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어쩔수가없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1월 24일 9:00 오전

CINESSAY

영화로 만나는 세상과 사람

 

‘어쩔수가없다’

씁쓸하거나, 쓸쓸하거나

 

[OST] 음악감독 조영욱

박찬욱과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 등을 함께 했던 조영욱 음악감독이 런던 컨템퍼러리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했다. 세계적인 첼리스트 장 기엔 케라스의 연주는 고전영화의 품격 있는 색감과 차갑고 현대적인 화면 사이를 음악으로 엮는다. 상황별로 극의 긴장감과 몰입을 극대화한 데는 조용필의 ‘고추잠자리’와 산울림의 ‘그래 걷자’가 삽입되었다. 과장된 상황 위로 흐르는 음악이 유머와 페이소스의 균형을 잡는 기막힌 순간을 겪은 후, 조용필과 산울림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 장면이 생각날 것 같다.

 

감독 박찬욱

출연 이병헌, 손예진, 박희순, 이성민, 염혜란, 차승원

 

인생의 위기는 딸꾹질처럼 불쑥 찾아온다. 언제 시작됐는지도 모르게 평온한 호흡을 끊어놓고, 누구도 쉽게 멈추는 법을 알지 못한다. 숨을 참거나, 물을 들이켜거나, 누군가의 장난스러운 위협에도 의연히 버티다 끝내 스스로 사라질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원인도 해법도 모른 채 딸꾹질이 멈추는 순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일상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또 언제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우리의 호흡을 흔들지 알 수 없다.

 

살아남아 볼 결심

25년 경력의 제지 전문가 만수(이병헌 분)는 갑자기 정리해고를 당한다. 가족을 위해 재취업을 하려 하지만, 취업은 쉽지 않고 실업 기간이 길어지면서 집까지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절박한 상황에서 만수는 마지막 취업의 기회를 얻기 위해 자기보다 능력 있는 경쟁자를 찾아낸 다음 하나씩 제거하기로 결심한다.

박찬욱(1963~) 감독의 신작 ‘어쩔수가없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딸꾹질처럼 불쑥 찾아온 해고라는 상황이 한 사람과 그 가정을 얼마나 순식간에 무너뜨릴 수 있는지, 또 극단적 상황 속에서 인간은 어디까지 이기적이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소동극이다.

가정과 집이 인생 최고의 가치라 생각하는 주인공 만수의 모습은 사실 낯설지 않다. 그는 한국 소시민의 비극적 생존을 다룬 1980년대 연극 ‘칠수와 만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당시 작품 속 만수가 청년 실직의 상징이었다면, ‘어쩔수가없다’의 만수는 중장년 실직의 초상을 보여준다. 시대는 달라졌지만, 재취업 전쟁과 삶의 붕괴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두 작품은 묘하게 겹친다.

영화의 원작인 도널드 웨스트레이크(1933~2008)의 소설 ‘액스(The Ax)’는 해고된 가장이 겪는 내면의 통증과 도덕적 딜레마, 생존의 절박함을 지극히 건조한 문체로 묘사한다. 이 소설은 범죄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사실상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존재가 얼마나 손쉽게 도태되고, 생존을 위해 어디까지 망가질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질문한다.

감독은 주변 인물들을 주인공의 주변에 다양하게 배치하면서, 개인의 몰락을 넘어서는 사회적 문제를 드러낸다. 특히 잔혹하고 차가운 시스템이 개인을 압박하는 양상을 전시하거나, 경쟁자를 단순한 ‘대상’으로 전락시키면서 감독 특유의 블랙 코미디적인 감각을 강조한다.

감독의 전작들이 시각적으로 잔인하고 폭력적이었다면, ‘어쩔수가없다’에서는 조금 더 정서적 잔인함을 담아낸다는 점만 다를 뿐, 지금까지 보여준 작품 연대기에서 특별히 이질적인 면은 없어 보인다.

‘올드 보이’나 ‘친절한 금자씨’에 이어 ‘아가씨’나 ‘헤어질 결심’의 어리둥절한 엔딩은 이미 ‘박찬욱식’ 특징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유독 ‘어쩔수가없다’에서 관객의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데, 끔찍한 희극 혹은 지독한 비극 사이의 경계에서 박찬욱 감독이 뚜렷한 지향점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쩔 수가 있었던 아쉬움

굳이 롤랑 바르트(프랑스의 철학자, 1915~1980)까지 끼워 설명하지 않아도 텍스트를 통해 독자가 느끼는 정서적 쾌감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적극적인 행동이다. 독자는 텍스트에 담긴 감정에 공감하고, 글을 통해 삶의 희로애락을 체험한다. 여러 이야기가 숨겨진 회화나 건축, 당연하게도 연극이나 영화를 통해서도 읽기의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는 적극적 상상과 개입을 통해 관객이 얻어낼 수 있는 텍스트 읽기의 원초적인 쾌감을 주는 영화였다. 하지만 ‘어쩔수가없다’는 다층적 읽기에 도전하기에는 좀 단순하다. 자극적으로 텍스트를 비꼬는 방식을 택했지만 복잡하지 않다. 텍스트를 읽고 느끼고 공감하는 과정을 생략했기 때문에 정서적 동감을 얻어내지 못한다.

그의 영화는 이제까지 전통적이고 고전적 서사를 현대적 감성과 미장센을 통해 새롭게 보여주는 방식을 선택했다. 그러한 전개 방식은 영화를 불가해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우아하게 만드는 면이 있었다. 하지만 ‘어쩔수가없다’는 고전적 서사 구조 대신 블랙 코미디와 과잉된 은유를 담아낸다. 직장을 얻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는 설정에서 다수의 공감대를 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뭐, 어쩔 수가 없지 않냐”며 벌여놓은 갖은 이야기들과 다양한 인물들을 들러리로 세워 한통치는 결말도 아쉽다. 만수라는 인물의 서사가 작품 전체를 압도하면서 다른 캐릭터들은 들러리에 머문다. 특히 여성 인물들은 독립적인 주체로 기능하지 못하고 가족이나 서사의 장식적 요소로만 소비된다.

 

필연적으로 마주하게 되는 불편함

흥미로운 점은 감독이 작품을 통해 극단적 이야기를 던지면서도 사회적 리얼리티에서 절대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수의 행위는 비윤리적이지만, 그간 감독이 즐겨 다뤄온 복수극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올드 보이’의 개인적 원한, ‘아가씨’ 속의 사랑과 지배의 권력관계가 그랬듯, 여기서는 생존이라는 더 원초적 욕망이 이야기 전체를 견인한다.

그러나 전작의 복수 서사에서 느껴졌던 카타르시스가 이번에는 좀처럼 발생하지 않는다. 감독이 의도적으로 선택한 서사 공백을 통해서 삶의 위기는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이 찾아올 수 있다는 불편한 질문만을 던진다.

희극인지 비극인지 분간되지 않는, “어쩔 수가 없지 않냐”는 여러 푸념은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에게 이어지는 질문이 된다. 누구나 딸꾹질 같은 위기를 피할 수는 없다. 단지 멈췄다고, 되돌아간다고 똑같은 일상을 맞이할 수 있을까? 어쩔 수가 없었던 일이 아무렇지도 않은 일은 아니라는 ‘씁쓸한’ 결말이 누군가에게는 ‘쓸쓸한’ 결말이 된다.

 

최재훈 영화평론가.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제37회 영평상 신인평론상 최우수상, 제3회 르몽드 영화평론가상을 수상했다. 저서로 영화에세이집 ‘나는 아팠고, 어른들은 나빴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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