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OICE REVIEW
기자들의 공연 관람 후기
사랑스러운 숲속 나무들의 열 번째 나이테
발트앙상블 리사이틀
8월 12일 오후 7시 30분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발트앙상블의 연주를 보고 있으면, 참 ‘탐이 난다’. 적절히 자란 연주자들이 체임버 오케스트라 규모로 모여, 자발적 열심을 내는 데에서 풍기는 특유의 유쾌함 때문일까. 마치 ‘서로를 사랑해서 모인 듯한’ 발트앙상블은 새로운 세대의 응집 방식을 대변하는 것도 같다.
첫 곡은 그리그 ‘홀베르크 모음곡’으로 시작했다. 바로크 춤곡 양식에 그리그의 서정성이 흐르는 작품으로, 높은 수준의 앙상블을 선보였다. 이어진 두 곡은 야심 찬 아이디어가 돋보였다. 김한이 협연한 코플런드의 클라리넷 협주곡(1948)은 재즈 클라리네티스트인 베니 굿맨의 의뢰로 탄생한 곡이다. 장발 머리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김한은 민첩한 기교부터 익살스러운 음향까지, 마치 한 마리의 파랑새처럼 숲 사이를 누비며 작품의 독창성을 마음껏 뽐냈다. 한편 슈니트케 ‘하이든 풍의 모차르트’는 하이든의 ‘고별 교향곡’처럼 연주자들이 한 명씩 무대를 떠나는 설정까지, 보고 듣는 즐거움이 있었다. 두 협연자 설민경·이지혜(바이올린)의 열정적인 연주가 전제된 덕에, 빈 무대를 바라보며 느끼는 여운의 맛은 더 깊었다. 마지막 곡은 차이콥스키의 현을 위한 세레나데. 치밀하진 않지만, 생동감 있는 연주가 주는 감동이 넉넉했다.
숲(Wald)에 모인 나무들의 나이테가, 올해로 꼭 열 줄이 되었다. 무한한 가능성으로 뻗어나가던 가지 끝에, 이제는 조그마한 열매가 맺히는 시기. 바이에른의 최전선에서 달리던 음악감독 이지혜도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자리를 잡았다. 발트앙상블은 새로운 프로젝트로 ‘발트 아카데미’ ‘발트 키즈’를 언급했다. 이들이 심을 새싹은 어떤 모습일까. 정원 혹은 봉우리, 어쩌면 정글이 되더라도 부디 지금의 발트앙상블이 가진 매력적인 공동체성이 사라지지 않길 바라며.
글 허서현 기자 사진 발트앙상블
어둠 속을 떠도는 관객, 서사의 주인공이 되다
펀치드렁크 ‘슬립노모어 서울’
7월 24일~9월 28일 매키탄 호텔(옛 대한극장)
1930년대 뉴욕의 호텔을 옮겨놓은 듯한 공간이 서울 충무로에 펼쳐졌다. 객석과 무대의 경계가 사라진 이곳에서 관객은 가면을 쓴 채 호텔 복도를 거닐며 방 안을 엿보고, 때로는 배우와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에 휘말린다. 공연은 약 세 시간 동안 이어지며, 한 시간 분량의 스토리가 총 세 번 반복된다. 관객은 자유롭게 동선을 선택해 배우를 따라가거나 방을 탐험할 수 있으며, 서랍 속 편지와 옷장 뒤 비밀 통로, 책상 위의 낡은 소품까지 모두 이야기를 풀어내는 단서가 된다.
어두운 복도를 지나 도착한 곳은 재즈 선율이 흐르는 맨덜리 바. 웰컴 드링크로 건네받은 샤도네이 한 잔을 마시는 순간, 시간은 1930년대로 이동한다. 흰 가면을 쓰고 낯선 어둠으로 발을 내딛는 순간, 날카로운 비명이 공기를 찢는다. 눈앞에 맥베스가 던컨 왕을 살해하는 장면이 펼쳐지고, 도망치는 그를 따라가자 레이디 맥베스가 욕조에서 피 묻은 그의 몸을 씻겨낸다. 레이디 맥베스를 따라간 두 번째 루프에서는 권력과 욕망에 가득 찬 그녀의 서사를 만날 수 있었다. 마지막 루프에서는 맥베스의 운명을 쥐락펴락하는 마녀들을 쫓았다. (스포일러 주의) EDM 리듬과 강렬한 섬광 속에서 배우들의 형체가 흔들리듯 일그러지고, 어둠과 혼돈 속에서 옷과 머리를 풀어헤친 마녀들이 광란의 춤을 추는 ‘저주쇼’ 장면은 오싹할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마지막 만찬 장면에서는 앞선 두 번과는 다른 결말이 펼쳐진다. 각기 다른 서사를 경험해온 관객들은 그제야 모두 작품의 최종 서사와 마주한다. ‘슬립노모어’의 핵심은 관객마다 전혀 다른 경험을 한다는 점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었더라도 누구를 따라갔는지, 어떤 방에 들어갔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렇게 작품은 각자의 몰입과 경험 속에서 매번 새롭게 탄생한다.
글 홍예원 기자 사진 미쓰잭슨
CONTEMPORARY MUSIC
앙상블블랭크·주정현 싱크 넥스트
몸과 소리의 경계 허물기
7월 18일 오후 7시 30분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찰스 아이브스(1874~1954), 지아친토 셀시(1905 ~1988)처럼 작품의 진가가 뒤늦게 알려진 사례들은 자연스레 미래의 음악을 생각하게 했다. 그래서 20세기에 많은 음악가가 아방가르드에 뛰어들었고, 많은 사람이 과거와 다른 음악을 추구하는 이들을 주목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들은 역사가 되었다. 이러한 경험은 예술을 수용하는 관점을 미래로 바꿔놓았고, 예술은 미래를 현재로 투영하는 다층적 시간성으로 확대되었다. 더불어 현 세기에는 지난 세기의 축적된 경험과 학습을 바탕으로 대중의 관심과 환영까지 받고 있다. 세종문화회관의 ‘싱크 넥스트’ 시리즈는 그 필연적 결과로써 이를 증명하고 있다.
올해 ‘싱크 넥스트’가 추구하는 미래는 무경계의 지점이자 예상할 수 없는 지점이다. 무엇이든 장르로 설정되는 순간, 틀에 갇히고 예상할 수 있는 대상이 된다. 이는 곧 과거의 추억으로 오늘을 사는 존재로 머물게 한다. 따라서 경계 지우기는 예상 가능한 존재를 예상 불가능한 대상으로 바꾸고, 익숙한 과거를 알 수 없는 미래로 옮기는 효과를 얻는다. 그렇기에 각자의 장르와 범주에서 활동하던 음악가들을 조우시키는 것만으로도 미래의 무대가 펼쳐진다. 이는 감상자에게 큰 흥미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음악가들에게도 대단히 큰 도전이 된다. 특히 입지를 굳힌 음악가라면 더더욱!
이틀간 열린 ‘싱크 넥스트’의 세 번째 공연은 현대음악과 전통악기 퍼포먼스의 결합으로 채워졌다. 국내에서 주요 현대음악 앙상블로 인정받고 있는 앙상블블랭크(예술감독 최재혁)와, 해금 연주자이자 작곡가로서 해체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주정현(1994~)이 그 주인공이다. 공연장을 들어서는 순간 꼭짓점을 마주하는 두 개의 삼각형 무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첨예한 접점에서 무경계의 자유가 피어났다.
먼저 앙상블블랭크가 알렉산더 슈베르트(1979~)의 ‘진지한 미소’로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 이 곡은 연주자의 신체에 센서를 부착해 동작 자체를 소리로 변환하고, 지휘자에게도 센서를 달아 지휘자를 소리 내는 역할에 합류시킴으로써 내부적인 경계를 허문다. 여기에 피아노와 첼로, 드럼, 전자음향이라는 복합적 편성으로 또다시 경계를 허문다. 이어서 16세기 작곡가 팔레스트리나의 ‘아베 마리아’를 악기로 연주해 과거를 소환함으로써 시대의 경계를 허물었다.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한 것일까? 아니, 그 반대다.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연주자들의 연주는 이 음악을 실체 없는 과거의 환영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어둠을 깨는 주정현의 즉흥연주가 시작되었다. 그의 즉흥연주는 정신과 신체, 신체와 악기, 과거와 현재의 경계를 허물며 미래를 제시했다. 이에 최재혁의 ‘스트레이트 투 헤븐(Straight to Heaven)’은 건재한 현대음악의 생명력을 확인시키고, 아시아 초연으로 선보인 제시 콕스(1995~)의 ‘퀀티파이(Quantify)’에서 그 둘은 각자의 언어로 즉흥연주를 하며 강렬한 조우를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주정현의 ‘원초적 기쁨’(세계 초연)에서는 공간적 연주와 작곡가의 신체 퍼포먼스 영상이 더해지며 음악과 신체의 경계마저 허물었다. 이렇게 앙상블블랭크와 주정현은 현대음악과 전통악기의 음악적 협업을 넘어, 신체의 움직임을 통한 경계 허물기로 몸짓과 소리짓이 연결되는 미래를 오늘에 풀어냈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세종문화회관
CLASSICAL MUSIC
최예은 바이올린 리사이틀
장쾌한 포르테, 자유로운 루바토의 여왕
8월 7일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
여름의 정점, 열심을 부려 더위를 뚫고 공연장을 찾은 관객들이 가득했다. 청량한 푸른 치마를 입은 바이올리니스트 최예은(1988~)은 피아니스트 김준형(1997~)과 함께 청중을 환영하듯 환한 미소를 지으며 무대로 나왔다. 6·8·9·11월 1회씩 열리는 금호아트홀의 연중 시리즈 ‘더 바이올리니스츠’의 두 번째 주자로 나선 최예은은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 세 작품을 선보였다.
강조된 화음으로 시작하는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의 첫 음부터 바이올리니스트의 노련함이 느껴졌다. 이 곡은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균형이 유독 중요시되는 작품인데, 피아니스트는 음량을 과시하기보다 세심하게 조율하며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했다. 김준형은 피아노의 음량도 이중주에 맞게 섬세하게 선택해, 앞으로 튀어나오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게 바이올린과 ‘함께’ 노래했다. 최예은의 포르테는, 베토벤 곡 전체를 조망하는 해석이 기반이 된 포르테여서 더욱 장쾌했다.
2악장에서 피아노의 순수한 음색과 바이올린의 안정감 있는 긴 프레이즈가 잘 어울렸다. 무게감과 캐릭터가 잘 맞는 이중주를 듣고 있으려니, 이제까지 무심코 들었던 수많은 피아노-바이올린의 이중주 중에서 서로 캐릭터가 잘 맞지 않거나, 혹은 맞추려는 노력이 부족했던 이중주도 참 많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마지막 빠른 악장 ‘론도’에서도 둘의 명랑한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음악의 시작을 기계적으로 맞추는 것보다도, ‘호흡’이 함께 들어가 듣기에 한결 쉬운 론도였다.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에서 응당 그래야 하는 만큼, 두 악기는 곡 전반에서 동등하게 빛났다.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3번은 첫 음부터 인상적이었다. 화가의 붓터치가 느껴지듯이, 최예은의 선 굵은 주선율이 관객의 집중을 이끌어냈다. 길게 이어지며 두터워지고, 다시 가늘어지는 조절이 능란했고, 틀에 박히지 않은 루바토는 과감했다. 2악장에서도 느린 선율 속 내면의 흔들림이 잘 포착되었다. 함께 느려지는 리타르단도에서 둘의 같은 마음이 와 닿아서였을까, 3악장이 가장 듣기 좋았다. 4악장에서는 ‘이 정도 당기겠지’하는 것보다 훅 더 당겨주고, ‘이 정도 커지겠지’ 예상한 것을 깨는 해석이 쾌감을 선사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서 둘이 함께 비등점에 도달하는 모습에, 관객의 호응이 자연스레 커졌다.
인터미션 후 프랑크 바이올린 소나타 A장조가 이어졌다. 첫 음부터 아름답게 노래한 피아노는 최예은의 크레셴도를 믿음직스럽게 도우며 쏟아지는 듯한 화성을 연주했다. 2악장에서는 두 연주자가 재현부를 치밀하게 계획한 흔적이 보였고, 화려한 음악이 배가됐다.
흥미로운 대화가 대개 그렇듯, 두 사람의 연주는 밀고 당김, 자유로움이 공존했다. 이날의 프로그램만 보고, ‘대략 이렇겠지’ 하는 ‘콘서트 고어(Concert Goer)’들의 지레짐작을, 한 음 한 음 가득 담긴 ‘어른스러움’과 ‘독창적 접근’으로 격파하는 연주회였다. 똑바른 선에 집착하는 정밀화라기보다, 큰 붓질로 단번에 그려낸 추상화 같은 시원함이 가까웠다. 앙코르로는 차이콥스키의 ‘멜로디’가 연주되었다. (※ 9월 18일 ‘더 바이올리니스츠’에선 이지혜가 브람스 바이올린 소나타 전곡(1~3번)을 선보인다.)
글 양경원(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금호문화재단
CONTEMPORARY MUSIC
이원석 퍼커션 리사이틀
어색함에서 새로움으로 넘어가다
7월 31일 오후 7시 30분 금호아트홀 연세
KBS교향악단 수석 팀파니스트 이원석의 리사이틀에서는 다채로운 시도를 관찰할 수 있었다. 첫 곡인 이안니스 크세나키스(1922~2001)의 ‘사포’에서는 자신의 몸을 타악기로 삼아 볼과 몸을 물론 혀까지 두들기고, 벽을 치며 발을 굴렀다. 피아노 줄을 퉁기며 프리페어드 피아노(현에 이물질을 껴넣어 이색적인 소리를 연출한 피아노) 같은 효과도 냈다. 이어 스티브 라이히(1936~)의 ‘전자 대위’에서는 반도체 세포 같은 영상과 음악이 재생되며 마림바를 연주했다. 마이크 하울링과 전자음의 노이즈가 귀에 거슬리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루프(Loop, 일정한 마디의 음악을 반복 재생하는 방식)의 재생이고, 어디까지가 지금 이 순간의 실연(實演)인지 경계가 모호해졌다. 이어진 필립 글래스의 ‘유사한 움직임의 음악’에서도 그 기조는 이어졌다. 반복되는 곡상의 미니멀리즘 음악을 듣다 보니, 복제된 음의 숲에 은거하는 인간이 피운 모닥불을 바라보는 듯했다.
류이치 사카모토(1952~2023)의 ‘아쿠아’는 혼돈을 정리하는 듯한 여백의 미는 인상 깊었지만, 연주 자체는 감흥이 덜했다. 크세나키스의 작품 연주에서 보여준 서투름이 떠올랐는데, 그것은 평소 익숙지 않은 음악과 주법에 대한 어색함이기도 했다. 끝 무렵에 프리페어드 피아노 연주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효과를 시도했지만, 이 하나만으로 타악기 연주회의 한편을 차지하기에는 부족한 곡이었다.
헬무트 라헨만(1935~)의 ‘귀로’는 프리페어드 피아노로 연주되었고, 계속되는 실험은 청자들에게 피로감을 안겨주기 시작했다. 프랭크 자파(1940~1993)의 ‘세인트 알폰초 팬케이크 브렉퍼스트’는 자파 특유의 풍자와 해학이 여전히 살아 있는 작품이지만, 이제는 그의 음악이 클래식 음악계에서도 자주 다뤄지는 만큼 독특함은 덜했다. 음악과 영상 사이에서 어느 부분이 실제 연주인가 하는 의문을 남겼다. 자파의 보컬을 연주자가 직접 소화한 모습에서도 일관성이 느껴졌고, 이 서투름의 궤적은 오노 요코의 ‘리멤버 러브’에서 변조된 가사를 읊으며 가성을 써서 음정을 맞추는 장면으로 이어졌다.
존 케이지의 ‘풍경 속에’는 움직이는 실타래 같은 영상 속에서 업라이트 피아노로 연주됐다. 단순한 피아노 연주에 타악기의 지분은 마지막에 징을 울리는 부분뿐이었다. 이현민의 ‘어스에프터어스’에서는 영상이 무대 뒤와 옆까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졌고, 화려한 전자음향 위에 마림바 연주가 이어졌다. 도서관이 나오고, 깨지고, 부서지는 영상 속에서 활로 마림바를 켜는 시도는 그다지 새롭지 않게 다가왔다. 이원석이 작곡한 ‘!바로(크-).’에서는 그가 영상에 직접 등장해 허공에 에어드러밍을 하며 무대를 돌아다녔다. 귀에 거슬리는 전자 노이즈와 종교단체나 공포 영화를 연상케 하는 음향 효과들이 흘러나왔다.
마지막 곡인 바흐의 ‘주는 귀한 보배’(요하네스 크뤼거 편곡)는 가장 정통적인 타악기 레퍼토리였다. 파편이 떨어지는 영상과 함께 망설이며 머뭇대는 듯한 연주는 청중에게 먹먹함을 안겨주었다. 타악기의 발산과 두들기는 쾌감을 떠올렸던 관객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 모든 것이 영상에 의존한 채 밀도 낮은 연주를 펼치는 오늘날 음악가들에 대한 풍자였다면, 이번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글 류태형(음악 칼럼니스트·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금호문화재단
CLASSICAL MUSIC
로렌스 르네스/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 협연 얀 리시에츠키
모두가 즐기는 음악의 제전
8월 10일 오후 5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여름이면 음악가들은 주요 활동지를 떠나 낯선 사람들과의 새로운 만남을 찾아간다. 그 목적지는 바로 음악의 제전! 덕분에 주요 도시에서 상징적인 음악가를 만나기 어려운 경우도 있지만(예컨대 여름의 빈 필하모닉은 잘츠부르크 음악제에 참여하느라 빈에 없다!), 오히려 예상치 못했던 명연주자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기도 한다. 8월 5일부터 6일간 열린 ‘2025 예술의전당 국제음악제’가 바로 이에 걸맞는 음악제였다. 총 16개의 공연이 펼쳐진 이 음악제에서는 세계 정상급 연주자부터 개성있는 음악으로 꿈을 키우는 국내 젊은 연주자까지, 그리고 수백 년 전의 고음악에서부터 최근 작곡된 신작, 크로스오버 재즈까지 폭넓은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음악의 다양한 즐거움과 피부에 와닿는 생생한 예술의 현장성을 고루 경험하는 한 주였다.
6일간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날의 폐막 공연 또한 그랬다. 베를린 도이치 심포니의 악장 강별을 비롯하여 국내외 관현악단 소속 연주자들로 구성한 SAC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와 지휘자 로렌스 르네스(1970~), 그리고 피아니스트 얀 리시에츠키(1995~)가 무대에 올랐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3번으로 시작된 공연은 1악장 제시부부터 관현악단의 뚜렷한 아티큘레이션과 유연한 보잉을 결합하여 관현악에서 구현하기 힘든 섬세한 표현력을 들려주었다. 반면, 목관은 긴 호흡으로 연주하여 두 악기군이 대조를 이루었다. 이러한 대조적 특징은 관현악의 음색을 선명하게 전달하고, 음악적 서사를 구체화하여 관중의 예술적 상상력을 고무시킨다. 리시에츠키의 연주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로, 화려한 독주보다는 모두와 함께하는 앙상블을 지향했다. 섬세한 관현악과 앙상블 스타일의 독주라는 이 곡에 대한 낯선 관점은 서정미를 끌어올리는 데에 최적화되어 있으며, 음악적 서사를 관객 내면으로 자연스럽게 이어갔다. 더불어 강렬한 표현이 필요한 부분에서는 대조가 극대화되어 극적 표현에도 효과적이었다. 앙코르로 연주한 쇼팽 녹턴 20번 역시 같은 맥락으로 내면의 서사를 잇는 순간이었다.
후반부의 말러 교향곡 1번에서 르네스는 관현악을 차분하게 이끌며 자신의 표현 의도를 충분히 구현했다. 약한 다이내믹에서는 앰비언트 뮤직이 연상될 정도로, 음향의 정적 질감에 집중하여 관객들의 영혼을 흡인하여 무아에 이르게 했고, 잔향의 길이까지 체크하는 지휘자의 기다림은 감상자에게 호흡도 멈추게 하는 집중력을 끌어올렸다. 이 점은 음악적 시나리오에 가려지기 쉬운 섬세한 음향과 특징적 제스처를 전면에 부각하는 효과도 얻었다. 반면, 강한 다이내믹의 극적인 부분에서 거대한 음향을 아끼지 않으며 객석의 음향 공간을 뒤흔들었다. 가장 긴장되는 순간 중 하나인 3악장 임채문의 더블베이스 독주는 매우 안정적이었으며, 4악장의 고요함도 특별한 순간이었다. 다만 3악장 카논에서 균형이 맞지 않은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앙코르로 연주한 엘가의 ‘님로드’ 역시 실크 같은 음향적 질감을 이어가며 공연을 마무리했다.
객석을 나서며 여전히 상기된 관객들의 표정을 보았다. 폐막 공연은 음악제의 문을 닫으면서도 관객들의 여전한 관심을 다음 공연으로 이어준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이후 열릴 예술의전당의 무수한 공연들이 짐짓 기대된다.
글 송주호(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예술의전당
THEATER
연극 ‘사의 찬미’
조선의 모던걸, 파리에서 조우하다
7월 11일~8월 17일 LG아트센터 서울 U+ 스테이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 나혜석의 그림 ‘초상화’가 무대 정중앙에 놓여 있다. 분명 연극 ‘사의 찬미’는 윤심덕과 김우진을 다루는 작품인데, 왜 나혜석의 그림이 등장하는 것일까? 연극 ‘사의 찬미’가 윤대성(1939~2025) 작가의 원작을 대대적으로 각색한 목적이 바로 ‘초상화’와 관련이 있다.
초연 35년을 기념하는 2025년의 ‘사의 찬미’는 이 그림에 상상력을 더했다. 바로 ‘초상화’의 주인공을 윤심덕으로 설정해, 나혜석(1886~1948)과 윤심덕(1897~1926), 1920년대를 불꽃처럼 살았던 예술가이자 신여성이었던 두 사람을 만나게 했다. 현실에서 윤심덕과 나혜석의 실제 접점은 없었지만, 극에서는 현해탄 사건 실종 후 생존한 윤심덕이 나혜석을 만났다는 가상을 추가한 것이다.
이러한 설정은 최근 제작 지향과 관객의 감수성에 부합한다. 역사 속 오해와 편견 속에 사라진 여성들을 재조명하려는 움직임이 공연 예술계에 활발히 진행되고 있기에, 화가 나혜석과 성악가 윤심덕을 무대 위에 함께 등장시킴으로 관객들의 공감을 최대화한 점은 흥미로운 설정이자 효과적인 발상이다. 윤심덕과 나혜석을 아는 관객들은 한 공간 속에 두 사람의 존재 자체로 감동이고, 두 인물을 잘 모르는 관객들은 식민지 시기 여성으로, 예술가로 살아간 삶의 행적에 깊이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만난 윤심덕과 나혜석은 상당히 설득력 있었고 흥미로웠다. 극을 끌어가는 내레이터는 두 명으로, 하나는 윤심덕·김우진의 친구였던 홍난파(1898~1941), 다른 하나는 나혜석과 만난 윤심덕이다. 홍난파는 요시다에게 김우진·윤심덕의 이야기를 사실 관계 중심으로 전한다. 반면, 윤심덕은 나혜석에게 김우진을 사랑하는 자신의 감정을 세밀하게 전달하고 있다. 두 명의 내레이터 덕분에 김우진과 윤심덕의 관계가 조금 더 풍성하게 상상할 수 있었고, 윤심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캐릭터가 모호해지고 작품의 지향이 흐려졌다. 홍난파는 해설자 역할이 특화되어 김우진과 윤심덕의 예술가로서의 내적 고민들을 부각시키지 못했고, 윤심덕은 김우진과의 관계에만 집중되어 있어 남성(사랑)에게 자발적으로 희생하는 여성으로 성격이 단순화되기도 했다.
오히려 현해탄에서 사라진 이후 윤심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여성 예술가로서 조선을 떠난 삶에 초점이 맞췄다면 나혜석에게 더 많은 공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두 사람을 한 무대에 세운 기발한 상상이 한발 더 나아갔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1920년대 공기를 고스란히 담아낸 무대 위에, 파리의 이국적 풍경까지 영상 이미지로 잘 구현되어 그 시대를 살아간 인물들을 생생히 불러냈다. 전반적으로 기발하면서도 개연성 있는 상상의 각색을 바탕으로, 연극은 조화로운 만듦새와 완성도를 보여주었다. 다만, 윤심덕이 작품의 중심에 놓이면서 정작 당대의 ‘지적 매력남’이었던 김우진의 면모는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다. 내년이면 두 사람이 현해탄에서 사라진 지 꼭 100년이 된다. 김우진은 후손과 연구자들에 의해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윤심덕은 누가, 어떤 방식으로 기억하게 될까. 그런 점에서 이번 작품 속 윤심덕의 존재감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글 배선애(연극평론가) 사진 쇼앤텔플레이
MUSICAL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
아메리칸 드림? 뮤지컬 드림!
8월 1일~11월 9일 GS아트센터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이 현실이 되는 장면을 보며, 정말 꿈같다고 생각했다. 빌보드, 아카데미, 에미상, 노벨상, 토니상까지! 불과 10년 전만 해도 꿈꾸지 못했던 일들이 이루어진 꿈이 되었다.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라는 꿈의 공간이, 이제는 뛰어들어 일할 현장으로 바뀐 것이다.
뮤지컬 ‘위대한 개츠비’는 그 현장의 성과다. 오디컴퍼니의 프로듀서 신춘수는 브로드웨이 시스템 안에서 현지 창작 인프라를 활용해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만들어냈다. 이번 사례는 제작자 역시 해외 진출의 주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미국적인 소설을 텍스트로 선택한 것도 전략적인 판단이다. 미국의 인프라에 적절할뿐더러 뮤지컬에 어울리는 요소들이 다분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원작이 지닌 비판적 주제 의식을 미뤄둔 자리에 오직 낭만적 사랑만 남겨 놓은 것도 어쩌면 지극히 브로드웨이다운 선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이 작품이 원작답지 않다고 섭섭할 필요는 없겠다. 물론 대본만 놓고 보면 잘된 각색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닉 캐러웨이에게서 화자의 아이러니가 사라졌고, 이기적이고 속물적인 데이지는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여성으로 바뀌었으며, 개츠비에게서 타락과 순수의 복잡한 양면성이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원작을 모르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작품에 실망할 필요는 없다. 애초에 아메리칸 드림의 암울한 초상화는 이 작품이 바라보는 방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작품의 관심사는 ‘뮤지컬 드림’에 있다. 투자 대비 불확실성이 큰 대형 쇼뮤지컬 제작은 무모한 도전에 가깝다. 이 도전에 한국의 제작자가 뛰어들었고, 브로드웨이, 웨스트엔드, 그리고 서울까지 세 도시에서 동시에 공연을 올리고 있다니. 뮤지컬 제작의 새로운 지평을 증명하고, 넓은 시장에서 흥행하는 작품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꿈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뮤지컬 드림을 실현하기 위해 작품이 택한 화술은 화려한 시각성이다. 무대와 조명, 의상과 퍼포먼스 등 시각적 스펙터클 구현에 집중한다. 이는 원작의 서사를 이해하는 가장 뮤지컬다운 방식이기도 하다. 화려한 치장으로 점철된 개츠비의 세계는 시각적으로 구현되어야 할 드라마의 핵심인바, 무대의 판타지라는 대형 뮤지컬의 시각적 목표와 딱 맞아떨어지는 지점이다.
의외로 이 작품은 보고 즐기는 것보다 듣고 이해해야 할 부분이 많다. 인물들이 넓은 무대에서 독백 같은 노래로 캐릭터를 설명하다 보니 무대보다 자막을 더 열심히 보게 된다. 예컨대 개츠비의 캐릭터를 파티보다 노래가 더 잘 드러낸다는 점은, 이 작품의 시각적 전략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적재적소에서 보여줘야 할 요소가 더 많아져야 마땅하다.
그런데 데이지를 향한 사랑을 노래하는 개츠비에게서 엉뚱하게도 주인공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 개츠비와 뮤지컬 드림의 주인공 신춘수. 그린라이트를 향해 손을 뻗는 개츠비처럼, 신춘수 역시 뮤지컬의 그린라이트를 좇고 있지 않은가. 작품이 놓친 것보다 그가 붙잡으려는 것이 더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 순간, 부디 그의 꿈과 사랑이 배반당하지 않고 행복해지길 바라는 마음이 진심으로 우러났다.
글 정수연(뮤지컬평론가) 사진 오디컴퍼니(주)
TRADITIONAL
어둠 속의 콘서트
암흑 속에서 깨닫는 것들
8월 1~3일 인천 문학시어터
객석은 단 30석. 180도 젖혀지는 휴양 의자와 담요·안대가 완비돼 있다. 시작 전부터 ‘이건 온전한 휴식이자 몰입 경험이겠구나’ 싶은 예감이 들었다. 안대를 쓰고 철저한 암흑 속에 진입하는 순간 테라피스트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들려온다. 음악치료에서 흔히 쓰이는 ‘호흡 이완 기법’이 먼저 중재되는 중. 이것은 음악치료인가, 공연인가. 한때 음악치료사였던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공연의 콘셉트에 흥분을 가누기 어려웠다.
본격적으로 음악이 시작되면 첫 곡으로 정가의 한 갈래인 시창(詩唱) ‘십이난간’이 귀로 스며든다. 청아한 여창 가창자의 목소리가 혼탁한 영혼을 정화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다. 뒤이어 공명이 탁월하도록 특수 제작된 핸드 드럼이 3소박 장단의 이중주로 사람 맥박과 동조화를 이루며 서서히 템포와 에너지를 올린다. 싱잉볼과 방짜징, 윈드 차임을 비롯한 크고 작은 금속 사운드가 가죽 사운드와 어우러지는 가운데, 극대화된 ‘이머시브 서라운드 효과(공간을 가득 채워 감싸는 듯한 입체음향. 사방의 벽면부터 천장과 바닥에서까지도 소리가 난다)’에 힘입어 우리를 우주 한가운데로 공중 부양시키는 듯하다. 타악만으로 몰입감에 한계를 느낄 즈음에 테라피스트의 즉흥 구음이 공중을 맴돌다 귀를 감싸니, 저 멀리 사막의 끝을 걷는 듯한 이국적 느낌 속에 내면 여행의 종착점에 다다른다. 관객들은 어둠 속에서 안대와 담요로 감싸진 채로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소리에 온전히 둘러싸인다. 30석만의 ‘사운드 코쿤(누에고치처럼 포근하게 감싸는 공간)’이 만들어 내는 미적 체험의 호사가 이런 것인가!
공연 후반부의 절정은 심청가의 ‘심봉사 눈 뜨는 대목’이다. 음악치료에서는 이를 ‘피크 익스피리언스(정점의 체험)’라 부른다. 그 처절하고 간절한 장면에 눈 감고 있기에는 참기 어려워 살짝 안대를 올려 소리꾼의 마지막 사설인 ‘번쩍 눈을 뜨는’ 부분을 엿본다. 뜻밖에도 시각장애 소녀(최예나, 한예종 예술사 3년)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닌가! 암흑 속에서 들은 그 목소리가 유난히 가슴을 울린 이유가 이 기막힌 역설 때문이었구나. 앞에서 정가를 불렀던 시각장애인 이현아(국가무형유산 12가사 이수자)였다. 안대를 쓰고 철저하게 청각으로만 음악을 감지하게 한 연출 의도의 가장 강력한 동기는 음향적인 새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것보다도, 일차적으로는 시각 장애인들에 대한 선입견 없이 오로지 음악 그 자체로 사람들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데 있었다.
‘어둠 속의 콘서트’는 어둠 속에서 청각적 경험을 새롭게 하는 실험 음악회에서 그치지 않는다. 시각을 차단하고 청각과 내면만을 살려 ‘지금 여기’에 몰입하게 만든다. 심봉사의 눈이 뜨이던 순간, 우리도 우리의 내면에 새삼 눈을 뜬다. 잠시 시야를 닫으면, 마음이 더 환해진다. 무엇보다 ‘장애’ ‘치유’ ‘이머시브’ 세 키워드를 국악이란 도구를 사용해서 이렇게 유기적으로 버무릴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음악회가 어떻게 영적·정신적인 영역까지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보기 드문 무대이다. 4년째 이어진 이 공연이 앞으로도 지속되어야 할 이유이다.
글 이소영(음악평론가) 사진 문화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