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 파리 오페라 발레 ‘지젤’

기사 업데이트 시간: 2025년 11월 10일 9:00 오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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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ANCE BALLET

 

파리 오페라 발레 ‘지젤’ 9.28~10.31

숭고함으로 피어난 영혼의 서사

 

에투알(수석무용수) 박세은이 ‘나만의 지젤’을 선언했던 순간! 파리의 밤은 감동으로 물들었다

 

 

1841년 6월 28일, 최초의 ‘지젤’을 탄생시킨 파리 오페라 발레는 전설적인 ‘지젤’들과 함께 역사를 써왔다. 이베트 쇼비레(1917~2016)에서 오렐리 뒤퐁(1973~)에 이르기까지, 당대 최고의 에투알(수석무용수)들은 저마다의 해석으로 이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관객의 가슴에 새겼다.

지난 10월 4일, 가르니에 극장에 오른 동양인 최초의 에투알 박세은(1989~)은 선배들의 유산을 온전히 흡수한 동시에, 자신만의 언어로 다시 써 내려간 숭고하고도 처연한 ‘지젤’을 탄생시키며 파리의 밤을 깊은 감동으로 물들였다.

에투알 승급 후 임신한 몸으로 치른 ‘지젤’ 데뷔, 그 이후로도 세 명의 파트너와 아홉 번의 무대를 거치며 역할의 다층적 결을 온몸으로 흡수해 낸 그녀가 마침내 선언한 ‘나만의 지젤’ 서막이었다. 필자와 나눈 인터뷰에서 그녀는 “처음 도전했을 때는 ‘데뷔한다’는 설렘과 긴장감이 컸다면, 지금은 무대와 관객 앞에서 제 안무와 해석을 보다 차분히 풀어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고 소회를 밝혔다.

파리 관객들은 한 무용수가 시간과 함께 하나의 역할 속에서 성숙해 가는 경이로운 과정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동안 다양한 레퍼토리를 통해 넓어진 그녀의 시야는 ‘지젤’에 비교할 수 없는 깊이를 더했으며, 기술을 넘어선 영혼의 춤이 무엇인지를 증명하는 역사적인 무대였다.

 

‘지젤다움’으로 체화된 순수와 광기

1막에서 박세은의 몸짓에는 순수를 넘어선, 생동하는 ‘지젤다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목표는 명확했다. 어렴풋한 ‘순수한 사랑’의 관념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진짜 그녀가 되는 것’. 춤을 향한 순수한 열망, 알브레히트를 향해 속절없이 피어나는 설렘, 사랑스러운 성격의 모든 편린이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었다. 토슈즈가 바닥과 부딪혀내는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깃털처럼 가벼운 스텝, 공기 중에 부력을 얻어 잠시 떠 있는 듯한 ‘발롱(ballon)’, 수줍게 번지는 미소는 계산된 연기가 아닌 한 인격의 자연스러운 발현이었다.

그녀의 춤은 정해진 안무의 수행이 아니라 한 인격체의 희로애락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내는 시와 같았다. 알브레히트(제르맹 루베 분)와의 파드되에서 보여준 완벽한 호흡은 두 사람의 사랑이 얼마나 진실하고 순결한지 의심할 여지 없이 증명하는, 두 영혼이 나누는 가장 순결한 교감이었다.

순수한 ‘지젤’이 찬란하게 빛을 발한 순간은 행복이 절정에 달했을 때가 아니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광란의 장면에서였다. 알브레히트의 배신을 마주한 그녀의 눈빛에는 사랑의 진실이 산산조각 나는 소리가 담겨 있었다.

텅 빈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하며 행복했던 춤의 기억을 더듬는 장면은 처절할 만큼 아름다웠다. 특히 이 장면에서 파리 오페라 발레 특유의 해석이 두드러졌다. 박세은은 과장된 제스처 대신 섬세함과 절제를 통해 비극성을 극대화하며, 그 철학을 분석하는 것을 넘어 몸으로 오롯이 증명해 냈다. 광기를 과장하지 않고, 실낱같은 이성의 끈을 놓아버린 연약한 영혼의 마지막 몸부림을 정교하게 조각해 내는 깊이 있는 연기. 머리카락 한 올의 떨림까지도 지젤의 무너지는 내면을 표현하는 도구로 삼았고, 기술이 감정을 얼마나 숭고한 차원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어머니의 품에서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가르니에는 숨 막히는 정적에 휩싸였다.

 

절제미 속에 드러난 강철의 영혼

죽음 후 ‘윌리’가 되어 나타난 박세은은 1막의 지젤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였다. 인간적인 온기는 사라지고, 달빛 아래 차갑게 빛나는 비극의 정수만이 남아 있었다. 움직임은 중력을 거스르는 듯 비현실적으로 가벼웠고, 이는 파리 오페라 발레 ‘지젤’의 본질적 특징과 맞닿아 있었다. 팔과 손끝, 상체의 미세한 움직임까지 감정의 결을 드러내는 데 중점을 두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아라베스크’(한쪽 다리로 서고, 다른 다리를 길게 뻗는 자세)와 부드러운 ‘포르 드 브라’(팔의 움직임)는 단순한 동작이 아닌, 지젤의 영혼이 흘려보내는 슬픔의 언어였다. 마치 무덤가의 냉혹한 안개가 형상화된 듯했다. 박세은은 1막을 넘어 2막에서 결정적으로 만개했다.

2막의 백미는 단연 알브레히트와의 재회, 그리고 그를 향한 구원의 순간이었다.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연인을 향한 원망과 여전히 남은 사랑 사이의 내적 갈등이 만들어낸 구원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윌리들의 여왕 미르타의 명령에 따라 냉혹하게 알브레히트를 유혹하면서도, 그의 지친 숨결 속에서 피어나는 연민을 감추지 못했다. 지쳐 쓰러진 알브레히트를 지키기 위해 미르타에게 맞서는 장면에서, 그녀는 더 이상 ‘희생하는 존재’라는 평면적 이미지가 아니었다. “윌리 앞에서 묵묵히 맞서는 지젤의 숭고한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그녀의 말처럼, 박세은의 지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죽음의 힘과 맞서는 강인한 영혼, 그 자체였다. 끝없이 반복되는 ‘앙트르샤 카트르’(공중에서 다리를 네 번 교차)와 고난도의 리프트 속에서도 표정은 초연했고, 그 극한의 절제미는 오히려 더 큰 감정의 파동을 만들어냈다. 새벽이 오고 마침내 구원받은 것은 알브레히트만이 아니었다.

알브레히트를 춘 제르맹 루베(1993~)는 지젤의 숭고한 사랑에 화답하는 완벽한 상대였다. 특히 2막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이는 윌리들의 춤을 소화하는 그의 모습은 기술적 완벽함을 넘어선 품격 있는 드라마였다. 지치지 않는 도약 동작은 비극의 깊이를 더했다.

 

하나의 전설, 또 다른 서사를 기다리며

2025/26 시즌의 문을 열며 파리 오페라 발레는 다름 아닌 ‘지젤’을 시즌 개막작으로 선택했다. 필자는 이를 하나의 회귀이자 선언으로 읽었다. 순수한 프랑스 혈통을 고집하던 견고한 백색 군단이 다국적 무용수들을 받아들이고 주니어 발레단을 창설하는 등 변화의 물결 한가운데에서, 발레단은 가장 오래된 유산으로 돌아가 그들의 근원과 자부심을 되새기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 장대한 서사의 첫 장을 연 히로인이 바로 박세은이었다. 이제 그 감동을 고스란히 안고 오는 11월 고국의 무대(국립발레단 ‘지젤’)에 선다. 파리의 유산 속에서 절제미와 내면의 서사로 관객의 영혼을 파고들었던 그녀의 지젤이 한국의 무대에서는 또 어떤 색채와 숨결의 언어로 되살아날 것인가. 하나의 위대한 해석은 또 다른 해석에 대한 갈증을 낳는다. 그것이야말로 고전이 시대를 초월해 살아 숨 쉬는 이유일 게다. 박세은의 ‘지젤’은 프랑스를 넘어, 세계 발레의 역사 속에 지워지지 않을 빛나는 이름으로 기록될 것이다.

장인주(무용평론가) 사진 파리 오페라

 

PERFORMANCE INFORMATION

국립발레단 ‘지젤’

11월 12~16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박세은·박슬기·조연재(지젤), 김기완·허서명·박종석(알브레히트) 외

(※ 박세은·김기완 캐스팅은 13·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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