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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가 박지혜
유령은 왜 여전히 우리 곁을 배회하는가
오랜만에 완전체로 모인 양손프로젝트가 새롭게 불러낸 입센의 유령‘들’
1881년 발표된 헨리크 입센(1828~1906)의 ‘유령’은 개인의 삶을 규정짓던 종교·도덕·사회적 관습을 정면으로 비판하며 사실주의 연극의 토대를 세웠다. 근친·매독·안락사 같은 주제를 다룬 이 작품은 당대 비평가들에게 불편함을 넘어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일부 무대에서는 상연이 금지되기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이 작품은 사실주의 연극의 정점을 보여주는 고전으로 자리매김했다. ‘죽은 자의 관념이 산 자를 어떻게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은 시대를 초월해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 문제작이 올가을, 공동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박지혜·손상규·양조아·양종욱)의 손끝에서 새롭게 태어난다. 미니멀한 무대와 치열한 텍스트 해석으로 독창적인 연극 언어를 구축해온 이들은 오는 10월, 네 명의 창작자가 오랜만에 함께한 ‘완전체’로서 신작 ‘유령들’을 무대에 올린다.
보이지 않는 것들과의 대면
작품은 노르웨이 피오르드에 자리한 어느 저택에서 시작된다. 알빙 부인은 죽은 남편을 기리기 위해 고아원을 세우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가려진 진실이 있다. 존경받는 가장으로 보였던 알빙 대위가 사실은 방탕과 위선으로 가득했던 것. 그리고 그의 죄는 아내와 아들 오스발에게 유령처럼 남아 있다. 오스발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유전병에 시달리며 어머니에게 안락사를 간청하고, 목사 만더스는 사회적 도덕을 내세워 그녀를 옭아맨다. 결국 고아원은 화재로 무너지고, 알빙 부인은 아들의 고통과 대면하며 참혹한 선택의 기로에 선다.
박지혜는 ‘유령’을 지금 다시 무대에 올리는 이유를 입센의 고향 노르웨이에서 찾았다. “작품의 배경인 피오르드는 빙하가 남긴 흔적이 오랜 세월 쌓여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도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가치와 질서가 형태를 바꿔가며 여전히 이어져 내려오죠. 그것이 지금까지 유효하든 아니든, 과거로부터 전해진 유산은 DNA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유령’은 특정 시대의 문제가 아닌, 오늘날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보편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그는 “보이지 않는 관념이 인물에게 얼마나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가”에 주목했다. “인물들의 갈등과 충돌을 통해 (유령들로 표현되는) 죽은 생각과 죽은 관념이 얼마나 끈질기게 살아남는지를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이번 공연 제목에도 반영됐다. 단수형인 ‘유령’ 대신 복수형 ‘유령들’을 택해 “보이지 않는 존재로 여겨지는 유령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느낌”을 더했다. 특히 2막의 엔딩이 그를 사로잡았다. 고아원이 불타며 집착하던 것이 무너지는 순간, 역설적으로 자유가 찾아오는 장면이다. 박지혜는 그 안에서 발견한 “우리가 강하게 붙드는 것이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고 설명한다.
세 배우, 네 개의 면, 시선의 힘
양손프로젝트는 소수의 배우와 미니멀한 무대로 자신들만의 연극 언어를 쌓아왔다. 리허설 과정에서 모든 배우가 배역을 번갈아 맡고 각자의 해석을 공유하는 것은 그들의 오랜 창작 방식이다. 박지혜는 “세 배우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물을 해석하고, 그 해석을 공유하며 서로에게 설득당하는 과정이 늘 새롭고 자극적”이라고 말한다. 무대 위에서 세 명의 배우가 모든 배역을 오가며 유령들과의 갈등을 그려내는 방식은 특정 시대나 인물의 한계를 넘어 보다 보편적이고 동시대적인 감각을 얻기 위한 선택이다.
무대는 LG아트센터(U+스테이지)의 가변형 블랙박스를 4면 객석으로 꾸며 관객이 무대를 둘러싸고 앉게 했다. 관객은 서로 마주 보고 배우와 눈을 맞추며 극을 체험한다. 그는 “‘유령들’은 사회의 ‘시선들’이 얼마나 강력한지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둘러앉은 관객이 서로의 시선을 인지하고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배우와 호흡하는 경험을 강조한다. 배우 역시 관객의 시선을 체감하며 극을 진행하는데, 이러한 상호작용은 서로의 존재를 실감하게 하고, 작품을 한층 더 감각적인 체험으로 만든다.
입센 3부작을 통한 질문
이번 작품은 양손프로젝트가 3년에 걸쳐 선보일, 하지만 아직은 비공개인 ‘입센 3부작’의 서막이다. 이들은 모파상(1850~1893), 현진건(1900~1943), 김동인(1900~1951), 다자이 오사무(1909~ 1948) 등 다양한 작가의 작품을 탐구하며 입체적 접근 방식을 구축해왔다. 입센도 그 연장선에 있다. 박지혜는 입센을 “구조적이고, 장식 없이, 문제를 직설적으로 던지는 작가”로서 “공동창작에 이상적인 재료”라고 설명한다. 양손프로젝트는 ‘유령들’을 시작으로 이어질 두 작품을 통해 입센이 반복해 던진 질문들을 다층적으로 탐구할 예정이다.
입센의 질문은 여전히 우리 곁을 배회한다. 그리고 양손프로젝트는 그 질문으로 오늘의 관객을 붙든다. “지금 내 삶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는 건 무엇일까. 그 실체는 어디에서 왔을까. 나는 그것과 어떻게 대면해야 할까.”
‘유령들’은 과거의 이념이 시대를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삶을 여전히 제한하는 데 주목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배하는 관념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주해야 할 유령의 얼굴이다. 그렇다면 지금, 당신 곁을 배회하는 유령은 무엇인가.
글 홍예원 기자 사진 LG아트센터 서울
박지혜(1985~)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을 졸업하고, 2011년 결성한 공동창작집단 양손프로젝트의 연출가로 활동 중이다. 2015년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받았으며, 최근 이자람의 ‘노인과 바다’(2022), ‘눈, 눈, 눈’(2025)의 연출을 맡아 활동의 폭을 넓히고 있다.
PERFORMANCE INFORMATION
양손프로젝트 ‘유령들’
10월 16~26일 LG아트센터 서울 U+스테이지
헨리크 입센(원작), 박지혜(연출)/손상규, 양조아, 양종욱(출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