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린다 린다 린다’
작지만 반짝이는 청춘의 노래
감독 야마시타 노부히로
음악 제임스 이하
출연 배두나, 카시이 유우, 세키네 시오리, 마에다 아키
수면 아래 가라앉아 있는 것 같은 시절이 있었다. 올려다보면 어른거리는 저 너머에 다른 세상이 있을 것 같은데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밖으로 나갈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고 가라앉아 있던 시간. 숨을 참지 않고 크게 들이쉴 수 있는 시간은 과연 오려는지…. 남들은 파랗다는데 내게는 까맣기만 하던 그 심연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정말 죽을 것같이 아팠지만 죽지는 않았고,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정작 터지지는 않았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때의 나를 기억하다
고등학교 문화제를 앞둔 고3 여학생 밴드가 있다. 한 멤버가 다치고, 보컬이 갑작스럽게 팀을 떠나면서 위기를 맞는다. 남은 3명의 멤버는 평소 교류가 없던 한국인 유학생 송(배두나 분)에게 보컬을 제안한다. 일본어도 서툴고 노래도 잘하지 못하는 송이 우연히 밴드에 합류해 블루 하츠(일본 펑크록 밴드)의 ‘린다 린다’를 부르기로 한다. 밴드 소녀들은 공연까지 남은 3일 동안 밤낮없이 연습에 몰두한다.
야마시타 노부히로(1976~) 감독의 영화 ‘린다 린다 린다’가 2005년 일본 개봉(2006년 국내 개봉) 후 20년 만에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재개봉한다. 80년대 일본 록 밴드 블루 하츠의 명곡 ‘린다 린다’를 중심으로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청춘의 한 페이지를 특별하게 그려내는 음악 청춘영화다. 1980년대의 음악을 21세기로 불러오며 복고의 감수성을 전한 영화였는데, 개봉 20주년이 되면서 영화 자체가 복고에 대한 회상이자 추억이 되었다.
리마스터링하면서 영상도 선명해졌지만, 밴드 사운드도 한층 풍부해져서 음악영화로서의 매력도 훨씬 커졌다. 영화 속 여고생들은 국경을 초월하는 풋풋한 우정을 나눈다. 송의 일본어가 서툴러 소통이 어렵지만 음악으로 점점 더 긴밀하게 소통하는 소녀들의 모습은 어른들보다 훨씬 어른스럽다.
‘린다 린다 린다’는 우리가 흔히 과거를 낭만적으로 기억할 때 떠올리는 학교 밴드와 축제, 그리고 그 시절의 음악이라는 설렘을 이용해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음악을 통한 소통으로 자신과 타인을 함께 아우르고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과장된 연출 없이 무덤덤한 시선으로 그려내기 위해 성장이라는 청춘영화의 코드에만 순수하게 집중한다.
일본 소녀들 사이에 낯선 이방인인 한국 소녀 송을 배치한 것도 영리하다. 사는 게 서툴고 미숙한 건 단지 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청소년기에 누구나 느끼는 이물감 같은 것이라는 상징성을 더욱 부각시킨다. 이방인처럼 떠돌던 송이 언어가 아닌 밴드 활동과 음악을 통해 화합을 배우는 과정은 하나의 성장 이야기이기도 하다.
감독은 송을 통해 불안정하고 어설픈 청춘이지만, 그 시간을 거쳐 자라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며 힘주어 토닥여준다. 소녀들의 개인적 서사보다 하나로 어우러지는 소녀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 중심을 두면서 우리가 그 시절을 떠올렸을 때 느끼는 감각을 하나의 파란 덩어리로 보여준다. 그래서 끊어졌던 다리 저 너머에 있던 추억이 덩어리가 되어 툭 현재의 시간 위로 떨어진다.
그 시절의 음악을 읊조리며…
‘린다 린다 린다’의 또 다른 주인공은 록 밴드 블루 하츠(The Blue Hearts)다. 영화가 밴드를 위한 헌정처럼 보일 정도로 블루 하츠와 그들의 노래는 영화를 관통하는 큰 줄기이다. 블루 하츠는 일본에서 순수한 열정을 상징하는 아이콘이다. 그들의 음악이 지닌 직설적이고 강렬한 펑크 록 정신은 10대의 불안·좌절·희망을 가장 생생하게 대변한다.
사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결성된 밴드가 3일 만에 음악을 함께 만들어내고 공연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지만, 소녀들은 해낸다. 블루 하츠 음악이 주는 에너지와 소녀들의 에너지는 불안정하고 불완전하지만, 파닥거리며 살아 숨 쉬는 청춘의 열정을 보여주며, 영화에 긴장감을 주고 관객들의 몰입을 높인다.
우리에게 익숙한 밴드는 아니지만 블루 하츠 스타일의 음악은 국내에서도 유행한 적이 있어 묘하게 낯설지는 않다. 타이틀 곡인 ‘린다 린다’와 함께 ‘끝나지 않은 노래’, ‘나의 오른손’ 등 블루 하츠 명곡의 멜로디와 가사는 소녀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국적과 문화의 차이도 불협화음과 미숙한 실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 소녀들의 순수한 열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들려준다.
시련의 깊이만큼 자라난 청춘
꾹꾹 눌러 담아 배가 볼록해진 여행 가방처럼 삶이 묵직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뒷장에 자욱이 남을 만큼 꾹꾹 눌러 살아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젊은 시절 아픈 만큼, 시련의 깊이만큼 훌쩍 자라날 거라 믿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살다 보면 매일 뒷걸음질 치는 삶을 살거나 생각보다 삶이 시시하다고 느끼는 순간이 훨씬 많다.
‘린다 린다 린다’는 시련을 극복하고 훌쩍 어른이 된다는 성장 판타지 대신 그냥 자라난다는 것 역시 우리가 겪는 일상의 소중한 한 부분이라는 이야기를 묵묵하게 들려준다.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어서 불안하지만, 뭐, 또 목표를 향해 단 며칠만이라도 뜨겁게 나의 시간을 불살랐다면 충분하다”고 말하는데, 연주도 노래도 서툴고 화음도 맞지 않지만 그런 불협화음이 오히려 묘하게 안정감을 준다.
작정 없이 시시한 삶을 사는 청춘을 무시하거나 걱정하지 않는 감독의 시선이 청춘의 눈높이에 머문다. 마음을 못나게 만드는 결핍 대신 부족함으로 타인을 넉넉하게 품어내는 곁이 되어주는 소녀들의 마음은 모래알처럼 작지만, 또 반짝반짝한다. 열병처럼 뜨거웠고 달궈진 조약돌처럼 식을 줄 몰랐던 그때, 그 시절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OST] 음악감독 제임스 이하 | Universal
주로 일본 록 밴드 블루 하츠의 곡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오리지널곡이 아니라 영화 속 밴드가 커버한 버전으로 수록되어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성장과 우정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며, 배우들이 직접 연주하고 노래를 불러 생생한 진정성을 더한다.
SET-LIST
01 Opening Title 02 Linda Linda 03 03 Houkago 04 Yoninno Fuukei
05 Bokuno Migite 06 Aruhino Hirusagari 07 April Mirage 08 Hiiragi Sai
09 Sayonara-Nostalgia 10 Kazeni Fukarete 11 Cat Walk 12 Taisetsuna Jikan 13 Sonno Yume 14 Keito Kyokoto Nozomi 15 Yuugureno Kaerimichi
16 Mabayui Gogo 17 The Water Is Wide 18 Yasashii Jikan 19 Fuuraibo
20 3:30PM 21 Owaranai Uta
글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