반인 ‘차이콥스키 프로젝트’➊ Decca는 작곡가의 오케스트레이션과 음향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놀라운 에너지를 담고 있다. 비치코프 특유의 세련되고 아름다운 접근은 자극적인 표현이나 과도한 화려함을 기대하는 청중에게는 담백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는 차이콥스키 음악의 깊은 집중력과 자연스러운 흐름이 살아 있으며, 지휘자 특유의 팽팽한 선율미와 절제된 낭만이 두드러진다.
특히 교향곡 6번 ‘비창’에서는 비치코프의 절제된 감정이 만들어내는 균형감이 색다른 감동을 준다. 1악장 발전부에서 현악기의 장대한 소스테누토 패시지와 트럼본의 포효하는 선율이 어우러지며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이루는 대목은, 기존 명반들이 보여준 폭발적인 파괴력과는 상당히 큰 차이를 보이며, 색다른 균형미를 선사한다. 이는 최근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던 테오도르 쿠렌치스/무지카 에테르나의 해석(Sony)과 정반대의 접근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다.
독일적인 오케스트라 전통을 바탕으로 한 체코필의 연주는 고유의 따듯하고 포근한 사운드로, 차이콥스키의 낭만을 값싼 열정으로 떨어뜨리지 않는다. 교향곡 1번 2악장의 첼로가 호른의 회상적인 주제를 이어받는 서정미, 2번 특유의 디베르티시망(Divertissement)적인, 유쾌하면서도 리드미컬한 느낌, 3번 2악장 왈츠의 춤추는 리듬감과 이어지는 안단테 엘레지아코의 사랑스러운 선율 모두 그러하다.
특히 교향곡 4번은 비치코프/체코필의 가장 큰 성과라 할 만하다. 유연하고 운무적이며, 서정적이면서도 고전적인 해석은 조지 셀/런던 심포니의 연주(Philips)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전적인 권위와 이르지 벨로흘라베크가 체코필과 남긴 유려한 음향을 절묘하게 결합한 듯하다. 키릴 게르슈타인과 협연한 피아노 협주곡 1번(1879년 오리지널 판본)은 물론, 2·3번도 명연이며 ‘로미오와 줄리엣’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에서는 비치코프의 개성과 작곡가 고유의 러시아적 기질이 극단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정돈되어 파노라마 같은 스케일로 청중을 매혹시킨다.
전통을 지켜낸 음향, 새로운 명반을 낳다
많은 오케스트라가 전통의 사운드와 정체성을 잃어가는 오늘날, 체코필은 변치 않는 음악적 유전자와 습득력을 간직한 드문 존재다. 2025년 BBC 뮤직 매거진 ‘올해의 오케스트라 음반’에 선정된 스메타나 ‘나의 조국’➋ Pentatone과 드보르자크 교향곡 7·8·9번➌ Pentatone은 기존 체코필의 명연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명반의 탄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특히 ‘나의 조국’에서 ‘비셰흐라드’의 영롱한 하프와 웅장한 총주, ‘샤르카’의 피 튀기는 드라마, ‘블라니크’의 전원적 여유 등 모두 각별하지만, ‘블타바’의 그 도도한 흐름이 주는 편안한 에너지와 소박한 폴카 리듬이 주는 친연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프라하를 향한 장엄한 여정과 격정의 소용돌이조차 작위적이지 않으며, 그 자체로 자연스러운 감동을 준다. 드보르자크 역시 스메타나 못지않은 깊이를 지니며, 라파엘 쿠벨리크가 남긴 결정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충분하다.
말러 해석의 새로운 이정표 비치코프가 이끄는 말러 교향곡 전곡 사이클은 현재 교향곡 1번➍ Pentatone·2번➎ Pentatone·3번➏ Pentatone·4번➐ Pentatone·5번➑ Pentatone까지 발매되며 화제를 이어가고 있다. 그의 말러는 기존의 열정적이거나 낭만적인 해석, 혹은 키릴 페트렌코의 기계적일 만큼 냉철한 접근과는 궤를 달리한다. 악단 고유의 자연스러운 음향을 유지하면서도, 마리스 얀손스를 연상시키는 디테일의 섬세한 조탁과 드라마의 명확한 구조를 강조한다. 앞으로 남은 작품들까지 체코필과 비치코프가 말러의 새로운 이정표를 완성해 내기를 바라지 마지않는다.
글 박제성(음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