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우아한 종지부
1981년부터의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하겐 콰르텟의 마지막 여정
1970년대 잘츠부르크의 작은 거실에서 시작된 하겐 남매의 음악은 하우스무지크의 따스한 색채를 품고, 도이치 그라모폰(DG)과 남긴 방대한 음반, 현대 작곡가들과의 협업, 동시대 거장들과의 무대를 통해 실내악의 지평을 끝없이 넓혀왔다. 이제 이들은 품격 있는 작별을 준비 중이다. 하지만 ‘마침표’는 그들의 연주사에만 찍힐 뿐, 그들이 남긴 음악적 유산은 후예들의 현 위에 ‘느낌표’로 남게 될 것이다
총괄 홍예원 기자
STORY & HISTORY 하겐 콰르텟 _장혜선
INTERVIEW 제2바이올린 라이너 슈미트 _장혜선
DISCOGRAPHY 오스트리아의 명가가 써 내려간 음반들 _박제성
STORY & HISTORY
하겐 콰르텟의 시간
라이너 슈미트(1964~) 1987년 하겐 콰르텟 제2바이올린으로 합류했으며, 1989년에는 라비니아 피아노 트리오를 창단했다. 1988년부터 모차르테움에서 실내악을 가르쳐왔고, 2007년부터는 바젤 음악원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 교수로 재직 중이다.
클레멘스 하겐(1966~) 하겐 콰르텟의 첼리스트. 바젤 음악원에서 하인리히 쉬프를 사사하고, 1983년 빈 필하모닉 특별상과 카를 뵘상을 수상했다. 1988년부터 모차르테움에서 첼로와 실내악을 가르치고 있으며, 169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첼로를 연주하고 있다.
베로니카 하겐(1963~) 하겐 콰르텟의 비올리스트. 부다페스트 비올라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주목받았고, 1988년부터 모차르테움에서 가르치기 시작해 2003년부터 비올라와 실내악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루카스 하겐(1962~) 하겐 콰르텟의 바이올리니스트. 모차르테움에서 헬무트 체헤트마이어를 사사했고, 졸업 후에는 기돈 크레머에게 배웠다. 1999년부터는 모차르테움에서 바이올린과 실내악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970년대의 잘츠부르크는 집집마다 아이들이 악기를 배우고, 저녁 무렵이면 가족이 함께 모여 연주를 나누던 ‘하우스무지크(Hausmusik)’의 전통이 여전히 살아 있던 시절이었다. 바흐 가문이 한때 그랬던 것처럼, 음악은 거실을 채우는 일상의 언어이자 가족의 대화였다.
하겐 남매 역시 그 안에서 자랐다. 비올리스트였던 아버지 오스카 하겐의 손길 아래 매일같이 바이올린과 비올라, 첼로 소리가 울려 퍼졌고, 형제자매는 서로의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루카스 하겐(제1바이올린)은 훗날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가 매일 형제자매들과 함께 연주할 수 있도록 해주셨던 것이 제 음악적 성장의 가장 큰 출발점이었습니다. 당시 잘츠부르크에는 저희처럼 아이들이 악기를 배우는 집안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청소년 콩쿠르 무대에서 자주 마주쳤어요. 지금은 가족 규모가 작아지면서 이 아름다운 하우스무지크 전통이 거의 사라진 것이 아쉽습니다.”
이 따스한 풍경 속에서 싹튼 음악적 토양은 곧 하나의 앙상블로 이어졌다. 그리고 1981년 여름, 바이올리니스트 기돈 크레머의 초청으로 오스트리아에서 열린 제1회 로켄하우스 실내악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을 때, 하겐 콰르텟은 그야말로 젊음의 상징이었다. 제1바이올린을 맡은 맏형 루카스는 1962년생으로 10대였고, 여동생 비올리스트 베로니카는 18세, 막내 첼리스트 클레멘스는 겨우 15세 소년이었다. 오늘날 K팝 그룹의 10대 멤버들이 세계 무대에 오르는 모습에 비견하자면, 당시 하겐 콰르텟이 남긴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말 그대로 10대 학생들이 세계 클래식 음악계의 중심으로 뛰어든 사건이었고, 이들의 소리는 첫 연주부터 청중을 압도하며 하나의 센세이션을 만들어냈다.
이듬해, 그들의 발걸음은 본격적인 커리어로 이어졌다. 1982년 포츠머스 현악 4중주 콩쿠르에서 우승과 인기상을 동시에 거머쥐며 두각을 나타냈고, 우승을 계기로 주어진 런던 위그모어홀 데뷔 무대에서는 신선한 앙상블의 힘으로 호평을 받았다. 영국 언론 ‘해럴드’는 이들의 연주를 두고 “깨끗함이 빛나는 음악”이라 표현했는데, 순수함과 투명함이야말로 하겐 콰르텟의 초창기 정체성이었다.
한편 제2바이올린 자리는 초창기부터 다소 불안정했다. 1982년 제2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하던 안겔리카 하겐이 먼저 자리를 비웠고, 잠시 모차르테움 동창생인 아네트 비크가 그 공백을 메웠다. 그리고 1987년, 라이너 슈미트가 합류하면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하겐 콰르텟의 라인업이 완성됐다.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 시작된 4중주는 이제 혈연을 넘어선 음악적 동지애로 확장되며, 더 단단한 앙상블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가족 악단, 실내악 르네상스의 중심에 서다
1980년대 초반, 클래식 음악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와 화려한 솔리스트들이 무대를 주도하던 시기를 지나, 주요 음반사들은 이 다시금 실내악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도이치 그라모폰(DG), 데카(Decca), EMI 같은 레이블들은 젊고 패기 있는 현악 4중주단들을 적극적으로 발굴하고, 이들의 해석을 음반으로 남기며 ‘실내악 르네상스’라 부를 만한 흐름을 만들어냈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DG가 CD 시대 초반에 에머슨 콰르텟을 선택해 현악 4중주 레퍼토리 시리즈를 출범시킨 결정이었다. 그 선택은 실내악에 거는 시대적 기대를 뚜렷이 드러냈다. 데카 진영에서는 타카치 콰르텟이 버르토크와 베토벤 전곡 사이클로 굵직한 이정표를 세웠고, EMI에서는 알반 베르크 콰르텟이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텔덱과 EMI 레이블을 통해 방대한 카탈로그를 남겼다(현재는 워너 클래식스 박스 세트로 총정리).
바로 그 흐름 속에서 하겐 콰르텟 역시 DG의 전속 아티스트로 합류했다. 1984년, 이들은 마침내 ‘꿈꾸던 무대’였던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청됐고, 이후 세계적인 음반사인 DG가 전속 계약을 제안해 온 것이다.
이 계약은 단순한 비즈니스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잘츠부르크의 ‘한지붕 가족 앙상블’이 빚어내던 음악이 레코딩을 통해 전 세계로 울려 퍼지게 된 순간이었다. 초기 음반에서 하겐 콰르텟은 하이든과 모차르트라는 고전적 뿌리를 탐구하면서도, 젊은 앙상블 특유의 신선한 해석을 잃지 않았다. 평단은 그들의 연주를 두고 “투명하면서도 불같은 에너지,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는 소리”라 평했고, 이는 하겐 콰르텟을 단숨에 동시대 최고 현악 4중주단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이후 DG와 함께 약 45장의 방대한 디스코그라피를 구축했으며, 전속 계약 종료 5년 뒤에는 2009년경에 설립된 미리오스 클래식스(Myrios Classics)로 옮겨가 베토벤·모차르트·베베른을 아우르는 30주년 기념 음반 ‘하겐 콰르텟 30’(Myrios)을 발표하며 새로운 장을 열었다.
실내악 레퍼토리 무한 확장
하겐 콰르텟의 상징성은 단순히 음반의 숫자나 화려한 이력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이들이 특별한 이유는 늘 동시대의 거장들과 나란히 서며, 음악의 지평을 끊임없이 넓혀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 죄르지 쿠르탁(1926~)과의 교류는 결정적이었다. 두 인물과의 만남은 하겐에게 ‘해석의 언어’를 다듬는 거대한 축처럼 작용했고, 동시에 이들은 새로운 작곡가들의 목소리를 위촉하고 초연하며 스스로의 레퍼토리를 확장해 나갔다.
그 상징적인 장면이 2011년 잘츠부르크 ‘모차르트 주간’에서 펼쳐졌다.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하스(1953~)의 현악 4중주 6번을 세계 초연한 것이다. 이 작품은 단순한 레퍼토리 추가가 아니라, 하겐 콰르텟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현대음악과 호흡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선언이었다. 같은 달 11월, 런던 위그모어홀에서 이어진 이 곡의 영국 초연은, 현대 작품의 연주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게 하려는 마음이 엿보인다. 이후의 흐름은 외르크 비트만(1973~)과의 협업으로 이어졌다. 하겐 콰르텟의 위촉으로 탄생한 비트만 ‘클라리넷 5중주’(2017)는 마드리드 초연을 거쳐 해외 투어 레퍼토리로 자리 잡았고, 2023년 발표된 음반 ‘모차르트, 비트만: 클라리넷 5중주’(Myrios)에서는 모차르트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전통과 현대가 한 호흡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순간을 만들어냈다.
이들의 확장은 또 다른 차원, 편성의 확장에서도 드러난다. 2009년 피아니스트 우치다 미츠코(1948~)와 함께한 위그모어홀의 브람스 피아노 5중주는, 네 개의 현이 피아노와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층위의 정밀한 균형을 보여준 무대였다. 2019년 하겐 콰르텟은 키릴 게르슈타인(1979~)과 같은 곡을 녹음(Myrios)으로 남기며, 공연과 레코딩을 오가며 5중주 레퍼토리를 끊임없이 새롭게 했다. 첼리스트 하인리히 쉬프(1951~)와 함께한 슈베르트 현악 5중주와 베토벤 ‘대푸가’의 레코딩은 하겐 콰르텟의 사운드를 더욱 두껍게 만들었다. 그리고 최근의 2024/25 시즌에는 클라리네티스트 자비네 마이어(1959~), 외르크 비트만과 모차르트와 브람스의 5중주 연주에 몰두하고 있다. 이처럼 이들은 단지 네 명의 울타리에 머무르지 않고 실내악 전체의 지형을 확장해 왔다.
실내악에서 레퍼토리 확장은 단순히 곡목을 늘리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낯선 목소리를 받아들이고, 새로운 편성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들의 언어를 끊임없이 갱신하는 과정이다. 하겐 콰르텟은 이 시도를 멈추지 않음으로써, 고전에서 현대까지 이어지는 실내악의 ‘살아 있는 지도’를 그려왔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은 하나의 앙상블을 넘어, 실내악이라는 장르가 지닌 끝없는 가능성의 상징으로 남는다.
그러나 끝나지 않은 이야기
네 명의 멤버는 모차르테움의 강단에 서서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후배들에게 전해주었다. 그들의 수업은 단순한 테크닉 훈련에 머물지 않았다. 무대 위에서 그랬듯, 교단 위의 네 사람은 무엇보다도 서로의 호흡을 듣고 존중하는 법부터 가르쳤다. 마스터클래스와 아카데미 무대에서 만난 젊은 앙상블들은 하겐 콰르텟이 남긴 언어를 이어받아 각자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제 한 시대를 열었던 4중주단이 아름다운 종지부를 준비하고 있다. 하겐 콰르텟은 2025/26 시즌을 끝으로 무대에서 물러날 계획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여러 공연장은 ‘마지막 투어’라는 표지와 함께 이들을 맞이하고 있다. 바젤에서는 ‘1970년대에 시작된 전무후무한 커리어의 끝’이라는 문구로 고별 무대를 예고했고,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대강당에서는 2026년 ‘페어웰 콘서트’라는 이름의 공연을 앞두고 있다. 세계 언론은 1981년 결성으로부터 이어진 40여 년의 서사가 천천히, 그러나 품격 있게 마침표를 준비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작별은 단절이 아니다. 끝나는 것은 무대 위의 연주일 뿐, 그들의 관계와 유대, 그리고 남긴 음악은 여전히 살아 숨 쉰다. 하겐 콰르텟의 은퇴는 끝이 아니라, 후배들의 현 위에 켜켜이 쌓여 다시 울려 퍼질 또 다른 서사의 시작이다.
글 장혜선(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목프로덕션
‘객석’이 꼽은 하겐 콰르텟의
CHOICE Albums 10
CHOICE ➊ 하이든
현악 4중주 ‘종달새’와 ‘기사’(1989) DG 4236222
초창기 ‘청년’ 하겐 콰르텟의 경쾌한 숨결을 담아낸 음반이다. 그러나 그 빛깔은 단순히 가볍거나 신선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젊음 속에서도 깊이 있는 음악성이 엿보이며, 하이든 특유의 구조적 명료함과 모티프 처리의 섬세함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해석 덕분에 평단 역시 뜨거운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CHOICE ➋ 슈베르트
현악 4중주 D956 외(1994) DG E4397742
첼리스트 하인리히 쉬프가 합류한 음반. 슈베르트의 현악 5중주와 베토벤의 ‘대푸가’를 나란히 담았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슈베르트의 아다지오에서는 밀도 높은 감정이 쌓이고, 이어지는 ‘대푸가’에서는 그와 대조적으로 치밀한 구조적 해석이 돋보인다. 두 작품을 통해 하겐 콰르텟은 감성과 이성을 동시에 꿰뚫는 자신들의 폭넓은 음악 세계를 선명히 드러냈다.
CHOICE ➌ 베토벤
현악 4중주 Op.18-4 & Op.131(1999) DG 4596112
하겐 콰르텟의 베토벤 해석을 대표하는 정점으로 꼽히는 음반이다. Op.18-4는 초기 4중주 특유의 고전적 균형을 담아내고, Op.131은 후기 작품의 심오한 정서를 압축해 보여준다. 특히 Op.131의 느리고 쓸쓸한 아다지오가 마지막 프레스토로 이어질 때, 긴 호흡 속에서 감정이 서서히 응축되고 폭발하는 흐름은 이 음반의 백미라 할 만하다.
CHOICE ➍ 버르토크
현악 4중주 1~6번(2000) DG 4635762
버르토크 현악 4중주 전곡을 수록한 이 음반은 하겐 콰르텟의 기교가 집약된 결정판으로 꼽힌다. 느린 악장에서는 감정의 미묘한 결을 세밀하게 드러내며, 음향의 농도를 정교하게 조율한다. 반면 빠른 악장에서는 극적인 다이내믹의 대비가 날카롭게 살아나, 이 악단 특유의 에너지를 강렬하게 체감할 수 있다.
CHOICE ➎ 모차르트
‘하이든 4중주’(2001) DG E4710242
모차르트는 1782년부터 1785년까지 여섯 곡의 현악 4중주를 남겼고, 하이든에 대한 존경을 담아 ‘하이든 4중주’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겐 콰르텟은 이 여섯 작품을 모은 음반에서 네 악기 사이의 균형과 섬세한 음색의 대비를 탁월하게 구현한다. 투명하고 정제된 해석을 선호하는 이들에게 꾸준히 추천되는 대표적 레코딩이다.
CHOICE ➏ 모차르트
현악 4중주(2006) DG 4776253
모차르트 현악 4중주 23곡(외 디베르티멘토 등)을 망라한 이 음반은 하겐 콰르텟의 고전 해석 세계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는 컬렉션이다. 미묘한 질감의 변화와 투명하면서도 정교한 아티큘레이션은 모차르트 연주의 한 기준점으로 오래도록 회자된다.
CHOICE ➐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3·7번 & 8번(2006) DG E4776146
쇼스타코비치의 현악 4중주는 광활한 감정의 스펙트럼과 날 선 긴장으로 가득하다. 하겐 콰르텟은 그 복잡한 세계를 치밀하게 파고들며, 고전과 현대를 잇는 다리로서의 위상을 선명히 각인시킨다. 특히 7번과 8번에서 흘러나오는 비통한 음색은 청자를 압도하는 응축된 긴장을 만들어 낸다.
CHOICE ➑ 하겐 콰르텟 30(2023)
Myrios MYR006CD
1981년 결성 후 30주년을 기념해 2011년에 발매된 음반을 재발매한 것으로 하겐 콰르텟의 변화와 성숙이 교차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레코딩 완성도 또한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베토벤·모차르트·베베른 등의 작품에서 내부 성부의 조화, 각 악기의 공간적 배치, 질감의 선명함 등 디테일이 섬세하게 포착되어, 하겐 콰르텟 특유의 정교한 앙상블을 생생히 전달한다.
CHOICE ➒ 브람스
현악 4중주 3번 & 피아노 5중주(2019) Myrios MYR021
피아니스트 키릴 게르슈타인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음반은 브람스의 현악 4중주와 유일한 피아노 5중주를 함께 담아 더욱 주목받았다. 특히 피아노 5중주 Op.34에서는 피아노와 현악이 서로 교차하며 직조해내는 하모니가 구조적 명료성과 감정적 깊이를 동시에 드러낸다.
CHOICE ➓ 모차르트, 비트만
클라리넷 5중주(2023) Myrios MYR031
현악 4중주와 클라리넷의 조화가 얼마나 매혹적인지 보여주는 음반. 모차르트의 5중주에서는 클라리넷의 부드러운 음색과 절묘한 균형을 이루는 하겐 콰르텟의 노련함이 빛을 발한다. 여기에 외르크 비트만의 클라리넷 5중주 세계 초연 녹음이 더해지며,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강렬한 긴장감을 생생히 담아냈다.
INTERVIEW
제2바이올린 라이너 슈미트
끝나는 것은 연주일 뿐
1981년, 하겐 콰르텟의 첫 울림은 40여 년의 세월을 거치며 거대한 서사로 이어졌다. 그들은 그 긴 시간 동안 무대 위에서, 음반 속에서 현악 4중주의 정수를 몸소 새겨왔다. 이제 은퇴라는 이름 앞에 선 지금, 하겐 콰르텟은 무엇을 되돌아보고, 또 어떤 유산을 세상에 남기려 하는가. 그 이야기를 제2바이올린 라이너 슈미트(1964~)와 나눴다.
40여 년간 세계 무대를 지켜온 하겐 콰르텟이 2026년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또 그 과정에서 나눈 멤버들과의 대화가 궁금합니다. 아울러 ‘해체(disbandment)’가 아닌 ‘은퇴(retirement)’라는 표현을 선택하신 이유와 두 단어에 담긴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도 궁금합니다.
하겐 콰르텟은 2026년 여름 공연을 마지막으로 무대에서 물러나기로 했습니다. 그 결정에는 단 하나의 결정적 계기가 있었던 게 아니라, 여러 작은 이유들이 조금씩 쌓여 자연스럽게 도달한 것이죠. 우리는 그 과정에서 진솔한 대화를 나눴고, 서로의 마음을 존중하며 편안함 속에서 은퇴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이번 선택을 작별이나 해체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저 무대에서 한발 물러나기로 했을 뿐, 우리가 나눈 깊은 유대는 온전히 남아 있습니다. 끝나는 것은 연주일 뿐, 우리의 관계는 변함없이 계속됩니다.
네 기둥의 한 축을 맡다
1987년, 세 명의 하겐 가족이 함께하는 콰르텟에 유일한 외부 멤버로 합류했습니다. 당시 하겐 콰르텟은 막 주목받기 시작한 젊은 실내악단이었죠. 스승인 알반 베르크 콰르텟의 하토 바이엘레(1933~2023)를 통해 멤버들을 소개받아 미국에서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로 건너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긴장과 설렘은 어땠는지, 또 지금 돌아보면 그 순간은 어떤 의미로 다가오나요?
오늘날 젊은 현악 4중주단을 보면 문득 우리의 초창기 모습이 떠오르곤 합니다. 1987년, 제가 콰르텟에 합류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는 듯하지요. 얼마나 젊었는지, 또 얼마나 벅찬 설렘 속에 있었는지를 새삼 떠올리게 됩니다. 현악 4중주 레퍼토리는 오래전부터 제가 가장 사랑하는 음악 장르였고,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큰 기쁨이었습니다. 단순한 직업적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제게는 개인적으로도, 예술적으로도 깊은 충만함을 안겨준 긴 여정의 시작이었습니다.
세 명의 가족 구성원과 함께하면서, 오히려 가족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만 가질 수 있었던 특별한 시선이나 균형감각이 있었을까요? 또 앙상블 안에서 당신이 맡게 된 자연스러운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요?
세 남매의 끈끈한 유대는 본래 깊이 뿌리내려 있었지만, 그것이 콰르텟의 운영을 방해한 적은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네 사람이 하나의 앙상블로 호흡하겠다는 의지를 나눴고, 시간이 지나면서 각자가 맡는 고유한 역할이 생겼습니다. 그 역할들은 서로를 보완하며 동시에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었어요.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면서도 각자의 개성이 살아 있었기에, 우리의 협업은 더욱 단단하고 오래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 “어떤 곡을 충분히 연주하다 보면 비로소 ‘이제는 녹음하고 싶다’라는 마음이 든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겐 콰르텟은 공연이나 음반 레퍼토리를 정할 때 어떤 기준이 있나요?
매 시즌 레퍼토리를 짜는 데 있어 중심이 되는 것은 빈에서 열리는 정기 연주회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네 개의 프로그램을 준비하는데, 각각은 하나의 일관된 아이디어나 예술적 맥락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이 연주가 시즌의 뼈대를 이루며, 우리의 음악적 여정에 구조를 부여하고 한 해의 방향을 정해주지요. 동시에 우리는 늘 스스로에게 도전하고자 했습니다. 새로운 작품을 발견하는 설렘은 물론, 이미 익숙한 작품을 깊이 있게 다시 들여다보는 작업에도 똑같이 매료됐습니다. 한 번 연주했던 곡을 다시 연구하다 보면 늘 새로운 층위와 질문, 통찰이 드러나곤 합니다. 이처럼 끊임없이 반복하고 탐구하는 과정이야말로 우리의 음악을 살아 있게 하는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무대에 남긴 발자국, 그리고 다음 세대
하겐 콰르텟의 긴 음악적 여정 가운데, 가장 큰 전환점이 된 순간을 꼽는다면 언제일까요?
단 하나의 결정적인 순간을 꼽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를 형성해 온 것은 오히려 시간 속에서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경험이었으니까요. 그중에서도 큰 울림을 준 것은 탁월한 음악가들과의 만남이었죠. 피아노와 클라리넷 거장들과의 협연,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나 죄르지 쿠르탁 같은 인물들에게서 받은 자극은 우리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러한 만남은 단순히 연주 방식에 영향을 준 것을 넘어, 음악 그 자체에 대한 이해를 한층 깊게 해주었습니다. 우리의 성장은 언제나 대화와 교류, 그리고 예술을 아낌없이 나누어 준 이들의 너그러움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겐 콰르텟은 큰 갈등 없이 민주적인 방식으로 결정을 내려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면 무엇인지, 또 그것을 어떻게 풀어갔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어떤 음악적 과제에 직면하든 늘 민주적으로 접근해 왔습니다. 기본적으로 다수의 의견을 우선하며, 만약 의견이 팽팽히 맞설 때는 명확한 다수가 모일 때까지 결정을 미루곤 했습니다. 이 원칙은 음악적인 문제뿐 아니라 협업의 모든 과정에 적용됐습니다. 그러면서도 한 멤버가 강하게 반대 의견을 내면 그 입장은 늘 존중했습니다. 다행히 그런 상황은 극히 드물었어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완전히 같은 생각을 하지 않더라도 각자의 관점을 지지하며 신뢰를 쌓아왔고, 그것이야말로 우리 협업의 가장 튼튼한 기반이 됐습니다.
하겐 콰르텟은 고전에서 현대에 이르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구축해 왔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도전적이었던 작품은 무엇이며, 세월이 흐르며 같은 작품을 다시 연주할 때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무엇인가요?
현악 4중주 레퍼토리에는 버르토크의 현악 4중주 5번, 알반 베르크의 ‘서정적 모음곡’, 죄르지 리게티의 현악 4중주 2번처럼 극도로 높은 기술적 난도를 요구하는 작품들이 있습니다. 그 요구가 워낙 강렬하다 보니, 처음에는 음악적 질문에 다가가기 전에 먼저 테크닉의 장벽을 넘어야 한다고 느끼곤 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접근 방식은 달라졌습니다. 처음부터 음악적인 해석과 마주했고, 오히려 그것이 기교적 어려움을 자연스럽게 극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음악적 의도가 분명하면 테크닉은 그 뒤를 따라오는 법입니다. 위대한 작곡가들이 결코 ‘연주 불가능한’ 음악을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비전은 복잡하고 심오하며 때로는 급진적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언제나 표현과 의미를 추구했을 뿐입니다.
도이치 그라모폰(DG)에서 40장이 넘는 음반을 발표한 뒤, 미리오스 클래식스(Myrios Classics)로 자리를 옮기며 ‘예술적 자유’를 강조했습니다. 새로운 레이블을 선택하게 된 배경과 그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 바, 그리고 그 과정에서 느낀 가장 큰 즐거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DG와의 여정이 끝나갈 무렵, 그것은 자연스러운 마무리처럼 느껴졌습니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다만 클래식 음악 레코딩을 바라보는 그들의 방식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기 때문이죠. 옛 시절을 돌아보면 감사한 기억뿐입니다. 우리를 다양한 방식으로 성장시켜 준 값진 협업이었습니다. 이후 우리는 미리오스 클래식스와 그 중심에 있는 레코딩 프로듀서 슈테판 카헨(1974~)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의 예술적 비전과 성실함, 탁월함은 우리에게 이상적인 파트너십을 가능케 했죠. 신뢰와 투명함, 그리고 완벽을 향한 같은 마음 덕분에 그와 작업하는 시간은 언제나 즐거웠습니다.
하겐 콰르텟이 후배 현악 4중주단에게 남기고 싶은 가장 큰 유산은 무엇인가요? 멘토로서 다음 세대를 이끌 때 가장 강조하는 점은요?
위대한 현악 4중주단이 되기 위해 필요한 요소는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결코 한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는 일이 아니죠. 우리가 남길 ‘유산’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것은 결국 다른 이들이 평가할 몫일 테니까요. 다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의 차원이나 몇 가지 요소에만 집중해서는 절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해석을 아무리 세련되게 하더라도, 특히 오늘날의 음악 환경에서 그것만으로 성공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저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품을 대하는 진실하고 성실한 태도입니다. 결과나 성과, 관객 반응을 먼저 의식하기보다, 작품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 말이죠. 작품 해석은 언제나 호기심과 겸손, 그리고 깊이 들으려는 태도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음악이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바가 드러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번 방한에서 들려줄 연주 프로그램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또 한국 청중에 대한 인상과 공연을 기다리는 팬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부탁드립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저는 많은 뛰어난 한국의 젊은 음악가들과 함께할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 과정에서 늘 놀라웠던 점은, 문화와 대륙을 넘어 우리가 음악을 이해하는 방식이 본질적으로 맞닿아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음악이라는 언어는 국경을 초월해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보편적인 무언가와 직접 소통하는 듯합니다. 음악에 열린 마음으로 다가갈 때, 즉 배움에 열려 있고, 공감에 열려 있을 때 비로소 더 깊은 차원에 닿을 수 있습니다. 공감은 음악에 있어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우리는 수 세기 전의 누군가가 느꼈던 감정을 다시 체험하고 표현하려고 하는데, 그것을 진정성 있게 마주할 때 더 큰 존재의 매개체가 됩니다. 음악은 인류에게 주어진 특별한 선물이며, 우리가 전 세계와 함께 나눌 수 있다는 사실에 늘 감사함을 느낍니다.
글 장혜선(음악 칼럼니스트) 사진 목프로덕션·통영국제음악재단
Performance information
하겐 콰르텟 리사이틀
11월 8일 오후 5시 포항시청 대잠홀(포항국제음악제)
바흐 ‘푸가의 기법’ 중, 쇼스타코비치 현악 4중주 8번,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5번 D 887
11월 9일 오후 7시 30분 롯데콘서트홀
베토벤 현악 4중주 16번, 베베른 현악 4중주를 위한 5개의 악장 Op.5·현악 4중주를 위한 6개의 바가텔 Op.9, 슈베르트 현악 4중주 14번 ‘죽음과 소녀’
하겐 콰르텟 아시아 투어
11월 11일 ‘프로젝트 피날레-나이트Ⅰ’(도쿄 톳판홀)
11월 12일 ‘프로젝트 피날레-나이트Ⅱ’(도쿄 톳판홀)
11월 13일 ‘프로젝트 피날레-나이트Ⅲ’(도쿄 톳판홀/클라리넷 외르크 비트만)
11월 15일 키타큐슈 국제 음악제(히비키홀/피아노 타니 아키토)
11월 16일 타이베이 공연(국가음악당/클라리넷 외르크 비트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